펜드의 모험 16
2."좋아. 널 데려가도록 하겠다."
"저 정말이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펜드의 허락을 듣자 파르세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펜드의 품에 안겨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다.
"달라 붙지마! 네 몸에서 더러운게 묻잖아."
펜드는 파르세스가 자꾸 부대껴 오는게 싫었다. 그녀의 몸에 묻은 정액이 자신의 옷자락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죄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흑"
"더럽다"는 말을 듣자 파르세스는 눈물을 떨구며 그에게서 떨어졌다. 펜드는 잠시 그녀를 힐긋 하다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읏!"
파르세스가 허겁지겁 펜드의 뒤를 따르다가 힘없이 바닥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뭐하는 거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펜드의 핀잔에 파르세스는 급히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너무 심하게 능욕을 당해 제대로 걸을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흑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조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될까요? 아 아니에요. 금방 일어날게요. 먼저 가지 마세요. 네? 제발요."
[제기랄]
"아.."
할 수 없이 펜드는 파르세스를 안아들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펜드의 행동에 약간 당황했지만 곧 말없이 눈을 감고 펜드의 팔에 몸을 맡기었다.
"나는 제국의 황제가 될 몸이다. 그런 남자가 너 같이 정액받이나 될 쓸모없는 여자를 안아 옮겨주는 것이니 황송한 줄 알거라."
"...."
"어이 듣고 있는거냐?"
새근 새근
파르세스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사실 오늘 너무도 힘든 일을 경험한 그녀로서는 지금껏 정신을 유지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펜드의 품에 안겨 몸이 편해지자 그대로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래. 잘 수 있을때 자 두렴. 흐흐 난 세피아 황비마마의 명을 어기는 엄청난 모험을 하면서 너를 맡은 거니까, 대가는 꼭 받아낼 것이다.]
펜드는 파르세스를 성노리개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것 외에는 이 쓸모없는 계집의 용도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쉐밀에 대한 인질이라고는 하지만 처음부터 펜드는 인질같을걸 잡는데에 부정적이었고 시렌느도 자기 의지로 쉐밀의 측에 붙은 마당에 이 애를 잡아두는게 의미가 있을까?
.
.
.
"후후후.."
실험실로 돌아온 세피아는 파르세스와 펜드가 사라진걸 확인하고 차가운 비웃음을 흘렸다.
"한번 안아 보니 곁에 두고 계속 먹고 싶더냐? 쯧쯧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껏 행동하는 펜드는 아마 훌륭한 차기 황제가 될 것이다.
물론 세피아가 생각하는 "훌륭한 황제"는 제국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릴 폭군이다. 사실 천년이 넘게 이어온 제국이 고작 펜드 하나때문에 멸망할 확률은 적겠지만 그가 최소한 계기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렇겠지. 이정도면 충분할까?]
펜드는 이제 자신이 없어도 자력으로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원로원을 포함해 많은 유력한 귀족들을 포섭해 놨고 황제를 조종해 펜드를 직접 황태자로 지목시켰다. 거기다 예지안을 지닌 파르세스마저 세뇌시켜 펜드의 종으로 만들어 놨으니, 웬만해서는 큰 낭패를 볼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랬다. 이미 파르세스는 세피아의 사악한 마법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능욕한 펜드에게 의지하는 행태를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 그것은 바로 사람의 연심을 조종하는 세피아의 흑마법이었다. 제국의 철혈 황제도 세피아의 마법에 사로잡혀 끝내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연약한 열 다섯 소녀 파르세스가 그녀의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지끈
갑자기 세피아의 시야가 검게 물들어 간다. 전신의 생기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죽음인가?
[아 아냐. 아직은 죽어서는 안되.]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아있다. 세피아는 몸에 남은 기력을 모두 짜내 정신을 추스렸다. 조금만 더 움직여다오 내 몸뚱아리야. 반나절 정도만 시간을 주면, 제국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고갈 폭군 펜드를 제위에 올릴 확실한 보증을 만들 수 있다. 조금만 더..
.
.
.
"젠장.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제국의 1황자이자 얼마전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황위계승권자였던 칼미츠 테어카나는 요즘 무척 기분이 더러웠다. 자신의 세력에 붙어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있던 몇몇 귀족들이 펜드라는 자식에게 등을 돌린데 이어, 쉐밀의 미친 소리에 동조하는 정신나간 것들도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자신이 황제가 되기에 유리한 고지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더러워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대답들 해봐! 그 펜드란놈이랑 미친 쉐밀 삼촌이 뭐가 잘났다고 자꾸 내 세력이 줄어드냔 말이야?"
"그 그게.."
부하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칼미츠는 자신의 말에 토다는 부하를 무척 싫어한다. 지금은 말없이 그의 분노를 감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똑똑
한참 화를 내고 있는 칼미츠의 방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뭐야!"
"아 그게.. 칼미츠 황자님께 방문객이 있어서요."
"꺼지라고 해. 통보도 없이 불쑥 오면 이 고귀한 내가 만나줄 줄 알았나?"
"하지만 그 루카 아가씨가 오셨는데요.."
순간 칼미츠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 졌다.
[제길 그 철없는 계집년, 대체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지금이 얼마나 중대한 시기인데.]
루카는 몇주 전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납니다.]라는 쪽지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원래 여행을 꽤나 좋아하던 여자라 그녀의 행동이 아주 이해 못할건 아니었지만, 황위계승을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 명색이 1황비가 될 여자가 그렇게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되지.
"너희들은 나가 있어라."
"네. 저하."
칼미츠는 일단 부하들을 내보냈다. 그는 무단으로 여행을 떠난 루카의 죄를 물어 오늘에야 말로 그녀를 가질 생각이었다. 그동안 루카는 결혼하기 전에는 안되요 라느니, 그러다 아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라던지 하는 핑계로 칼미츠와의 섹스를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못벗어난다. 무엇보다도 칼미츠 자신이 요즘 스트레스를 받을대로 받은 형편이라 루카의 몸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청발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약간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칼미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했나? 상태가 왜 저......]
푸욱
칼미츠의 생각은 끝내 다 이어지지도 못했다. 목표를 확인한 예속인형 루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옛 약혼자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어.. 으.."
쿠당탕
한때 제국의 황제 자리를 두고 경쟁해온 한 사나이의 죽음이라 보기에는 너무도 허망했다. 칼미츠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무 감정도 없는 텅 빈 루카의 갈색 눈동자였다.
.
.
.
[목표 제거 완료.]
마녀 세피아가 마지막 힘을 짜내 교단으로 가던 중, 품속에 넣어놓은 마정석에서 보고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리고, 보고는 계속되었다.
[임무 외 사상자 스물 네명. 아니 스물 다섯. 스물 여덟.. 계속 적들이 나타나 이탈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 특이사항 발생시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보고가 끊겼다. 루카의 목소리 이외에도 계속 병장기 소리와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던걸 보니 아마 탈출때문에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후후 뭐 잘 알아서 오겠지. 전 대륙을 통틀어도 그 아이보다 강한 존재는 거의 없다. 뭐니뭐니해도 내 흑마법의 정수가 집약된 예속인형이니 말이지.]
세피아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이걸로 펜드가 되는데 장애물 하나가 줄었다. 이제 남은건 법왕 아렌티아의 보증을 받는 일이다. 세피아에게는 그녀가 결코 거절하지 못할 카드가 있었다. 이걸 사용해 그녀로 하여금 펜드를 돕게 만들 것이다.
교단에 도착한 세피아는 안내를 맡은 견습수녀에게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예상대로 그 수녀는 세피아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 법왕님께서는 외방객을 만나지 않습니다."
"...."
"네 안내하겠습니다. 절 따라오세요."
정체노출의 위험성 때문에 원래 이런식으로 마법을 남용해서는 안되지만, 세피아에게 있어 이제 뒤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흑마법을 사용해 간단히 그녀를 납득시킨 후 세피아는 안내를 맡은 견습수녀의 뒤를 따라 법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저기 법왕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웬 손님이란 말인가? 아렌티아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일단 방문객을 들이게 했다.
"법왕성하를 뵙습니다. 저는 제국의 3황비 세피아입니다."
"인사는 됬어요. 절 방문한 이유가 뭐죠?"
"다름이 아니라, 저는 어제 황태자로 책봉된 펜드의 후견인입니다. 법왕님께서 펜드 저하에게 힘을 빌려주셨으면 해서 찾아뵈었습니다."
"..."
아렌티아는 대답대신 세피아의 눈을 자세히 살펴봤다. 생기가 없고 죽은 눈이다. 저 여자는 오래 살지 못하겠군.. 아니 어쩌면 벌써 죽어있는 거일 수도.
"곧 펜드저하는 다른 황위계승권자들과 피비릿내나는 항쟁을 해야 합니다. 그때 법왕님께서 펜드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제국의 정통 황위 계승자인 펜드저하가 황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어이. 장난은 그만두지. 너는 대체 누구냐?"
세피아의 말을 듣고 있던 아렌티아는 낮게 깔리는 음성으로 그녀의 정체를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말고. 제국의 3황비라고 했지? 너 정도 되는 흑마법사가 황제의 가까이에 있었다니.. 역시 황제를 죽게 만든건 너인 모양이군."
아렌티아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한치의 의구심도 없었다. 이건 확실하다.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죽음의 기운이, 얼마전 황제에게서 느낀 죽음의 기운과 동일하게 느껴진다. 황제를 죽인건 바로 저 여자다.
"하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번 보고 그 사실을 알아채시다니. 그래서 어쩌실 셈이죠?"
"뭐 딱히 어떻게 할 생각은 없다. 인간들 사이의 일에 괜히 끼어들어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지. 다만 너를 경멸하고 여기서 나가게 하는건 할 수 있다."
"인간들이라니.. 마치 당신은 인간이 아닌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세피아의 냉소에 아렌티아도 마주 비웃음을 흘렸다.
"그런건 네가 알 바 아니다. 당장 꺼지거라. 그렇지 않아도 곧 죽게 될 몸인데 내 화를 돋구어 굳이 수명을 앞당길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그 까칠한 성격은 마치 제 스승님을 닮으셨네요.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걸까요?"
"!!"
아렌티아의 안색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 여자가 하는 말은..
"너는.. 누구지?"
그녀의 물음에 세피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세피아 하르실리온. 암흑룡 아카시아님의 제자에요. 아마 아렌티아님은 저를 모르실 거에요."
"아카시아.."
아렌티아는 신음하듯 그 이름을 되뇌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이름..
"네. 아카시아님이요. 아렌티아님이 그분을 버리고 레어를 나가신지 15년정도 후에 제가 그분의 제자가 되었어요. 평소 저는 아렌티아님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 했죠. 언제나 슬픈듯한 눈으로 내 딸 아렌티아는 어쨌느니 내 딸 아렌티아는 이정도는 우습게 해냈다느니.."
"...."
아렌티아의 얼굴에서 완전히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에게 있어 아카시아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끔찍한 저주를 건 지긋지긋한 마녀이지만,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저도 나중에 어머니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아마 그정도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없었을 거에요. 하지만 그렇게 사랑을 받은 자식은.. 정작 그분이 죽을때까지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지요.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 제 스승님은 아렌티아님을 그리워하셨어요."
"나가."
"아카시아님은.."
"나가라고 했지!"
쾅
아렌티아는 분노하여 책상을 부서져라 내리쳤다. 그녀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와 집무실을 가득 채운다.
"제가 나가면 아카시아님의 마지막 유언을 영영 듣지 못하실 거에요."
아렌티아의 살기에도 세피아는 태연하게 말을 꺼내놨다.
[유언?]
"펜드가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세요. 그러면 당신 불쌍한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전해드리겠어요."
웃기지도 않는다. 어차피 유언이라고 해 봐야 별 말도 없을텐데, 그걸 듣자고 그 펜드라는 버러지같은 종자를 도우란 말인가? 그놈은 순진한 여신관을 속여 능욕하는 파렴치한 놈이다!
"...."
"아렌티아님이 보신바처럼 전 이제 곧 죽어요. 즉, 아카시아님의 유언을 들을 마지막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는 거죠. 시간이 얼마 없어요. 전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에요. 어서 결정하세요."
역시.. 아렌티아는 어쩔 수 없는 아카시아의 자식이었다. 아무리 밉고 싫어하는 대상이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 정도는 들어두고 싶었다.
"좋아. 네 말대로 그 쓰레기를 도와주도록 하지. 아카시아의 유언을 전하거라."
"용의 맹약인가요?"
"그래. 약속이다.. 하지만 명심하거라. 나는 거짓을 간파할 수 있는 용의 눈을 지녔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세피아의 입가에 후련한 미소가 어렸다. 이걸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거짓말따위는 안해요. 잘 들어두세요. 아카시아님은 마지막으로, 당신께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
"미안하다 내 자식 아렌티아야. 미안하다.. 그분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거에요. 이 말을 끝으로 그분은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셨죠."
"후우.."
아렌티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상념이 길게 드리워 있었다.
"알았다. 돌아가거라. 혼자있고 싶구나."
"네. 아렌티아님. 생각해 보면 이게 당신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군요.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 말을 끝으로 세피아는 조용히 법왕의 집무실을 나섰다. 남겨진 아렌티아는 머리를 짚고 언제까지나 아카시아의 마지막 말을 되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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