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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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양판소(……야)이므로 개념이 없고 명랑소설이므로 어이없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막장입니다^^;;; 양판소의 깽판이 싫으신 분은 조용히 백스페이스로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중에 언급되는 인물, 사건, 지명 등은 실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묘한 것이 보여도 신경쓰지 마세요. 깊게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이 글은 양판소이니까요.
*이 글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을지도 모르나 행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판소니까요.
*이 글은 명랑소설을 지향하고 있으나……양판소이므로 깽판입니다.
[양판소]아버지처럼 되기 싫었어요
44話 어비스 : 과거의 이야기.
93.
“제가 눈이 높은 겁니까. 아니면 기연이라 할 만한 건 아버지가 다 쓸어가버린 겁니까.”
“글쎄다.”
약 한 달. 처음의 두 곳을 제외하면 순탄하게 던전을 찾아 기연을 찾아나선 우리들에게 돌아온 것은 약간의 금전과 약간의 아이템들뿐이었다. 기연이라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들 뿐이었다. 어디 영약 비슷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대치를 최대한 낮추어 보아도 기연을 찾으러 나선 목적에 비해 성취는 부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찾은 곳들은 마법사의 일기장도 없는 그런 허름한 던전들 뿐이었으니까.
“결국 한 건 수련밖에 없구나.”
마차 주위에서 제각기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아가씨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쉰다. 이곳은 어비스. 헬마치 대산맥 안의 미로 안이다. 아버지의 말로는 마왕과 정면으로 맞부딪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쉬었던 곳이라고 하는데 어비스의 중앙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야기다.
“아들아, 기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늘이 내린 축복이겠죠. 좀 고생하더라도 나중에 일용할 검기와 마법이 되는 바로 그런 축복. 깨달음의 방법을 기술한 서적도 좋고, 고수가 칼질을 해놓은 벽도 좋습니다. 영약이라고 해도 좋고 전설의 무구라고 해도 좋습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고수가 기쁜 눈빛으로 자신의 진전을 이으라고 애써 엄격하게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그런 것이 기연이죠.”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버지는 뜬금없이 기연이라는 것에 대해서 묻더니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 걸까. 살짝 불안함을 느끼면서 아버지를 지켜보았더니 허공에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대체 쓸데없이 허공에 무슨 짓을 한담. 생각하고 있으려니 우르릉 소리와 함께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던전 위의 절벽에 글자가 새겨졌다.
劍(검)
그 글자를 새긴 아버지는 ‘일단 하나 완성’이라고 말하고는 아공간 창고를 열어서는 책들을 꺼내었다. 그리고 던전 가장 깊숙한 곳까지 전이시키고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두 개 완성’이라고 말했다. 대체 이건 뭘하자는 걸까.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가만히 지켜본다. 일단 저 책들은 복사본이니 별로 상관이 없을 것 같고……. 그 다음으로는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이 강렬한 마나라니.
“이번엔 이걸 옆에 두면 되려나. 일단 이게 마지막이군.”
아버지가 꺼내든 것은 드래곤하트였다.
“있었습니까?”
“응, 죽어버린 동료의 것이지만.”
“있었으면 진작에 쓰시지.”
“쓸 필요없었어. 한 내 지도를 받으면서 10년 정도 지옥에서 구르듯 수련하고 다시 10년 정도 가다듬으면 이 세상에서는 드래곤을 제외하고는 최강자 소리 들을 수 있었으니까. 유리아가 그랬거든.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곧 4차 각성까지도 가능할 거야.”
이미 알고 있었습니까. 아니 그보다 중요한 건 속성이 아닌가 싶지만.
“속성은 없습니까?”
“주인공 보정 안 받고 속성으로 힘 키우려다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생에서 주인공이랍디다.”
“뭐,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많으니까.”
말하자면 없다는 이야기. 하긴 속성으로 힘을 익히려다가 인생 조진 케이스를 수없이 들어온 나로서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상황이다. 그런데 나는 뭐야?
“태어날 때부터 강한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것도 기연이겠지.”
쓰게 웃던 아버지는 ‘할 일은 끝!’이라고 말하면서 내 옆에 아무렇게나 주저앉는다. 이제 여성의 몸으로 지낼 필요가 없으니 남자의 몸으로 돌아와도 상관없을텐데 아직도 여성의 몸으로 지내고 있는 아버지의 생각은 도무지 모르겠지만 일단 앉는 법은 여자애들과 동일했다. 남자들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허벅지 붙이고 종아리에 걸터앉는 그 방법 말이다.
“그런데 그 기연이 발전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거든. 그게 문제야.”
어딘가 먼눈을 하고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런 말을 꺼냈다. 나는 그 말에 추임새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깔린다. 푸른 하늘을 한가롭게 가로지르는 구름이 평화로워 보였다.
“이야기를 해주마.”
그렇게 별 기대도 없이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이야기를 해주겠답시고 말을 걸어왔다. 하려면 하라지.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아버지는 내 무릎에 머리를 괴고 누워서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반대로 하고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생각했지만 일단은 내버려둔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과거의 이야기를 해준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들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조금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
“내가 처음에 이 세상에 떨어졌을 때는 말이다…….”
94.
아버지, 한국명 정XX는 2004년에 고등학생이 된 소년이었다. 그가 이 세계에서 세인 아슈레이가 된 연유는 차에 치인 것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빛나는 돌이나 금화, 혹은 구슬을 주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걷고 있다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은 어지러움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눈을 떴을 때 하늘을 보니 이 세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바로 그 시작이었다.
보통이라면 이렇게 다른 세계의 사람을 불러왔을 때에 불러온 당사자가 이것저것 챙겨주면서 ‘당신은 이런 것을 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하게 마련이었지만 마신들의 공격을 방어하는데 정신이 없던 신들은 정XX를 챙겨줄 여력이 없었다. 다만 소환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신경을 써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서로 대화가 통할 수 있도록 공용어를 머릿속에 집어넣어준 것과 행운이 함께할 것을 약속하여 준 것 정도가 아버지를 소환한 여신 노르텐, 그녀로서는 최대한의 도움이었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아버지 한 사람의 소환에 지쳐버려 다른 것은 해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이 들었나요?”
“아……네.”
아버지가 처음에 눈을 떴을 때에 본 것은 아름다운 소녀의 눈동자였다. 그 순간에 그녀에게 반했노라고 훗날 회상하게 되지만 이때에는 갑자기 밀려오는 느낌에 정말 정신이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과 그녀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어났나?”
“고등학생이네. 힘만 얻으면 ‘이고깽’이겠어.”
“아, 저기 ‘이고깽’이 뭡니까?”
“안도씨입니까. 그러니까 이세계에 고등학생이 가서 깽판을 친다는 내용의 소설 주인공들을 통틀어 잡아서 이고깽이라고 하지요. 거기 일본에도 ‘제O의 사X마’라고 있지 않습니까?”
“학생이 일어났다고? 괜찮아? 그 놈은 잘 쫓아냈지?”
“아,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요.”
“네, 어르신, 잘 쫓아 보냈습니다. 그나저나 이 학생 참 잘 생겼지요?”
“그렇습니까. 그냥 평범한 분이셨나 보네요. 오타쿠들은 대강 잘 알거든요. "X로의 X역X‘라고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NT노블이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히X가 사O토라고 하는 녀석이 이런 유형이라 볼 수 있답니다. 이 녀석이 전형적인 이고깽이거든요.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혼자 나서서 7만 명을 물리친다거나 기연을 만나서 공을 세운다거나 만나는 여자마다 반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죠.”
“여기에 우리 손녀가 있었으면 당장 시집 보냈을텐데 말야. 뭐, 우리 몸이 조금씩 변한 걸 보면 녀석도 변했겠지만 분명히 거기에서도 잘 생긴 녀석이었겠지. 게다가 수첩을 보면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인 것 같은데. 공부만 열심히 했다면 SKY는 따놓은 당상이 아닌가.”
“잘은 모르겠지만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한 명이 7만명을 막아내다니, 장비가 장판파에서 기세로 조조의 군대를 쫓아낸 것 같네요.”
“일단 몸도 건장한 것이 실한 놈 같습니다.”
“정확하게 보셨네요.”
“정말이지 손녀 아이만 있었다고 해도…….”
혼란의 극치. 피곤해보이는 안색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버지에게 너나 할 것 없이 말을 걸었다가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하는 통에 아버지는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나 뭐라나. 어쨌든 상황을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옆을 둘러보았더니 이건 인류박람회 같았다고 한다.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도 있고 중국인도 있었다. 물론 동양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백인도, 흑인도 있는 것을 보면 전세계 사람들이 하나씩은 모인 것 같았다.
“어찌된 건가요?”
“눈을 떠보니 이렇더라는 말밖엔…….”
학생도 있고 군인도 있고 평범한 회사원도 있는 것 같았으니 연령대도 다들 달랐다. 이런 상황이면 혼란할 법도 하였지만 대개 무리를 지어 앉아있었고 아직은 호시탐탐 서로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몸을 사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기절해 있을 때 기습당하지 않은 것은 현대인의 윤리의식 덕분은 아니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아버지가 기절해있을 때 아버지를 추행직전까지 하려고 했던 녀석이 있었다고 한다.
“저기 저기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저 변태같은 게이새끼가 널 바위 뒤로 끌고 가려는 걸 이 아가씨가 구해주었어.”
“…….”
매끈하게 생긴 서양 아저씨의, 음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버지는(이 때까지는 순수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세월이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해서는 그저 경악하고 탄식할 뿐이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소녀, 이운혜님에게 진심을 담아서 감사했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경청했다. 며칠 굶은 속을 고기로 달래면서 말이다. 그 뒤로 배탈이 났지만 이운혜님에게 보살핌을 받게 되어 아저씨들이 질투했던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어라.”
“네.”
어쨌든 누군가가 나서 파악한 인원 현황은 이러했다. 모두 100명의 사람들이 불려왔다. 불려온 100명의 사람 중에서 그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은 중국인이었고 모두 22명이었다. 물론 순수한 한족은 모두 15명이었고 나머지는 조선족이나 티벳인 등으로 소수민족 출신이었지만 여기에서 그런 사실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은 인도인으로 모두 17명, 미국인 12명, 일본인 7명, 한국인 5명, 북한사람 4명, 러시아인 3명, 프랑스인 3명, 터키인 3명……아버지의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던 소녀, 이운혜님 외에는 전원이 국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성별로 나누어보면 남자는 모두 82명, 여자는 18명이었고 나이를 보자면 30대가 42명, 20대가 35명, 10대가 20명, 40대 이상이 3명이 있었다. 이 100명의 사람들은 크고 작은 6개의 무리로 나뉘어 있었고 아버지는 이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무리에 끼었다고 한다. 편의상 6조라 부르자. 이 6조는 모두 10명이었다.
“장청수라고 한다.”
“안도 히데유키라고 합니다.”
“이운혜입니다.”
“김명원입니다.”
“야마시타 나츠키입니다.”
“마오 린센이다.”
“박세황입니다.”
“허진영입니다.”
“조지 톰슨입니다.”
여자 3명, 40대 이상 2명 등 가장 숫자도 적고 힘도 약한 무리였지만 사람들은 가장 선량했다고 한다. 어쨌든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고 가장 다재다능하기도……. 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조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능력들을 가진 사람들이라 감히 이들을 건드리는 사람들은 없었다. 6조의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는 유형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청수 어르……아니 형님은 한의사, 안도 형은 건축가, 운혜는 아직 학생이었던 것 같고, 명원이는 인문학부 출신……제일 쓸데없네. 나츠키씨는 요리사였고 마오 아저씨는 태극권 도장 사범이었고, 진영이는 간호사……왜 하필이면 성형외과냐. 톰슨씨는 군대 의무관이라. 우리 XX는 그래도 학생이니 상관없지?”
“잠깐만요! 내가 제일 쓸모없다니. 세황이 형도 그냥 도서관 사서잖아!”
“심심해서 읽어둔 책이 있잖냐. 우후후.”
“쳇.”
“넌 노가다꾼 낙찰. 안도 형에게 일 배워.”
“우이씨!”
어쨌든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또 달이 뜨는 모습을 보고,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이상하게 생긴 동물들을 보고는 이곳이 지구가 아니며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사람들은 있을 거야.”
“이곳이 가장 안전할 것 같은데.”
“여기에서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반대, 여기를 중심으로 개척을 하는 편이…….”
솔직히 이곳에서 대충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만들어두고 살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주변에 식량이 될만한 짐승들이 있었고 그 짐승들을 잡을 수 있는 기술도 있었다. 과일도 풍부했다. 하지만 서로 함께 있기 꺼림칙한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할까. 특히 한국인과 일본 우익들, 혹은 북한주민이 그러했고 한족과 소수민족들이 그러했다. 그래도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말이라도 섞어보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로 소통해보려 노력했지만 감정의 골은 더 깊어졌다. 서로의 생각이 아예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맞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그들도 대립했다.
“진영씨 죄송합니다.”
“짐승들이 으르렁댔다고 생각하지요. 안도 씨가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시대는 21세기인데 생각은 19세기에 머물러들 있으니…….”
“그거, 우리도 남말할 처지는 아닌 것도 같은데?”
결국 각 집단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모두들 어떻게든 세상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힘이 있는 남자들은 사냥을 준비하였고 여자들은 음식을 준비하였다. 얼마나 오래 걸어야 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으므로 오랫동안 음식을 보존할 수 있도록 훈제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훈제를 하는 것은 핀란드 여성인 타르야 라르코렌씨와 일본 여성인 야마시타 나츠키씨가 지휘를 맡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냥을 나갈 수 있는 어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들의 심부름꾼이 되었다.
“이곳에 오면서 몸이 좀 좋아진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좋아진 것이 없니?”
그렇게 여자들의 일을 도우면서 아버지는 여러 가지들을 새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의사이던 장청수 아저씨는 속병에 대한 치유력을 가지게 되었고 군대 의무관이던 조지 톰슨씨는 외상에 대한 치유력을 가지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사람은 열매가 열릴 리 없는 계절에 열린 과실을 따올 수 있었고 군인들은 전투에 대한 감각이 나날이 날카롭게 갈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대개 직업에 관한 능력이 강해졌다고나 할까. 요리사라고는 하지만 아직 보조에 불과하던 야마시타 나츠키가 수석 요리장이라도 되는 듯 빠른 손놀림으로 타르야 라르코렌과 훈제할 고기를 손질하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는 학생은 대체 뭘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였다.
“배우고 싶다고?”
“네.”
한번 배우겠다고 결심한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배우기를 희망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학생이었던 때문인지 아버지는 사람들의 능력을 빠르게 습득해나갔다. 인간 세상을 향해 떠날 준비가 끝나갈 때까지 아버지는 총 19명의 능력을 배워냈다고 한다.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가르칠 생각이 없는 사람이거나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려서 말을 걸기 힘든 이운혜님 뿐이었다고 한다.
“이 자식, 잘 해봐. 우후후후.”
“형, 나츠키 누나 말이죠. 명원이 형도 노리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뭐랏! 명원이 네 이노오옴!”
“그리고 진영이 누나는 형 좋아해요.”
“큭! 나, 나는 이, 일편……으으윽!”
어쨌든 주변의 격려와 재촉에 힘입어 이운혜님에게 말을 걸고 배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운혜님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뭇가지를 분질러서는 가만히 목검처럼 깎더라고 한다. 그리고 시작된 수련.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기 위한 여정 속에서 계속해서 실전과 병행하여 수련을 계속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새로 이운혜님에게 검을 배우던 아버지가 실전에 급히 투입되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투 경험자들도 여럿이 죽어나간 때에도 말이다. 아니 죽기는커녕 다치지도 않았다. 필시 여신의 가호가 미친 것일 것이다. 이때까지는 이상하게도 운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운이 좋았어.”
“…….”
하지만 그 운이라는 것도 주변의 여건이 받쳐주어야 겨우 성립이 되는 것이다. 그들이 물리친 몬스터들 중에서 이상한 힘을 내뿜는 녀석들이 있었고 그 녀석들이 마수였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행들은 무너지고 갈라졌다. ‘이 세상의 중심에서 천황폐하만세를 외치겠다’고 말하며 일본인들 중의 일부가 사라졌다. 경애하는 지도자 동무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북한사람들이 갈라섰다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죽어가고 사라져가는 가운데 끝내 살아남은 것은 아버지와 이운혜님 두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 운도 여기까지네.”
“…….”
6조의 수장이나 다름없던 장청수 아저씨가 마지막까지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려고 하다가 마수들의 기습을 받고 죽은 후 어떻게든 조직적인 행동을 하려는 시도는 아예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나 살아남았는지 얼마나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제각기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운혜님과의 동행하려고 했다.
“내가 말을 못했는데, 운혜야.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반드시 행복하게 결혼해서 살자.”
“……응.”
숲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이운혜님을 제외한 동료들을 모두 잃은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해야 했단다. 지금 듣는 나도 ‘그거 데드 플래그예요!’라고 외칠 법한 말을 마구 해버린 아버지는 당시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각오하고 질러버린 고백에 당시의 이운혜님은 기쁜 낯으로 받아들이셨다고 한다. 하지만 맹세의 키스는 불가능한 상황, 몰려오는 몬스터를 짓쳐나가며 슬픈 마음으로 싸움에 임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있었던 숨겨진 이야기.
95.
“무슨 말인지 알겠냐?”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땡.”
아버지에게서는 처음으로 들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해준다고 해도 대개 이운혜님이 불려온 후 잠깐 함께 다니면서 서로 좋아하게 되었고 그 뒤에 어머니, 아라니엔을 만나 잊혀진 숲에서 잠시 수련한 후 엘프들과 함께 북부대륙으로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 중간에 있었던 이런 저런 일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던 걸까.
“일단 이야기를 정리하면 아버지 외에 모두 100명의 사람이 불려왔고 각각의 특성에 맞게 능력이 발현되었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리고 아버지는 학생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프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마추어 정도의 실력을 발휘하신 거구요. 요리, 치료, 건축, 군사학, 전투술, 무공 등등을 배웠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만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뭘 배우길 원하십니까?”
그래서 직접 물어보았다. 내가 파악한 것을 말한 뒤에 아버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싶다는 것을. 그러자 아버지는 빙긋 웃더니 이야기했다.
“이야기만으로는 잘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거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된다는 거지. 그 방심이 일행에게서는 상대에 대한 무시로 나타난 것이거든. 그래서 일행들은 뭉쳐 다니기는 했지만 서로 손발이 맞지 않았지. 식량이 부족해지면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했고.”
아버지가 처음에 이 세계에 떨어지고 어머니, 아라니엔을 만나기 전까지 처절하게 느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재능이 있다고 깝치지 마라. 자신과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라.’ 처절하게 배우고 죽어가는 동료들을 구하지 못해 처절한 마음이 된 상황을 겪은 아버지의 말은 꽤나 진지했다. 아니 이럴 때는 중후하다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무게가 느껴졌다. 원래의 몸이 아닌 여자의 몸을 유지하면서 그렇게 무게를 잡는 건 좀 아니지만.
“어쨌든 마왕과 싸우면서 그 아래로 들어간 그 일본 극우 녀석들 때문에 조금 더 고생했지. 결국은 녀석들이 방심한 덕분에 쉽게 싸움을 풀 수 있었지만 중간중간에 심장에 칼이 박히기도 하고 참 고생많았지.”
아버지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운혜님이 이야기해주시지 않는 숨겨진 이야기를.
.
.
“괜찮으세요?”
“당신은 누구…….”
숲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몬스터들에게 포위되어 몸부림에 가까운 싸움을 하다가 죽을 위기에 처한 순간 기다린 귀를 한 사람들이 나타나 아버지와 이운혜님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엘프구나. 생각하면서 아버지는 지친 몸을 들어 덤비는 몬스터를 베어버리고는…….
“어머나?”
어머니, 당시에는 엘프들의 여왕 후보인 아라니엔의 품에 안겨서 기절했단다. 이에 이운혜님의 질투가 폭발. 깨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본 것은 반은 벗은 몸으로 아버지를 품에 안고 있는 이운혜님이었다고 한다. 과묵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이런 파격적인 모습에 아버지는 당황하면서도 쓰게 웃고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이운혜님과 선을 넘었다고 한다. 여기에 어머니, 아라니엔이 질투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불태우게 되지만 여기에서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제 품에 안길 수 있는 건 제 남편과 제 아이 뿐입니다. 고로 책임지세요.”
물론 어머니가 이런 농담을 하다가
“채, 책임져요!”
라고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했다. 물론 아버지는 이때에는 그냥 쓰게 웃고 말았다가 훗날 2살 주제에 쑥스러워하면서 잘 안기려 하지 않는 아들(나)에게 상처를 받고 우는 어머니, 아라니엔의 품에 실컷 안겨주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어머니가 불만을 토했다는 이야기도.
어머니, 완전히 빼도 박도 못하게 반해버리셨네요. 덕분에 내가 태어난 것이지만.
“마왕 강림?”
어쨌거나 검은 산맥, 과거에는 그렇게 불렸지만 지금은 ‘잊혀진 숲’에 통합되어버린 그 곳에서 과거의 잊혀진 숲(현재의 1/10수준)까지 이동하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과 마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는 안타까워했다. 그 안타까움에 앞장서서 나서기도 하고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면서 아버지가 어머니, 아라니엔에게 플래그를 꽂은 것은 자주 듣던 이야기이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 지도대로라면 아직 어비스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한 거네요.”
“최근 들어서는 빠져나오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요.”
마왕은 어비스에서 서서히 발을 떼어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상황. 제니키아 제국은 해외로 도피한 황실가족들과 일부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도탄에 빠져있는 상황. 미시어스 제국은 어비스 남쪽의 좁은 지역인 ‘영광의 회랑’을 틀어막고 마수들의 동진을 막고 있는 상황. 타클란 제국은 제니키아 제국에서 북진하기 시작하였으나 서늘한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는 마수들 덕분에 약간은 한숨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미시어스 제국의 황위 계승권자들은 모두 전멸한 상황이죠. 저 영광의 회랑을 막아서기 위해서 모두들 목숨을 바친 상황이니까요. 지금 남아있는 건 8살짜리 황녀뿐인데 혈통들은 사돈에 팔촌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모두 전멸. 이제는 데릴사위라도 들여야 할 위기라서 그녀가 군대를 이끌고 나올 수는 없을 거예요.”
이 때 어머니가 예상했던 것은 틀렸다. 엘리자베스 벳사지 엔앨빈 미시어스, 미시어스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른 거나 다름없던 어머님은 마를렌 누나의 어머니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여 제국 전체의 권력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하고는 스스로 출병, 영광의 회랑을 막아서버렸다. 지금도 가끔씩 아버지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면 잔소리를 넘어 꾸짖기 시작하는 그 성격으로 보아 그 당시의 성격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반장들이 흔히 가진다는 바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달까.
“용사? 남의 집에 마구잡이로 들어가서는 필요한 물건이랍시고 털어낸다는 그 도둑들?”
“그건 용자라고 부르는 거고 용사는 국가의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이지요. 예를 들자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길을 가면서 앞장서서 검을 휘두르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벌어먹지는 못해서 국가의 지원과 물품의 지원이 필요…….”
“한마디로 용역깡패라는 거구나.”
“우워어어억! 8살이라는 꼬마가 이런 까칠한 발언이라니!”
“용사건 용자건 귀찮아. 뭐, 뭐하는 거야!”
“8살이 억지로 어른인 척 할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그녀를 지원하기 위해 아버지가 어머니, 아라니엔과 함께 영광의 회랑으로 간 것이 용사파티의 시초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세인 아슈레이라고 자칭하게 된다. 그리고 로리콘이라는 의심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로, 로리콘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아하하하.”
“……나쁜 사람.”
“바보.”
어쨌든 몇 번이고 사람들을 모아 마왕의 앞마당으로 변해버린 제니키아를 향해 공격에 들어갔다. 그리고 제니키아에 권력층의 공백이 발생한 틈을 타 세력을 규합한 녀석들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마족들에게 포섭되었던 일본 극우파들이었다.
“이제 천황폐하만 불러와야 하는데 제물이 필요하던 참이었지. 잘 왔어.”
마왕에게 붙었다가 마왕을 배신하고 자신들의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한 녀석들은 아버지와 이운혜님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가 붙들리고 일행들이 다시 구출해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어떤 의미로는 녀석들이 아버지에게 시간을 벌어준 일등 공신이라고 했다. 이 녀석들은 무려 마족들의 침공을 방어해가면서 아버지 일행을 상대하는 곡예를 보여준 것이다.
.
.
“아버지, 어째 설명하기 싫다는 것 같은 얼굴인데요.”
“그렇게 보이냐?”
녀석들이 어떻게 했기에 10여년동안 마왕도 막고 아버지의 공격도 방어해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순간 아버지는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는데 그 눈빛에 빛이 없었다. 게다가 웃고 있는데 울고 있는 저 모습이란…….
“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하지 마세요.”
“아, 아니 해야 하는 거니까.”
대체 뭐길래 이 능글맞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아버지가 벌벌 떠는 걸까. 나는 아버지의 말을 기다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도무지 어떤 것이기에 그랬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이야기할테니까……크흑.”
“남자 모습으로 울지 않는 건 다행이지만 정말 말하기 싫으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아니, 달래는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아니, 해야 하니까 말이지.”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 떨어지고나서 있었던 일처럼 이 이야기 역시 숨겨졌던 이야기.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라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한 것이지만 아버지는 울어도 괜찮은, 아니 오히려 울어야 할 당사자라고 할까. 그랬다는 것이다.
“그 녀석들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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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야기1. 힘이 생긴다고 하여 무조건 좋은 건 아닌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