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 12.1
선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고 일어난 선영은 잠시동안 얼이빠진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있다가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주위의 모든 것이 눈에 익은 것들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저녁이면 언제나 그녀가 누웠던 침대..
언제나 출근할때 입고나갈 옷을 고르기위해 열어보는 옷장...
선영의 방이었다.
『휴우... 꿈.. 이었구나... 』
익숙한 주위의 모습에 선영은 꿈을.. 악몽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껏 딱히 꿈을 꿔본 기억은 없었고 특히나 악몽같은 꿈을 꾸어본 경험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일까? 침대위에 앉아있는 선영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 자신의 방임을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몸만은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한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는듯 선영은 양손을 교차시키며 양손으로 가슴을 꼭 부여잡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
다시는 생각도하기 싫을만큼 지독한 악몽을 꾸었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꿈이었다는 사실을 선영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지 옷도 잠복할때 입고 나갔던 옷 그대로 선영은 침대에 앉아있었다.
『하긴... 』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선영은 피식 웃으며 방금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정말 있었던 일인것처럼 생생한 꿈이긴 했어도 귀신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런 형상을 한 사람들이 실제로 있을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런 꿈에 옷이 흠뻑 젖어들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에 실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끈적끈적해.... 일단 샤워나 좀 해야겠다.. 』
땀을 얼마나 흘렸댔는지 온 몸이 끈적거리는 느낌에 선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입고있던 얇은 자켓을 벗고있을때 선영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지니? 』
현지에게 나무라듯 말하며 자켓을 마저벗고 돌아서던 선영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선영과 현지 단 둘이 살고있는 집이기에 당연히 현지라 생각하고 돌아보던 선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현지가 아닌 나이가 지긋이 들어보이는 노인 한 명과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영이 깜짝 놀라며 품안에서 권총을 찿았지만 선영의 품안에는 권총이 없었다. 당황하는 선영의 눈에 자다가 흘린듯이 보이는 권총이 눈에 들어오자 선영은 재빨리 침대위에 있던 권총을 들고 노인을 향해 겨냥했다.
『너..너희들 누구야!! 』
선영이 권총을 들고 위협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듯이 선영의 모습에 피식 웃어보이고만 있었다. 그 모습은 선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선영의 당황한 모습을 즐기듯 노인의 뒤에있던 한 남자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잘잤어~ 형사 아가씨? 』
남자의 목소리.. 그리고 말투...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디에서였는지 선영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너.....!!! 어..어떻게...!!! 』
어떻게 들어왔는지 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 사람들보다 더 당황스럽게도 남자의 목소리와 말투.. 그것은 방금 전 선영이 꾸었던 꿈에서 나온.. 선영을 위협하던 그 남자의 목소리와 말투였다. 더구나.. 지금 방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선영이 지금까지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고생이 많군 그래.. 』
건장한 남자들의 우두머리처럼 생각되어지는 노인의 목소리였다.
『특별히 내 소개를 하지 않아도 나를 알고 있을테지? 』
마치 선영이 알고있는 사람이라는듯이 말하는 노인의 목소리에 선영은 기억을 더듬었다. 오래지않아 노인의 말에서 풍겨지는 느낌처럼 어디선가 본듯도 한 느낌의 노인의 얼굴이 선영의 머리속에서 떠올랐다
『정...재환..?!! 』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지후와 관계된 인물로 파일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지후의 친할아버지였다. 선영으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주 타겟은 지후의 주변인물이 아닌 지후 그 자체였고 지후를 뒷조사하는 과정에서 지후의 할아버지가 손자를 보호하기위해 튀어나온 것은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고 자신을 희롱하던 남자의 입에서도 정재환이란 지후의 할아버지 이름이 나왔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꿈일 뿐이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눈앞에는 꿈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 목소리가 말했던 인물이 직접 선영의 눈앞에 서 있는것이었다. 그것도 선영의 집에.. 그리고 선영의 방안에 있는 것이었다. 선영의 머리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꾸었던 꿈이 예지몽같은 그런 것이었던 것일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건가? 』
혼란스러움에 휩싸여있던 선영의 귀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영이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려는듯 머리를 흔들며 선영의 앞에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었다. 이해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여자들을 죽인 목적이 뭐야??!! 』
질문보다는 단정이 상대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내기에도 당황하게 만들기에도 유리하다. 질문은 상대에게 수많은 대답중에 하나를 선택할 기회를 주지만 이렇게 단정지어 말해버리면 상대는 일반적으로 반박이나 부정 또는 변명을 하기마련이었고 이런것들은 질문에 대답하는것보다는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
더구나 지금처럼 약간 틀어서 상대에게 불리한 쪽으로 단정지어 말한다면 본능적으로 자신의 불리한 점을 없애기위해 단정속에 숨어있는 거짓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리고 가끔씩 그 과정에서 상대가 숨기려했던 진실이 의도치않게 튀어나오기도 한다.
『마치 내가 여자들을 죽인것 처럼 말을 하는군? 』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칭찬받은 김에 한가지 사실을 더 알려줄까? 지금까지 경찰은 어느 언론매체에도 사인까지 밝힌적이 없어.. 』
선영의 말에 노인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본 선영은 지후가 그리고 지후의 할아버지가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의 대화를 녹음 할 수 없는것이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이들에게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더 확인하고싶은 것이 있었다.
『어떻게 죽인거지? 』
『내.. 사람?? 』
선영은 재환의 "내 사람"이라는 말이 신경이 쓰였다. 마치 선영이 정재환과 한 패가 될것이라고 말하는듯한 아니.. 확신하고 있는듯한 말이 상당히 거슬리고 있었지만 재환은 그런 선영을 무시하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돌연사가 맞아.... 』
어떻게 여자들이 죽였는지 알려줄듯이 모든걸 말한다고 한 재환의 입에서 부검의들이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이 나오자 선영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재환의 말은 무엇인가 다른 것이 숨겨져있는듯한 뉘앙스를 풍겨오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이어지는 노인의 이야기는 지금의 대화내용과는 전혀 다른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10여년 전... 교통사고가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승용차와 화물트럭이 충돌하는 큰 사고였지.. 그 사고로 승용차에 타고있던 일가족 3명과 트럭운전수 1명이 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세 명이 죽었고 한 명은 혼수상태였지.. 』
이 세상에서 죽음이란 뜻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건 선영이도 그리가 아마도 말을 하고있는 노인도 알고있는 사실일 것이었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물어오는 노인의 질문에 선영은 머리속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잠시 떠올렸다.
『호흡이 끊어지는 것.. 심장이 뛰지 않는 것.. 맥이 뛰지 않는 것.. 아마도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겠지?? 』
선영은 노인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실제로 영혼같은 것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영혼이 존재한다면 사람이 죽을때 그 영혼이 사람에게서 빠져나와 천국을 가거나 지옥을 가거나 한다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사람들은 육신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야...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몸안에서 인간의 몸을 움직인다.. 심장이 뛰고 심장에서 뿜어져 나간 피가 산소와 에너지를 신체부위에 전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신체의 각 부위가 제 기능을 하며 움직이지.. 그렇다면 심장은 왜 뛰는 거지?? 』
대화가 끊기고 정적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목소리의 주인공과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도 혼란스러웠고 자신과 자신의 손자의 짓이라 말하면서도 소설속에서나 있을법한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정재환과의 대화도 혼란스러웠지만 일단은.. 빠져나가야 한다...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포위하듯 선영의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마!!! 』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능글맞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영이 그들을 향해 권총을 들이댔지만 아마도 선영이 그들에게 쉽사리 총을 쏘지 못할거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경찰의 총기사용에 관한 규정은 심할정도로 엄격하니까...
선영이 갑자기 다가오는 남자들을 향해 겨누고 있던 총을 천장쪽을 향해 치켜들었다. 선영이 비록 여자이고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그녀도 오랫동안 강력계에서 일해온 여자였다. 이들을 모두 제압할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호락호락하게 이들에게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누군가 선영을 도와주러 오기전까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구원요청이었고 느긋하게 전화등으로 지원요청을 할 수 없는 이상..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파트에서 총소리가 울리면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할테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선영의 집으로 출동을 할 것이었다. 또한 천장을 향해 총을 쏘면 지금 다가오는 이들에게 위협의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총까지 들고있는 이상..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할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이것이 선영의 계산이었다. 선영은 들어올린 총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딸칵...
딸칵...
『 ..........!!!! 』
하지만 선영의 기대와는 달리 총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아닌 빈 탄창을 때리는 딸칵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영의 얼굴에 또다시 당황하는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어째서...??"
남자의 말에 선영이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치 선영의 총안에 총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듯한 말투.. 그리고 낯빛...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만한 거리에까지 남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투욱...
선영의 손이 밑으로 쳐지고 선영의 손에 있던 권총이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총을 들고있다는 사실이 더 이상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선영을 포기하게 만든듯 그녀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차 올랐다.
『역시.. 똑똑한 아가씨군.. 상황판단이 좋아.... 』
선영에게 다가오던 남자들이 씨익 웃으며 선영을 잡으려하던 자세를 풀고 선영에게 다가왔다.
퍼억...!!
남자가 손을 뻗어 선영의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남자는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절망스러운 얼굴로 포기한듯 총까지 바닥으로 흘려버린 선영이 포기했다고 생각하고 방심하고 있던 남자의 사타구니를 선영이 힘껏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두 명의 남자도 예상외의 선영의 행동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 선영은 그대로 방문쪽으로 달려나갔다. 방문 앞에 있던 노인이 넘어지듯이 황급히 옆으로 피하고 선영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방문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현관문만 나가면 된다.."
선영의 머리속에는 현관문 밖으로 벗어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일단 문밖으로 나가면 사람들도 있을지도 모르고 어떻게든 이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방문을 빠져나온 선영은 생각대로 현관문쪽으로 달려갈 수가 없었다.
몇 년을 살아온 집인데.....
하루에도 몇 번은 왔다갔다하던 자신의 집 내부인데.....
선영은 그렇게도 익숙한 현관으로 가는 길을 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현관으로 가는 길이 없었다. 방문을 나선 선영의 눈에 보인 것은 선영이 알고있던 선영의 집의 거실이 아닌... 조금 전 꿈속에서 봤던 식당.. 그곳이었다.
선영의 뒤에서 정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잖아.. 넌 이미 잡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