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왕 아르셀라 11
11. 루스네의 눈물
"됐어요. 여기서부턴 혼자 가도록 하겠어요."
골렘 두마리가 지키고 있는 아르셀라의 성 입구에 도달하자 루스네는 자신의 부하들을 물리쳤다.
"네 공주님 혼자서요?"
"그 그럴 순 없습니다!"
충성스런 루스네의 호위병들과 중신들이 강하게 만류했지만 루스네는 막무가내였다.
"이건 명령입니다. 여러분이 함께 오면 협상을 하기 힘들어져요.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루스네는 아르셀라를 유혹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공주가 사내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다면 부하들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어쨌든 공주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 부하들이 물러서자 루스네는 홀로 성 안에 발을 들였다.
"그대가 루스네 공주인가?"
성문이 닫히고 루스네에게 다가온 안내인은 인간만한 크기의 우드골렘이었다. 골렘은 딱딱한 어조로 루스네의 신분을 물어왔다.
"그렇다. 나는 왕국의 공주 루스네 모르테아다. 너의 주인님에게 안내하거라."
"알겠습니다."
루스네의 신분을 확인한 골렘은 쿵쿵대며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루스네는 얌전한 모습으로 조용히 골렘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 사고하는 골렘이라니, 놀랍구나.]
루스네는 어느정도 마법을 익혔기 때문에 자신을 안내하는 이 우드골렘의 경이로운 기술력을 잘 알수 있었다. 보통 골렘에게 이정도 지성을 부여하는 것은 웬만한 마법사로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아르셀라는 어떤 인물일까?]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르셀라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8서클을 뛰어넘는 최고수준의 마법능력도 그렇고, 전쟁을 일으킨지 석달만에 벌써 수도 코 앞까지 진격해온 탁월한 전쟁수행능력.. 지금까지 아르셀라는 단 한번의 전투도 패한적이 없다.
전장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위력 외에도 그는 백성들의 인심까지 쓸어가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진의가 어떻던 간에, 아마 충분히 모르테스를 책임질 왕의 재목이 될 것이다. 그거면 된거다..
"여기입니다."
루스네가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어느새 회의장에 도착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루스네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기 주인님~ 키스해 주면 안돼?"
협상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르셀라는 자꾸 달라붙는 세이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세이키는 일찌감치 아르셀라의 무릎위에 자리잡고 귀찮을 정도로 아르셀라를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안돼.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거기다 협상단도 언제 도착할지 모르고.."
"하지만 심심하단 말이야~ 보는 눈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골렘들인데 아무 상관 없자나. 그러지 말고 한번만 해줘."
"안된다니까."
아르셀라는 매정하게 세이키의 부탁을 거절했다. 조그만 입을 삐쭉 내밀고 주인님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던 세이키는 아르셀라의 거절에 골이 잔뜩 난 듯 보였다.
"정말 너무한거 아냐? 이럴꺼면 나 왜 데려온거야? 모처럼 데이트라고 해서 따라와 줬더니 이런 딱딱한 방 안에서 시간만 죽이고.. 주인님 정말 세이키한테 혼나고 싶어?"
"헐.."
세이키의 막나가는 말에 아르셀라는 무척 당황했다. 명색이 노예라는 것이 주인에게 이런 무례한 태도라니. 역시 처음에 확 휘어잡았어야 했는데 불쌍해서 많이 풀어준게 실수였다. 이젠 아예 기어오르려고 하지 않는가?
"이 이봐. 데이트라니! 이건 모르테스 왕국과의 중요한 회담이란 말이다. 너도 빨리 무릎에서 내려가. 무겁단 말이다."
"에에? 내가 무거워? 깃털보다 가벼운 세이키가 무겁다니.. 이건 주인 아저씨한테 문제가 있어. 이 약골아!"
"...."
아르셀라는 세이키의 말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약골이라니? 물론 아르셀라가 여자를 안을때를 제외하면 운동을 극히 싫어하기는 하지만 약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몸이 약하지는 않았다. 명색이 용이니 기본 베이스가 되는 것이다.
"어이. 내가 왜 약골이야? 이녀석이 요즘 많이 봐줬더니 못하는 말이 없네."
"사실이잖아. 솔직히 말해서 주인님 나 이길 수 있어? 나보다 약하니까 약골이지 뭐."
세이키는 이제 아주 막나가기로 작정한 듯 했다. 대놓고 아르셀라의 자존심을 긁어댄다. 아르셀라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후우.. 네가 마법면역체를 달고 나와서 내가 무섭지 않나본데, 내 힘이 마법이 전부인줄 아냐?"
"헤헤. 마법이랑 h말고 할 줄 아는것도 있었어? 변태주인님~"
[크윽..]
아르셀라는 입술을 꽉 깨물며 오른손에 불꽃을 일으켰다. 그 불꽃을 세이키의 허벅지로 살짝 가져가니
"앗 뜨거!!"
불이 채 닿기도 전에 세이키가 펄쩍 뛰며 아르셀라에게서 도망쳐 갔다. 세이키는 마법면역체라 절대 마법이 통하지 않는데 아르셀라의 불꽃은 마법으로 일으킨게 아니라는 건가?
"갑자기 이게 무슨짓이야! 자칫 세이키 피부에 상처라도 나면 손해보는건 주인님이라구!"
"이제 내 무서움을 알았겠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너 정도 혼내주는건 아무것도 아니다."
세이키는 잔뜩 골이 나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애초에 순순히 키스를 해 줬으면 됬을것을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만들다니 주인님은 역시 나쁜 아저씨다.
"어이 이 불꽃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흥. 그런거 하나도 관심없어."
말하는 투로 봐서 잔뜩 토라진 것 같다. 이쯤에서 달래주는게 좋을 듯 싶은데..
"알았어. 키스해줄테니까 이리 와라."
"흥!"
"다섯 셀동안 안오면 안해준다. 하나 둘."
"으읏."
결국 손해보는것은 언제나처럼 세이키였다. 그녀는 아르셀라의 손가락이 다 접혀지기 전 언제 토라졌냐는 듯 쪼르르 다가오는 것이었다.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는건 자존심이 꽤 상하는 일이었지만 안오면 키스를 안해준다니 어쩔 수 없다.
"참 잘했어요 세이키 어린이."
"애가 아닌걸! 것보다 빨리 키스나 해줘."
아르셀라는 씨익 웃으며 세이키의 턱을 살짝 들어올렸다. 세이키는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눈을 꼭 감고 있다.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 아르셀라가 천천히 다가가는 찰나
끼이이익
[헉 협상단이 왔군.]
아르셀라는 깜짝 놀라 세이키를 옆 자리로 밀치고 엄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상석에 자리잡았다.
"꺅 뭐에요?!"
주인님의 키스를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은 세이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르셀라는 그녀의 반응은 무시하고 회의장에 들어온 협상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명?]
회의장에 들어온 인물은 단 한명이었다. 바다색 머리카락을 가진 2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날씬한 체구의 여성. 저 여자가 협상의 대표로 온건가?
[루 루스네?!]
그녀의 미모를 확인한 아르셀라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이건 확실하다. 이 세상 것이 아닌것 같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저 미녀가 대륙 최고의 미모를 가진 루스네 공주가 아니라면 그 누가 루스네란 말인가? 설마 이 자리에 직접.. 그것도 혼자 나오게 될 줄이야.
"...."
루스네가 처음 취한 행동은 아르셀라 옆에서 씩씩대고있는 은발의 소녀를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녀는 아르셀라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해왔다.
"아르셀라 님이시죠? 저는 모르테스 왕국의 공주 루스네 모르테아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 으 응. 만나서 반가워."
아르셀라는 루스네의 미모에 취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인간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인가?
"어어어어어?!!!"
그리고 잠시의 시간을 두고 루스네의 정체를 알아챈 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몇번이고 눈을 비비며 루스네의 얼굴을 확인했다.
"언니?!"
"...."
"언니 맞잖아! 어떻게 여기에.. 흑 언니!!"
세이키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루스네에게 안겨들었다. 루스네는 가만히 품 안의 세이키를 쓰다듬으며 아르셀라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어조로 담담히 협상목적을 설명했다.
"제가 협상을 제의한 이유는 이 전쟁의 무익함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국의 위협이 턱 밑까지 다가온 이 시점에 우리끼리 내란은 곧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으앙 언니도 무슨 말을 하는거야? 우리가 왜 싸워. 흑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루스네의 미모에 취해있던 아르셀라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화친이라도 하자는 건가?"
"잘 아시는 군요. 일단은 힘을 합해 외부의 적을 막아야지요."
아르셀라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여기까지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화친이라니..
"이봐. 뭔가 잘못된게 아닌가? 화친이 아니라 항복이 맞는 말 같은데. 흐흐 외부의 적 타령을 할 게 아니라 정직하게 말하라구. 도저히 아르셀라님의 병사들을 막아낼 수 없어요~ 하고 말이지."
루스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경에 나가있는 병력을 끌어 모으면 당신과 대적할 정도는 됩니다만.. 제국의 정예병을 막을 방법이 없어집니다.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되요."
"맞아요 주인님. 왜 언니랑 자꾸 싸우려고 그래요? 서로 평화롭게 지내면 좋잖아요."
세이키가 루스네의 편을 들었다. 그녀로서는 좋아하는 언니 루스네의 편을 드는게 당연한 것이다.
[주인님?]
하지만 그녀가 한 말은 루스네에게 있어 다른의미로 커다란 위화감을 가져다 줬다. 주인님이라니.. 설마 세이키가 아르셀라에게 종속되었다는 말인가?
"어차피 내 입장에선 제국이나 모르테스나 오합지졸이기는 마찬가지다. 흐흐 거기다가 내 궁극적 목적을 생각하면 더더욱 화친을 할 수는 없지. 돌아가라. 협상은 결렬이다."
아르셀라의 말에 루스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하다.
"실례지만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힘을 보태드리겠습니다."
아르셀라는 잠시 망설이다 곧 그의 목적을 당당하게 밝혔다.
"크크큭 나의 위대한 야망은 바로 전 세계의 아리따운 처자를 모두 아우르는 하렘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은 대륙 최고의 미녀로 알려진 아카시아 성녀와.. 흐흐 너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
"아.."
루스네는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하렘왕이라고? 제정신인가?
"참 주인님 또 망상병 도졌네. 언니 저 말 듣지 마요. 가끔씩 주인님은 헛소리를 할 때가 있어요."
"...."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모르테스 왕국을 점령할 필요가 있지. 어설픈 화친따위, 큭큭 개나 줘 버려라. 너도 기대하고 있으라고. 곧 이 아르셀라님께서 네 알몸을 친히 시식해 줄 테니까. 크하하하"
[차라리 잘 된거야.]
루스네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러웠다. 그녀는 세이키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내 몸을 바치려고 온 거잖아. 어서 말하라고. 저를 드리겠어요. 당신을 왕으로 만들어 드릴 테니 부디 화친을 받아 달라고.. 하렘왕이고 뭐고 하는 말은 세이키 말대로 망상일 거야. 그러니.. 그러니..]
하지만 루스네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몸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전혀 엉뚱한걸 물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냐."
아르셀라는 씨익 웃으며 루스네의 얼굴을 마주봤다. 역시 아름답다. 저 여자는 반드시 하렘에 넣어야 한다.
"세이키에게 무슨 짓을 한거죠?"
"응?"
"세이키는 제 계약자에요. 그런데 왜 세이키가 당신과 함께 있는 건가요. 거기다 주인님이라니.."
"어 언니."
루스네의 말에 가장 당황한건 세이키였다. 주인님과 있었던 일을 설명 해야하나?
아르셀라의 출정식을 방해하다가 비겁한 수단에 당해 사로잡힌 일. 거기서 아르셀라에게 몸을 더럽히고 매일 그에게 시달리다가 그의 부관 리노에게 속아 계약을 맺은 일. 계약의 내용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 후 주인님의 귀여움을 받으며 계속 옆에 있어야 했던..
[히익 완전 주인님이 죽일놈이잖아. 이런 말을 들으면 루스네 언니 성격에 가만히 있을리 없어.]
아마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아르셀라를 반으로 쪼개려 들 것이다. 하지만 루스네는 자신에게 약간의 검술을 배웠을 뿐 결코 저 변태아저씨의 상대가 안된다. 그러면 자신이 나서서 루스네를 보호해야 하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하지? 주인님 말을 안들을때 가끔 몸이 아파서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때가 있는데..
"흠 그것이 궁금한가? 뭐 말 못할 것도 없지. 이 아이는 나와 노예계약을 맺었다."
"노 노예?!"
아르셀라의 말에 루스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뭐 덕분에 매일이 즐겁지. 흐흐. 처음에는 잘 못하고 울기만 했는데 요즘은 꽤 익숙해졌는지 안는 맛이 있어. 너도 내 하렘에 들어오는게 어때? 세이키한테 그랬던 것처럼 네 몸에도 여자의 즐거움 이라는 것을 뼛속 깊숙히 새겨주지."
"아우 참! 왜 그런말을 하는거야 주인님.."
세이키는 아르셀라가 루스네를 도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빨갛게 양 볼을 물들였다. 주인님과 함께한 침대위의 시간이 떠올라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이키의 태도는 루스네를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
[세이키.. 미안. 정말 미안해. 내가 너를 위험한 곳에 보내서. 괴로운 일을 겪게 했구나. 모두 내 잘못이야. 흑 정말 미안해..]
루스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참으려 해도 가슴속 깊은곳에서 저릿한 슬픔에 절은 눈물이 자꾸 솟구쳐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살짝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아르셀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흑.. 아 안됄것도 없죠. 제 몸을 바치도록 하겠어요. 그러니.. 흑"
"뭐 뭣? 하렘에 들어온다고?"
아르셀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자신의 말은 진심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공주에게 자신의 여자가 될 걸 제의했다기 보다는 그녀를 도발해 마음의 평정을 흐트려 놓을 의도가 강했지 설마 들어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절 마음데로 해도 괜찮아요. 그러니 화친을 받아 주세요."
루스네의 음성에서 처연한 비장감이 묻어나왔다. 슬픔에 젖은 미녀의 아름다움은 사내의 마음을 처절하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언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저 h한 주인님이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그런데 언니도 그런 꼴을 당하고 싶다는 거야?"
세이키는 루스네의 손을 꽉 붙잡고 강하게 그녀를 만류했다. 화친이 대체 뭐길래 그녀가 아르셀라에게 몸까지 주려는 것인가?
"이 이봐. 큭 제길.. 뭘 모르는 모양인데. 널 한번 먹는게 내 목적은 아니다. 널 하렘에 넣는게 내 진정한 목표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르테스 왕국도 내 손아귀에 넣을 필요가 있다."
아르셀라도 이런식으로 루스네를 안게 되는건 사양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준 후 마음 속 깊은곳까지 굴복시켜 자신의 여자로 만드는게 아르셀라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네. 이 왕국을 드리겠어요. 아니 그것보다.. 저랑 결혼하시죠. 절 아내로 맞으시고 이 나라의 왕이 되는 거에요."
"뭐어?!"
"어 언니?"
나라를 통채로 준다고? 거기다 그녀 자신도 아르셀라의 하렘에 들어온다는 것인가?
"설마 거절하진 않으시겠죠. 모르테스 최고의 미녀와 왕 자리를 한꺼번에 얻게 되는 거에요.
"..."
너무 맛있어 보이는 과일에는 독이 있는 법이다. 아르셀라는 그녀의 진의를 의심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아니면 그토록 제국의 위협이 무섭다는 것인가? 일개 반군의 수괴인 자신에게 나라를 통째로 물려줄 정도로?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지?"
"후후 당신의 그릇이 그정도 인걸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당신과 싸우지는 않을 거에요. 텅 빈 수도를 점령하고 왕이 되십시오. 당신이 왕이 되는 동안 우리는 제국과 일전을 벌일테니.."
"..."
아르셀라는 루스네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건이 너무 좋다. 싸우지도 않고 원하는걸 모두 얻을 수 있다니.. 혹 루스네에게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정도는 감수해야 할 정도로 너무 조건이 좋았다.
"좋아 받아들이..."
"단 조건이 있어요."
루스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어조로 아르셀라의 말을 잘랐다. 일변한 그녀의 태도에 세이키도, 아르셀라도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인다.
"뭐냐?"
"세이키를 풀어주세요. 제가 세이키 대신 당신의 노예가 되겠어요."
"에에?"
그녀의 발언에 가장 놀란건 세이키였다. 자기 대신 주인님의 노예가 된다니? 말도 안된다!
"언니! 그게 무슨소리야? 왜 왜.. 언니가.."
"세이키는 아무 상관 없잖아요. 이 나라도 주고 제 몸도 줄게요. 그러니 세이키는 풀어 주세요."
루스네는 세이키가 뭐라고 하던 들은채도 하지 않고 아르셀라를 똑바로 노려봤다. 비록 자신은 저 더러운 사내의 소유가 되야 한다 하더라도 세이키만은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는게 루스네의 생각이었다.
"...."
아르셀라는 말없이 루스네를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절한다. 협상은 결렬이다."
그는 아주 차분한 어조로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이번에는 루스네가 놀랄 차례였다.
"어 어째서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왕위도 주고 루스네 자신도 준다는데 고작 세이키를 풀어주는 것 조차 해줄 수 없다는 말인가?
"뭘 모르는군. 확실히 네가 탐나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내 것을 포기하면서 까지 얻을 필요는 없어."
"아."
"세이키는 내 여자다. 결코 놓아줄 수 없다."
[주인님..]
세이키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비록 안좋은 형태로 주인님의 노예가 되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로부터 "자신은 주인님의 여자"라는 확언을 받자 마음이 여린 세이키로서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르셀라의 말은 세이키를 무척 감동시켰지만 루스네에게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째서.."
"흐흐 계약을 맺은 것도 있고 이미 정이 꽤나 들어버려서 말이지, 저 애가 없으면 좀 허전할 거야. 그러니 포기할 수 없는.."
"어째서냐구?!!"
루스네는 처절한 증오가 섞인 음성으로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녀는 아르셀라의 그 발언을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왜 세이키가 네 여자야?! 억지로 속여서 계약을 맺었잖아! 거기다.. 강제로, 그녀의 순결을 범한 주제에 뭐? 네거라구?!"
이제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억눌러 두었던 분노를 저 증오스러운 사내에게 아낌없이 쏟아내었다.
"너따위가.. 너따위가 나의 세이키를 빼앗아 가려는 거야? 나랑 세이키는 한 몸이나 다름 없어. 지난 3년동안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구! 흑.. 그런데 왜 네가 끼어들어서 세이키를.. 세이키를!!"
"루 루스네 언니.."
세이키는 루스네가 이토록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루스네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루스네의 이런 반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흑 으아아아앙."
세이키가 어쩔줄 모르고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자 루스네는 무너지듯 그녀의 품에 안겨 서럽게 눈물을 쏟았다. 이젠 한계였다. 사랑하는 세이키를 저딴 사내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 저주스런 사내에게 자신의 몸 마저 바쳐야 한다는게 너무 분했다.
왜 자신은 여자로 태어나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왜 자신은 공주로 태어나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
"언니 흑 울지마. 언니가 울면 나도 슬프단 말야."
"...."
아르셀라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 모든 불행을 초래한 악의 근원인데 딱히 변명할 거리도 없다. 그래도 하렘왕이라는 자존심 때문에 굽히고 들어가기는 싫어서 그냥 무게잡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주인님이 나빠! 왜 언니를 울리고 그래?! 어서 사과하란 말야!"
아르셀라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세이키가 그에게 화살을 돌렸다.
"정말 나쁜짓만 골라서 하고.. 흥 나쁜 주인님 따위는 죽어버려!"
[후.. 여자란 역시 어렵군.]
그냥 무턱대고 안는다고 끝이 아니다. 아르셀라는 세이키의 비난과 루스네의 원망을 동시에 받자 어떻게 해야할지 난처할 따름이었다. 자리를 뜨기도 그렇고..
"요즘 좀 착해졌나 했더니, h한것만 밝히고 심술만 부리고 정말 최악이야. 최저의 남자라구!"
"그 그만해 세이키 흐윽. 미안 이제 괜찮으니까.."
한참 울고 나자 어느정도 마음이 진정 됬는지 루스네는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흑 그만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어요. 방금 전에 추태는 제발 잊어주세요. 아르셀라님."
"...."
"아무 조건도 없어요. 그냥 저를 가지세요. 세이키도 가지시고, 모르테스도 가지세요. 그러니 제발 화친을 들어 주세요. 부디 이 나라를 제국의 손에서 지켜주세요."
루스네는 이제 완전히 자포자기한듯 보였다. 자존심도, 여자로서의 존엄도 모두 포기하고 눈 앞의 원수를 향해 제발 자신을 가져달라고 애원한다. 자신의 소중한 모든걸 가져도 좋으니 그저 나라만 구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루스네 공주..]
아르셀라도 이제 그녀의 진심을 알았다. 그녀는 단지 나라를 구하려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모든지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 그녀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나쁜 놈인가?
아르셀라는 더이상 이 장소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휑하니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모르테스 왕국의 루스네 공주와 아르셀라의 결혼이 발표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공주는 나라를 위해 아르셀라에게 모든 것을 다 주기로 결심했고 아르셀라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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