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룡왕 아르셀라 10
10. 아카시아의 증오심
아르셀라의 병력은 어느새 모르테스의 수도 모르테아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공주는 딱히 아르셀라의 군대를 막을 생각도 않고, 오히려 아르셀라의 진격로에 배치되어 있는 수비병을 모두 제국과의 국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아마 아르셀라와 싸울 생각을 포기한 듯 보였다.
[이거 참 왕되기가 이렇게 쉬웠나?]
아르셀라는 일이 너무 잘 풀려 오히려 불안할 지경이었다. 전혀 긴장감이 없다. 세이키는 곧 루스네와 적으로 만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빈둥대며 과일이나 줏어먹고 있었고 리노는 허구한날 잠만 잤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에, 아리따운 여자들은 아르셀라가 말도 하기 전에 먼저 그에게 안겨온다. 정말 자신은 하렘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단 말인가?
[흐음.. 첫째왕비는 리노로 하고, 둘째는 세이키, 셋째는 루스네.. 넷째는 아카시아.. 일단 들어온 순서대로 맞아들일까? 아니면 나이 순서가 나으려나? 크허허헛]
아르셀라는 벌써부터 김치국을 마시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앞으로도 이렇게 술술 풀릴지는 아직 알수 없는 것이다.
아카시아 대신관. 교단의 성녀로 칭해지는 아름답고 신성한 미녀. 그녀는 겉보기에는 고결한 성직자였지만 실은 무시무시한 비밀을 숨기고 있었다.
교단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제단. 이곳에선 한창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끔찍한 의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아카시아 혼자서 이 의식을 진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최근 그녀는 8서클에 달하는 엄청난 마력을 몸에 지닌 한 여자를 손에 넣었다. 그녀는 자신이 없어도 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에 아카시아는 그녀에게 비밀제단을 맡겨둔 채 안심하고 다른 일에 신경쓸 수 있었다. 이를테면 모르테스 왕국을 멸망시키는 일이라던지..
[아르..]
아르셀라가 자신의 하렘에 넣을 미녀들을 다시한번 점검하고 있는 사이 그의 애칭을 애타게 부르짖는 한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소리가 되어 입 밖에 나오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아르.. 도와줘.]
온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하다. 다크엘프 르나, 퀴러스의 셋째 제자이자 아르셀라의 사저인 이 아름다운 여성은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교단 깊숙한 지하 대공동에 유폐되어 성녀의 비밀스런 의식을 돕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그녀는 농담이라도 이런 끔찍한 의식에 참여할 생각따윈 없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카시아 성녀의 사악한 주술에 사로잡혀 완전히 그녀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
[제발. 나 이런 거 싫단 말이야.]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되버린 걸까? 그녀는 단지 교단에 몸을 의탁해 아르를 잊어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어렸을 때 자신의 마을을 완전히 불태운 무시무시한 흑마법사 퀴러스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로 들어간 이래,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실험을 도와야 했고.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던 한 남자는 매정하게 그녀를 차버렸다. 그 남자도 잊고 그동안 지은 죄를 씻을 겸 해서 교단으로 들어갔더니 이번에는 퀴러스 못지않게 무서운 마녀 아카시아의 손에 사로잡혀 죽느니만 못한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들 따위는 모두 죽어야 한단다. 그들은 살아갈 가치가 없어.]
머리속에는 성녀의 속삭임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다. 물론 르나는 그녀의 속삭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토록 계속 반복해서 들려오는 성녀의 목소리를, 언제까지고 거부할 수 있을지는 스스로도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 그녀의 속삭임에 넘어가고 말면, 이제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자아도 완전히 녹아버리게 되겠지..
"르나야."
한창 의식에 집중하고 있던 르나의 귀에 익숙한 한 중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온 것일까? 고개를 돌려 방문자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지만 아카시아가 이곳을 떠나기 전 내린 명령,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의식에 집중해라" 때문에 그녀는 한시도 마법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괜찮다. 곧 너를 구해주마."
[정말 구해준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 더 바랄게 없었다. 르나는 비록 몸은 움직일 수 없었지만 마음으로라도 그를 응원했다.
"아.."
남자의 손이 자신의 머리에 와닿자 르나는 흠칫 했다. 남자는 르나의 머리에 손을 대고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더니 이내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내 힘으로는 힘들구나. 10서클의 정신계열 마법이라니.. 당장 풀어줄 수는 없겠다. 일단 상아탑으로 가서 너에게 걸린 저주를 풀어 보도록 하겠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여기서 절 꺼내주세요.]
트라듀스, 퀴러스의 수제자이자 그가죽은 지금 현 대륙 최강의 마법사. 그는 자신의 사제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교단의 깊숙한 곳에 침투해 왔다. 과연 그는 무사히 르나를 데리고 이 장소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아하하하~ 제법 인간들은 당돌한 구석이 있어. 큭큭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너 따위가 발을 들이는 거지?"
[아..]
운나쁘게도 트라듀스가 이곳에 침입한 직후 아카시아 성녀가 돌아오고 말았다. 동시에 아카시아의 정신지배가 강하게 힘을 발휘해, 르나의 희미하게 이어지던 자아가 완전히 끊겨 버렸다.
대륙 최고의 미녀로 이름높은 이 교단의 성녀는 흥미 반 비웃음 반이 섞인 표정으로 검은 후드를 눌러쓴 대륙 최강의 마법사를 오만하게 내려보고 있었다.
"이 아이는 내 사제요. 풀어주지 않겠소?"
"싫다. 저렇게 쓸만한 애를 왜 내가 풀어줘야 하지?"
"...."
예상했던 반응. 결국 트라듀스는 아카시아 성녀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이 싫다면 힘으로라도 되찾아 가겠소."
"너정도 힘이라면 작은 유희거리는 될 것 같군. 비웃지는 않으마. 후후 전력을 다 해보려무나."
아카시아 성녀는 환히 웃으며 양 손을 펼쳤다. 그녀의 두 손에 주위에 각기 다른 종류의 마법진이 새겨져 간다.
[더블 스펠..]
웬만한 경지에 오른 마법사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다는 고난도의 마법 시전이다. 트라듀스의 스승, 퀴러스의 더블스펠은 오른손에 6서클, 왼손에 7서클이 한계였다. 하지만 성녀가 지금 캐스팅 하는 마법은 둘 다 무려 8서클이 아닌가!! 참고로 트라듀스의 더블 스펠은 양손 다 4서클 정도였다.
"일단 가볍게 한번 막아 보려무나."
아카시아는 마법을 캐스팅 하며 대화까지 건네는 여유를 보였다. 트라듀스는 자신의 지팡이를 바닥에 꽂고 최고수준의 방어마법을 펼쳐냈다.
[디멘션 게이트]
콰광
아카시아의 마법이 트라듀스의 방어마법에 가로막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차원으로 옮겨진 것이다.
"큭큭큭 인간주제에 어떻게 그정도 마법을 익혀낸 거지?"
자신의 마법이 막히자, 아카시아는 웃었다. 인간들의 발전속도는 역시 놀라울 정도다. 처음 자신들이 마법을 전수한지 4000년, 그동안 인간들은 이미 위대한 마법종족인 그들에 필적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이런 말 하기는 스스로도 무안하지만, 사실 네가 사용한 방어마법은 내가 창시한 것이다. 고작 인간주제에, 내가 만든 마법까지 훔쳐내어 사용하고 있다니. 기분이 영 좋지 않아."
"...."
"역시 인간들은 모두 사라져야 할 존재다. 후후 가만히 나두면 너희들은 주제를 모르고 허락되지 않은 곳 까지 기어오르려고 해."
아카시아의 절대적인 마력을 직접 본 후에도 트라듀스는 별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계획하는지는 별 관심이 없소. 어차피 당신이 세계에 균형을 깰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한다면 별의 수호자가 당신을 응징할 테니.."
"뭐 수호자? 큭큭 웃기지도 않는군. 그따위 되다만 놈들이 감히 나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느냐?"
"내가 알 바 아니오. 중요한건 당신이 나의 사제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이지."
트라듀스의 목적은 오직 르나 뿐이었다. 그녀를 구해내지 않으면 죽은 스승에게 면목이 없다. 르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퀴러스가 남긴 유일한 핏줄이 바로 르나였다.
"아하하하! 좋아. 아주 재미있어. 그래 어디 한번 데려가 보거라. 나는 한 손으로만 너를 상대하겠다."
"그 약속 지키길 바라오."
트라듀스는 조용히 주문을 외워 자신을 수호하는 3마리의 데스나이트를 소환했다. 아카시아가 마법사라면 접근전은 비교적 취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다.
"별 짓을 다하는 구나. 후후 오랜만에 눈이 즐겁겠어. 너처럼 주제를 모르는 인간들의 피를 보는 것이 나에게는 최고의 유희 란다."
아카시아는 마스터급 검술을 지닌 최강의 언데드들을 눈 앞에 두고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무시무시한 투기에 트라듀스는 심장이 오그라 드는 듯한 기분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크윽.."
"아하하 고작 이정도냐?"
트라듀스와 아카시아는 거의 한시간 가까이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아카시아는 그녀가 말한 대로 오직 한손으로만 그들을 상대했고, 트라듀스는 자신이 알고있는 최고수준의 마법을 남김없이 퍼부어 아카시아를 공격했다. 그가 만든 강력한 데스나이트들은 쉴새없이 검을 휘둘러 그녀를 압박해 갔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결착이 보였다.
[졌군..]
아카시아의 입에서 품어져 나온 막대한 화염에 두번째 데스나이트가 재로 산화하자 트라듀스는 패배를 직감했다. 남은 데스나이트는 하나, 자신의 남은 마력은 약 2할 정도.. 아카시아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다.
결코 이길 수 없다. 아카시아가 한 손만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미 그들 사이의 실력차이는 극복할 수 없을정도로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나는 할만큼 했다. 미안하구나 르나야]
트라듀스는 아픈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품 안의 마법 스크롤을 작동시켰다. 동시에 트라듀스의 몸이 하얗게 빛나더니 공간전이를 시작했다.
"하? 도망칠 생각?"
아카시아는 급히 방해장을 펼쳐 트라듀스의 도주를 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트라듀스가 미리 펼쳐놓은 방어마법 때문에 방해장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결국 아카시아는 간발의 차로 트라듀스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크으으윽!!! 인간주제에 감히.. 감히! 꺄아아아악!!"
모처럼 친히 몸을 움직였는데 피 맛을 보지 못했다. 마치 절정 직전에 섹스가 끝난것과 같은 극도의 불쾌감이 그녀를 온통 사로잡았다.
"피.. 제길 피가 필요해."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죽여 그 처절한 비명소리를 듣고 싶다. 마침 좋은 대상이 있다. 그녀의 뒤에 멍하니 서있는 여자 다크엘프.
"큭 아냐. 저 애는 죽여선 안돼! 크으으"
르나가 죽으면 의식에 차질이 생긴다. 아카시아는 터질것 같은 분노를 어찌하지 못하고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늘의 사건은 아카시아 성녀에게 직접 전쟁에 나서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이 분노는 증오스런 인간족을 찢어 발기지 않으면 해소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인간들을 도륙할 수 있는 장소는 역시 전쟁터다.
아카시아가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모르테스 왕국에 있어 거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최악의 결과였다. 물론 현 모르테스 왕국의 지도자 루스네 공주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녀는 하루 뒤로 다가온 반란군 지도자 아르셀라와의 협상 준비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참이었다.
루스네 공주는 갈수록 예뻐졌다. 물론 예전에도 그녀의 미모는 범접하기 힘든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격무에 시달리느라 많이 수척한 모습이었는데 요즘은 하루 일곱시간씩 꼬박꼬박 숙면을 취하는 데다 자주 거르던 식사도 세끼 잘 챙겨 먹었다. 단순히 생활 습관을 바꿨을 뿐인데도 대륙 최고의 미녀라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찬란하게 꽃피는 것이다. 이런 그녀의 변화는 궁성의 뭇 남성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플렌후작은 그런 그녀의 변화가 상당히 불안하게 생각되었다. 루스네는 평소 자신의 외모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신경쓰는 인물이었는데, 갑자기 예뻐지니 웬지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다가 반란군의 수괴와의 협상 테이블에 직접 나서겠다니.. 혹시 미인계라도 쓰려는 걸까?
"정말 직접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요. 제 몸을 줘서 그들을 막아야 하는데.."
플렌후작의 물음에 루스네는 체념한 듯한 어조로 말도 안되는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았다.
"공주님. 그 말은.."
후작은 당황하여 되물었다. 잘못 들었겠지?
"왜요? 그 아르셀라인가 뭔가 하는 사내는 여색을 무척 밝힌다고 들었어요. 제 미모라면 충분히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데.. 후작의 의견은 좀 다른가요?"
"저하! 제정신입니까?"
일국의 공주가 창녀짓을 한다는 말인가? 플렌 후작은 루스네의 말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까르르. 그럼 어쩌라구요? 큭큭 지금이라도 국경의 병사를 빼서 반란군이랑 내전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제가 두 오라버니를 죽였던 것처럼 아르셀라의 목도 한번 따볼까요? 날더러 어쩌란 말이에요!!"
루스네는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히스테릭 하게 외쳤다. 요즘들어 루스네는 이런 저런 일로 반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마저 무너저 버리면 이제 더이상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말도 안됩니다! 공주님이 그런 천한 무리와.."
"이것이 최선이에요. 난 그 남자와 결혼할 것이고 이 나라의 왕 자리를 이어받게 할 거에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모르테스는 망하고 마니까.."
플렌은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 곧 힘없이 물러났다. 그녀도 야만스런 반란군의 수괴 따위와 혼인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바치려는 것이다. 그녀의 가슴아픈 결단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이군..]
공주의 말대로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반란군과 왕국군이 힘을 합치면 어쩌면 제국의 군대를 감당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플렌 후작이 방을 나가자 홀로 남겨진 루스네 공주는 처연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이 정말 원망스럽다.
[나는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어..]
대륙 최고의 미녀라는 허명은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보단 여자로 태어나서 손해본게 이만 저만이 아
니다.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의 중심을 잡을 수도 없다. 사랑하는 세이키를 아내로 맞을수도 없다. 그나마 이런 창녀짓이라도 해서 아르셀라와 협상을 할 수 있으니 그건 다행이라고 할까나?
문득 창밖을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우울한 석양이 깔려있었다. 멍하니 밖을 보고 있던 루스네의 뺨에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음날 아르셀라의 진영.
[이런.. 협상이라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아르셀라는 꽤나 고민이었다. 루스네 공주가 협상을 하자고 해서 흔쾌히 받아들이기는 했는데 막상 날이 닥치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저 준비 다했어요~"
세이키는 오랜만에 주인님이랑 나들이라도 간다고 생각했는지 들뜬 모습으로 아르셀라의 팔에 매달려왔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루스네 공주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자신의 전 계약자와 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녀는 무슨 얼굴을 하게 될까?
"어이 리노! 정말 안갈꺼야?"
아르셀라는 옆에 매달려 있는 세이키는 무시하고 알몸으로 침대에서 꿈지럭 거리는 부관 리노를 다그쳤다.
"음냐~ 귀찮아여."
"그래도 협상이잖아. 난 너말고는 쓸만한 부하가 없단 말야. 세이키랑 단 둘이 가면 영 모양새가 안나온다구. 거기다 이 꼬맹이가 협상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전 겉보기에도 마족이라는 티가 나잖아여. 꼬리도 있고~ 날개도 있고~ 그냥 세이키나 데려 가세요.."
리노는 협상 테이블에 마족인 자신이 끼면 꽤 불리한 결과가 나올거라 생각했다. 또 귀찮기도 하고..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금 깊은 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후후 리노 아줌마는 별로 가기 싫은 모양이네? 주인님. 우리 둘만 가자. 저런 방해꾼 따위 하나도 도움 안된다구~"
"끄응.."
리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래도 자신은 나름 백성의 지지를 받는 몸인데(왜 백성들이 자신을 환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족을 데려가면 안좋은 인상을 줄 우려가 있었다.
"할 수 없지. 가자 세이키."
"우와 주인님 최고~ 잘 생각했어~ 헤헷"
세이키는 방해꾼 아줌마를 떼놓고 간다는 사실이 너무 기뻣다. 단 둘만이 협상을 간다면(세이키는 협상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이건 데이트가 아닌가? 세이키는 주인님과의 데이트가 너무 기대되어 설레는 마음을 좀처럼 억누를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가 누구와 만나게 될 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체..
*비축분이 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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