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타노마키아 - 1부(13~14)
문을 걸고있는 자물쇠의 고리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지희는 최경희의 아파트문에서 예전에 복사해두었던 열쇠를 뽑아들었다.
『화를 내시더라도.. 어쩔수 없어.. 』
지희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미 수차례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지희는 복사해둔 열쇠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갈 결심을 했던 것이다. 선생님 없이 혼자 이렇게 이곳에 오는것은 지난 주 토요일 이후 처음이었지만 언제나 들렸던 곳임에도 오늘따라 어색하고 낯선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맥주캔이며 과자봉지등의 쓰레기가 가득담긴 봉투들이 어지럽게 거실에 널려져있어 평상시 깔끔한 편이었던 거실의 느낌과는 다르게 어수선하고 어두운 분위기였다. 거실의 모습에서 그런 느낌이 들자 지희의 불길한 생각이 맞을거라는 확신과 함께 마음이 조금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거야.. 』
토요일 오후 엉망인 몸으로 집으로 들어와 거의 기절하다시피한 선생님의 모습도 그렇고 집에서 자신을 내쫓으려고 했던 선생님의 모습등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고 분명 선생님에게 말못할 어떤 중요하고도 좋지않은 일이 있는거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특히나 검도부 교사실에서 만난 그 남자.. 아직도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남자가 분명했고 그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는 내내 불안하고 불쾌한 기분과 함께 심장이 요동치듯 뛰는것이 지희의 머리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남자는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불안하고 불쾌한 기분이 느껴질수록 요 몇일 이상하게 변해버린듯한 선생님의 모습이 그 남자들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쇼파위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명함같은 종이가 거실을 둘러보고 있던 지희의 눈에 들어왔다.
『돈.. 빌려 드립니다.. 직장인..대학생 여성 환영..?? 』
지희가 집어든 작은 종이는 명함이 아니라 명함같은 사이즈에 돈을 빌려준다는 광고와함께 전화번호와 주소가 적혀있는 광고지였다. 광고지를 보는 지희의 머리속에 TV나 뉴스같은 곳에서나 들어봤던 신체포기각서, 협박등과 같은 불길한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보던 지희는 어쩌면 이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선생님이 엉망인 몸으로 들어왔을때 빚독촉으로 구타당하거나 강간을 당한것이라면..? 그러면 그때 속옷을 입고있지 않던 선생님의 모습이나 119를 부르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될것도 같았다.
『서..설마..? 』
심장이 점점 더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지희가 둘러보는듯이 여기저기를 살펴보기만 했던 지희가 적극적으로 거실을 샅샅히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져보던 지희는 거실의 TV셋트 아래 바닥에서 조금 떠있는 그 사이의 작은 공간에서 사진한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을 보는 지희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 자리에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듯 주저앉아 버렸다. 사진속에서 선생님은 거의 정신을 잃어버린듯한 모습으로 자신이 본 그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었다.
『서...선생님이.. 』
한참을 멍하니 주저앉아있던 지희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지희의 머리속에 당장 떠오르는 것은 경찰에 연락하는 것이었지만 이렇듯 사진까지 찍혀있는 상황에서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지희가 그렇게 사진과 광고지를 들고 고민하고 있는 그 때 달그락거리며 현관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현관문을 열쇠로 열려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희가 손에 들려있는 사진과 광고지를 보며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경희의 침실안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그리고 지희가 안방문을 안에서 닫음과 동시에 현관문이 열리고 최경희와 남자들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빨리 준비하라고.. 』
현관문을 닫고 경희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경희의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말하자 경희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침실쪽을 향해 걸어갔고 두 명의 남자는 거실의 쇼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경희의 침실에 있던 지희가 경희의 옷장쪽으로 소리가 안나게 살금살금 다가가 옷장문을 열고 옷들이 줄지어 걸려있는 옷장안으로 몸을 숨기고 옷장의 문을 닫자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침실의 문이 열리며 경희가 들어왔고 바로 뒤에 남자 하나가 따라들어왔다.
『꼬..꼭... 해야만..하는거에요..? 』
『뭐 어려울거 없어.. 그냥 옆자리에 앉아서 술 좀 따라주고 그러면 되는거야.. 』
남자들이 경희에게 무엇을 시켰는지 경희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에게 꼭해야하는 것이냐고 묻자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대답했다. 말은 그냥 술만 따라주는것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지금 남자의 말은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들처럼 접대를 하라는 것이었고 아마도 이런 남자들이 시키는 일이니만큼 또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겨야하는 상황이 올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 할 수 있었다. 경희는 자신이 그런걸 할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 우리한테 몇 번 안겨보니 다른 남자는 싫어?? 크크 』
남자가 키득거리며 경희의 허리를 휘어감으며 경희의 입술에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술을 거부하지 못하는 경희는 차라리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술시중과 잠자리 시중을 들바에는 여기서 이 남자들에게 당하는게 훨씬 나을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형님이 시키는거니까.. 어쩔 수 없는거야.. 』
『벌써 잊은거야? 넌 우리한테 빚이 있어.. 』
남자의 말에 옷장속에 있던 지희는 자신의 생각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평소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 선생님이었지만 아직 고등학생인 자신이 생각하기 어려운 어떤 문제들로 인해 선생님은 이들에게 돈을 빌렸고 그 돈때문에 이렇게 이 남자들에게 사진까지 찍히고 협박당하고 있는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니가 니 입으로 그랬잖아.. 뭐든지 한다고.. 그때 니네 집에 온 그 년한테 손대지 않는 조건으로 뭐든지 다한다고 니 입으로 말하지 않았어...? 』
『크크크킄 역시 선생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구만.. 』
경희는 고개를 떨구고 몸을 떨며 지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희가 지희를 생각하고 있는 그때 지희는 남자의 말에 뒷통수라도 맞은듯이 멍해지는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때.. 니네 집에 온... 그 년? 제자년....? 서..설마.... 나...나?? "
지희는 경희가 내쫓듯이 자신을 밀어내는 그 날을 생각했다. 그 당시 쫓아내듯이 지희를 밀어버리는 경희의 모습에 의아함과 서운함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분명 그렇게 지희를 밀어내기전 경희는 죽을 가지고 왔다는 자신에게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거라고 이야기 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뒤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던 그 남자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서..설마 나...날 이 남자들에게서 보호하려고....?"
그렇게 생각을 하니 경희가 쫓아내듯 자신을 밀어냈던 일이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함부로 찿아오지말라고 했던 이유도 그리고 학교에서 자신을 피하듯이 자신과 마주치지 않으려했던 선생님의 모습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가끔씩 지희에게 자기 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해주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선생님.."
지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그 남자들에게서 지켜주려고 했던 선생님인데 그렇게 자신을 위해주던 선생님인데.. 잠시나마 선생님에게 서운한 생각을 했던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은게 아니라구 』
지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의 말에 선듯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경희를 보던 남자가 꾸물거리는 경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이 말을 했다.
『내가 옷을 골라주지!! 아주 야들야들한 옷으로 말야 아.. 너무 야하면 안돼나? 흐흐흐 』
경희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던 손을 풀고 지희가 숨어있는 옷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지희가 옷장안에 숨어있는것을 알 리 없는 경희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채로 서 있었다.
끼익...
아귀가 잘 들어맞도록 짜여진 옷장의 문이 소리를 내며 살짝 열리고 중앙에서부터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옷장 한쪽구석에 있던 지희는 눈을 동그랗게뜨고는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남자를 쓰러트리리라 마음먹으면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지희였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지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고 있었다.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밖으로 뛰쳐나가야하는지 판단하지 못한채 가슴만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어쩌지.. 어..어떻게 해야하는거지..?"
『내가..할게요.. 』
지희의 머리속에서 뛰쳐나간다와 그대로 있는다의 두 가지 생각이 빠르게 교차하고 있을 그 때 경희가 남자에게 말하며 옷장으로 다가왔다. 이런 남자에게 옷장을 열게하고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휘저어 놓는게 싫었던 경희가 마음을 굳히고 말했던 것이다.
『흠.. 내가 골라줄 수도 있는데? 』
『됐어요.. 제가 할게요.. 』
경희가 옷장으로 다가와 빼곰히 열려있는 옷장의 양쪽 손잡이를 잡고 옷장문을 열었다. 열리는 문에의해 옷장옆으로 밀려난 남자의 시선이 가려진 사이 경희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랗게 커지면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했다. 걸려있는 자신의 옷들 아래로 잔뜩 몸을 웅크린채 놀란듯이 큰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희의 모습이 경희의 눈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놀란 눈을 하고 경희를 바라보던 지희의 입술이 열렸다.
『서.. 』
경희는 다급히 손을 뻗어내 선생님을 부르려던 지희의 입을 막았다. 경희의 심장이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만약 지희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남자들이 안다면 그들이 지희를 어떻게 할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것만 같았다. 지희는 충분히 강한 아이이고 지희와 자신이 손을 잡으면 집에 있는 세 명의 남자를 제압할 수도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해도 그걸로 모든게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 능력자.. 아무리 지희와 자신이 전력을 다해 덤벼도 도저히 어쩔 수 없을것만같은 상식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그 능력자가 자신들을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니까... 분명 지금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자신은 물론 지희까지 자신과 똑같은 상황이 될 것이란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시간없다니까.. 뭘 그렇게 꾸물거.. 』
옷장의 문에 밀려있던 남자가 말을하며 다시 경희에게 다가오자 경희는 급한 마음에 남자에게 키스를 하며 남자가 옷장을 보지 못하게 남자의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서..선생님.."
지희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으며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키스를 하는 경희의 행동에 조금 당황스러운듯 하면서도 키스를 받아들이며 손으로 경희의 엉덩이를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경희는 남자에게 키스를 하면서 한 손으로 열려진 옷장문을 살짝 밀었다. 옷장문이 살짝 닫히면서 지희에게 옷장문에 의해 생겨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거 무슨 뜻이야? 』
경희가 입을 떼자 남자가 조금 의외라는듯이 물었다. 경희는 다시 자연스럽게 옷장을 등지고 돌아서서 지희가 들키지 않도록 옷장을 기대고 서서 남자에게 말했다.
『그냥.. 다른 남자보다는... 』
『네... 』
경희는 남자의 말에 대답했지만 옷장에 몸을 기댄채 한손으로 옷장의 문을 잡고있던 그녀의 손만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옷장안쪽으로 접혀들어온 경희의 손이 떨리는 것을 지희는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 믿고.. 밖에서 기다려 주시면.. 』
남자는 또다시 경희의 입을 탐하기 시작했다. 경희는 옷장문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면서도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며 혀를 남자의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남자의 혀도 경희의 혀를 받아들이며 경희의 입속으로 침범하며 경희의 점막을 쓸어갔고 그럴수록 경희의 손은 더욱 떨려만 갔다. 비록 옷장문이 닫혀있어 볼 수는 없었지만 경희의 손을 보며 경희가 얼마나 떨고 있을지 얼마나 무서워하고 마음이 아플지 지희도 조금은 느낄 수 있을것만 같았다. 지희가 조용히 손을 들어 반쯤 옷장문쪽으로 들어와있는 경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듯 잡아주자 옷장문을 꼭 붙들고 있던 경희의 손이 방향을 돌려 지희의 손을 맞잡아 주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경희도.. 지희도.. 그렇게 몸을 떨며 서로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하고 나오라고... 』
『네.. 』
경희의 대답과 함께 남자는 침실의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나가고도 잠시동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는듯 그렇게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경희가 옷장문을 열고 지희를 바라보았다. 지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어떻게..여기에... 』
경희가 몸을 숙여 눈물을 흘리며 떨고 있는 지희를 안아주었다. 어떻게 하다가 옷장속에 들어가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걱정해주는 지희가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나 사실은.. 많이... 보고싶었어 지희야.. 』
선생님을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해드릴 수 있다고 지희는 생각했다.
『오늘.. 지희는 여기 없었던 거야.. 그리고 앞으로 선생님하고 지희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야... 』
『선생님... 』
경희가 지희에게서 몸을 떼고 지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언젠간 너한테 말해주고 싶은게 있었는데.. 이제.. 말할 기회가 없을것 같아서.. 지금 말해둘게.. 선생님이.. 아니.. 내가... 이곳에 왔을때..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 그런데 어느날.. 지희라는 아이가.. 내 삶에 끼어들어왔다.. 처음엔 다른 학생들과 다를바없는 그냥 한명의 제자일 뿐이었는데.. 왜그런지 그 아이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 재밌고 즐거운 일들이 많아지더라.. 나랑 좋아하는것도 비슷하고.. 언제나 내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나를 믿어주고... 』
『언제부터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내 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제자라기보다 친구같고.. 동생같은 그 아이가... 지희라는 아이가.. 난 너무 좋았고.. 행복했어... 아마도 이제 볼 수는 없겠지만.. 보면 안되겠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선생님과 제자가 아닌.... 언니와 동생으로... 』
『서...선생님... 』
지희가 경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희도 지희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희는 경희의 눈물의 의미를 알것 같았지만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울것만 같은 그런 의미를 가진 눈물이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
밖에서 경희를 재촉하는 남자의 말이 들려오자 경희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지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이 저 남자들하고 나가고 조금 있다가 잘 살펴보고 여기서 나가.. 그리고 다신... 다신.. 오면 안돼.. 알았지? 』
아쉬운듯 다시라는 말을 반복하며 지희에게 말을 하고난 경희가 얼굴을 내밀어 지희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리고 입을 뗀 경희가 이번엔 지희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고마...웠어... 지희야.. 』
지희의 부드러운 입술에서 입을 뗀 경희가 지희를 향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눈으로 웃어보이며 옷장에 걸려있던 옷을 몇가지 꺼내들고 옷장문을 닫았다. 그리고 눈물을 닦아내고는 서둘러 침실의 바깥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을.. 이렇게.. 이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경희가 침실밖으로 나가고 어두운 옷장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지희가 무엇인가를 결심한듯한 눈으로 주먹을 꽉 쥐어보이고 있었다.
- 14 -
어느 고급스러워 보이는 아파트의 문 앞에서 한 여자가 초인종에 손을 살짝 대었다 떼며 주저하고 있었다.
얼마전 학생회실에서 정찬에게 처녀를 바쳤던 정애리 그녀였다.
"내..내가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건지..?"
그날 정찬과 그런일이 있은 후에 애리는 되도록 정찬을 피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오늘 저녁 자신의 집으로 오라는 정찬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자신이 협박을 당하거나 하는 상황도 아니고 꼭 그의 말을 따라야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애리는 정찬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녁이 가까워오자 왜그런지 정찬의 집에 가지 않으면 안될것같은 마음이 계속해서 들기 시작했다. 안갈거라고 마음을 다잡아 봤지만 저녁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져가기 시작하고 아무리 안정시키려고 해도 안정이 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손톱을 이빨로 깨물면서 자신의 방을 서성이던 애리는 일단 밖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면서 마음을 안정시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왔지만 오히려 점점 더 초조해지는 마음은 억누를 길이 없었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정찬의 집쪽으로 향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정찬의 집앞에까지 오게되었다.
"나..정말 그 녀석말대로.. 나도 모르게 그런걸 원하고 있는건가..?"
애리는 스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집에와서 이불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대면서 절대 아닐거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절대 그런생각따윈 갖지 않을거라고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이쪽으로 발길이 옮겨가는걸 보면 역시 정찬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수도 있을것 같았다. 그렇게 애리는 초인종에 손을대고 갈등에 빠져 있었다.
『어머!! 』
그렇게 애리가 갈등하고 있을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오다가 애리를 보고 깜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아..안녕하세요.. 』
애리는 자신도 모르게 얼떨결에 인사를 해버리고 말았다.
『아.. 오늘 정찬이 친구가 온다더니 여자친구였나보네? 』
『네? 아..아니에요 그런거.. 그냥.. 같은학교..치..친구.. 』
애리는 기분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혐오스러워하는 인간을 스스로 친구라고 이야기해야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고 이런 상황이 답답한 것이었다.
『어서 들어와... 안그래도 친구온다는 말을 듣고 마트에 가려던 참인데.. 』
애리가 불안한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보며 말했다. 정찬의 집에 애리가 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분명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해 오라고 했으리라 그냥 지레짐작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집에 정찬이외의 식구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는것도 잠시 지금 이 여자가 자신과 정찬만을 집에 남겨두고 마트에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애리는 되도록 자신의 앞에 있는 여자와 같이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어머.. 너 혹시 우리 정찬이가 무슨 나쁜짓이라도 할거라고 생각하는거니? 』
애리는 여자의 말에 깜짝 놀라며 수상할정도로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다. 여자의 말이 너무 정확하게 애리의 심정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정찬과 한 집에 살고있는 정찬의 가족인듯 보이는 이 여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후훗.. 그냥 해본 소리야.. 그럼 나랑 같이 장보러 갔다올래? 』
같이 장을 보러가자는 여자의 말이 애리에게는 너무도 반가운 말이었고 결국 애리는 그렇게 여자와 함께 차를 타고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애리는 여자의 조금뒤쪽에서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여자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정찬의 어머니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보였다. 꽤 미인형에 속하는 얼굴이었으며 생김새나 몸매가 전체적으로 시원시원한 느낌이 들었고 성격도 꽤나 쾌활하고 당당한 성격인데다 왠지 성적인 매력까지도 풍겨나오는듯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뭐 특별히 먹고 싶은건 없니? 』
자신도 30대이후에 저런 모습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씩 여자를 훔쳐보는듯이 보던 애리는 갑자기 돌아보며 애리에게 물어보는 모습에 도둑질하다 들키기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음.. 뭐가 좋을까나.. 』
이것저것 들어보며 물건을 고르고 있는 여자에게 애리가 조용하게 물어봤다.
『저기..혹시.. 정찬이 어머님 되세요? 』
여자는 웃으며 애리의 말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정찬이 말로는 의사..라고....... 』
『저기 가보자~ 저기 맛있는거 많이 있는거같다~ 』
정찬이의 엄마가 갑자기 애리의 손을 잡고 마트의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정찬이의 엄마란 사람 상당히 동안인데다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 사람인듯 싶었다. 어떻게 이런 엄마밑에서 그런 인간이 나왔을까 싶을정도로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어릴때부터 어머니가 없던 애리였기에 애리의 마음속에서 나중에 닮고 싶을만큼 당당하고 멋진 캐리어우먼인 정찬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였으면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정찬의 어머니는 애리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시식코너에서 음식을 집어 애리에게 먹여주기도 하고 장난도 치면서 마치 자신의 딸을 대하듯 애리를 대했고 애리는 잠시동안 모정에 젖어들듯 정찬에 대한 불안감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애리라고 그랬지? 』
『네.. 』
마트에서 정찬의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애리는 마트에서 잠시나마 잊고있던 불안감과 초조함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자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듯이 정찬의 어머니가 운전을 하면서 애리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 직업이 정신과 의사다보니까.. 평상시에는 그렇에 안하려고 해도 자꾸 직업적으로 사람을 보는 버릇이 생겨버렸어.. 그런데 지금 애리를 보니까 상당히 고민이 많아 보이는것 같은데.. 내가 잘못본건가? 』
『어머.. 아줌마라니.. 왠지 섭섭한 기분인데? 하핫.. 』
주희의 농담섞인 말에 애리도 웃어보였다. 처음에 생각했던대로 멋진 여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주희에게 마음이 끌리기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이렇게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멋지고 예쁜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