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왕자 - 1
1. “리셀.” 하지만 자신을 재촉하는 그녀, 사야는 힘이 넘쳐보였다. “그때 말을 사는 거였어.” 국경선 마을에서 말이 필요할 것이라는 경비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걸어서 가기에 좋은 거리라는 사야의 말을 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절약에 눈이 멀어 그녀의 능력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돈은 있는 거야?” 기사시절에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한이 맺힌 그녀는 성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했다. 리셀도 짜증이 났던 터라 물러섬 없이 맞받아쳤다. “발을 보라고! 물집이 생겼어. 대체 며칠을 걸은 거야, 온통 숲만 가득하고. 운동 삼기 좋은 거리라며!” 리셀이 얼굴이 폭발 직전의 분화구가 되어 씩씩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사야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언덕 방향에서 시선을 고정하고 칼집에 손을 얹었다. 리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언덕을 보았다가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어졌다. 열댓 명의 무리가 말을 내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지!” 선두가 오른 손을 들자 감속하던 말들이 리셀과 사야,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은 무더운 여름임에도 중장갑옷 한 벌을 차려입고 있었다. 리셀은 그들이 기사임을 확증하자 그립(Grip)에서 손을 땠다. 사야는 그 미숙함에 혀를 찼다. “리셀과 그의 동료인가.” 선두는 투구를 착용한 그대로 물었다. 그제야 리셀은 그들이 호의적이지 못한 자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기사들이 칼을 뽑으며 일행을 포위했다. 사야는 그들 못지않은 속도로 칼을 겨누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리셀은 당황하는 차에 기회를 놓치고 무방비 상태로 사야와 등을 맞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큰 배후가 있다.’ 사야는 선두를 노려보며 칼을 버렸다. 비무장을 확인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고, 두 사람은 밧줄에 포박되어 호송되었다.
일행은 곧장 후작의 성으로 호송되었지만, 후작을 알현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향한 곳은 성 내부의 지하 감옥이었다. 감옥은 쇠창살이 아닌 나무문에 철판을 박은 문으로 된 형식이었다. 떠밀리듯 수용된 사야는 창살로 막힌 문구멍을 통해 끌려가는 리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야가 갇힌 방은 입구 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이어서 어느 정도 빛도 들어왔다. 하지만 리셀이 향하는 방향은 기사가 들고 있는 횃불이 멀어지자 어둠으로 뒤덮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사야는 신탁 받은 리셀로 인해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은 적대세력의 감옥 그리고 이곳 또한 다른 감옥처럼 고문을 위한 방이 따로 배정되어있을 것이다. “설마….” 그제야 그녀는 이 방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감옥에 있을 리가 없는 그물 침대가 걸려있고 몇 권의 서적이 쌓은 탑 위로 촛대가 놓여있었다. 거기에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꿀 냄새였다. “먹을 텐가?” 침대에 앉아있는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꿀이 발린 과자가 그 손에 들려있었다. 사야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거친 손과 변성기가 끝난 목소리의 ‘그’는 분명 남자였다. “아….” 사야는 숨을 삼켰다. “당신은 누구시죠?” 사야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감옥에 있을 리 없는 물건들이 있다는 점은 귀족이라던가 하는 존재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자신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사회와 격리된 감옥 안에서. “선택을 잘 한 것 같아. 리셀, 그 녀석의 곁을 지키면 보옥들이 굴러오겠군.”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이름을 반복해 읊는 순간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 이름은 폴리왈츠의 제이왕자의 것이다. 사야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사악한 웃음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쓸고 지나갈 때마다 그 자리에 오한이 돋았다. “당신이 힌, 아니 아인데나르 제이왕자님이시라면, 어째서 이곳에 갇혀있는 거죠?” 남자의 음흉한 눈빛에 불길이 일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야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너희들을 이곳에서 구하고 동행하기 위해서.” 사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인데나르를 자칭하는 남자의 말에는 속내가 숨어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골몰히 고뇌에 빠진 차, 장난기를 거둔 아인데나르도 국왕의 속내를 추리하고 있었다. ‘무엇을 이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 뭐 때문에 베르하제드를 적으로 보는 거냐….’ 아인데나르는 모든 계획이 정해진 그 날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 한 주 정도 걸리겠지. 지금 당장 사자비 후작에게 가라. ‘무도회에서 하듯이 말인가.’ 솟구치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야는 아직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인데나르는 그녀의 천으로 가려진 육체를 훑었다. 감춰진 욕망을 들키지 않도록, 조금 전처럼 진한 눈길이 아닌 한껏 여유로움으로 감상했다. ‘하지만….’ 아인데나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게 욕망의 조건은 외형도 중요했지만, 또 한 가지 필수 되는 조건이 있었다. 그가 수면왕자라고 불리게 된 이유이자,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단 한 가지를 그녀에게서 확인해야했다. ‘기대되는군.’ 상상만으로도 참지 못하고 혀가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수많은 여자들을 봐왔던 혀가 인정할 정도의 상등급이다. 아인데나르는 벌써부터 일어선 ‘심벌’을 진정시키며 기다림을 즐겼다. “좋아요. 경의 말이 맞는다고 하죠. 그럼 ‘왜’ 우리를 구하려는 것인지, ‘어떻게’ 당신과 내가 같은 방에 갇힌 것인지 설명해주세요.” 아인데나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폴리왈츠의 제이왕자는 첩의 자식으로 성인식에서 아버지에게 본명을 인정받지 못한 방탕하거든. 그런데 적통인 왕세자가 몸이 약해서 언제 죽을지 몰라. 만약 왕세자가 죽으면 계승자는 바로 나지. 귀족들은 이미 왕세자에게 다 가버렸는데. 절대왕정인 이 나라에 왕이 자신들의 적이 되면 당연히 목이 달아나 버릴 테지. 그러니 날 가만 내버려두겠냐, 아니지. 게다가 난 왕좌에 앉고 싶지도 않다는 게 본심이고…. 이정도면 되려나?” 그는 물을 한 컵 들이켰다. “이제 ‘어떻게’를 설명해야하나? 그건 별거 아니지. 폴리왈츠로 가는 길목은 사자비 후작령이 유일하니 너희가 이곳을 향하리란 것을 알았지. 정확히 6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후작의 딸이 나와 관계가 있었거든. 후작은 내가 자기 딸을 건드릴 거라 생각했는지. 도착하자마자 잡아들이더군.” 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 아인데나르에 대한 평판은 광대와 다를 바 없었다. 폴리왈츠가 군사강국으로 불리는 시점에서 그러한 소문의 근원이 대내적 무시에서 비롯되었다면 딱 들어맞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이 방에 오게 된 것이죠?” 후, 하고 촛불을 껐다. 아인데나르가 있던 장소가 어둠에 뒤덮였다. 사야가 눈치체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녀석들이 출동하자마자 바꿨거든. 평민 간수는 조용히 꼬드겼고.” 아인데나르는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 외로 큰 키가 드러났다. 성장기의 리셀보다 머리 하나 붙은 키였다. 그는 사야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너를 선택한 이유는, 어린 리셀보다 널 설득하는 것이 확실할 것이었기 때문이었지. 라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라고 대답해주지.” 사야는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의 손은 깔끔한 얼굴과 달리 울퉁불퉁하고 온갖 고난을 격은 손이었다. 기사로서 병장기를 달고 사는 그녀의 손보다 더 처참했다. 손을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에 찰나 안타까움이 나타났었다. “어이.” 순간, 딱딱한 감촉이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아인데나르가 무언가를 집어넣은 것이다. 황급히 뱉어내려했다. 아인데나르의 손이 그녀의 볼을 눌러 뱉지 못하게 막았다. 그녀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뱉기 위해 닿았던 혀에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꿀?’ 그제야 자신이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야는 붉어진 얼굴로 차마 꿀 과자를 뱉지 못하고 잘근잘근 씹었다. 아인데나르는 그녀의 빠알간 입술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음미하고, 씹어, 삼켜라. 나 또한 너를 그리하리니.’
Ps. 태그를 터득해서 줄맞춤이 되서 기쁜 사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