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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왕자 - 1


1.
 여름이었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은 열기를 머금고 있었고,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에 송공송골 맺힌 땀이 옷에 들러붙었다.
 리셀은 옷깃을 펄럭이며 주변을 살폈다.
 삼일 째 걸어오고 있는 길의 끝에는 아직도 넘어야할 작은 언덕이 있었다. 다른 길은 없다. 양 옆에는 울창한 숲이 버티고 서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오직 이 정돈된 길 뿐이며, 벌레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짜증을 내고 싶었지만, 이제 그럴 체력도 없었다.


 “리셀.”


 하지만 자신을 재촉하는 그녀, 사야는 힘이 넘쳐보였다.
 자유기사 사야. 그녀는 한 달 전, 여행의 시작과 함께 남부 다에드에서 만났다. 그녀는 국왕군 소속으로 내전에 참가한 제국의 기사였다. 그리고 한 번의 큰 패전으로 패잔병신세가 된 뒤로 자유기사로 방황하고 있던 것을 리셀이 회유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신분보다 외모에 끌려 동행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몇 번의 위협을 헤치면서 그녀가 기사라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소녀의 외형의 거짓이고, 숱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숙련된 병사가 알갱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숨이 나왔다.


 “그때 말을 사는 거였어.”


 국경선 마을에서 말이 필요할 것이라는 경비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걸어서 가기에 좋은 거리라는 사야의 말을 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절약에 눈이 멀어 그녀의 능력을 잊고 있었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사야는 리셀의 투정을 깨닫고 추궁했다.


 “돈은 있는 거야?”
 “…몸을 팔아서라도.”
 “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서 말하는 거야?”


 기사시절에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한이 맺힌 그녀는 성적인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했다.  리셀도 짜증이 났던 터라 물러섬 없이 맞받아쳤다.


 “발을 보라고! 물집이 생겼어. 대체 며칠을 걸은 거야, 온통 숲만 가득하고. 운동 삼기 좋은 거리라며!”
 “남자가 그 정도가지고!”
 “이 마녀야!”
 “말조심해. 막대기씨.”


 리셀이 얼굴이 폭발 직전의 분화구가 되어 씩씩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사야의 표정이 점차 굳어간 것이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하더니 언덕 방향에서 시선을 고정하고 칼집에 손을 얹었다. 리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언덕을 보았다가 마찬가지로 얼굴이 굳어졌다. 열댓 명의 무리가 말을 내달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정지!”


 선두가 오른 손을 들자 감속하던 말들이 리셀과 사야, 두 사람 앞에서 멈춰 섰다. 그들은 무더운 여름임에도 중장갑옷 한 벌을 차려입고 있었다. 리셀은 그들이 기사임을 확증하자 그립(Grip)에서 손을 땠다. 사야는 그 미숙함에 혀를 찼다.


 “리셀과 그의 동료인가.”


 선두는 투구를 착용한 그대로 물었다. 그제야 리셀은 그들이 호의적이지 못한 자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기사들이 칼을 뽑으며 일행을 포위했다. 사야는 그들 못지않은 속도로 칼을 겨누었지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리셀은 당황하는 차에 기회를 놓치고 무방비 상태로 사야와 등을 맞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는 왕실 소속 제 삼 근위대다! 순순히 항복하라. 너희들을 처분은 사자비 후작이 할 것이다.”


 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들이 정말 왕궁 기사단이라면 개개인이 사야보다 출중할 것이다. 게다가 그 수는 열넷에 중무장 기승 상태니 도망조차 불가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곤란한 것은 적대세력에 왕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여행을 시작한 근 한 달. 몇 번의 암습으로 신탁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왕국 하나가 적으로 돌아설 줄은 몰랐다. 이것은 왕국 하나만의 영향력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개인적인 감정으로 신탁 받은 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더 큰 배후가 있다.’
 “무기를 버려라. 후작께서 무죄를 선언하신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신의 분노가 두렵지 않으신가보군요.”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신이더냐.”


 사야는 선두를 노려보며 칼을 버렸다. 비무장을 확인한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렸고, 두 사람은 밧줄에 포박되어 호송되었다.



2.
 “판결은 내일이다. 너는 이쪽으로 들어가고, 너는 따라오도록.”


 일행은 곧장 후작의 성으로 호송되었지만, 후작을 알현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향한 곳은 성 내부의 지하 감옥이었다. 감옥은 쇠창살이 아닌 나무문에 철판을 박은 문으로 된 형식이었다. 떠밀리듯 수용된 사야는 창살로 막힌 문구멍을 통해 끌려가는 리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사야가 갇힌 방은 입구 계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이어서 어느 정도 빛도 들어왔다. 하지만 리셀이 향하는 방향은 기사가 들고 있는 횃불이 멀어지자 어둠으로 뒤덮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사야는 신탁 받은 리셀로 인해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곳은 적대세력의 감옥 그리고 이곳 또한 다른 감옥처럼 고문을 위한 방이 따로 배정되어있을 것이다.


 “설마….”
 “이상한 생각하지 마. 단지 남녀구분을 위해 다른 방으로 가는 것뿐이니까.”
 “누구시죠?”


 그제야 그녀는 이 방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감옥에 있을 리가 없는 그물 침대가 걸려있고 몇 권의 서적이 쌓은 탑 위로 촛대가 놓여있었다. 거기에 달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꿀 냄새였다.


 “먹을 텐가?”


 침대에 앉아있는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꿀이 발린 과자가 그 손에 들려있었다. 사야는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거친 손과 변성기가 끝난 목소리의 ‘그’는 분명 남자였다.
 ‘그’는 손을 돌리고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이 살아나며 남자의 모습이 밝혀졌다.


 “아….”


 사야는 숨을 삼켰다.
 새하얀 말총머리, 생체기 하나 없는 깨끗한 얼굴, 학자처럼 안경을 쓴 검은 눈동자가 귀공자를 연상시켰지만, 전체적으로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흡혈귀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사야는 그 음산함에 숨을 삼킨 것이다.
 남자는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사야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그보다 먼저 너를 맞춰보지. 제국 출신 자유기사 사야, 맞지?”


 사야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감옥에 있을 리 없는 물건들이 있다는 점은 귀족이라던가 하는 존재로 치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자신들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사회와 격리된 감옥 안에서.
 남자는 그녀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선택을 잘 한 것 같아. 리셀, 그 녀석의 곁을 지키면 보옥들이 굴러오겠군.”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당신이 누군지 말해줬으면 하는데요.”
 “힌 왈츠.”
 “힌, 왈츠…?”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이름을 반복해 읊는 순간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 이름은 폴리왈츠의 제이왕자의 것이다. 사야는 떨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여전히 사악한 웃음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눈동자가 쓸고 지나갈 때마다 그 자리에 오한이 돋았다.
 주춤, 한 걸음 물러서 물었다.


 “당신이 힌, 아니 아인데나르 제이왕자님이시라면, 어째서 이곳에 갇혀있는 거죠?”


 남자의 음흉한 눈빛에 불길이 일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사야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너희들을 이곳에서 구하고 동행하기 위해서.”


 사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인데나르를 자칭하는 남자의 말에는 속내가 숨어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골몰히 고뇌에 빠진 차, 장난기를 거둔 아인데나르도 국왕의 속내를 추리하고 있었다.


 ‘무엇을 이득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지. 아니, 뭐 때문에 베르하제드를 적으로 보는 거냐….’


 아인데나르는 모든 계획이 정해진 그 날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 한 주 정도 걸리겠지. 지금 당장 사자비 후작에게 가라.
 - 그 다음에 무엇을 하면 됩니까.
 - 네가 방탕한 짓을 그의 딸에게 저지르러 갔다고 이미 전령을 보내 두었으니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힐 것이다. 다음 주까지 그곳에 있다가, 리셀이란 애송이가 오면 같이 탈옥해 일행으로 행동해라. 변명은 알아서 생각하고. 그 뒤도 자유다. 평소 무도회에서 하듯이 말이다.


 ‘무도회에서 하듯이 말인가.’


 솟구치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야는 아직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인데나르는 그녀의 천으로 가려진 육체를 훑었다. 감춰진 욕망을 들키지 않도록, 조금 전처럼 진한 눈길이 아닌 한껏 여유로움으로 감상했다.
 갓 이십대를 바라보는 외형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길게 땋았고, 굴곡이 느껴지는 가슴은 아담했다. 허리는 옷 탓에 측정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엉덩이는 묘한 색기가 있어 찰나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인데나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에게 욕망의 조건은 외형도 중요했지만, 또 한 가지 필수 되는 조건이 있었다. 그가 수면왕자라고 불리게 된 이유이자,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던 단 한 가지를 그녀에게서 확인해야했다.


 ‘기대되는군.’


 상상만으로도 참지 못하고 혀가 입맛을 다셨다. 여태껏 수많은 여자들을 봐왔던 혀가 인정할 정도의 상등급이다. 아인데나르는 벌써부터 일어선 ‘심벌’을 진정시키며 기다림을 즐겼다.


 “좋아요. 경의 말이 맞는다고 하죠. 그럼 ‘왜’ 우리를 구하려는 것인지, ‘어떻게’ 당신과 내가 같은 방에 갇힌 것인지 설명해주세요.”
 “‘왜’부터 답하지.”


 아인데나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폴리왈츠의 제이왕자는 첩의 자식으로 성인식에서 아버지에게 본명을 인정받지 못한 방탕하거든. 그런데 적통인 왕세자가 몸이 약해서 언제 죽을지 몰라. 만약 왕세자가 죽으면 계승자는 바로 나지. 귀족들은 이미 왕세자에게 다 가버렸는데. 절대왕정인 이 나라에 왕이 자신들의 적이 되면 당연히 목이 달아나 버릴 테지. 그러니 날 가만 내버려두겠냐, 아니지. 게다가 난 왕좌에 앉고 싶지도 않다는 게 본심이고…. 이정도면 되려나?”
 “충분해요.”


 그는 물을 한 컵 들이켰다.


 “이제 ‘어떻게’를 설명해야하나? 그건 별거 아니지. 폴리왈츠로 가는 길목은 사자비 후작령이 유일하니 너희가 이곳을 향하리란 것을 알았지. 정확히 6일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후작의 딸이 나와 관계가 있었거든. 후작은 내가 자기 딸을 건드릴 거라 생각했는지. 도착하자마자 잡아들이더군.”
 “그게 가능한가요? 왕자에게?”
 “나는 첩의 자식이고. 국왕조차 인정안한 명분 없는 방탕아니까 가능하지.”


 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 아인데나르에 대한 평판은 광대와 다를 바 없었다. 폴리왈츠가 군사강국으로 불리는 시점에서 그러한 소문의 근원이 대내적 무시에서 비롯되었다면 딱 들어맞았다.
 아인데나르는 풀어지는 그녀의 얼굴과 저 붉은 눈동자에 욕망이 뒤덮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이 방에 오게 된 것이죠?”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기사들이 당신 편인가요?”
 “아니, 녀석들은 국왕의 개들이야. 네가 이 방에 올 수 있던 것은 이 방이 가장 좋은 여성 죄수의 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명색이 왕자니까 언제라도 방을 바꿔달라 요청 할 수 있지.”
 “당신이 원해서 이곳을 사용한 다해도, 당신이 있는 곳에 절 보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녀석들은 몰라.”


 후, 하고 촛불을 껐다. 아인데나르가 있던 장소가 어둠에 뒤덮였다. 사야가 눈치체기 전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녀석들이 출동하자마자 바꿨거든. 평민 간수는 조용히 꼬드겼고.”
 “과연….”


 아인데나르는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생각 외로 큰 키가 드러났다. 성장기의 리셀보다 머리 하나 붙은 키였다. 그는 사야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너를 선택한 이유는, 어린 리셀보다 널 설득하는 것이 확실할 것이었기 때문이었지. 라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라고 대답해주지.”
 “뭐…, 일단 인정해드리겠어요.”


 사야는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그의 손은 깔끔한 얼굴과 달리 울퉁불퉁하고 온갖 고난을 격은 손이었다. 기사로서 병장기를 달고 사는 그녀의 손보다 더 처참했다. 손을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에 찰나 안타까움이 나타났었다.
 아인데나르는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찰나의 그것 또한 눈치 챘다. 하지만 무정한 얼굴에 표정은 없었고, 남은 왼손만이 무언가를 집었다.


 “어이.”
 “네, 에?”


 순간, 딱딱한 감촉이 그녀의 입안을 헤집고 들어왔다. 아인데나르가 무언가를 집어넣은 것이다. 황급히 뱉어내려했다. 아인데나르의 손이 그녀의 볼을 눌러 뱉지 못하게 막았다. 그녀의 저항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언가’를 뱉기 위해 닿았던 혀에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꿀?’
 “꿀 과자다. 선물이라고 해두지. 하하!”


 그제야 자신이 놀아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야는 붉어진 얼굴로 차마 꿀 과자를 뱉지 못하고 잘근잘근 씹었다. 아인데나르는 그녀의 빠알간 입술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음미하고, 씹어, 삼켜라. 나 또한 너를 그리하리니.’


 


 


Ps. 태그를 터득해서 줄맞춤이 되서 기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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