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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德厚の野望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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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內外의 경계 짓는 수화문 안에는 세간의 이목을 피하듯이 원림園林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림에 조성된 강남의 기화요초들을 감상하며 일정 간격으로 박힌 석판을 밟아 가노라면 전당前堂이 있고, 그 뒤에는 실室이 있었다.


자주 빛을 내는 향목 탁자에는 문방사우文房四友가 뒹굴고 있었고 바닥에서는 서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창 작업하다가 멈춘 난삽한 풍경이다. 풍경의 주인은 산뜻한 모닝 커피를 마시며 귀족 백수 생활을 영위하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눈앞의 여인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별 다른 장식 없이 은청색의 무늬가 조화를 이루는 궁장이 날씬해 보이는 미녀는 기품 그 자체가 현신한 듯 한 자태를 엿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좀 떨어진 곳에는 자색을 기조로 장식과 패옥을 찬 미녀가 방관하는 척 둘 사이를 눈치를 보고 있었다.


“상공께서 분발하시어 저서著書를 남기시는 것은 홍복洪福입니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 거창한 일은 아닌데....”


덕후는 우희선을 보며 떨떠름하게 받았다. 눈을 굴려 그녀 곁에 있는 금보옥을 향했지만, 살짝 외면하고 있다.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 않아하는 것을 알지만, 따지고 보면 금보옥의 제안이 원인이 아니었던가. 덕후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할까 머리 회전을 가속시켰다.


별 일 아니었다. 상관세가의 몰락 후, 뒤처리를 할 겸 새로 들어설 왕부와 양주楊洲 일대의 화합 조성을 위해 신년을 소주의 심가장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일에 바쁜 것은 여자들이고, 덕후는 백수 라이프를 보내고 있었다. 가끔 양녀로 맞이한 주부용의 상태를 볼 뿐 그 자신은 심가장의 후원에서 삼국지연의를 마저 손질하고 있었다.


삼국지의 애독자는 금보옥이고, 그 뒤로는 소월하도 찾아 읽었다. 염미홍도 소월하가 불러주는 것을 듣다가 스스로 읽고자 했다. 덕후는 그녀들의 열띤 반응에 오히려 괴리감을 느꼈다. 현대 여성이라면 케케묵은 삼국지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드라마, 연예계 가십거리, 로맨스소설 등등으로 즐길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우희선은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현대 여성과 같은 마인드가 아니라 사문난적에 가까운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놓고 반대하지 않는 것은 황궁의 서적 취급 목록에 유일하게 소설이 들어가 있는데, 그게 삼국지연의이기 때문이다.


“하오나, 시중에 유통시키는 것은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금보옥의 어깨가 움찔한다. 돈벌이가 되겠다고 상인의 혼이 속삭여 덕후에게 제안한 것이다. 실명을 실을 수 없는 노릇이므로 필명을 전제로 했지만, 덕후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승낙했다. 어차피 삼국지의 대중화는 명말청초를 거쳐 남경과 복건 사이에 출판 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명 중기인 지금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고 크게 꺼릴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덕후가 쓴 삼국지는 소소한 오류들을 고치며 개연성을 강화하고, 쉬운 문체로 생동감을 불어넣어준 정도였다. 모종강 식으로 평을 넣지도 않았고 나씨의 골격은 유지한 상태였다. 동탁 개혁자론, 유선 현군설, 여포이민족 같은 자뻑 질도 안했다.


어쨌든 덕후가 승낙을 하자 금보옥이 아래를 시켜 판각업자들을 불러 제본작업을 시작하도록 한 것이 우희선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소녀가 책을 보아하니 근간은 저자의 무뢰들의 헛소리를 모은 잡기雜記입니다. 배움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사실의 도리를 어지럽힐 뿐입니다. 소일거리로 끝나면 상관없으나, 밖으로 나도는 것은 파란을 부를 뿐입니다.”


정색을 하고는 너무 직언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그보다는 강목綱目의 주해註解는 어떻습니까?”


강목은 남송의 유학자 주희의 저서로 북송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풀이한 것으로 사실 고증보다는 공자의 춘추春秋처럼 명분을 따지는 글이었다. 덕분에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삼국지의 애독자들 대다수가 지지하는 촉한을 정통으로 치고 있었다. 우희선은 덕후의 심사를 나름 짐작해보고 회유적 제안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덕후는 삼국지나 촉한 자체에 크게 애착은 없었다. 21세기에서는 역사 소재로 많이 접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다. 독특한 기믹이나 말초적 재미를 잘살려 멋지게 컨버전하면 아무래도 좋다는 주의였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심심찮게 나도는 쉰 떡밥들까지 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덕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희선의 권유대로 강목綱目의 주해를 다는 것도 내키진 않았다. 애당초 그가 손을 댄 것도 점수 좀 따고 나아가 용돈 좀 벌어볼까 하는 거지, 삼조三曹와 같은 열의는 없었다. 그래도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 덕후는 어떻게든 우희선을 설득하려고 했다.


“허무맹랑한 잡기는 맞소. 하지만 소설은 소설로 보아야하지 않겠소? 역사와 차이는 발문에 충분히 주지시키고 있으니 문제없소. 무익하다고 했는데, 머리를 잠깐 식히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할 참이오? 머리에 쥐를 유발하는 사서오경이나 팔고문은 아무래도 휴식 대용은 되기 어렵지 않겠소.”


금보옥이 입가를 가리고 쿡 웃는다. 우희선의 초승달 같은 아미가 살짝 휘어졌으나 수긍하여 물러날 기세는 아니었다. 실제 마오쩌둥이나 옛 영걸들이 삼국지를 애용했다느니 적극 이용했다느니 신화를 만들어내며 불멸의 고전 취급받게 된 것은 민국民國 이후다.


인심을 혹하게 만들고 저급한 책 취급이 당대 주류의 관점이었다. 상인 출신인 금보옥이나 서민 계층인 소월하나 염미홍 입장에서는 구애 받지 않고 지지를 보내지만, 주류 중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우희선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그런 패관잡기를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일이었다. 자식이었더라면 손수 회초리를 들일이었다.

덕후가 끝내 빠져나가려하자 우희선의 표정이 단호하게 변했다.


“근래에 상공께서는 권權을 즐기시고 경經을 멀리하시는 것 같아 참으로 근심입니다. 왕부에 경연經筵을 맡으실 명망 높으신 대학사大學士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덕후는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얼굴이 해쓱해졌다. 유교권 국가의 후계자 교육은 현대의 교육열에 비하면 저리가라 수준이다. 경연이라 함은 옛 일을 가리키고 치도治道를 논하는 일이다. 사서오경은 기본이고 나머지도 광범위하게 습득해야한다. 완전기억에 가까운 능력과 전생의 사회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동궁 시절의 경연을 압도하고 있지만 빡빡한 수험 생활에는 천재든 범재든 학을 뗄 정도로 싫기는 마찬가지다. 황태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해방되었는데 얼마 안가 다시 수험 라이프에 빠지게 생겼으니 정신적으로 격침이다.


이제 덕후로서는 출간을 취소하거나 아니면 우희선의 청을 받아들일 처지에 빠졌다. 금보옥은 눈을 촉촉이 적시며 덕후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어느 쪽이든 후폭풍이 두려웠다. 취미를 인정받도록 설득은 물 건너갔고 옹호해서 정당성을 설파하는 쪽으로 난이도가 올라가버렸다.


“상공은 약관 이전에 궁리窮理의 요체를 깨우치셨습니다. 거경居敬에 충실하시어 미흡한 부분을 완전히 잡으신다면 당대의 성현聖賢이 되실 것입니다.”


죽일 셈이냐! 라고 반사적으로 말하려던 덕후는 일단 하하하 웃었다. 앞뒤 잘라두고, 일단 거경居敬에 충실하려면 정좌를 비롯하여 꼼짝없이 12시진 바른생활을 해야 한다. 조선조 선비들이 염복  때도 체신을 생각하여 옷을 벗지 않는 것과 같은 근성일색의 각오를 다져야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니군.


본인이 자각은 못하는 듯해도, 벌써부터 안사람 노릇을 톡톡히 하려 드는 모습에 덕후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평소 방만한 행실로 속으로만 삭혔다가 삼국지 출판 건으로 한 번에 폭발한 셈이리라. 그래도 우희선은 여타 여인들과 반응이 틀렸다. 금보옥처럼 차가워지거나, 염미홍처럼 대놓고 원망하거나, 소월하처럼 까칠해지거나, 형욱처럼 무시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평소와 다름없다. 그 절제력에 경의를 표하는 한편 가장 마음에 부담이 갔으며 상대가 어려웠다.


“배워서 깨우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소.”
“설마요, 성현의 도리는 끝이 없습니다. 다만 궁행躬行에 힘쓰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우희선이 추켜세우는 척 압박을 주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되라는 뜻이 아니라 체신 좀 챙겨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덕후는 자신에 대한 우희선의 마음이 끝내 모질지 못하다는 점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 보다는 마음을 밝게 하고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지행知行이 합일合一을 이루어야 업적이 되고 의미가 되지 않겠소. 박학博學도 좋지만 실사實事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리라 보오. 의관衣冠과 소소한 예법보다는 일상의 큰 줄기에 맞춰 연마하고 싶소. 그러한 연마는 수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이바지하게 될 것이오.”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라고 돌려 말하는데, 정작 말을 받은 것은 우희선이 아니라 금보옥이었다.


“일상 속에서라니요?”


눈을 빛내며 호기심 반, 의혹 반이 있다. 방관자적 태도를 버리게 하여 아군으로 삼기 위해서 덕후는 과녁을 바꿨다.


“경서이라는 것도 결국은 경험과 사고의 산물이 아니오? 상고上古 이전에는 경서도 없을 텐데 이치가 어디에 담겨 있겠소? 하늘에서 석판이 툭하니 떨어진 것도 아니고, 결국은 마음에 담겨있던 것이 아니겠소? 결국 그 이치를 깨닫고 적은 성현도 결국 사람의 자식이 아닌가 말이오. 그리고 성현이 왜 그런 경서를 남겼겠소. 세상에 이바지하라고 그런 것이 아니요. 성현은 성현의 처지에서 이바지한 것이니, 나는 번왕藩王으로서, 그대들은 왕비와 각자 맡은 분야에 맞춰 연마 하면 될 것이오.”
“상인商人도 가능한가요?”
“물론. 아는 것이 있어도 실천하지 못하면 죽은 지식이오. 일상에 자기 주관을 확립하고 이치를 갖춘다면  만 가지 여울이 결국은 바다로 이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소. 비단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세상에 이바지 할 수 있다면 태평성대는 요순에 있는 것은 아니요.”


덕후의 말에 금보옥은 환희에 가까운 듯 눈을 반짝였고, 우희선은 놀라는 듯 했다.


“욕망에 물들지 않도록 본성으로 회귀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수기修己로 궁리窮理 추구하는 것이고요. 하온데 방금 말씀은....”
“욕망도 결국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적당히 다스린다면 모를까....그렇다면 욕망을 없앤다고 함은 본성의 일부를 배제한다는 것인데 그러길 바라오? 가령 남녀 간에도 말이오.”
“아....”


우희선의 얼굴이 붉어졌다. 덕후의 마지막 말은 치명타였다. 덕후가 우희선을 비롯한 여인들을 안을 때 한 가지 절대 원칙이 있는데, 카사노바가 그랬듯 자신의 욕정보다 여성의 쾌락을 절대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타 이 시대 남자들은 물론이고 화화공자의 기교와 정성도 덕후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희선과 금보옥도 덕후와 함께 살을 맞대고 오르가즘에 이르는 순간은 정말로 자신이 사랑받고 있고, 영혼까지 그와 동등한 입장이며, 밖으로 말은 못하지만 섹스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환상까지 품고 있는 상태였다.


은밀하면서도 노골적인 예시에 우희선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심오하고 원대한 고견이라 당장 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상공께 맞는 답을 준비 해 올 테니 그때까지 이 일은 불문에 부칠 수 없겠습니까?”


곰곰이 헤아리는 듯하다가 우희선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덕후도 우희선이 침제된 행간을 포착하고는 덩달아 무거운 안색이 되어 그러마, 하고 대꾸했다. 우희선이 읍을 하고 물러나자 금보옥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다가왔다.


“상공의 식견은 정말 대단해요. 언니가 답변을 못하고 물러나는 것은 처음 보네요.”


금보옥도 련주의 후계자로 키워져 실무뿐만 아니라 상당한 교양도 쌓았다. 진사 출신도 말발로 눌러줄 만큼 학식이 있었다. 그러나 사족士族 출신에 화명사태로부터 전통적 교육을 습득한 우희선에 비하면 한참 못 미쳤다. 황궁 내각의 학사들도 지위를 떠나 성취 면에서도 우희선에게는 한발 양보하는 수준이다.


그 우희선이 말문이 막히는 것은 정녕 진귀한 광경이었다. 막판에 꼼수를 부렸다는 것을 눈치 채기는 했지만, 그것을 차지하고서라도 논거 자체에는 흠집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의가 똑부러져 있었다. 그보다 금보옥은 덕후의 견해에 왠지 모를 이끌림과 정신적 신선함을 느꼈다. 덕후가 인용한 것은 명대 후기에 등장한 양명학의 설이다. 기존 주자학에 요구되는 방대한 고전해석을 물리치고 간단명료함을 중시했다. 기존의 주자학과 달리 욕망을 원리적으로 긍정하고 적극적인 행동주의를 제창했다. 이런 양명학의 흐름은 명 중기 이후 상업경제의 발달에 따라 신흥계층을 비롯하여 서민들에게 깊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니 그 신흥계층의 정점에 있고 상승욕구를 지닌 금보옥의 입장에서는 정말 구미에 당기는 소리였다.


금보옥이 워낙 간절하게 요청하는 지라 덕후는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꼬박 두 시진을 양명학의 대략적인 개념과 요체에 대한 문답으로 소비했다. 자기변호를 할 겸, 흉중에 품은 계획에 나름 조타가 될 것 같아 불가피하게 언급하기는 했지만, 창시자인 왕양명의 자리를 표절하고 싶지는 않아서 덕후는 마지막에 출전이 자신이 했다는 소리를 못하도록 신신당부했다.


금보옥은 덕후의 말에 고개를 끄떡였다. 겸손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유별난 귀찮음으로 이해한 듯 했다.


“그럼 제가 멋대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상관없겠죠?”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기 마련이오. 주학이 본래의뜻을 잃고 엄숙주의로 흐르고 있는 것처럼, 그것도 자칫 근거도 없이 주관적 담론만 펼치는 식으로 흐를 수도 있소.”


양명학의 험난한 미래를 아는 덕후는 나름 경고를 했지만, 금보옥은 독단에 대한 경계로 받아들였다. 덕후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다가 싱긋 웃었다.


“왜 웃소?”
“상공이 새롭게 보여서요. 그냥 짐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짐짝 취급해주시오. 자꾸 꺼내면 닳거든.”


덕후는 무기력한 표정으로 팔다리를 흐늘거리며 땅에 벌러덩 누웠다. 금보옥은 쌜쭉한 표정을 지었지만 평소처럼 밟아주기 보다는 관대히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보다는 문답을 까먹기 전에 한 자라도 종이로 옮겨 적는 게 급했다.


“시비한테 차와 다과를 보내주라고 할게요. 생각 있으면 저녁에 오세요.”


금보옥으로선 모처럼 침실로 오라고 언급한 것이다. 덕후는 기쁘기보다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설마 문답 후속편을 찍어야하는 것은 아니겠지. 금보옥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자 한차례 뒹굴 거리던 덕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외출이다, 외출. 마녀들 소굴에 있다가는 노사 분규가 일어날지도 몰라.”


심가장의 주인들 중에서 제일 편한 입장에 있는 주제에 헛소리를 지껄인 덕후는 후실에서 벗어났다. 수화문에서 당도했을 때, 그 곁의 분지에 한 소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연무복은 땀에 흠뻑 젖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슬림한 굴곡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연상케 했지만, 소녀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했고, 어딘가 닳고 닳은 듯  분위기를 두르고 있어 가화假花 같은 느낌이 감돌았다. 덕후가 양녀로 받아들인 주부용이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여러 병장기가 어지럽게 널려있는데 십팔반무예를 익히는 듯 했다.


기식을 조절하던 주부용은 덕후의 접근을 알고 자세를 풀었다. 덕후는 바닥에 떨어진 명주 수건을 꺼내들더니 휙 던졌다.


“아빠!”
“수련은 잘 되어가니?”


주부용이 땀을 훔치는 것을 지켜보면서 덕후가 슬쩍 물었다. 주부용의 교육 담당은 세휘지만, 수련은 형욱이 따로 전담하고 있었다. 토납식을 비롯하여 권각을 놀리는 법 그리고 마음가짐을 군 더기 없이 설명하고, 몸에 확실히 새겨주는데 적임자였다.


“잘 모르겠어. 난 모든 게 처음이니까.”


그 말은 덕후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주부용의 실체는 인세에 보기 드문 마검령이다. 에고 소드 같은 의미지만 거기서 진화하여 아예 숙주와 융합했다. 말 그대로 신검합일 그 자체인 것이다. 인간으로 의식과 오감을 가진 마라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생소했다. 수련은 육체의 단련이 아니라, 적응도를 테스트한다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요새는 꿈을 꾸니?”
“꿈....”


그 말에 마라는 털썩 주저앉아 어딘가 먼 것을 보는 표정을 지었다.


“응, 남자들이 날 깔개로 써서 헉헉 대는 거랑 날 샌드백으로 팔다리 꺾고 파열 시키는 거 말이야? 뭐, 그럭저럭.”


숙주와 융합하면서 마라는 원주인의 꿈을 잦게 꾸었다. 그것은 보통 소녀로서는 악몽이지만, 마라는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한 편으로는 신기해했다. 마검령 일 때 자신은 꿈을 꾸지 못했다. 완전기억력을 가진 것이다. 


“어떻게 죽여야 억만 분의 일이라도 해소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의지가 희미해져 가.”


덕후도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망각이라는 거야. 인간의 속담에는 시간이 약이라는 소리가 있단다.”
“.....싫은 거네.”
“하지만 모든 걸 기억하면 미쳐버린다고? 예를 들어서 전날의 똘똘이들 감촉이 현재진행형이라 느껴보렴.”
“윽, 그건 더 싫다.”


이맛살을 찌푸리는 마라, 둘의 대화는 정상적인 부녀관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슬슬 익숙해지렴.”
“무엇에?”
“인간에.”
“하지만 난 불로불사인 걸. 본체인 검이 소멸하지 않는 한 천년 후에도 계속 남아있을 걸? 그리고 이런 번거로운 수행을 안 해도...”


마라는 근처의 잡초를 뽑았다. 그리고 잠깐 조몰락거리자 파릇한 풀잎이 한여름 때처럼 생기를 발산하다가 급격히 시들어져 재로 흩어져갔다. 생령을 강제로 조종하여 순식간에 사화死化 시킨 것이다. 저걸 인간에 적용하면 순식간에 미이라가 되어 죽을 것이다. 전생의 자신이 본다면 필시 놀라자빠지리라. 그러나 덕후는 대신 마라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물론 그 능력이면 수련이고 뭐고 필요 없겠지. 하지만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제를 받아.”
“흥이다 뭐. 지들이 말 안 들으면 어쩔 건데.”


마라는 심기가 상해 쏘아붙였지만 덕후로부터 반응은 심상찮았다. 마치 사이코패스를 하는 일반인처럼 괴이하게 변했다.


“학대받은 기억이 잊혀져가니까, 그런 식으로 마조 끼를 발산하겠다는 거니?”
“멋대로 변태로 만들지 마! 아닌 걸 알면서 딸 놀려 먹음 좋아?”


마라가 크왕~! 하며 덕후에게 덤벼들었다. 무공이고 뭐고 없는 투정에 덕후는 껄껄 웃으며 마라를 받았다. 열받은 마라가 전신을 마구 꼬집어 비명을 지르며 엎치락뒤치락했다. 아옹다옹하다가 덕후가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자 마라는 깔깔 웃으며 떨어져나갔다.


한바탕 소동이 진정되자 덕후는 문득 말했다.


“마라, 난 네 보호자야.”
“응.”
“하지만 언제까지고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순 없어. 자식은 부모를 떠나는 법이니까.”
“.....필멸자처럼 말하네. 아빠는 그렇지 않잖아?”


지금의 엄마들이 죽는다 해도, 아빠와 자신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근원은 달라도 불사는 둘의 공통점이었다. 세휘도 있지만 부록 같은 존재이고, 아빠가 그녀를 탐탁치 않아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결국 세상이 끝날 때까지 동반자는 둘 밖에 없으리라.


덕후는 마라의 머리에 붙은 풀을 하나하나 떼어주었다.


“부모는 자식을 부양할 의무가 있어. 하지만 그건 낳아 준 전능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자식이 자립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야. 거기서 권리가 생겨나는 것이고. 그게 충족되면 같이 있을 필욘 없지.”
“참 매정한 아빠네.”


마라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체 학습한 덕후의 부성관은 자식은 독립체이긴 하지만 부모의 소유라는 관념이 혼재한 이 시대로 보는 이단적이다. 덕후는 아아,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겨버렸다. 전생의 부모가 떠올랐다. 항상 자식에게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셨다. 뚜렷하게 존경하진 않지만 감사하고 사랑했다. 노후조차 챙기지 못한 부모를 보고 어린 오기에 쥐꼬리만 한 봉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특별한 천재도 배경도 없는 덕후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아니 최선이라는 핑계로 고된 안주에 적응한 것일지도 몰랐다. 후회는 하진 않지만 아쉬움이 있다.


같은 조건은 아니지만, 그 느낌을 마라에게 전이시키고 싶지 않았다. 여인들이야 덕후의 구상 때문에 관계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몇몇 더 포함 시킬 것이지만, 마라는 따로 두고 싶었다. 먼 훗날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고 편지나 받을 사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니까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스스로 설수 있게끔 홀로서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마라에게 구속력이 되지 않게끔.


“으음, 마음에 안 들어.”
“뭐가?”
“그 만사가 편하다는 얼굴이.”
“훗, 네겐 거부권이 없단다. 싫음 정면으로 덤벼들 만큼 성장하라고.”
“우....엄마들한테는 그렇게 살갑게 굴면서.”
“후훗, 나는 시크한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아내들한텐 따듯하겠지.”


덕후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느끼한 포즈를 취하자 마라는 혀를 내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열 받는데....


속으로 궁시렁거리는데 덕후는 휙 자리에 일어났다.


“외출하고 올 테니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렴. 올 때 당과 사올게.”
“당과?”


마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 달디 달고 바삭거리는 요물! 인간으로서 얻은 보람이라면 바로 오감인데 그 중에 단 맛은 마라의 본능을 송두리째 휘어잡았다.


“당과! 당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해.”
“그래도 먹고 나면 소금으로 양치해라. 사람 이는 관리 안해주면 쉽게 썩는다.”
“에, 소금은 싫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짜거든.”
“첫번 째는 차냐?”
“그건 세 번 째.”
“호오, 첫 번째는?”


그 질문을 내뱉자마자 덕후는 금방 후회했다. 마라가 소악마처럼 눈을 반짝이며 짓궂게 웃은 것이다.


“인간 수컷의 정액.”
“.....그 소리 엄마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마라.”
“당과 하나 더 추가해주면.”
“오냐.”
“응, 부용은 순진무구하고 착한 아이인 걸? 수컷의 자지 따위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덕후는 대꾸를 포기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 했다가는 같은 과를 대표해서 사죄해야할지도 모른다. 궁색한 자들이 그렇듯 괘씸죄로 마리의 머리를 꽁, 쥐어박아 준 다음에, 따지는 마라를 무시했다. 휘파람을 불며 수화문을 벗어났다.


 


 


네이버3 계정이 막혀서 일일히 호스트 수정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글 초반에 지루한 부분(성리학과 양명학)이 있는데, part 4 배경에 깔린 흐름이라 패스하기 어려워서 부득불 넣었습니다. 재미없게 느끼셨다면 필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성수기 준비가 슬슬 시동입니다. 그래도 월간 연재는 이루도록 하겠습니다.(그러므로 다음 화는 한 달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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