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 6
엉거주춤하게 팔을 내민 자세로 지현이 천진난만하게 웃자 은수는 한편 가엾기도 하고 한편 우습기도 해 지현을 안아준다.
“헤헤~, 이모 내가 훨 크다.”
생뚱맞은 지현의 말에 은수는 빙그레 웃으며 볼을 쥐고 가볍게 흔든다.
“요 말괄량이 또 한 번 이모 놀래키면 엄마한테 확 일러바친다.”
“응, 이모 ...... 한 번 만 봐줘라~ 뭐, 아픈 것도 서러운데 ......”
“이제 들어가서 자. 학교엔 아침에 일찍 알릴 테니까 푹 자둬 ......”
지현의 등을 떠밀어 침실로 보내고 소파에 앉은 은수는 피식 웃음을 짓는다. 꽤나 아플 텐데도 밝게 웃는 조카에게서 아직 어리고 명랑한 성격의 계집아이를 보는 것 같아 은근히 즐거운 은수다.
거실을 돌아보니 어수선하게 수건이며 헤어드라이어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말끔하게 정리하곤 옷을 벗어 거실 탁자위에 차곡차곡 개켜두고 욕실로 들어간다. 지현의 사고로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하는 통에 땀이 밴 몸에 차가운 물을 뿌리며 지현의 부상이 그 정도로 끝났음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커다란 타월로 가슴께부터 감싸고 욕실 밖으로 나선 은수는 한결 나아진 기분에 옷을 입을 생각도 않고 소파로 털썩 몸을 던진다. 좀 전의 부산하고 정신없던 순간이 언제 적 일이었느냐는 듯 밤이 찾아든 자신들의 공간은 고요함이 자릴 하고 있다.
눈을 감고 밤이 주는 편안함에 취해가는 은수는 소파에 몸을 묻은 체 깜빡 잠이 들고 만다. 언니의 걱정 많은 얼굴이 보이고 호탕하게 웃는 형부의 얼굴이 보인다. 환하게 밝은 정원에 우뚝 선 형부의 팔에 손을 감고 비스듬히 기댄 체 지현과 은수를 바라보는 언니의 얼굴...... 자신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형부의 얼굴......
얼마나 잤을까......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그리던 은수가 눈을 떠 주위를 한 차례 휘 둘러본다. 어쩐지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거실을 둘러 보다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곤 소파에서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간다. 서랍에서 속옷을 꺼내 입고 그 위에 부드러운 감촉을 주는 잠옷을 걸친 후 침대시트를 파고든다.
“이모~, 아이 이모~~~~~~”
잠결에 들려오는 지현이 부르는 소리에 잠이 덜 깬 은수가 돌아누우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응, 지현아 ......”
“나, 급해 이모~”
“...... 뭐가?”
“아이, 이모 나 화장시~일”
번뜩 정신을 차린 은수가 후다닥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지현의 두 손이 밤사이 퉁퉁 부어 통증에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되어버렸다. 꽤나 통증이 심했을 텐데 지현이 혼자 끙끙대며 밤을 새운 모양이다.
“어쩌니...... 지현아. 손이 퉁퉁 부었어”
“응, 근데 이모 나 화장실 급해. 새벽부터 참았단 말야.”
“이모 깨우지 ......”
“자는데 미안하잖아.”
“으이구, 기집애야 그래도 그렇지......”
은수는 조카의 미련스러움을 타박하며 욕실 문을 열어 지현을 들여보낸다.
“저..기 ....... 이모~”
“응?”
“바지......”
“아참, 내가 정신이 없네”
욕실 안으로 들어서며 은수가 지현의 바지를 내려주고 나와 문을 닫는다.
“아~, 이제 살 것 같아 이모”
어리광 부리듯 내뱉는 지현의 말에 은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만다. 암만 봐도 지현이는 이목구비만 제 엄마를 닮았을 뿐 성격은 전혀 딴 판이다. 항상 단정하고 얌전하게 몸을 움직이고 부끄럼 많은 언니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가끔, 아주 가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수다스런 입술을 다물고 있을 때나 잠깐 스치듯 언니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지현이 화장실에 앉아 있는 사이 은수는 매번 갈기가 귀찮아 적당량을 갈아 병에 담아두었던 원두를 포트에 덜어 넣고 물을 채운 후 전기 스위치를 누른다. 지난밤 탁자위에 벗어두었던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고 불려놓은 쌀을 냉장고에서 꺼내 전기밥솥에 넣는다. 부산하게 움직이던 은수가 혼잣말로 ‘어머 깜빡했네......“ 중얼거리며 거실 탁자위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이모~~~~~~~~~~~~”
학교에 사고를 알리는 사이 욕실에서 길게 늘어지는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까의 다급했던 목소리가 어느새 나긋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미안함이 배어나는 지현의 목소리는 약간의 애교를 함께 담아낸다.
“응, 그래, 이모 가”
다행이 비데가 설치된 집이라 지현이 옷을 올리는 것 말고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물을 내리고 세정을 끝낸 지현이 마치 처음 봉을 잡은 고등학교 밴드부 악장이 지휘를 하는 듯 두 팔을 앞으로 하고 씨익 웃는다. 그 모습에 은수 또한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들어온 김에 세수 하고 나가자.”
지현의 옷이 물에 젖지 않도록 목에 타월을 두른 뒤 가볍게 세안을 해주던 은수가 장난기 담긴 눈으로 지현의 눈을 들여다보며 코를 쥔다.
“착하지, 킁.”
“에게, 이모......”
“호호호...... 왜 지현아? 너 아직 철들려면 멀었는데. 이쁜 어린이는 이모 말 잘 들어야 해~”
“이못!”
빙글거리며 놀려대는 은수를 노려보던 지현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비록 손은 퉁퉁 부어 통증이 심했지만 그렇게 두 사람은 즐겁게 아침을 맞는다.
주차장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리며 김 대리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이곳저곳 구경 할 곳들 많은데 다 둘러보지 못하셨죠?”
“그러게, 시간이 모자라 다 돌아보지 못했지 뭐야.”
현욱이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한켠에 서있던 은지는 얼굴을 살짝 붉힌다. 마치 김 대리가 자신들이 욕정을 불태우느라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자네, 부모님께선 다들 건강하시고?”
“네, 워낙에 농사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분들이라 두 분 모두 건강하십니다.”
“부모님 건강하게 오래 사시는 것도 자식들에겐 복이라네. 자주 찾아뵙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생전에 효도 많이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참 선물 고맙다 전해 달라 십니다.”
“뭘, 되려 우리가 고맙다 말씀 드려야 하는데...... 하하하”
“.......예?”
“아냐, 아냐...... 그만 출발하자고 서울 도착하면 길 막힐 텐데”
“그러시죠,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겠나?...... 오가며 자네만 고생 시키는구먼”
“하하, 별 말씀을”
은지는 속으로 김 대리란 남자는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을 한다. 호주에 있는 은수의 얼굴을 떠올리며 ......
뒷 자석에 몸을 실은 은지는 연신 유쾌한 농담으로 두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김 대리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본다. 현욱과 김 대리 사이에 오고가던 대화가 잠시 멈춘 틈에 은지가 불쑥 끼어들어 김 대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좋은 사람 만나면 결혼 하실 거죠?”
“네? ...네.... 하하, 좋은 사람 있으면 얼른 결혼 해야죠. 하하하”
“왜, 당신이 중매 서려고?”
“네, 김 대리님처럼 괜찮은 남자라면 중매서도 욕먹지 않을 테니까”
“좋은 사람 있는 모양이네. 그럼 당장 소개시켜 줍시다.”
“조만간 자리 마련하도록 할게요. 김 대리님 나중에 잘 되면 한 턱 내셔야 해요.”
“어이쿠, 사모님 한 턱이 아니라 두 턱, 세 턱 아니 열 턱이라도 쏘겠습니다. 하하하”
“좋아요. 그럼 보름 쯤 후에 선 자리 마련 할게요.”
“이거 벌써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저 운전 못하겠습니다. 부장님 ......”
“어허~, 이 사람 벌써 꾀부리면 어쩌나...... 하하하”
“실은 이번에 부모님들 성화가 얼마나 대단하시던지 저 아주 혼쭐이 났습니다.”
“그럼, 이 사람아. 부모님이야 당신들 살아생전에 귀여운 손주 품에 안아보시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데 ......”
“그런가 봐요. 하여튼 담에 내려갈 땐 꼭 며느리 감 인사 시켜드린다 약속은 하고 왔는데......”
김 대리의 중얼거림에 은지는 빙그레 얼굴에 웃음을 짓는다.
지루한 여행길에 김 대리는 대관령 목장으로 차를 몰아 넓게 펼쳐진 목초지 위로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의 모습과 녹색으로 짙게 물들어가는 풍경 속에 잠시 여행으로 지친 은지와 현욱을 쉬게 하고 잠깐 다녀온다며 저만치 자리한 건물로 들어갔다 라면박스를 안고 돌아온다.
“온 김에 저녁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샀습니다. 여행객에겐 할인해서 팔거든요.”
김 대리가 안고 온 라면박스를 보고 은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혼자 산다고 끼니 거르고 라면 같은 걸 드시면 안돼요 ......”
“사모님, 걱정 마세요. 이놈의 뱃속은 거지가 들어앉았는지 먹고 돌아서면 허기가 져선 저녁에 참을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니까요. 하하하”
크게 너털웃음을 짓던 김 대리가 슬쩍 현욱이 다른 곳에 신경 쓰는 틈을 타 은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부장님이 허구한 날 야근 시키시는 탓에 집에 돌아가면 배가 고파서요......하하”
김 대리의 농담에 은지가 소리 내어 웃는다.
“우리 남편 너무 못된 상사로 만드네요. 김 대리님이 ”
“어~어, 부장님께 일러바치시면 안돼요. 사모님,”
“흥, 다 고자질할 거예요. 각오 하세요.”
“에잇, 할 수 없다. 뇌물입니다. 한 박스 댁으로 가져가세요. 하하하”
안고 있던 라면 박스를 트렁크에 실으며 김 대리가 장난스럽게 아부하는 시늉을 하자 은지는 또 그 모습에 즐겁게 웃는다.
“자, 출발 하겠습니다. 어서 타시죠.”
대관령을 출발한 차는 이천 즈음부터 밀리기 시작해 지루한 시간을 소비하고 나서야 서울에 도착을 했다. 한사코 택시를 타겠다는 현욱 내외를 아파트까지 태우고 온 김 대리가 라면 한 박스를 내려놓고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선다.
경비실을 막 지나쳐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경비를 서는 영감님이 작은 창을 열고 머리를 쑥 내밀어 현욱 내외에게 인사를 건넨다. 고개 숙여 답례를 한 은지가 밤을 세 근무하려면 출출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김 대리가 내려주고 간 라면 박스를 뜯어 절반을 경비실 안으로 건네준다.
긴 시간을 차를 타고 온 탓에 피로가 쌓인 현욱과 은지는 간단히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뉘고 바로 잠에 빠져든다.
“왜, 불편해?”
“아니~”
“그럼, 또 화장실?”
“아~니~”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지현이 빙긋 웃는다.
“요게~, 이모한테 장난을 치고”
벌떡 몸을 일으킨 은수의 눈에 순간 장난기가 어린다.
“히히히......”
은수의 반응에 지현이 짓궂은 웃음을 짓는다.
“이 기집애~”
와락 지현의 허리춤에 올라탄 은수가 벌어진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간지럼을 태우자 손끝에 이는 아픔과 함께 옆구리에 느껴지는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틀어 피하려고 한다.
“이모... 이모....... ”
“너, 자꾸 이모한테 까불고 ...... 오늘 혼 좀 나봐라.”
상체 곳곳을 은수의 손가락이 간지럼을 태우고 지나가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지현이 그만 항복을 외친다. 하지만 은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지현의 목이며 가슴까지 끝없이 괴롭힌다.
“이모, 항복.. 제발... 항복...”
다친 팔이 자유스럽지 못한 지현은 은수를 밀어내지 못하고 몸을 틀어대기만 한다. 한참을 씨름한 탓에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숨이 턱에 차오른 지현이 그만 눈가에 눈물을 보인다.
“제발, 이모 항복... 다신 안 그럴게 응?”
"어휴~, 덥다. 앞으로 또 까불 거야?“
“아니~, 절대로...... 다신 안 그럴게...... 이모, 한 번만 봐줘라. 응?”
은수가 깔고 앉은 히프를 들어 소파 옆으로 비켜나자 지현이 일어나 앉으며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또 다시 혀를 낼름 내밀었다 숨긴다.
“너~, 또~”
“아냐, 이모...... 아냐......”
고개를 저으며 다급하게 말하는 지현을 노려보던 은수가 깔깔 웃어넘기자 지현도 따라 깔깔거린다.
“어휴~ ...... 이모, 너무 했어 온 몸에 땀이 다 나버렸잖아.”
“그러게 왜 이모를 갖고 놀려고 해. 앞으로 조신하게 있어라. 귀여운 조카야~”
“아이고, 잘 알겠습니다. 못된 마귀할멈 메~~~~”
“뭐? 마귀할멈? 너~ 또 이모 놀린다.”
은수가 마귀할멈 흉내를 내려는 듯 손가락을 구부려 손톱을 세운 모양으로 다가서자 후다닥 일어선 지현이 저만치 달아나며 또다시 혀를 빼문다. 그 모습에 은수가 킥킥 웃음을 터트리고 멀찌감치 달아난 지현도 킥킥거리며 웃는다.
“이모, 나 배고파......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