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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번역] 중국무협 강설현상(絳雪玄霜) (와룡생 원작)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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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와룡생 작품중 최고를 꼽으라고 하면 옥차맹 -1960년- (국내에서는 군협지로 출간)을 드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주인공인 서원평과 자의소녀의 로맨스가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만에서는 옥차맹보다 강설현상이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특히 여주인공인 매강설(梅降雪)의 포스는 무협사상 최고의 포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네요. (이부분은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깁니다.)

생전에 와룡생은 대만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자신의 작품과 여주인공으로 강설현상의 매강설을 두번째로 주저없이 꼽았다고 합니다. (비연경룡이라는 소설이 가장 애착이 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강설현상은 국내에서는 무유지, 군웅문, 무유대전 등으로 번역되어 출간이 되기도 했는데, 번역본마다 약간씩

누락된 부분이 있고 또 부분적으로 바꾼 부분도 있어서 옥의 티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제목 강설현상은 여주인공인 매강설과 진현상의 이름을 뜻하는데, 중국 무협소설중에서 여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지은것은 이것외엔 거의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강설현상은 지금까지 두번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는데 86년 구숙의 주연의 강설현상과 97년 설화신검 두 작품은 주인공들만 따왔을 뿐, 원작과는 아주 다르게 각색이 되어서 와룡생 매니아들에겐 실망을 주기도 했답니다.

주인공 방조남과 매강설의 애뜻한(사실 애뜻하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만;;) 로맨스...더불어 정열의 화신(요거는 작품속에 이렇게 나옵니다 ;;)진현상의 불같은 사랑을....직접 보면서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1-

 

1. 작게 품은 원한(怨限)

 

쌀쌀한 서북풍에 실려 쏟아지는 눈보라를 뚫고 한 필의 준마가 말발굽소리를 상쾌하게 내며 산동성(山東省)으로 이어지는 북쪽 관도(官道)를 달리고 있었다.
말 위에는 이십 세 가량의 홍안 미장부가 앉아 있었다. 파란 옷으로 단장한 그의 왼쪽 어깨에는 바람막이 위로 녹색의 장검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고, 그 젊은이의 준수한 얼굴에는 씩씩한 기개가 엿보였다. 그는 살을 에이는 듯한 눈보라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어떤 생각에 골몰해 있는 모습이
마치 즐거웠던 옛일을 되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별안간 한 마리의 까마귀가 머리 위로 날아가면서 까욱까욱 하고 울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즐거운 회상을 깨우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못마땅한 듯 젊은이는 품속에서 연화 모양의 엽전(葉錢)만한 암기(暗器)를 꺼내어 날카롭고 깨끗한 솜씨로 휙 던졌다. 그러자 그 암기는 쌩 하고 바람 뚫는 소리를 내며 위로 비상하려는 까마귀에게 바로 적중됐다.
까마귀는 두세 번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하안 눈위에 피를 뚝뚝 뿌리며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젊은이는 곤 말을 멈추고 금연화(金蓮花)라는 암기에 맞아 떨어진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까마귀의 조그만 몸체는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에 파묻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지는 다시 은세계로 되돌아갔다.
한겨울의 매운 바람은 여전히 세차게 불어오고, 솜 같은 눈송이가 쉴새 없이 쏟아지는 이 적막한 곳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조금 전의 평화롭고 낭만적인 세계로 다시 돌아갔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젊은이는 갑자기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친 듯 자기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곧 말에 채찍을 가하여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젊은이가 탄 말잔등엔 구슬 같은 땀이 배어나왔다. 얼마 후 말은 너무나도 과로한 나머지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말이 쓰러지자 젊은이는 발에 힘을 주어 팔구척(尺) 가량 떨어진 곳에 사뿐히 뛰어내려서 쓰러진 말을 돌아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놈아, 가슴 아프긴 하지만 내 갈 길이 너무 바빠 너를 돌보지 못하겠구나."
이렇게 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달려 가기 시작했는데 그 몸놀림은 마치 날쎈 준마와도 같았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눈보라는 더욱 세차기만 한데 젊은이는 쉼없이 흐르는 이마의 땀방울을 손으로 훔쳐 가며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 걸친 바람막이는 세찬 바람에 펄럭이다 못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더니 주위를 한 번 휘둘러보고는 다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약 반 시간 가량이나 걸었을까? 그는 어느 조그만 호숫가에 이르렀다.
호수는 추위에 꽁꽁 얼어 붙은 채 흰 눈으로 덮혀 있었고 호숫가 저편에 한 채의 집이 보였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등불 같은 불빛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둠의 장막에 싸여 있는 집은 으시시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젊은이는 몸에 쌓인 눈을 털고 나서 나서 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앞에 다다르니 검게 칠한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 망설이다가 대문을 두드려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다시 두 팔에 힘을 주어 힘껏 대문을 믿어 보았다. 그러자 대문은 삐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안을 들여다보니 넓은 정원은 칠흑 같은 어둠에 파묻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주저하는 듯 하다가 조용히 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서 정원을 지나 곧바로 대청으로 향했다.

그는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면서 대청 문을 열고 발을 들이밀었다. 넓은 대청에는 어둠이 더욱 질게 깔려 앞으로 내민 다섯 손가락 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창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스치는 소리로 냉냉한 분위기에 공포감마저 일어나게 했다. 그 젊은이는 비록 남다르게 담력이 크고 무술(武術)이 비범했지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는 온 몸에 공력을 모으며 살며시 등에 멘 칼자루를 더듬어 보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능히 사물을 볼수 있는 재간을 가지고 있는지라  잠시 동안 눈을 감고 격동하는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눈을 떴다. 그러자 어렴풋이나마 실내의 광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벽쪽에 붙여 놓은 팔각형 탁자와 네 개의 의자는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여진 채 실내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는 대청 후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곱게 가꾸어진 화원이 있었고, 화원 가운데로는 조그만 길이 있어 아랫채와 본채를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화원을 지나 꼭 닫혀진 아랫채의 문앞에 이르렀다. 그는 초조한 나머지 곧 문을 열어젖히려 하다가 다시
주춤하며 들어올렸던 팔을 문에서 떼었다. 여기는 스승님이 내공(內功)을 쌓는 곳으로서 누구를 막론하고 허락 없이는 절대로 출입할 수 없는 곳임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공손히 문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문하생 방조남(方兆南)이 삼가 사부(師父)님께 문안 드리오."
그러나 공허한 메아리만 퍼져나갈 뿐 집안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다만 몰아치는 눈가루만 그의 얼굴과 머리에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그 눈가루의 차가운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고나서
문을 밀어 보았지만 문고리가 안으로 걸려 있는지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물러나 전신에 공력을 모은 그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으나 갑자기 떠오른 스승의 준엄한 모습에 자세를 바꾸어 담 위로 뛰어올랐다. 저만치 두 그루의 활짝 핀 매화가 초연히 눈 속에서도 향기로운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그 매화를 바라보자 문득 아름다운 옛 추억이 떠올랐다. 이미 십여 년 전 일이다. 그는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이 두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었다. 그때는 팔구 세의 소년소녀에 지나지 않았으나 함께 무술을 익히며 자랐다. 세월은 흘러 
그가 무술을 모두 익히고 스승의 문하를 떠날 때에는 이미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 있었고 다시 이 년이란 세월이 지난 오늘 그가 천 리를 멀다 않고 이곳을 찾아온 것은 스승에게 문안도 드릴 겸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녀를 만나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의 가슴은 마냥 부풀어 있었고 설레임으로 들떠 있었다.
잠시 동안 추억에 잠겨있던 그는 돌연 담을 뛰어내려 사부님이 내공(內功)을 쌓던 처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이미 스승의 가문(家門)에 어떤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사람이란 본시 어떤 불길한 예감에 봉착하게 되면 억지로 좋게만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는지라 그 역시 사부님이 사모님과 사매(師妹)를 데리고 출타 중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자위했다. 그는 스승내외가 내공을 쌓던 방문 앞에 이르러 힘껏 문을 밀어 보았다.  그러자 그 문은 그대로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
"앗!"
방 안을 들여다 본 그는 그만 입을 딱 벌린 채 멍하니 그냥 그자리에 못박힌 듯 멈춰섰다.
그곳 실내 중앙에는 가지런히 두 개의 관(棺)이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죽음을 조상(弔裏)하는 흰 휘장들이 걸려 있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멍해 있던 방조남은 소리치며 달려갔다.
"사부님 ! "
그리고 두 개의 관을 부등켜 안고 통곡했다.  얼마 동안 울음을 터뜨리고 난 그는 이성을 되찾자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사부님의 무예는 거의 오묘(奧妙)의 경지에 도달하여 강호(江湖)에 그 성명 (聲名)이 높고, 또 사모님은 여중호걸(女中寀傑)로서 양자강(揚子江) 남쪽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따라서 누가 공격하더라도 능히 그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재간이 있는데,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는 관을 뜯어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좌측의 관 뚜껑을 열려고 했다. 이때 차갑고 냉냉하기 이를데 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잠깐만. "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왔는지 백의(白衣)에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한 여인이 서있었다.
그녀는 아름답기 그지 없었지만 이렇듯 관들이 놓여진 음산한 방에 기척도 없이 나타났으니 제 아무리 담이 큰 방조남이라 하더라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백의녀(白衣女)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이 밤중에 여기까지 와서 울고 불고 하시는거요?"
방조남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주(周)영웅의 문하(門下)로서 성은 방(方)이요 미명(徵名)은........"
"좋아요, 당신의 이름까지 묻지는 않았어요."
너무나 차가워 살벌함마저 느껴지는 백의녀의 반응에 방조남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두 개의 관 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뚜껑을 열어보아도 괜찮겠지요?"
"열어 보실 것 없어요. 하나는 주패(周楓)라는 분의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분 부인의 것이에요."
방조남의 가슴 속에는 뜨거운 불덩어리같은 것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게 정말이오?"
그녀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믿어지지 않거든 열어보면 되잖아요."
방조남이 왼쪽에 놓인 관 뚜껑을 움켜잡고 한번 힘을 주자 뚜껑은 쉽사리 열렸다.  그는 품속에서 무인(武人)들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화약을 끄집어내어 불을 붙였다. 그러자 캄캄하던 방 안은 곧 밝아졌다.
관 앞에 놓인 조그만 탁자 위에는 쓰다 남은 초가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밝아진 불빛 아래서 슬쩍 그 여인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전히 냉냉한 얼굴로 꼼짝도 않고 서있을 뿐 이었다.
세찬 바람에 여인의 긴 머리카락과 옷소매가 유난히도 휘날렸고 촛불 또한 춤을 추듯 감실거렸다.
방조남은 마침내 관 속을 들여다보았다. 관 속에 누워 있는 한 시체. 그것은 바로 십여 년 동안 그를 길러주고
무술을 익혀 준 은사(恩師) 주패 노인의 자애로운 얼굴이 아닌가?
이 년 동안이나 못 뵈온 얼굴.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만나리라고 어찌 꿈엔들 생각했으랴.
방조남은 너무나 기막힌 현실 앞에서 그만 자기도 모르게 관 앞에 엎드려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즐거웠던 지난 날의 추억은 하나하나 아픔이 되어 방조남의 가슴을 찔러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뼈 속에 맺혔던 슬픔이 어느 정도 씻어진 듯 하자 통곡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촛불을 바라보았다.  촛불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백의여인도 여전히 꼼짝하지 않고 옆에 서있었다.  방조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백의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대체 누구이기에 저의 사부모님의 유체를 수렴(收殮)하셨나요?"
백의녀는 방조남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저의 부모님이 한 때 주(周) 영웅께 받은 은혜에 보답코저 내가 수렴을 했지요. 당신은 이젠 그만 울고

돌아가시죠!"
그리고 나서 천천히 휘장 뒤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방조남은 황급히 달려가며 말했다.
"잠깐만, 제가 몇 마디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그러자 백의녀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말씀인지 빨리 하시죠."
방조남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그만 울컥 화가 치밀었다.
(세상에 이런 거만한 여자도 있담.)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여인은 귀찮다는 듯 몸을 한 번 가볍게 움직이더니 그만 휘장 저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방조남은 스승과 함께 이 방에서도 내공을 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쪽에는 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음성을 높혀 말했다.
"저의 스승님의 슬하에 따님이 한 분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아가씨는 모르십니까?"
"전 몰라요."
짤막하고도 차가운 한 마디가 휘장 뒤에서 들려왔다. 방조남은 미간을 찌푸리며 거듭 소리쳤다.
"그럼 아가씨는 저의 스승님 내외가 참살(慘殺)당하는 장면을 목격 하셨나요?"
"제가 여기 왔을 땐 살해 당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지요."
하얀 휘장 뒤에서 짤막하게 던져준 이 외마디 대답에 방조남은 더럭 의심이 일어났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가씨는 우리 스승님이 살해 당하신 걸 어떻게 알고 여기와서 수렴까지 하셨나요?"
"그건 왜 물으세요. 제가 살해범인 줄 의심하시나요?"
그리고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방조남은 그 간드러진 웃음소리에 어떤 음산한 기분을 느끼면서 자기도 모르게 모골(毛骨)이 송연해졌다.
이때 백옥 같이 희고 가느다란 손이 휘장 뒤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굵은초 한 자루를 내밀었다.
"오늘 밤 당신의 스승님 내외의 빈소(殯所)를 모시고 여기서 밤을 세우겠다면 이 초를 켜놓고 관뚜껑을

닫으시죠."
어느 모로 보나 언동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이 여인, 더구나 눈보라치는 음산한 야반(夜半)에

그것도 죽은 사람의 관을 앞에 두고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 여인에 대해 방조남은 등어리가 오싹해 왔지만 그녀가 내민 초를 본능적으로 받아 들었다.  다시 휘장 뒤에서 냉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초 한 자루면 내일 아침까지는 어둠을 밝혀 줄테니 무섭지 않거든 온 밤을 여기서 지새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방조남은 새로 촛불을 바꾸어 불을 붙여 놓고 관뚜껑을 닫았다. 관에 기대어 앉아 촛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천 갈래 만 갈래의 회포(懷抱)가 가슴 속에 끓어 올랐다. 처음으로 스승의 문하에 들어와
무예를 익히던 일, 근엄한 스승의 모습과 사모님의 인자한 모습,그리고 정답고 아름다운 사매(師妹)의 얼굴. 모두가 하나 하나 그리운 추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스승님과 사모님은 비참히 살해당해 관 속에 누워 있으니... 그분들의 단 하나의 혈육인 사매는 생사(生死)조차 알 길이 없었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더욱 더 슬퍼졌다.  밤은 점점 더 깊어 갔고 그는 피로와 슬픔에 지져 관에 기댄 채 그만 잠에 골아 떨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감촉(感觸)에 문득 눈을 떠보니 청색 도포를 입고 길게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비통한 표정으로 관 옆에 서있었다.
방조남은 놀라움과 기쁨이 엇갈린 심정으로 벌떡 일어나 노인 앞에 꿇어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노인은 노영웅 추패(周佩)의 가장 가까운 지기(知己)로서 강호에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는

강남사검(江南四劍)중의 한 분인 장일평(張一平)이었다.  노인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게.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좀 얘기나 해주게. "
방조남은 옷소매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다.
"제가 어제 저녁 이곳에 달려 왔을 땐 이미 사부님과 사모님은 살해 당해 관 속에 누워 있었습니다."
노인은 놀란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자네가 사부모님의 시제를 수렴한 게 아니란 말이지."
방조남은 그제서야 백의녀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백의녀가 있던 곳의 휘장을 젖혔다. 그리나 휘장 뒤에는 한 줄의 사람 머리만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 그녀는 간 곳이

없었다.  장일평(張一平)은 얼굴에 놀란 빛을 감추지 못하고 뚜벅뚜벅 휘장 뒤쪽으로 들어갔다. 방조남도

장 노인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보니 한쪽 구석에는 십여 개의 머리 없는 시체가 쌓여 있었다. 그것은 세어보니
머리 수와 일치하는 꽉 십오 구(具)가 아닌가?  장 노인은 이를  깨물었다. 그리고 분노의 홍소를 터뜨렸다.
"악랄(惡辣)한 수법이다. 개미 한 마리도 남기지 않았군."
방조남은 스승 밑에서 무예를 익히고 있은 때부터 이 노인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의 무술이야말로 스승

이상의 실력과 쟁쟁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대협객(大俠客)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무예계의 달인(達人)이 나타났다는 것은 극도의 비통함 속에서도, 그에게 사부모님의 복수를 할 수 있다라는 한가닥 희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선생님! 이번 스승님 가문(家門)에서 받은 재앙(災殃)은 견문이 넓으신 선생님께서 선처해 주셔야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스승님과의 수십 년 의를 생각하셔서라도 꼭 원수를 찾아 그 원한을 풀도록 해주십시오.

저는 비록 큰 재난은 없지만 이 원한을 갚는 일에 있어서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가겠습니다."
이 말에 장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모를 내가 아니네. 자네 스승과의 우정으로 말하면 삼십 년 동안이나 사귀어 온 사이라네, 그러니까, 삼십 년 전 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자네의 사부모(師父母)님 두 분이 인의(仁義)로써 내 목숨을 구해 준 일이 있네. 그로부터 삼십 년 나는 그 은혜를 깊이 가슴 속에 새겨두고 그 은혜를 보답할 기회를 찾고 있었네. 그런데 오늘 이런 비참한 멸문지화(減門之禍)를 당했으니 내 마음 속의 비통함은 결코 자네 못지 않다네, 이 장일평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원수는 꼭 갚고야 말겠네."
장 노인은 그만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 하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방조남은 감격하여 엎드린 채 말했다.
"삼가 불초 소생이 참변을 당하신 스승님을 대신하여 선생님의 깊으신 정의에 감사드립니다."
장 노인은 곧 마음을 가다듬고 방조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어나게. 일어나서 어제 저녁에 목격한 모든 사실을 얘기해 주게."
방조남은 몸을 일으켜 시체가 쌓인 곳으로 갔다. 그는 시체들을 하나하나 훑어 보며 사매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사매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매의 시신이 없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제 저녁 자기가 겪은 자초지종을 장일평에게 들려 주었다.  다 듣고 난 장일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개의 아녀자로서는 아무리 무예가 탁월하다 해도 그 담력(膽力)에는 정도가 있는 법인데, 백의녀는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아무도 없는 깊은 밤중에, 더구나 시체와 함께 밤을 세웠던 것일까?)
장일평의 얼굴에 떠오른 의혹(疑惑)의 그림자를 보자 방조남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제가 말씀드린 사실에는 추호도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저도 기이(奇異)한 처녀의 거동에는 사람인지 귀신인지 분간조차 못 하고 있습니다."
장일평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세상에는 이상한 일도 많군. 만일 자네가 너무나 비통한 나머지 본 환상(幻像)이 아니라면, 그 여자는 도리어 좋은 단서(端緖)가 될 것 같네."
방조남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사실이 아니라면 아마 제 자신도 믿기 어려웠을 것 입니다. 이런 일을 선생님께서 의심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 말을 마쳤을 때, 느닷없이 조그만 뭉치 하나가 날아 들었다.  금련화(金蓮花)라는 암기에 뛰어난 솜씨를 가진 방조남은 눈과 귀도 그만큼 날카로워서 얼결에 차가운 그것을 받고 보니 암기가 아니라 조그만 눈뭉치였다.
그 조그만 눈뭉치는 은행(銀杏)만한 크기의 아주 단단하게 뭉쳐진 것이었는데, 그것을 던진 사람의 재간은 놀랍게도 방조남이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힘과 거리를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내공(內功)이 탁월한 자 만이 이렇듯 정확하게 암기를 던질 수 있는 만큼 그것을 받아 든 순간 방조남은 속으로 섬뜩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장일평은 이내 코웃음을 치며 몸을 수평으로 나르는 제비 같이 재빨리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몸을 쓰는 폼이 과연 일대의 고수급(高手級) 솜씨였다. 방조남 역시 휘장을 해치고 연자천운(燕子穿雲)이란 경공수법(輕工手法)을 사용하여 뛰쳐나가 바라보니, 장일평은 어느새 지붕에서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돌연 왼쪽 발을 쓱 내밀어 선 자세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와 마당에 서더니 탄식하며 말했다.
"허 참! 오늘 이 장일평의 얼굴이 형편없이 깎기는군, 여보게 빨리 자네 손에 있는 눈덩이를 쪼개 보게."
조금 힘을 주자 눈덩이는 쉽게 부숴졌다. 과연 그 속에는 한 조각 흰 비단이 있었고 그 위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빨리 이곳을 떠나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면하시오.)
그 밖에는 아무런 이름도 기호(記號)도 없었다. 장일평은 견문(見聞)이 놀라운 노인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그것이 호의적인 경고문인 줄은 몰랐다. 방조남은 눈덩이를 받아 쥐었을 때 그 속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들어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죽음의 통지가 아니면 결투신청장이나 그런 류의 것이 들어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방조남은 새까만 눈썹을 치켜올렸다.
"선생님 여기서 한 번 기다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장일평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처럼 젊은 사람이 이렇듯 담력이 강한 것은 가상한 일이네. 자네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어. 하지만 자네가 여기 있어 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네."
"제가 비록 재주는 사부님의 십분의 일도 따르지 못 하지만 사부님 가문의 원수를 몰살하여 그 분의 영전에 바칠 작정입니다. 그러자면 원수의 얼굴이라도 알아두었다가 서서히 복수를 도모코저 합니다. 만일 저의 평생에 원수를 갚지 못 한다면 바로 이 나무와 같은 꼴이 될 것을 맹세합니다."
그리고는 등 뒤의 장검을 뽑아 휙 내두르자 한 그루의 매화나무가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자 장일평의 눈에서는 광채가 빛났다. 그것은 하늘을 찌를 듯한 그 호기(棄氣)가 마치 옛날의 자기 모습을 보는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노인은 다시 평소의 얼굴빛으로 회복하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동안을 참지 못 하면 큰 일을 그르치는 법. 이 눈뭉치로 위험을 경고해 준 사람의 무예만으로서도 능히 원수들의 무예가 얼마나 높은가를 짐작할 수 있네. 나는 이미 인생을 다 살아온 몸으로 생사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는 몸, 더구나 죽어간 친구를 위해서 피를 흘릴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이 또 어디 있으며, 죽어서 이
동평호(東平湖)가에 묻혀 옛친구와 함께 지하에서나마 같이 지낸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만일 목숨을 붙여 도피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당연히 천하의 무예계 고수들을 불러 이 원수를 갚으리라......."
장일평은 말도 채 마치기 전에 갑자기 방조남의 오른팔을 붙잡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방조남은 노인의 무쇠와 같은 손아귀에 오른편 손목을 잡히자 전신의 혈맥이 곽 막히며 기운이 빠져 별 수 없이 끌려가듯 따라갔다.
단숨에 오륙 리 길을 달려간 장일평은 그제서야 방조남의 오른 손목을 놓아주면서 말했다.
"자네는 자네의 스승 내외분이 갑자기 화를 당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방조남은 스승 가문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 원수의 얼굴을 보아 두려고 마음먹고 있다가 갑자기 손목을 잡혀 꼼짝없이 끌려오게 되자 슬며시 화가 났다. 그가 불끈 치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장일평에게 진의(眞意)를 따지려고 하는 순간, 장일평의 갑작스런 질문에 도리어 어리둥절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럼 선생님께선 스승님 내외분이 멸문지화를 당하기 전부터 이미 이런 참변을

예측하고 있었단 말씀입니까?"
장일평은 하늘을 쳐다보고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그렇지! 자네 스승 내외분은 이런 참화를 미리 예측했을 뿐만 아니라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남의 도움이나 피신을 하지도 않았네."
방조남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넓은 천지에 어디간들 몸 하나 피하지 못 하겠습니까7 더구나 사부님과 사모님의 무술로 말하면 적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하더라도 능히 피할 수는 있지 않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참화를 당하신 것은 아무래도 적의 갑작스런 흉계에 빠져 미처 피신할 기회조차 얻지 못 한 것
같은데......."
장일평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그건 나도 이해할 수 없단 말야. 자네 스승은 성격이 온후하여 평생 동안 남과 다툰 일도 없었을 뿐더러 세상사(世上事)에 초탈하여 이 동평호에 묻혀 산 이후로는 이 늙은이와 몇몇의 지기(知己)를 제외하고는 강호(江湖)와는 인연을 끊다시피 내왕(來往)이 없었는데 말이야. 이십 년 동안 꼬박 집에 박혀 화초 가꾸기와 제자들 기르기에만 힘썼을 뿐이었지. 그러다가 삼 년 전부터 내공에 깊은 수련을 쌓았지. 또 자네 사모님도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대강(大江) 남북에 걸쳐 흑백(黑白) 두 분파의 많은 무예계 고수들을 통털어 보아도 자네 스승 내외분을 이길 자는 몇 안 되는데 이런 참화를 당하다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란 말이야. 그러나 내가 집안을 주의해서 살펴본 결과에 의하면 그들은 이 참화를 미리 짐작하고 사전에 모든 준비를 해 놓았거든."
"우둔한 저로서는 전혀 이해가 안 가는군요.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방조남의 요청에 장일평은 사방을 한 번 휘둘러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건 뭐 경험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알고 나면 별것 아닐세. 빈소(殯所)를 모신 그 방에 쌓인 시체에서

자넨 사매(師妹)의 시체를 발견했는가?"
"저의 사매는 아주 총명한 데다가 마음씨 또한 비단결 같아서 그렇게 될 리가 없는데,

적의 손에 잡혀갔는지...... . "
그는 차마 말끝을 맺지 못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장일평은 방조남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옳은 말이야! 그러니까내 의견에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말이지?"
"제가 감히 어찌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빈소가 있는 방에서 자네 사매의 시체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네.

하나는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이미 자네 스승의 지시에 의해 다른 곳에
피신해 있다는 경우인데, 이 관건(關鑛)은 오직 시체에 있네."
방조남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시체에 사건의 열쇠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장일평은 그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만일 자네가 휘장 뒤의 그 많은 시체들이 모두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 스승은 이 재난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어서 집안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닥쳐오는 위험에 대비케 했으며, 자기가 수십 년 쌓아온 무예로서 적과 사생결단을 지으려고
했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네. 그러나 적의 너무나 높은 재간에 결국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했다고 볼 수 있지.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참변당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왜 피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네. 물론 적의 추적을 오랫동안 피하지는 못 한다 할지라도 잠시 동안은 피해 있을 수 있으며, 그동안 서서히 동지들을 규합하여 반격할 수도 있지 않았겠나? 아아! 하늘이 무심하구나.내 어찌 며칠이 늦어 평생 한(恨)이 될 이 참변을 막지 못 하였는고! "
이 말을 들으며 방조남은 곰곰히 생각해 보니 과연 시체들 전부가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또 만일 스승이 이 일을 먼저 알지 못하고 창졸간에 밀어닥친 적들과 싸웠다면 결코 무장할 틈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방조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일언일구(一言一句)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부님께서 이 일을 미리 예측하셨다면 어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요?"
장일평은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스승이 이 동평호에 은거(隱居)한 이래 강호 인물들과의 왕래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또 당대 무인들의 재간이 자네 스승 내외분을 따를 인물이 별로 없으니 도움을 청하려고 해도 적당한 사람이 없었을 거야. 이 진상은 다른 사람이 가히 추측할 수 있는 단순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만일 내 추측이 옳다면 자네 스승댁 부근에 틀림없이 감시인이 숨어 있었을 거라고 볼 수 있네. 즉 이 눈뭉치를 던진 사람이 자네가 보았다는 백의녀인지도 모르지만,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네. 이 늙은이가

경공(輕工)엔 어느 정도 자신을 갖고 있었지만 오늘 지붕 위에 뛰어 올라가 보니 거기에도 아무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거든.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사건은 무예계에 흔히 있는 복수 따위가 아니며, 또 적의 악랄한 수단이나 무예의 재간은 우선 강호 인물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일세. 더우기 살인을 하고 나서도 그 흔적을 없애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를 갖고 있다는 증거일세, 그 백의녀가 관을 지키고 있었다는 그 자체에도 어떤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옳겠지. 하여튼 이번 참사의 경과를 검토하여 볼 때 전후사태(前後事態)가 줄줄이 연관되어 있으며 적의사전 계획은 빈틈이 없었네, 그러나 자네 스승이 미리 알고서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떤 원인이 개재되어 있는지, 이건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단 말야......."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시급히 해야할 일이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자네 사매의 거처를 탐지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밝혀내야 하는 일인데, 당장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조그만 단서라도 찾아내야겠네. 물론 이 두 가지 일은 말하기엔 쉬워도 실행하기에는 난점(難點)이 많네. 자네는 우선 비통한 감정을 억제하여 마음을 크게 먹고 적의 변화에 대응(對應)하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주었으면 좋겠네."
"선생님의 정연한 사리 판단엔 탄복하지 않을 수 없군요. 부디 소원이니 사부님 가문의 원한을 씻는 일에 꼭 선생님께서 지휘를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방조남은 눈 쌓인 땅 위에 부복했다. 장일평은 쓸쓸한 빛을 얼굴에 띠우며 방조남을

일으켜 세웠다.
"이젠 그만 일어나게. 자네 스승과 나와는 혈육지간보다 두터운 사이일세. 자네가 말하지 않더라도 이 늙은이는 생명을 걸고 진상을 밝혀낼 작정이야. 이제 우리 둘은 각각 한 가지씩 일에 착수해야겠네. 자네는 자네 사매의 행방(行方)을 찾으러 떠나야 하고, 나는 다시 안으로 되돌아가 자세히 한 번 살펴봐야겠네. 자네 사부의 영혼이나마 적의 정체를 암시해 줘서 복수를 도모할 수 있게 된다면 좋으련만."
그 말에 방조남은 불복하여 말했다.
"스승님 슬하에서 십여 년 동안이나 가르침을 받은 저로서는 몸이 가루가 되어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 할 것 같은데 사부모님의 원수를 갚는데 있어서 어찌 가벼운 일만 맡기려 하십니까?"
장일평은 방조남의 이와 같은 물음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집에 되돌아가는 목적은 적에 대한 어떤 단서를 얻자는 것이지 사생결단을 짓자는 것은 아닐세. 그러니까 행동이 은밀(隱密)하면 할수록 좋네. 자네가 같이 간다면 도움이 되기는 커녕 도리어 짐이 될 뿐일세. 그리고 자네 사매의 행방을 찾는 일이 집에 되돌아가 단서를 탐색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이지. 이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가 되는 거니까."
방조남은 그 말을 듣자 자기가 따라가는 것이 도리어 폐가 된다는 걸 이해했다.
"선생님 의견이 그러시다면 동행을 고집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넓은 천지에 어디를 가야 사매의 행방을 찾겠습니까?"
이때 장일평은 품에서 모서리가 칼날 같은 금전(金錢) 한 닢을 꺼내 주면서 말했다.
"이 금전을 가지고 즉시 노남(魯南)땅 포독고(抱犢肯)의 조양평(朝陽坪)에 달려가서, 수수초은(抽水樣隱) 사모둔(史謨道)이란 분을 찾아보게. 만일 그 분이 면회를 거절하거든 이 금전을 보이면 틀림없이 자네를 면대(面對)할 것이네. 금전을 받고 나면 자네에게 틀림없이 무슨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불을 거야. 그러거든 자네는
사매를 찾아 달라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말고, 이 금전으로 도움을 청하려는 원래의 주인이 곧 올 것이라고만 말하고 자네는 다만 명을 받고 미리 통보하는 것 뿐이라고 하게. 그리고 그가 어떤 말로서 자네를 조롱하더라도 꼭 참고 절대로 반박일랑 하지 말아야 하네. 그가 다시 이 금전을 자네에게 되돌려줄 때 자네 사매의 행방을 슬쩍 탐지해야 하네. 이 일은 절대 장난이 아니니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분의 어떠한 모욕적 언사라도 참아야 하네. 만일 자네가 실수하는 날이면 자네 사매와의 대면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의 모든 계획을 망치게 한다는 걸 명심하게."
방조남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장일평의 너무나도 엄숙한 안색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매를 찾고 사부님 내외분의 원수만 갚을 수 있다면 어떠한 모욕이라도 참아내겠습니다."
장일평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수수초은이란 위인은 괴벽(怪婢)하여 평생에 남의 일에 관여한 예가 없지. 그의 별호(別號)의 첫 두자 수수(抽水)라는 이름만 보아도 그 사람됨을 가히 짐작 할 수 있네. 시간이 없어 상세한 얘기는 못 해주지만 이삼 일 안으로 나도 포독고(抱檀骨)에 달려 가겠네......"
그는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삼일 이내에 그곳으로 찾아가지 않거든 자네는 이 금전으로 스승 내외분의 원수를 찾아달라고

요구하게."
총명한 방조남은 삼일 이내에 장일평이 포독고에 나타나지 않으면 원수의 독수에 걸려 죽은 줄 알라는 말뜻임을 짐작하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선생님의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義氣)는 영원히 제 가슴에 새겨질 것입니다. 스승님 가문의 피맺힌 원 한은 기필코 갚고야 말겠습니다. "
이 말을 들은 장일평은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적과 마주친다 하더라도 이 장일평이 설마 동평호반(東平湖畔)에 쓰러지기야 하겠나. 현질(賢姪)은 안심하고 가보게. 만약 자네 사매를 만나게 되더라도 자네 스승 내외분이 살해 당했다는 얘기는 하지 말게. 또 수수초은의 성격은 본래 냉혹하고 괴벽하여 강호인물들과 거의 내왕이 없는 사람으로 오직 이 금전만이 통할 수 있다네. 한 냥의 금전에 꼭 한 가지 부탁 밖에 들어주지 않으니 이 점을 명심하여 때를 봐서 행동하게. 자네는 총명해서 잘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전해. 절대 이 금전을 남용(濫用)하지 않도록. 자! 얘기는 끝났으니 이젠 가보게."
방조남은 잠깐 생각하더니 장일평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선생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방조남은 전신에 공력을 불어넣어 나는 듯이 사라졌다. 장일평은 방조남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시 야에서 사라지자 장탄식을 하며 뚜벅뚜벅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방조남은 쉬지 않고 달려 저녁 무렵엔 어느 조그만 주막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하루 낮 하루 밤을 가기에만 바빠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배에서는 연신 쪼르륵 쪼르륵 소리가 났다. 마침 길가 어느 한 곳에 술집 간판을 보고 주막 안으로 들어가보니 안에는 골동품이 다 된 탁자가 세 개 놓여 있고 두 사람의 주객(酒客)이 서로 마주보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런 조그만 마을의 주막에서는 대개가 주인 혼자서 손님을 맞기도 하고 안주와 밥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 접대가 신통치 못 했다. 무예로 단련된 방조남이었지만 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까닭에 어지간히 시장기와 피로에 지쳐 있었다. 그는 앉자마자 안에다 대고 안주와 술을 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한참 불러도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여기 아무도 없소?"
그제서야 비로소 안에서 포장을 들추며 남루한 옷에 머리를 두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십칠팔 세 가량의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할아버지는 시장에 가서 아직 안 들아오셨고, 남은 술과 안주는 먼저 온 손님에게 모두 드렸어요."
그는 배가 몹시 고픈 데다가 포독고로 갈길이 바빴던 터라 이 소녀의 안주와 술이 모두 없다는 말에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술과 안주가 없다면 왜 밖에 걸어 놓은 포장(布帳)은 걷지 않고 그냥 두었소?"
너무나 화가 치밀어 이렇게 쏘아 무진 방조남은 칠척 체구의 대장부가 세상 모르는 촌구석의 한 아녀자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줍잖은 태도라고 생각이 들자, 곧 부드러운 얼굴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급한 길을 가는 몸이라 하루 밤 낮을 굶었습니다. 안주와 술이 없다면 뭐 그밖의 음식이라도 있으면 좀 주시오. 잘 보아 주시면 그만큼 사례하겠소."
소녀는 의복은 허술했지만 성품은 아주 침착한 듯 방조남이 화를 낼 때도 조금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이 크고 아름다운 눈방울을 똑바로 뜬 채 냉정히 그를 바라보는 폼이 대갓집 규수(閨秀)의 태도였다. 그 소녀는 방조남이 화를 내다가 다시 좋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도련님의 그 옷차림이나 헌앙(軒昻)한 태도는 틀림없이 대갓집 귀공자 같사오나, 우리 이 궁벽한 촌구석의 주막에서는 손님도 별로 없고 하여 술과 안주를 충분히 준비해 두지 않습니다. 다 팔리고 나면 남은 음식이라곤 하나도 없지요. 미안하오나 어쩔 수가 없군요."
말하는 품도 완곡(婉曲)한 것이 분명히 학식과 예의를 갖춘 규수임에 틀림이 없는데 어찌 이런 촌구석에서 음식이나 팔고 있을까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방조남은 마음 속으로 약간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소녀를 두어 번 더 훑어보았다. 그런데 그 소녀의 자태는 바라볼수록 의연한 데다가 미목(眉目)이 그림 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또 약간 벌려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흰 이는 상아와 같았으며 상큼한 코는 얼굴 한복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인이었지만 한 가지 옥에 티라고 한다면 그것은 얼굴이 약간 검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아직 어렸지만 품위 있는 태도와 미소를 머금은 그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을 풍기고 있어 방조남은 곧 공손한 표정으로 바꾸면서 말했다.
"아가씨의 고상한 언행으로 보아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조금 전에 보여 준 실태(失態)를

용서하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주막을 나섰다. 그러자 홀연 뒤에서 그 처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잠깐만 발걸음을 멈추십시오."
방조남이 뒤를 돌아다보니 그 소녀는 주막 문간에 서서 방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도련님이 발걸음을 재촉하시는 것을 보면 매우 급한 볼일이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머지않아 날은 저물고 추위는 더할 뿐더러 또 얼마 못 가서 산길이온데 도련님이 아무리 무예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이 눈덮인 산 속에선 어쩔 수 없습니다. 들짐승들을 잡아 공복을 면하시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방조남은 이 말을 듣고 대단히 놀랐다. (이 소녀는 어떻게 내가 마음 속으로 하는 걱정을 알아내고, 또 어떻게 내가 무예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았을까?)
어리둥절하는 방조남의 태도에 소녀는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잠깐 들어 오셔서 기다려주세요."
방조남은 소녀의 이와 같은 태도에 마음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아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도 났다. 거절하자니 배는 고파 죽겠고 그 말을 듣자니 어떤 함정이 있을 지도 모를 것 같고 하여 그는 잠시 주저한 끝에 다시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까 마주앉아 있던 두 사람의 주객이 여전히 꼼짝하지도 않는 품이, 몸 한 번 움직여 본
일도 없는 사람들 같았다. 이상히 생각하며 자세히 바라보던 방조남은 그만 놀라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 두 사람은 일찌기 다른 사람에게 혈도(穴道)를 잡혀 꼼짝도 하지 못 하고 있었는데 배가 고픈 그는 주막에 들어서자 마자 먹을 것만 찾았지 두사람에겐 주의조차 하지 않았었다. 속으로 자신의 부주의(不注意)를 자책(自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는 방조남의 놀라는 기색을 눈치채면서 담담하게 웃었다.
"도련님만 괜찮으시다면 저 두 사람의 음식을 우선 드시죠. 아직 저 분들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 소녀의 태도에 방조남은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가씨의 성의는 감사합니다만 남의 음식을 빼앗아 먹을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자 소녀는 또 생긋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의 의사가 그러시다면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부엌에 가서 다른 음식을 마련해 보죠."
그리고는 곧 포장을 가볍게 들추고 안으로 사라졌다.방조남은 그 톰에 이 주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집 평수는 새 칸 가량이었는데 판자로 가운데를 막아서 외부와 내실(內室)을 갈라 놓았다. 판자 벽에는 내실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는 파란 포장을 쳐서 내실을 들여다보지 못 하게 하였다. 외부의 주막에는 세 개의 탁자 외에 십여 개의 대나무로 만든 의자가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의심스런 점이 없자 방조남은 도리어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이런 궁벽한 곳에서는 지나가는 길손이나 음식 찾는 손님도 없을 테니 이 조그만 주막을 도적의 소굴이라 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소녀의 신분이 확실하기는 고사하고 추측을 절대 불허하니.......)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그 소녀는 계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나오면서 말했다.
"워낙 쓸쓸한 촌락이라 손님을 대접할만한 것이 없군요. 약소하지만 이것으로나마 공복을 참아 주십시오."
그는 갈길이 급한지라 사양하지 않고 두 손으로 열 개 가량의 삶은 계란을 받았다. 그리고 은전(銀錢) 몇 닢을 꺼내어 탁자에 놓았다.
"성의니 받아 두십시오."
그러자 그 소녀는 은전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말했다.
"계란 열 개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겠습니까? 도련님의 후의(厚意)는 고맙습니다만 그렇게 많은 돈은 받을 수 없어요."
방조남은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사람이 배고플 때의 한 술 밥은 돈으로 헤일 수 없을 만큼 값비싼 것입니다. 이 얼마 안 되는 은전 몇 냥으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대로 받아 주시오."
그리고 나서 곧 몸을 돌려 주막을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려 온 그는 그제서야 뛰던 걸음을 멈추고 주위의 경치(景致)을 둘러 보았다. 벌써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라 하얀 눈에
쌓인 산봉우리들만 몽롱하게나마 어둠 속에서 분별할 수 있었다. 주위가 모두 산인 것으로 보아 어느 산악지대(山獄地代)에 들어선 모양이었다. 그는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계란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는 눈깜짝 할 사이에 계란을 다 먹어치우고 눈이 쌓인 땅 위에 주저앉았다. 무예인들이 이렇게 도승(道僧)의 좌선(坐禪)과 같이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내공(內助의 일종으로서 혈맥을 순환케 하여 짧은 시간에 피로를 풀게 하는 것인데 이를 조식(調息)이라 한다. 얼마 후 피로를 회복한 그는 벌떡 일어나 다시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약 한 시간 가량 오르자 산세(山勢)는 점점 험악해져 다만 보이는 것은 하늘 높이 치솟은 산봉우리요 절벽단애(絶壁斷屋) 뿐이었다. 온 누리가 백설에 쌓여 은세계를 이루었을 뿐 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무예가 깊은 방조남이었지만 이 험준한 산 속에서는 발거름조차 떼기가 힘들었다.
지팡이 대신 검으로 앞 길을 더듬기도 하고 위험한 절벽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밤중에 눈덮인 산길을 가자니 자칫하면 수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질 판이다. 얼마 안 가서 그의 온 몸은 땀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천신만고(天辛萬苦) 끝에 목적지인 포독고에 도착했을 때는 이튿날 새벽 오경(五更)쯤 되었을까? 어스름한
장막아래 포독고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재 산봉우리는 보이지 않고 깎아세운 듯한 절벽만이 자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방조남은 녹초가 된 데다 또다시 이 험준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여 날이 밝은 다음에 오르기로 하고 어느 으슥한 곳을 찾아 우선 쉬기로 했다.
그리고는 바람을 막아주는 어느 바위 아래 자리를 잡고 단정이 앉아 조식(調息)을 시작했다. 그러나 몹시 피로한 끝이라 어느덧 바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높이 솟아 있었고 온 몸이 노곤하여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집중하여 조식으로 혈액을 순환케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장일평이 일러준대로 길을 찾아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일평의 이야기에 의하면 조양평(朝陽稱)이란 곳은 산 중턱 절벽에서 돌출한 상당히 험한 바위로 형성된 곳이어서 천연적으로 험요(險要)한 지세일 뿐만 아니라 그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개의 인공으로 다듬어진 석대(石重)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수초은의 허가 없이는 그 험요한 몇 개의 석대를 뛰어넘어 조양평에 이르지 못 한다는 것이었다.
장일평의 지시에 따라 조양평이란 곳을 찾아 바라보니 깍아 세운 듯한 산허리에 불쑥 튀어나온 약 십여 평(十餘坪) 되는 크고 평단한 암석이 보였다. 원래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하는 작은 길이 있었던 모양인데 사람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다만 몇 군데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석대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방조남이 살펴보니 벼랑에서 조금 튀어나온 듯한 석대간의 거리가 여덟 자 내지 일장(一丈) 가량이었다. 그 아래는 말할 것도 없이 수천

길이나 되는 벼랑으로 석대를 잘못 딛기라도 한다면 그 아래로 떨어져 뼈도 찾지 못 할 것 같았다.
방조남은 자기의 경신법(輕身法) 재간으로는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혼신의 힘을 단전(丹田)에 모아 소리 높히 외쳤다.
"후배 방조남이 급한 볼일로 사(史)선배님을 한 번 뵙고자 하오니 진배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칠팔 척 정도의 높이로 치솟아 올려 허리를 움추리는 동시에 팔을 한 번 너울거리는 찰나 공중을 가로질러 첫번째 디딤돌에 사뿐히 내려섰다. 이때 앞을 바라보자 끝도 보이지 않는 계곡에 정신이 아찔하여 눈을 꼭 감아버렸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껑충 뛰어올라 서서히 두번째 디딤돌인 석대에
내려섰다. 이번에는 조금 전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어 밑을 내려다보지 않은 채 호흡만 조절하고서는 다시 세번째의 석대를 향하여 몸을 껑충 날렸다. 이렇게 뛰고 날고 하기를 도합 여덟 번, 마지막 디딤돌인 석대위에 내려서자 그가 서있는 석대와 저쪽 크고 평탄한 암석(岩石)과는 거리가 이때까지 뛰고 건너던 석대 간의 거리보다는 몇 배나 먼 삼장 가량이나 되어 보였다. 방조남 자신의 경신법으로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라 그는 마지막 디딤돌에 서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할 줄을 몰라 멍청이 서있는데 홀연히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사부님은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사절한 지 이미 오래이며 이십년간이나 강호 친구들과 내왕을 하지 않았으니 그냥 돌아가는게 좋을 거요."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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