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14
14
초여름과 같이 따가운 햇살과 푸근한 바람이 교차하는 강남의 풍경은 도자기의 명산지인 경덕진에도 녹아들었다. 자기의 고향으로 유명한 이곳에 은밀한 회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맹의 주역은 십패의 일원이자 중원상계에 독자적인 영향력을 보유한 대상련과 같은 십패인 천하문과 동맹이었다. 천하문의 전신은 흑룡방이다. 하오문주 염곽정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은 강일도가 흑룡방이란 이름으로 집권한 것을, 염곽정의 딸인 염미홍이 2대 방주 강무제를 제거한 뒤, 하오문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천하문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이다.
천하문주의 자리에 오른 염미홍은 대상련에 동맹을 제의했다. 상대의 신용를 얻기 위해 장소와 시간은 마음대로 정하라는 조건을 주었고, 금보옥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강서와 절강의 중간지역인 경덕진의 회관으로 정했다. 부재중의 일은 모두 금천효에게 일임한 금보옥이 고른 동행인은 중개인 덕후 외에 정익훈이 이끄는 호위대 열 명 정도였다. 상대편은 셋만 온다고 통보하였으므로 격을 맞춘 인선이었다.
이 시대 상인들은 객지에 활동하기 편하도록 회관을 건립하여 활동하였다. 회관은 재력과 인맥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대상련쯤 되는 재력 집단이라면 천하 각지에 무수히 많은 회관을 두고 있었다.
상,등,하의 삼등에 따라 상등 회관의 경우에는 천평의 면적에 백 칸에 가까운 방이 있고, 중등은 그 절반 규모, 하등은 반에 반 규모를 지니고 있었다. 경덕진의 회관은 중등의 크기였다. 비록 중등이라 하나, 기화요초와 정원수로 꾸며진 정원과 그를 둘러싼 높은 벽돌담은 밖의 풍진으로 부터 아담한 정취를 지켜내는 듯 하여 여느 초일류객잔 못지 않았다. 다만 기둥과 문에는 복,녹,수와 같은 주술적 기원을 비는 상징물이 곳곳에 정교하게 금각되어 있다는 점이 이곳은 상회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수많은 전각군의 어느 호실, 회맹의 당사자들이 막 상견례를 마치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안, 팔선탁을 중심으로 동서에 묘령의 미녀들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서편은 활달한 인상에 시원스런 미소가 잘 어울리는 여인, 동편은 자색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비단처럼 늘어뜨린 화려한 인상의 가인이었다. 바로 십패의 수장을 차지하고 있는 천하문주 염미홍과 대상련주 대리 금보옥이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형욱과 소월하, 그리고 덕후가 있었다. 정익훈은 회담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바깥을 순시하러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정식으로 만나는 것은 이 자리가 처음이죠?"
금보옥이 부드러운 음색으로 운을 떼었다.
"아, 네, 그렇죠."
염미홍은 금보옥의 뒤편에 자리 잡은 이에게 힐끗 향했다. 쥘부채를 접혔다 폈다하면서 흐믓한 얼굴을 하고 있는 덕후가 있었다. 염미홍과 시선을 맞닥뜨리자 보이지 않게 응원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아니, 그렇게 엄지를 치켜들어 봤자 도움이 안돼.
금보옥의 시선이 소월하에게 옮겨진 틈을 타서 보이지 않게 손사레를 쳤다. 그때 옆구리에 통증이 일었다. 탁자 밑으로 소월하가 꼬집기를 한 것이다. 오리가 수면 위는 어디까지나 우아한 자태를 선보이는 것처럼 금보옥을 향한 얼굴에는 빈틈 하나 없었다.
-작금은 최대한 자중할 때. 결맹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본문의 족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능한 최대한 지원을 받아야해요.
엄숙한 소월하의 표정을 대하자 염미홍은 회담 직전에 소월하가 당부한 사항이 떠올랐다. 그 외 이러저러한 사설을 잔뜩 들었지만, 염미홍이 이해한 결론은 "땡깡"이었다. 대상련과 천하문은 은원이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본디 대상련이 남창으로 진출한 것은 강남 경제의 유통망을 보다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호광숙 천하족" 이라는 말처럼 중원 최고의 곡창인 호광과 인접한 강서를 점유한다면 앙숙인 상관세가를 견제하며 세를 더욱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강서무림에서 발돋움하는 하오문이란 장애세력이 나타나자, 당시 대상련의 간판 고수인 강일도를 보내 진압하여 해체를 꾀했다. 그러나 중간에 강일도가 배신하여 하오문을 흡수하여 흑룡방을 세우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리게 된다. 세월이 흘러 그 흑룡방은 다시 토착 세력인 하오문에 의해 전복되었다.
여기서 대상련이 택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전대의 방침으로 천하문을 지워버리고 남창을 직접 장악하느냐, 아니면 동맹을 맺고 이와 입술의 사이가 되느냐. 이 자리는 그것을 가늠하기 위한 회맹인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임을 안 염미홍은 소월하가 알아서 해주겠지, 라고 좌불상 연습을 하다가 본인으로부터 부정을 당했다.
-서로 잘못을 따지고 손익을 계산하는 식으로 흐른다면 결렬될 가능성이 매우 높죠. 실제로 하오문과 대상련의 사이가 틀어진 계기도 그런 심보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여기선 주군의 인망에 기대하겠어요. 큰 틀에서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나머지 실무 협상에 대해서는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내가 나가서 뭘 어떻게 하라고? 협상에 대해서는 난 아무것도 몰라.
-그냥 주군의 성격대로 밀고 나가세요. 저랑 할아버지들을 설득한 것처럼 련주의 마음을 흔들란 말이에요. 결자해지! 일도양단!
-그렇게 말을 해도....안되면...?
-실패하면 바로 전쟁일까나~?
-아악!
염미홍은 머리를 쥐어싸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군사의 무책임에 항의 했으나, 군사란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할 뿐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주군의 몫이라는 반박을 듣고서 백기를 들고 말았다. 현재의 침묵이 자신이 해결할 과제인양 중압감이 든다. 끙끙 앓는 듯한 기색이 드러나자 금보옥의 얼굴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편찮아보이시네요.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아, 아닙니다. 여, 역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인상이시기에..."
"흐음..."
금보옥은 살짝 비음을 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다니,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처음 만날 리가 없지 않는가. 덕후와 첫 만남을 가질 때 시녀로 동석한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금보옥이 푸른 기가 도는 눈을 그대로 직시하자 찔리는 구석는 염미홍은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자신은 대상련과 그녀를 쥐도 모르게 농락한 존재인 것이다. 전말은 덕후가 꾸몄으되 세간의 입장에서 감당하는 것은 염미홍이 되었다. 떠돌이 예인에서 하룻밤 사이에 십패의 수장이 되었으니 당연한 응보랄까, 하는 마음이 되어 염미홍은 고개를 숙였다.
"그 날은 미안했어요. 제 본의가 아니었거든요."
"제가 왜 사과를 받아야하는 것이지요? 저 모르는 사이에 무슨 결례라도?"
금보옥은 살짝 몸을 이동시켜 염미홍의 예를 피했다. 예를 받으면 자신이 속았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대상련의 주인으로서, 얕잡아보이기 싫은 금보옥으로서는 염미홍과 첫 만남을 이 자리로 해두고 싶었다. 안그래도 회맹을 두고 련내에 말들이 많았던 차.
-자족할 줄 모르는 분들 같으니....
금보옥은 반대한 면면들을 떠올리며 울분을 살짝 곱씹었다. 어린 나이에 대상련의 수장을 차지한 뒤로 계속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여자라는 한계를 두어 외인 혹은 대리인 취급을 하였다. 참새처럼 떠드는 무리들을 향해 항상 좋은 언사를 보이며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후원의 땅속에는 남 모르게 묻히는 제웅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선부의 한을 갚은 것을 감축드려요."
상념을 접으며 금보옥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진짜 선친일 리가 없는 염미홍은 낯이 뜨거워 인사를 받았다.
"아이고, 아니에요. 어차피 그 놈들도 귀련의 적이 아닌가요? 서로에게 복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염미홍은 괜한 공치사에 몸을 베베 꼬여 말한 것이었지만, 금보옥으로는 의외의 역습이었다. 그 강씨 부자를 보낸 것은 뭐니해도 대상련이다. 수족의 이반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대상련의 명성에 크게 먹칠당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배반자를 처리하기는 커녕 남의 손에 빼앗긴 셈이다. 무림의 생리로는 수치에 가까운 일이다.
-그걸 대놓고 언급한 건, 저희와 척을 지자는 속셈인가요. 아니면 기를 꺾어보려는 수작?
평온한 표정이 무너지지 않게 유지하면서 금보옥은 되뇌었다. 금보옥의 심사를 유추해낸 것은 덕후와 소월하였다. 염미홍은 자신의 대답에 스스로 만족한 상태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한 틈을 놓치지 않고 소월하가 말했다.
"련주, 필요하시다면 강씨 부자의 목을 드리겠습니다."
"목이라니요?"
"자고로 배신에는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는 법. 그 무뢰배들의 목을 귀련의 문에 내건다면 허튼 망상을 품은 무리들에게 좋은 경계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입술에 나오는 내용은 피비린내가 잔뜩 감돌고 있었다.
"파리가 꼬이는 물건은 원치 않아요."
"그 점은 걱정 마세요. 최고의 분장사들로 하여금 단장시켜왔으니까요."
살벌한 내용의 대화를 여상스레 말하는 두 여자의 모습에 덕후의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중고딩 나이의 형욱이 가차없이 살인을 하는 것은 그렇다손 쳐도 묘령의 처녀들이 사람의 목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에 괴리감이 들었다. 역시 이 곳은 자신이 살던 곳과 양식과 윤리관이 생소한 세계였다.
그 사이 물꼬가 틔인 금보옥과 소월하의 대화는 중간중간에 염미홍이 끼어드는 식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번 회맹은...."
"그 목, 필요까진 없을 것 같네요.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닌데 죽은 자에게 죄를 묻기도 그렇고."
잠정적으로 승락한 것 같은 금보옥이 슬쩍 튕겼다. 두 부자의 목으로 최대한 이득을 받아내려던 소월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 굳이 요구할게 있어서 드리는 건 아니에요. 어쨌든 선물로 가져온 것이니까. 그냥 받아주세요."
돌아가는 길에 목을 동반하면 꺼림칙할 것 같아서 염미홍이 말했다. 선물이라는 데 거절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아 금보옥은 튕기는 것을 그만두었다. 소월하는 염미홍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이후는 자신이 나서서 "선물"을 토해내도록 해야할 차례....인데 염미홍이 앞질러 물었다.
"그런데 대상련은 부자이죠?"
"질문한 의도를 모르겠으나....돈이 궁한 적은 없답니다."
"그럼 돈 좀 꿔주세요. 사실은 저희 문에 돈이 없어서...."
염미홍은 부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소월하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궁한 사정을 그냥 까발리면 어쩌라는 거냐! 가라앉은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찜찜한 상태였던 금보옥으로서는 상대의 자충수가 못내 귀여워 보였다. 목걸이를 채우기 전에 조금 편의를 봐주도 괜찮겠지.
"몇 할로 꿔드릴까요?"
"네?"
"돈을 빌려주는데는 이율이 붙는 건 상식이 아닌가요? 요새는 물가가 많이 올라서..."
"으으음, 그냥 선물로 해주면 안될까요?"
"선물..."
금보옥의 입꼬리가 바르르 경련했다. 어쩜 이토록 뻔뻔한 요구가 다 있담? 차라리 그냥 돈을 달라고 해라. 승기가 보이자 소월하는 염미홍이 엉뚱한 소리를 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공치사는 아닙니다만, 저흰 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정말 갖은 고생을 다했답니다."
"저런, 굳이 수고하실 필요는 없을텐데요."
둘이 첨예하게 각을 세울 때 염미홍이 다시 눈치 껏 발언했다. 때론 소월하에게 유리한 방향이었으나 반대로 삽질하여 금보옥에게 약점이 잡혀 털리는 상황도 발생했다.
처음에는 예의를 지켰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숭이 벗겨져 신랄해졌다. 적아 구분할 것 없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독설과 핀잔, 타박을 물리화할 수 있다면 염미홍의 전신은 난자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크는 것이야.
덕후는 간혹 눈빛으로 구원을 청하는 염미홍에게 한결 같이 미지근한 태도로 다양한 격려의 제스처를 선보였다. 원래 시나리오 대로라면 저 자리는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덕후는 염미홍의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오늘 동안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덕후의 팬터마임을 적나라하게 감상한 이는 형욱 뿐으로 보는 것 자체가 괴로워 살짝 외면하고 있다. 금보옥과 소월하라는 고래는 염미홍이라는 새우등을 무대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데 여념 없었다.
-아아, 훈훈한 광경이로다.
쉰내나고 음충맞은 사내새끼들의 회담이 아니라 꽃다운 미소녀들의 모임이니 오감이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녀들이 입에 담는 것이 금기서화를 비롯한 풍류가 아니라 천하무림의 대소사를 논하는 것이지만 덕후에게는 그 편이 더 좋았다. 그의 야망중에는 적아를 떠나 무림의 실세들을 가급적이면 미(소)녀들로 채우는 것도 있다.
까까머리의 소림방장 대신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소녀승과 꼬짱한 말코도사보다는 색시미를 풍기는 여도사 누님이 바람직했므로. 망상드릴이 나선력을 얻어 몽골까지 운하를 파는 동안 회담은 절정을 지나 파장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슬슬 저녁인데 이만 하고 내일 하죠?"
염미홍이 잔뜩 시달린 표정으로 애원하듯이 중재하였다. 소월하와 금보옥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결국 덕후도 지원에 나섰다.
"염 문주의 말에 동의하오. 소생은 벌써 시장하오이다."
아랫배를 문지르면서 지루한 인상을 더하자 덕후를 향한 금보옥과 소월하의 시선이 묘하게 날카롭다. 심처에 묻어둔 사안이 동시에 그녀들의 뇌리 위로 부상했다. 가장 개인적인 일이면서도 민감하기에 의식적으로 잊고 있었던 것을.
"그러고보니, 한 가지 잊은게 있군요."
"어머, 저도 방금 생각 난게 있었는데."
제갈량과 주유가 적벽전에서 조조군을 격파할 계책을 궁리할 때가 이러할까. 두 여인은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혼약은 어떻게 되는 거죠?"
올게 왔다. 원래 흑룡방 일을 처리하면 금보옥과 혼약하기로 약정하고 회맹을 주선하는 대가로 은근슬쩍 염미홍과 소월하와도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양다리, 아니 세 다리를 걸친 상태였다.
"하하하, 무에 어려울 것 있겠소. 양가의 화평을 위해 이 한 몸을 희생하여...."
"그 입 다무세요."
"넵."
소월하의 일침에 덕후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소월하는 한숨을 쉬더니 금보옥을 향했다.
"저 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시죠?"
싸우면서 정든다고 할까, 둘은 친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묘한 유대감을 형성한 상태였다.
"글쎄요, 그쪽은?"
"왕부의 귀인이라는 것 밖에는요."
소월하는 에둘러 말했다. 덕후가 밝힌 신분을 그대로 신용하지 않기에 그가 떠난 직후 따로 정보를 수집하였다. 염미홍과 형욱을 닥달하는 한편, 남경에 발 빠른 사람을 보내어 확인토록 했다. 소월하가 얻은 추측 중 하나는 부임 후 몇 달 째 와병하고 있다는 왕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짐작이 맞으실 거예요."
금보옥의 긍정에 소월하는 확신을 얻었다. 한편 이때까지 "설마? 에이~ 아니겠지." 하던 염미홍과 형욱은 덕후의 말을 통해 드러난 정체를 알고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미미하게 떨었다.
"하하하! 그런 건 신경쓰면 지는 것이오!"
덕후는 쥘부채를 파닥파닥 흔들었다. 특히 형욱이 엉거주춤 무릎을 꿇으려하자 서둘러 달려가 억지로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그냥 넘어가자."
"하, 하오나."
"넘어가세. 그 신분을 내세울거면 애당초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게야. 편하게라고 말해도 힘든 거 다 알아. 하지만 서로 묵인은 가능하지 않겠나. 응?"
덕후의 애원조에 형욱은 한참 갈등하다가 마지 못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덕후는 활짝 웃으며 어깨의 먼지를 털어주는 시늉을 하면서 떨어졌다. 그때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멍하니 있던 소월하는 덕후를 보았다.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경계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더불어 미묘한 배신감도 살짝 엿보였다. 덕후는 재빨리 손사레를 쳤다.
"소생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번복하지 않소."
관조하겠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한번 휩쓸린 마음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럼 굳이 혼약으로 묶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덕후가 보통 신사층이나 무가의 동량이었더라면 혼인하더라도 달리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녀들이 몸담은 가문과 실세의 격부터 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족이라면 이야기가 틀려진다. 무림에서 지고무상으로 받들어지는 천하제일인이라해도 법대로 황족 앞에서는 일개 신민에 불과하며 오체투지를 해야한다. 그녀들이 아무리 날고 뛴다해도 왕야의 신부가 된다면 제약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세력을 가져다 바치는 꼴이 될 수 있다.
"나는 신데렐라가 싫소."
"신대래라?"
염미홍은 생소한 발음을 따라부르다가 혀가 꼬였다.
"크흠! 아무튼 가문이나 남편의 위세를 자신의 전부인냥 믿고 정작 대가리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 아내는 사양이다, 이 말이오. 그건 나만으로 족하거든. 반대로 내가 처가를 획책한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오. 하나뿐인 인생은 젊어서 노세가 참 진리가 아니겠소? 그런 건 유능한 반려께서 다 알아서 하실 사항이고. 그대들이 아이를 가진다해도 왕자나 왕녀로서 삶을 강요하진 않겠소. 필요하면 처가 성을 따라도 좋고 가업을 이어받아도 좋소. 원한다면 각서를 써드리리다."
"진심이세요?"
금보옥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정략혼은 대게 양가의 이익, 하다못해 자기 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덕후의 발언대로라면 그녀들에게 유리하면 유리했지 왕야로서 이득이 되는 것은 극히 적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소."
덕후는 진심이었다. 환생인지 이계진입인지 해버린 덕분에 황족의 신분에 대한 자각은 있어도, 그것을 자신의 근본 태생으로는 인식하지 않았다. 이왕 한 김에 속내를 드러내보일 필요가 있어 말을 보탰다.
"사실은 내가 왕부의 담장에 뭐를 칠할 때까지는 태평성대로 살고 싶소. 역모는 물론이고 민란이나 역병이 창궐하는 것을 보고 받고 싶지 않다오."
"역대 왕야들의 본을 따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금보옥이 반문했다. 역대 왕야들처럼 담장과 배개를 높이고 살면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덕후는 고소를 머금었다. 친왕은 미운 혹 이상 되지 못한다. 황실의 울타리이기는 하나, 잠재적인 반란 씨앗이었다. 또한 민생을 등쳐먹는 재주만은 뛰어났다. 명조의 마지막 군주인 숭정제는 세간에 적지 않는 동정을 샀지만 주씨 친왕들의 몰락에는 모두 고소하게 여겼다 한다. 덕후가 속편하게 흉내냈다가는 언젠가 부메랑을 맞을 확률이 높다.
"나 혼자 자리보전을 추구 한들 집이 다 썩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소?"
고소를 지은 덕후는 씩 웃었다.
"그래서 본인 나름대로 생각한 꾀가 혼인이오. 힘 쎈 마누라들을 얻으면 대신 해주지 않겠소?"
덕후의 말을 주시하고 있던 여인들에게 허탈감이 엄습했다. 금보옥이 기운이 빠진 어조로 항의하듯 말했다.
"그럴 것 없이 영향력 있는 무림 명사들을 불러 언질을 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뭣이?"
덕후는 발끈한 듯 쥘부채를 좌락 폈다 접었다. 그의 눈에 불이 일었다.
"날 더러 정녕 영감 아저씨들과 대면하란 말이오? 뭐가 좋다고 세파에 찌들고 속이 썩어문드러진 남정네들과 뭐가 아쉬워서 하하허허 해야하느냔 말이오! 의리? 우정? 잠깐은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다 소용 없는 것.....이 시대의 남자들은 모두가 나의 적!"
인격 반전 스위치라도 누른 듯 포효하는 덕후에게 여인들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공통분모로 느낀 것은, 여자(미(소)녀 한정)에게는 한없이 양보해도 같은 남자는 무지막지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어렴풋 깨달았다.
"진정하세요. 상공. 체신에 맞지 않사옵니다."
금보옥이 달래듯이 덕후의 폭주를 가라앉혔다. 이들중에서 덕후의 본성을 가장 잘 체감하고 있는 염미홍은 정리하듯 말했다.
"뭐, 장난으로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았으니 되었잖아? 그리고 하면 어때? 천하문만 살리면 되지."
"천하문만 살리면 그만이 아니에요! 자고로 혼인은 인륜대사이건만...."
"그럼 저 인간 보다 나은 신랑감 찾아올 수 있어?"
염미홍은 진지한 음색으로 물었다. 말문이 막힌 소월하를 두고 염미홍은 장내를 훑어보았다.
"여기 모인 이들은 결혼한다고 다들 조신하게 규방에서 삼종지도나 닦을 성미들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우리 같은 신부감은 무림을 뒤져도 극소수 일거예요.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기왕이면 둘 다 받아줄 수 있는 배우자가 낫지 않을까요?"
"짝은 하나만 있는게 좋지 않나요?"
금보옥이 이의를 제기했다. 삼처사첩이라해도 남자에게는 기분 좋은 변명이긴해도 여자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입장 바꿔서 여자가 많은 남자를 거느리고 다니면 매력녀라기 보다는 탕녀라고 욕하는게 보편적이다.
염미홍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무엇보다 평범하게 시집을 가서, 악녀나 요부로 이름을 날릴 여지가 있는 길을 택하는 것보다는....남편이 기인이고 별난 성정이라 고생하는 아내로 불리는 쪽이 나아요. 왕야라는 신분이라면 웬만한 떨거지들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을 테고."
듣고 보니 그렇다. 끌리는 구색을 보이는 소월하와 금보옥을 두고 형욱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론 주고받을 말이 아니다. 검귀가 씌인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서도.
"후후, 혼인날만 잡으면 되겠군!"
알아서 혼사가 진행되니 덕후는 희희낙락하였다. 염미홍은 덕후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보이고는 츳츳 흔들었다.
"너무 좋아할 거 없어요. 등짝부터 단련하셔야죠? 이제부터 평생 마누라들 등쌀에 견뎌내야 할텐데."
악의를 머금은 채 오호호~ 웃는 그녀의 모습에 덕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비분이 자리잡았다. 아무리 회담 동안 방치 플레이했다고 하지만 다 너를 위한 것이었거늘!
"염미홍아, 나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네에~ 저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니까요. 나머지 이할은 당신이 채워주셔야죠."
"크흑, 이렇게 되면 입이 아니라 아래로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밖에!"
당장이라도 덮칠 듯 한 콧김을 뿜는 덕후, 염미홍은 웃옷을 살짝 풀어 앙가슴 부분을 보이도록 해 짐짓 도발적인 자태를 취했다. 덕후가 몸을 날리려는 찰나 목젖으로 차가운 쇠붙이가 나타났다. 어느새 발검을 했는지 형욱이 겨눈 것이다.
"체통을 지키십시오. 왕야라면."
"어허, 서로 묵인하기로 하지 않았나. 이 자리에는 왕후장상은 없다. 오직 사랑에 불타는 남자만 있을 뿐!"
"왕야가 아니라면 이 검이 베는 것은 분명 욕정에 껄떡이는 파렴치한이겠지요."
형욱의 싸늘한 대응에 덕후는 신음을 삼키며 몸을 뒤로 뺐다. 형욱의 뒤편에서 염미홍이 강제 정좌를 당한 채 소월하에게 옆구리를 꼬집히고 있었다.
결국 첫 회담은 그렇게 헤프닝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그러나 완전히 헛 짓거리는 아니었다. 첫 회담처럼 설전을 벌이는 빈도가 나날이 갈수록 낮아진 것이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서 일시로 손잡기 보다는, 끝까지 같이 가야할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새로이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나흘간 릴레이 협상을 펼친 결과 양파 수장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사항이 맺어졌다. 골자로는 첫째, 대상련은 10년간 천하문이 요구하는 금품과 물량을 적정 수준에서 이자 없이 지원을 해준다. 대신 천하문은 강서 일대의 상권을 모두 대상련에게 맡기며 안전을 책임진다. 둘째, 상관세가와 분쟁이 있을 때 양파는 이유불문하고 공동 전선을 펼쳐 대항한다. 그 외는 상황을 보아 대응한다. 셋째는 서로 가진 정보는 공유한다는 것이다.
정식으로 비준한 것이 아닌 약식 사항이었지만, 소월하와 금보옥은 관철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회맹은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였으나 정작 덕후에게는 가장 큰 불만으로 남았다. 릴레이 회맹 동안 염미홍과 시간을 보낼까 했더니 형욱이 12시진 붙어다녀 감시했다. 그 배후에는 한쌍의 바퀴벌레처럼 놀아나려는 작태에 눈이 신 두 소녀의 조종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