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厚の野望 13
13
"아흑..."
깨어났을 때 소월하가 느낀 감각은 허리와 엉덩이의 아픔이었다. 그 못지 않에 뇌를 쾅쾅 두들겨대는 숙취에 이마를 누르던 소월하는 벌떡 손을 내렸다. 간밤에 일을 떠올린 것이었다.
-세상에나, 내가 무슨 짓을 한거람?
염미홍의 고백을 듣고 흑막이라는 남자와 대면하였다. 취중 거래를 한 것까지는 술에 취해서 경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손등에 비수를 콱! 박아놓고 정사를 치른 것에는 미쳤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일어났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염미홍이 앉은 자세로는 충분히 들어갈만한 반신욕조를 형욱과 나눠 잡고 들어섰다. 반신욕조 안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월하는 의미를 몰라 두 눈을 깜빡였다.
"그건 뭐죠?"
"목욕할 것들. 간밤에 술을 너무 마셨잖아. 아무리 미소녀라해도 술떡이 되서는 매력이 반감한다나? 나랑 형욱은 먼저 했어."
염미홍은 쾌활하게 말했다. 소월하는 대답 대신 방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 되었을 탁자는 깨끗이 정리 되었고 자신은 누군가가 가져온 이불을 덮고 앉아 있었다.
"시녀들을 불러다 시키면 될 것 가지고..."
염미홍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소월하는 말꼬리를 흐렸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파과의 흔적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월하는 이불을 치우면서 일어났다. 사타구니 안쪽 생살을 후비는 듯한 아픔에 신음을 흘리며 도로 주저앉았다. 염미홍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피, 필요없어요. 저 혼자서 충분히..."
"오늘만이야. 형욱은 나가 줘."
염미홍은 듣지 않고 소월하를 욕조로 인도했다. 욕조에는 울금향을 비롯한 향초들이 뿌려져 있었다. 숙취로 다소간 멍한 소월하는 순순히 옷을 벗고 천천히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피부에 와닿자 아득한 느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염미홍은 소매를 걷어올린 채 소월하의 흐트러진 머리를 뒤에서 감아주기 시작했다. 두피를 자극하는 손가락에 소월하는 긴장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그 사람은 누구죠?"
"어제 말한게 전부야. 월하야말로 따로 알아낸 것 없어?"
자기 소개는 했지만 술김에 척 봐도 둘러댄 티가 분명했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캐물을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배경 따위는 사소한 장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풍기는 인상은 귀인 티가 확실해보였다.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요?"
"월하라면 유도심문을 잘 할 것 같아서."
"잔뜩 취한 상태인데....오히려 제쪽이 넘어간 것 같네요. 거래만 했어요."
소월하는 쌀쌀히 말했다. 염미홍이 직접 목욕물을 준비하고 살갑게 구는 것도 미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소월하는 저도 모르게 입가가 삐뚤어졌다.
"너무 신경쓰실 것 없어요. 순결 하나 때문에 죽네사네 하는 부류는 아니니까요. 다만 준 만큼 가치를 해주길 바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지 마."
염미홍의 손길이 멎었으나 다시 움직였다. 전 보다 세심하게. 소월하는 우습기도하고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는 염미홍이 애처로운 감상에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순결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순결 딱지는 결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가 가지는 유일무이한 패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략에 자신있는 그녀 답게 좀 더 맨 정신으로 흥정하여 가치를 올려야하지 않나 싶은 아쉬움은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염미홍이 입을 열었다.
"제멋대로 이긴 해도 막 되먹은 인간은 아니야. 연을 맺었다고 새장 안에 있기를 강요하기 보다는 하고 싶은대로 다해도 지원해줄 지도 몰라."
소월하는 덕후의 말이 떠올랐다. "관조" 하겠다고. 소월하는 쓰게 웃었다. 특이 사항이다. 천하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을 취한다면 모를까.
-아니지, 저가 무슨 고금제일인인줄 아나.
덕후가 들었다면 일단 같이 부정하고, 그 뒤에 "차원제일인이 아닐까?" 라고 천연덕스럽게 물었을 것이다. 소월하는 살짝 약이 올랐다. 해석하기에 따라 자신은 물론 십패들은 경극의 배우에 불과하단 말일 수도 있다. 오기가 치미는 소월하는 하나 더 결심을 하였다.
소월하는 천하를 입에 담았지만 그것은 딱히 군림과 지배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자신의 재능을 표출하기 위함이다. 가급적이면 가내나 문파에 국한되지 않고 천하라는 큰 무대에서 거침없이 발휘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여자라고 안 된다는 소리는 소경이나 맹인 같은 장애로 치부하던 그녀였다. 간혹 외조부가 네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는 아쉬운 소리에 내심 반발하고 있었다.
-좋아, 보란듯이 차지하겠어.
소월하는 오연한 마음이 들었다. 덕후에 대해 꽤씸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천하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인정해준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분하단 생각 안들어요?"
"뭐가?"
"그 자는 우리를 꼭두각시로 보고 있잖아요."
"뭐, 아주 부정하긴 힘들지."
염미홍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 소월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염미홍과 얼굴을 가까이 맞대었다.
"제가 맹세한 대상은 당신이에요. 그 자가 아니죠. 지금까지야 주군도 이용당하는 처지였고 저도 그걸 몰랐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부터는 안 되요."
"그, 그럼?"
"독립해야죠. 아, 당장 칼을 뽑으란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쪽에서 이쪽이 필요하다고 애원할 정도로 키울 필요가 있어요."
"음."
염미홍은 애매하게 동의했다. 약간 회의적인 반문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괄목상대란 고사가 주군에게 어울리도록 다방면에서 조교시켜드리죠."
소월하는 우후훗 웃었다. 염미홍이 순간 얼어붙은 것이 재미있었다. 문득 괴롭히면 재미있어질 것 같다. 그 자는 놀리는 재미는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이쪽은 충분히 차고 넘칠 것 같다. 무엇보다 완성된 느낌이 드는 덕후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가능성을 품은 염미홍이 상성에 맞으리라.
염미홍의 표정이 무언가 생각에 미친 듯 미묘하게 변했다. 그리고 충동적이라는 느낌 그대로 불쑥 묻게 된다.
"자, 잠자리까지 관여할거니?"
"이,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요?"
염미홍의 말에 소월하는 당황했다.
"그...좋아서 말이야. 따, 딱히 내가 색녀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정기적으로 하지 않으면 욕구불만이랄까, 그, 그, 건강에 나쁘다고들."
염미홍도 얼굴이 붉어진 채 횡설수설했다. 듣고 있는 소월하는 목덜미까지 홍시처럼 붉어졌다. 간밤의 기억이 뇌리를 마구 크리티컬했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마구 질타하는 소리가 있지만 반대편에는 분명 느꼈잖아?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파과의 아픔은 있었지만 분명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생살을 찢은 아픔을 줬으니 미운 마음이 들법하건만, 상대는 자신이 손등에다 꽂은 비수를 정사 내내 뽑지도 않고 달아주는 것으로 상쇄되고 있었다. 살을 찢는 아픔이라면 그쪽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이 모르고 오직 자신만 알 수 있다면 그 쾌감을 다시 맛보아도 괜찮을까 싶기도 했다. 유혹이라는 첨가제를 넣어 불가항력이라면 완벽하다.
"따, 딱히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만은요...그, 그건 좀 더 연구해본 다음에 시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 싶어요."
"으, 응. 그렇겠지. 그럴 거야. 어, 어쨌든 실망시키지 않을께."
덕후가 있으면 뭘 연구 해? 라고 짖궃게 묻겠지만 두 여자는 상황 자체가 어색한지라 아무 말이나 나와도 다행이었다. 그로부터 반 각 뒤 물이 식을 기미를 보이자 소월하는 목욕을 마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두 여자의 대화를 문 밖에서 그대로 들은 형욱은 이들이 나오기 전에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형욱의 발걸음은 입구를 빠져나올 무렵 정지했다. 수상썩은 그림자가 은근슬쩍 문 옆의 담을 넘으려는 것이 보였다. 익숙한 인기척이다.
"넘으면 벱니다."
형욱의 경고에 구렁이처럼 넘으려는 그림자는 도로 내려왔다.
"커흠, 새로 취임한 방주가 있다길래 인사 차..."
"나중에 정식으로 방문하십시오."
"거 딱딱하기는."
형욱은 지그시 바라보자 덕후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녀의 곁으로 갔다. 형욱은 원래 경호하던 자리를 찾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덕후는 혀를 차더니 어깨를 나란히 맞췄다.
"이번에는 나란히 가자구."
"경호에 지장이 있습니다."
보통 보표는 왼쪽 뒤에 위치한다. 오른손잡이가 유사시 경호대상을 앞지르며 발검하기 유리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잠깐 휴업."
덕후는 다시 뒤로 빠지려는 형욱의 곁에 붙더니 팔짱을 꼈다. 살의가 없는데다가 너무나도 뜻밖의 행동인지라 절정고수고 뭐고 소용없었다. 팔짱을 낀 덕후는 나직히 투덜거렸다.
"이런 건 여자가 먼저 해줘야하는 건데 말이지."
"노, 놓아주십시오."
형욱은 팔을 빼기위해 덕후를 밀쳤다. 그러나 덕후는 오히려 형욱에게 바싹 붙으며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그의 어조는 장난기없이 진지하기 그지 없었다.
"정말로 싫으면 공력을 일으켜서 뿌리치게. 두 번 다시 이런 짓 안할테니."
"그, 아, 그...."
팔을 죄어오는 힘 정도는 충분히 덕후를 튕겨낼 수 있다. 그러나 형욱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대신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말문을 열었다.
"놀기를 원하신다면 제가 아니라 염미홍님도 계십니다."
"놀자는 것 아닌데. 스킨 쉽 속에 피어나는 애정확인이랄까."
스킨 쉽? 형욱이 생소한 단어에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 때 덕후의 말이 귓가로 이어졌다.
"강무제를 처지했더군. 고맙다는 인사를 아직 못했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번 흑룡방 탈취에 핵심은 강무제였어. 아무리 좋은 계략을 꾸며도 정작 무력이 받침하지 못하면 백 날 헛짓거리지. 네 공이 가장 커. 상을 내려야겠는데."
"대가라면 이미 받았습니다. 저를 절정고수로 만들어주셨으니까요."
형욱의 어조는 자신도 모르게 부드러웠다. 그러나 덕후는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으음, 이 번에는 초절정고수를 목표로 잡자!"
형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절정에 들어선지가 언제인데 초절정을 논하다니. 당금 무림에 활약하는 초절정고수라면 다섯 손가락에 들만큼 극소수다. 보통 고수와 달리 가히 일인문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무위와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었다. 그것을 덕후는 가볍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형욱은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귀인, 저는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떠나시게?"
"....예."
덕후는 그때까지 끼고 있던 팔장을 풀었다. 형욱의 예상대로,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거나 무슨 구실을 빌미 삼아 협박 비슷한 조건을 내걸지는 않았다. 그저 침착한 눈길로 형욱의 눈을 들여다 볼 뿐이었다. 속이 낱낱이 헤쳐지는 느낌에 형욱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직은 좀 더 수행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조용한 곳에서 몇 년 지내볼 생각입니다."
"왜 수행하려는 데?"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왜 강해지려는 데?"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는데 그게 싫어서 수행하러 가시겠다?"
"아, 예. 그렇습니다."
덕후가 정리 하듯이 말하자 형욱은 무심코 고개를 끄떡였다. 덕후는 무언가 생각하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흔들리는 게 꼭 나쁜건 아니지 않나?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말이지. 이등병 같아서 주변에 신경쓸 여유가 없는 것 같았지. 절정의 벽을 넘고나서는 다소 의식하는 것 같아서 성장한 것 같았는데. 본인은 아니라고 하니."
"여유...말입니까?"
형욱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듯 반문했다. 흔들림이 여유라. 강해지는데만 매진했던 형욱이었다. 절정의 벽을 넘고 나서는 주변에 신경을 쓰고 대게는 덕후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이런 의식의 변화에 형욱은 당황했다. 주변에 상담할 사람도 없이 자신이 퇴보한게 아닌가 고민하고 있었다. 덕후의 해석을 듣고나니 무언가 묵은 것이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불안한 마음은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래. 많이 겪다보면 괜찮아 질거야. 오히려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그들이 품은 도와 자신의 도를 논해보는 게 어때? 무공이 제 아무리 힘을 추구하고, 한술 떠 대자연을 모사한다 한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개체가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기와 술은 혼자서 얼마든지 연마할 수 있지만 법과 도라는 것은 성질이 틀린 법이지."
결국 형욱은 설득당했다. 덕후의 곁을 떠나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드는 것이 생숭했다. 그 내면을 들키고 싶지 않아 형욱은 일부러 멍한 표정을 지었다.
"궁금한게 있다. 무공을 배우고자 한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
이것은 덕후로서 정말 궁금했다. 지금의 형욱은 이레귤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케릭터 자체에 대한 필요성 보다는 이벤트 형편에 맞는 인물이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 끼워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 만남은 의외였을 뿐, 인상이 희박한 편이었는데 같이 지내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하기사 글자 쪼가리로 몇 줄 적은 설정 나부랭이와 곁에서 직접 숨쉬고 살아있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형욱은 질문을 받은 뒤에 한참 후에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었다.
"전 눈치가 없는 편입니다."
눈치라는 부분에서 덕후는 미묘한 어감을 받았다. 남들은 다 하는데 자신은 선천적으로 수준 미달인것 같다라는 식이었다.
"강자는 따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정말로..."
형욱은 자신도 모르게 강조를 넣었다. 미소년같이 깨끗한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말을 꺼내하고 싶어하지 않아 덕후는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형욱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나머지는 시간이 허락해주겠지. 경호 잘 부탁하네."
덕후의 눈웃음에 답례로 미소를 지은 형욱은 거처로 돌아오자 충실한 호위무사의 자세로 돌아갔다. 다음 날 덕후는 정식으로 방문첩을 띄웠다. 대외적으로 강무제에게 치도곤을 당한 덕후는 거리로 내쳐졌으나 쿠데타 이후 대상련과 관계 조정이 필요하다는 소월하의 조치로 객소로 옮길 수 있었다.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던 3원로는 덕후가 선공을 날리듯 대면을 요구하자 의아해하는 한편 자리를 마련했다.
장소는 성채의 가장 위에 있으며 능선을 따라 밑에 전각들과 마을들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곳, 한 달 전만해도 강무제가 차지했던 거처였다. 이틀 전만해도 아담과 이브의 추종자들의 밤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었다.
단상에는 염미홍이 앉아있고 그 옆 좌우에 보좌하듯 소월하가 서 있었다. 단하의 좌석에는 3원로가 앉았다. 탁자를 끼고 맞은 편에는 덕후가 착석했으며 그 뒤를 형욱이 배경처럼 서 있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순억이 거대한 체구와 반비례로 앙증맞은 그릇에 놓인 차를 내놓고 물러났다. 염미홍은 순억의 모습에 킥 웃었으나 중인들은 그를 본체 만체 했다.
인사치례를 마치고서 덕후가 꺼낸 제안이 3원로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니까, 동맹을 원하신다?"
"선대에 약간 불화가 있는 듯 하지만, 이미 한 배를 탄 처지가 아니겠소?"
이불상은 덕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다쳤는지 한 손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이 인간 때문에 자신이 뇌옥에 갇히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연 그를 대하자니 복잡미묘한 감회가 들었다.
"우리 방은 아직 귀련과 손을 잡을 여력이 없소."
"엥? 피차 여력이 없기에 손을 잡아야하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오. 급할수록 건저놓는 김에 보따리 내놓으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게 본심이거늘..."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바람에 악중평은 노화를 견디다 못해 버럭 질렀다.
"입이 뚫린대로 지껄이지 마라!"
"에크~! 영감 목청이 크구려. 간 떨어질 뻔 했잖소."
덕후는 깜짝 놀란 듯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도로 앉았다.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은 자세가 여차하면 형욱의 등뒤로 숨을 기색이다. 악중평은 고작 자신이 이런 놈을 향해 성을 냈는가 싶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강무제의 목을 벤 일등공신인 형욱이 그의 호위무사라니 무력시위하기도 그랬다.
강무제라는 절정 고수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차지한 형욱을 3원로를 비롯한 하오문도들은 수단을 강구해 붙잡으려 애썼다. 다행히 염미홍과 구설수에 있는 듯하여 회유가 쉬울 것 같았으나 대상련 사자의 호위무사라는 사실이 소월하를 통해 밝혀짐에 따라 난항에 부딪쳤다. 여기서 손을 떼주면 곤란하기 때문에 덕후는 떡밥을 계속 던졌다. 주변 시비를 통해 형욱이 대상련 소속이 아니고 일종의 계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피력하여 계속 미끼를 물 여지를 남긴 것이다.
이러니 악중평이 아무리 고집이 드세어도 절정 고수 영입이란 기회를 날려버리기에는 손해가 너무 컸다. 이도 저도 못하게 된 처지에 빠지자 콧김을 뿜고는 도로 앉아서 눈을 감았다. 회의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명상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귀련과 결맹을 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과거 귀련이 보낸 이 때문에 하오문의 꿈이 스러졌다. 귀련 역시 타격을 입었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우리가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억압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터....그저 한 배를 탄 공동체라고 강조해봐야 지난 은원이 간단히 씻겨나가지는 못한다. 만약 결맹을 한다면 어떤 이득이 있는가 말하라."
이불상의 하대에 개의치 않고 덕후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내가 금보옥님과 결혼할 수 있소!"
"....."
3원로 사이에 불가해하다는 침묵이 흘렀다. 눈을 감았던 악중평 마저 부릅 치켜떴다. 소월하는 서늘한 눈길을 덕후에게 향했다. 염미홍은 입과 배를 양 손으로 각각 틀어쥔 채 웃음을 참으려고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금보옥님은 아름답기 그지 없소. 고소 지방(소주의 옛 지명,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수도)의 미녀는 서시의 고향으로 으뜸! 양 집안의 화평으로 이 몸이 장차 절세의 미녀를 처로 맞이한다면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소?"
집단간의 거래 현장에 개인적 욕망을 툭 털어놓는 엉뚱함에 모든 이들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그때까지 방관하고 있던 염미홍이 물었다.
"금보옥님을 아내로 맞이한다라, 남아라면 한 번쯤 품을 만한 생각이겠지. 헌데 그녀가 그렇게 미인인가? 나나 여기 군사님과 비교한다면?"
염미홍의 가벼운 목소리에 노인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질책하지 못할 망정 장단이나 맞추고 있다니! 이불상의 시선이 소월하를 향했다. 소월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일 뿐 정작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한편 얼굴을 내민 염미홍이 모습을 본 덕후는 멍한듯 바라보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었다.
"후우, 소생의 안목으로는 감히 비교할 수 없소. 춘란추국과 같다 생각하오."
"고마워. 그럼 나랑 결혼할 마음은 있어?"
염미홍의 말에 덕후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3원로는 경악해서 명목상 문주를 보았다. 그러나 염미홍은 내친 김이라는 듯 소월하를 가리켰다.
"나랑 금보옥 중에서 선택하기 아쉽다면 얘도 추가하지. 어떤가?"
"문주!"
"좋소!"
이불상의 외침과 덕후의 찬성이 같이 터져나왔다. 이불상은 덕후를 홱 노려보았다. 덕후는 살기에 찔끔하여 의자를 밀치고 뒷걸음질 쳤다.
"앉아!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그때 염미홍의 호통이 터져나왔다. 안색을 바로하고 명령하는 모습에 덕후는 재깍 앉았으나 이불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월하가 한 발 앞서더니 조용히 말했다.
"할아버님, 문주님의 명을 어길 참이십니까?"
"월하야, 너는 이 소리를 듣고 화가 안난단 말이냐?"
"여기는 공적인 자리입니다. 원로의 직책에 맞게 예의를 지켜주세요."
이불상은 외손녀의 말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망연히 바라보았다. 소월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받았다. 이불상은 불현듯 전신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소월하와 염미홍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교감이 있는 것을 감지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악중평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고운경이 전음을 보냈다.
-자중하게.
-하지만!
-매정하긴 하지만 월하의 말이 옳아!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문주의 위엄을 훼손해서 무엇할 생각인가! 끝내 자네 뜻대로 고집을 피우겠다면 차라리 날 이 자리에서 죽이고 하게나.
-자네...
악중평은 말문이 막혔다. 평소 한수 접어주는 고운경이 이렇게 강경한 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다. 사실 고운경은 소월하와 염미홍 입장에서는 3원로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였다. 소월하와는 농담을 할 만큼 사이가 좋았고 사부(?) 유영은과 애틋한 정리 때문에 3원로에 비해 염미홍과 쉽게 친숙했다. 그래서 염미홍과 소월하는 고운경의 처소로 가 명분과 실리를 설파하면서 애교와 눈물의 호소 작전을 총동원하여 협력을 얻어낸 것이었다. 직접 전면으로 나서서 척을 지라는 것도 아니고 악중평만 제어해달라는 요청이었으니 거절할 리가 없었다.
두 원로가 이렇게 견제 상태에 들어가자 이불상은 고립무원에 빠졌다.
"동맹을 원한다면 성의를 보이도록 하게."
"이를테면?"
"수장끼리 직접 만나서 흉금을 털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양파의 중간지점을 잡는게 어떨까?"
염미홍의 말에 덕후는 생각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떡여보였다. 사전에 준비된 말을 꺼낸다.
"소생이 중재를 서겠소. 구혼자가 아니라 덕왕부의 집사, 주치로 말이오."
"음!"
탄성과 같은 신음이 노인들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들이 덕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대상련의 사자이며 구혼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뺀질한 얼굴과 그저그런 무공을 지닌, 부모 잘 만난 한량인줄 알았다. 쿠데타의 뒷처리와 한없이 깔보는 마음이 있기에 배경조사를 소홀히한 결과였다. 물론 염미홍과 소월하, 그리고 형욱은 덕후의 정체에 대해 사전에 유추하고 있었다.
"....황실의 사람일 줄은 몰랐소. 허나 관과 무림은 불간섭이오."
"소생은 덕왕부의 많은 집사 중에 하나에 불과하오. 국성을 이어받고는 있지만 서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요. 결혼이 성사되면 집사직은 버릴 것이오."
가짜 집사를 버리고 왕야의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니 아주 거짓말은 아니다. 덕후가 내세운 주치란 가명도 이세계의 이름을 그대로 쓰기 난감하여 미리 만든 것이다. 칭기스 칸의 장남이자 킵차크 칸국을 세운 주치의 음을 빌린 것이다. 몽골어로 주치란 손님, 이방인이라는 뜻이 내포하고 있었다.
"내 이번 동맹에 최선을 다하리다. 장차 아내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원치 않소."
덕후는 이때까지 경망스런 태도를 버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러나 원로들은 십패의 두 사람을 아내로 삼아버리겠다는 말에 기가 찼다. 염미홍이 자리에 일어나서 단하로 내려왔다.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말 하시오."
"둘을 아내로 삼겠다는 건, 십패의 둘을 거두겠다는 의미인가?"
덕후의 앞으로 와 손을 뻗은 염미홍의 손에는 어느새 비도가 들려있었다. 비도의 위치는 목에 한 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살기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형욱도 일순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듯 했다.
"손 떼십시오."
발검하기 전에 경고가 나왔다. 염미홍은 형욱을 향해 싱긋 웃었다.
"본심을 듣고 싶을 뿐이야. 거짓말이라면 너랑 결혼한다는 뜬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야 할테니까. 자, 말해 줘. 십패의 둘을 거두겠다는 의미인가?"
"거두다니! 일을 떠맡는 성격은 아니오."
"십패 둘을 마다하겠다는 것인가?"
"절세가인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 꿈이오. 그리고 당신이나 금보옥을 보면 십패의 일각을 지탱하기에 충분한 역량 아니오? 원한다면 문서로 남겨둘 의향 있소이다."
"그럼 됐고."
염미홍은 비도를 거두었다. 말하는 도중에 반치 파고 들어 목에 혈선이 나 있었다.
"중지를 모아 알려주겠으니 자리를 비워."
염미홍은 덕후에게 턱짓을 하였다. 덕후는 포권을 해보이고 방을 후다닥 나갔다. 애써 태연을 유지한 티가 역력했다. 형욱은 염미홍을 한 차례 노려보다가 그 뒤를 따랐다. 염미홍은 그들이 나가는 것을 완전히 지켜보고는 단상으로 올라가서 우아한 고양이처럼 앉았다.
-기대 이상이군요.
염미홍을 지켜보던 소월하는 내심 웃었다. 사자의 신분을 알면서도 담대하게 대하는 모습이 3원로들에게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러면서 덕후의 목에 혈선이 그어진 것은 염미홍 그녀 나름의 보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들 생각하세요?"
염미홍이 의견을 물어보자 소월하가 선수치듯 말했다.
"필히 성사되어야합니다. 우환을 겪은 뒤라 전력이 상당히 약화되었습니다. 대상련도 금대숭의 죽음으로 상당히 흔들릴 터. 이와 입술의 관계가 된다면 다른 십패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하오문과 대상련은 십패 중에서 무력은 가장 최하위니까요. 당장 우문세가나 영호세가가 도발해오지 말란 보장이 없습니다."
이불상이 반박하듯 말했다.
"하지만 아무까지 무소식이지 않느냐. 별다른 동향도 없고."
"시간 문제죠. 자리를 찾은 지 아직 한달도 지나지 않잖아요? 우문세가는 마교와 척을 지고 있고, 영호세가도 녹수맹과 마찬가지. 우리가 계속 고립을 자처한다면 분명히 밀약을 맺고 공격할 거예요. 예전에 강무제의 폐륜을 당장 덮어둔 것도 영호세가의 도발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으음....그렇다면 상관세가랑 맺는게 낫지 않느냐? 적의 적은 아군이라 했으니...대상련은 아무래도..."
"대상련은 우리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상관세가라면 가능합니다."
현가주 상관 종민은 전대의 인물로 대상련과 흑룡방과 항쟁으로 세월을 보낸 인물이다. 절정 고수일 뿐만 아니라 예능과 사교에 밝아 절강 일대의 유력 신사층과 무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전술 감각 또한 탁월하여 강일도에 견줄만했다. 그의 기반이 되는 복주는 해외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상계의 영향력이 대상련 못지 않았다. 최근에는 폐관 수관을 하다가 주화입마에 들었다는 둥, 죽었다는 둥 소문이 돌고 있지만, 용위수를 비롯한 쟁쟁한 고수들이 버티고 있어 흔들림이 없었다.
워낙 이치에 맞았기에 이불상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 짙은 무기력감이 떠올랐다.
-허허, 나도 늙었군. 폐물이 다되어가는 겐가.
"영감님."
염미홍이 3원로들을 불렀다. 막부르는 것 같으면서도 소녀 특유의 발랄함이 담겨 있어 불쾌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난 고아야. 염곽정이 내 아버지라고 하지만 별로 실감나지 않구."
소월하가 놀라 눈짓으로 만류했지만 염미홍은 모른 척했다. 진실을 밝힐 수 없을 바에 거짓말을 하느니 애매하게나마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 시선을 이불상과 고운경, 악중평과 하나하나 맞추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을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 그렇게 똑똑한 편도 아니고 무공도 쎈 편 아니야. 그래도 천하 각지를 유랑하고다녀서 세상을 모르진 않아. 상황에 따라 잠깐 무를 수는 있어. 하지만 손해 보는 짓은 절대 안해."
염미홍은 평소에 잘 써먹던 애원이나 애교를 쓰지 않았다. 봄날의 미풍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것이 3원로들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문주는....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가족과 행복"
염미홍의 말은 3원로 뿐만 아니라 소월하에게도 파랑을 일으켰다. 아련한 울림이었다. 이 냉혹한 세상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근원적인 관계. 비록 난세의 부침을 당하면 믿지 못할 관계로 돌변하나 요람과 같은 가족의 이상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강씨 부자는 생각보다 많은 죄업을 진 것 같구려."
노안이 축축해지면서 이불상이 말했다. 3원로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궁극으로 축출한 것도 이권이나 대의보다는 가족과 주변이 위협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 아닌가. 사욕이 아님을 알기에 그들이 허리를 굽히고 이번에 하극상에 가까운 짓을 저질러도 비난하는 하오문들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의에 굴종하여 천하에 고개를 당당히 들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이불상은 이 자리에서 후대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 눈 앞에는 명성과 실력은 한참 못미치지만 자질과 가능성만은 무궁한 대기가 둘씩이나 있다. 이불상은 결단을 내렸다.
"금분세수를 해야할 날이 머지 않을 것 같소."
자리를 내놓겠다는 이불상의 안색은 짐을 벗은 듯 후련하기 그지 없어보였다. 악중평과 고운경도 어느새 대립을 버리고 고개를 끄떡여 동조의 뜻을 나타냈다.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염미홍과 소월하였다.
"당장은 아니다. 아직은 손을 쉴 때가 아니니까. 그건 먼 훗날일게야. 그러니 할아버지들이 편히 쉬게끔 어서 증손자를 안겨주려무나. 문주도 마찬가지요."
"할아버지!"
소월하가 얼굴이 붉어져 소리를 빽 질렀다. 염미홍도 마찬가지였다. 노인들은 하나 같이 짖궂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 자리에서 염미홍은 진정한 의미에서 3원로들을 감복 시켰다. 무력이나 교언이 아닌 마음으로. 몇 달 전만해도 남들 눈치를 보며 밥을 빌어먹던 비천한 예인이 봉황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아직은 새끼에 불과하지만 머지 않아 천하 쟁패에 뛰어들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리라.
***
벽이 허물어지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소월하는 첫번째는 하오문과 흑룡방의 잔재를 모두 정리하기 위해 문파 이름부터 새로 지을 것을 주장했다. 문파 이름은 즉석에서 지워졌는데 일자무식에 가까운 염미홍이 알아보기 편하게 "천하문"으로 정한 것이다.
"강서 일대의 하오문들을 모두 지부로 삼아야해요."
소월하의 두번째 개혁이었다. 염곽정은 생전에 남창에 본문을 두고 천하의 하오문들을 지부로 삼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는 중구난방으로 노는 하오문들을 일원하하여 십패에 맞게끔 거대 방파로 우뚝 서게 하려는 것이었다. 중간에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지지부진하였고, 3원로들은 강씨 부자가 하오문의 기반을 아주 빼앗을까봐 인심을 핑계로 중단시켰다.
처음부터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강일도는 직속화를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았고, 대신 3원로에게 중재역을 넘겨 완충제로 삼는 대신 철저하게 부려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염곽정의 딸이 정식으로 즉위했으니 이런 어쩡쩡한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주변의 십패와 경쟁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월하는 강력하게 귀속할 계책을 짜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명백을 유지한 터라 반발이 있을 터, 조직 개편에도 시간이 걸릴 터라 실질적인 착수는 동맹을 성사시키고 난 뒤 일 것이다.
세번째는 동맹과 함께 혼인이었다. 정식 혼인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므로 약혼의 형식으로 해두는 것이었다. 그마저 파격이기 때문에 3원로는 하루에 수십의 인사를 만나는 등 피나는 로비와 단속에 들어갔다. 한편, 천하문과 동맹 건을 들고 덕후는 대상련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만해도 비웃음을 안고 떠났던 그 귀환은 당연히 대상련에 파란을 몰고 왔다. "눈이 어두워 눈 앞의 영웅을 몰라보았다." 하는 분위기는 없고 "반쯤 죽어서 올 줄 알았는데 멀쩡하다니 지지라도 운 좋은 놈." , 처음부터 "하오문에 이용 당한 거 아냐?" 하는 쑥덕임이 대세였다. 덕후보다는 방문 당시 시녀를 자처한 염미홍에 대한 촉각을 곤두세웠다. 흑룡방을 하룻밤에 탈취하여 문주가 된 것은 발 없는 말처럼 대상련에도 알려졌다. 실은 염곽정의 혈육임이 알려짐에 따라 더욱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극소수는 덕후를 의심했다. 경과가 어찌됬던 흑룡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동맹을 들고 온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발을 두고 금보옥은 침전에서 금천효를 끼고 덕후를 맞이했다. 이는 덕후를 상공으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덕후가 천하문에 가서 염미홍과 소월하와 혼인할지도 모른다는 구설을 못들을 리가 없을텐데도 안중에 두지 않는 듯 했다.
"약속은 지켰소."
"상공의 행보에는 소녀도 놀랐사옵니다."
"글쎄, 나는 별로 한 것 없소. 사실은 염미홍이 염곽정의 딸일 줄이야. 보표라고 데리고 다녔던 형욱은 절정고수였고 말이오."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가련한 표정을 짓는다. 발 안쪽에 있던 금보옥의 아미가 상큼 올라갔다. 눈썰미가 좋은 자라면 그가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애처로운 음성이 응수하듯 흘러나왔다.
"용이 날듯이 천하를 종횡무진 할 줄 알았습니다. 용행호보를 기대했던 소녀가 정녕 어리석었던 것인가요."
"오호, 아니오! 아니오! 이것이 다 소생이 덕이 부족한 것이 아니겠소."
지켜보던 금천효는 여우와 너구리의 싸움이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래도 동맹이 성사되니 얼마나 다행이오.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통보를 해야할 것이오."
"그것은 금 총관님이 해주실것입니다."
동맹 자체에 반대하진 않는다. 흑룡방의 위협을 제거하는 소기의 성과는 확실히 거둔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데 상대가 자신을 농락했다는 분한 마음은 없지 않았으나 심증만 있는 상태이니 섯불리 추궁하다가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욕심의 표출보다 덕후를 선택하여 흑룡방과 불화를 해소한 자신의 안목을 추켜세워 대상련의 중역들을 입닥치게 만드는 효과가 절실했다.
"든든한 방백이 생겼으니 전력투구할 수 있겠구려."
"상공의 은혜가 하해 같사옵니다."
다소 비꼬는 어조로 금보옥이 답했다. 중간에 강일도가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삼파전의 양상을 띄어 갔지만, 원래 대상련의 적은 상관세가였다. 중원 내륙의 상권을 주도하는 대상련과 해외에 줄을 잇는 상관세가는 인접한데다가 서로가 가진 영역이 부족하다 여겨 마찰했다. 천하문이라는 신세력이 등장하면서 배후를 위협당할 적이 사라지니 대상련으로서는 마음놓고 상관세가와 대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제대로 도와주시겠지요?"
금보옥은 짐짓 약한 소리를 하였다. 덕후도 지지 않고 맥아리 없는 소리를 내었다.
"자고로 뜻은 하늘이 이룬다고 했소이다. 마음을 편히 잡수시구려."
"음..."
"그리고 하늘이 그대를 외면한다면 불쌍히 여겨 편을 들도록 치성을 드리겠소."
금보옥은 입발린 소리를 하는 저 주둥이에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흑룡방을 처리한 과정이나 지금까지 문답으로 덕후가 정말로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지 않기를 바라는 의사는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분은 끝 끝내 잠룡이길 원하는 분이야.
북경에서 온 서신의 글귀가 뇌리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금보옥은 덕후를 시험하려는 의도를 이쯤에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조종할 수 없는 상대라면 죽이거나 설득하여 공존할 수 있는 지향점을 찾아 협력을 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금보옥은 후자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신경전을 접은 뒤, 한담을 나눈 뒤에 덕후는 조용히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각들 위로 하늘은 황금빛으로 채색된 듯 보였다. 호젓한 길을 걸으면서 덕후는 상념에 잠겼다.
"원래 진행과는 상당히 일탈한 전개가 되었다. 이대로 가도 정말 좋을까?"
강호 출도를 한 이후로 자신도 모르는 변수가 상당수 잠복해 있었다. 운이 좋아서 원하는 대로 국면을 조종했지만 언젠가는 사건이 꼬일 대로 꼬여서 자신이 가진 정보가 전혀 쓸모없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원래대로 진행할까 하는 미련을 몇 분 지나지 않아 잘라냈다. 기껏 천하제일인이 된 꼬락서니로 은거하는 것보다는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로 대낮에 미주가효를 즐기며 활보 하고 싶었다. 또한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적 없는 결심과도 충돌한다.
"뭐, 동맹 건만 마무리하면 첫 단추는 끼운 셈이니, 당분간은 한숨 돌려볼까."
조만간 있을 양자 동맹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절차를 염두에 두면서 덕후는 머리 속으로 다음 공략에 대한 시뮬레이팅하기 시작했다. 너무 골몰한 나머지 망상으로 헤렐레~ 한 낯짝을 하면서 후원을 몇 시진 때 배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대강 part 1이 끝났습니다. 워밍 업을 끝낸 기분이군요. 그래서 지금까지 써논 분량을 읽었습니다......자기 반성이 절설하더군요. 야설 중심을 포기 했기 때문에 케릭터 묘사 및 스토리 텔링에 대한 부재는 더 이상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part = 1권] 단위로 구상한 다음 써볼 생각입니다. (사실 본문에서는 회맹하는 장면까지 쓰려다가 접었는데, 다음 part 의 프롤로그 격으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에 보류했습니다.;) 첫 화를 적을 때는 삭제한 전작들의 벌충 연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목표를 좀 더 높여 성인무협라이트노벨(?)로 해두겠습니다.
자고로 라이트노벨에 미(소)녀 케릭터가 빠지면 말이 안되지요. 무협은 남성 중심이 대세입니다만, 라노베의 경우에는 여자 케릭터도 그만큼 매력적으로 나오지요.(기호별로 요소화 할 정도) 야설이 아닌데도 여자 없으면 안팔립니다.(.....)
그건 그렇고, 성수기가 상반기에 몰려 있기 때문에 1월부터 바쁩니다. 자격증 딸 것도 있기 때문에 여가 시간마저 쪼들릴 것 같고요. 글 올라오는 주기가 엄청 뜸해질겁니다.;
아무튼, 아직은 침만 발라둔 상태입니다. 차차 이벤트로 호감도를 올릴 생각입니다. 앞으로 전개로 보여줄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갑갑하신 것 같아 부연합니다.; (일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연재 속도가 극악으로 떨어질테고.;)
덕후는 히로인들에게 플레그 외에도 키잡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흑막으로 남기 위해서는 대리인들의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여자 치고는..."하는 식으로 어중간한게 뛰어난게 아니라 덕후만 아니었으면 천하를 다툴만한 기량을 지녀야 합니다. (삼국지의 유비, 조조, 손권 처럼 말이죠.) 그렇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고비가 올 때 덕후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성이 있어야 합니다.(다 그런 것은 아니고 히로인마다 편차는 있습니다.;) 그 정도 주체성을 가진 히로인들이 능력 있어보이는 딴놈(무협에선 주인공 라이벌?)에게 넘어가기는 힘들죠. 그런 놈이랑 맺어지면 자기가 가진거 다 버리거나 상당히 제약을 받을텐데요. 라이벌이 딱히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라 사회통념상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무능(?)하더라도 자기 비위 잘 맞춰주고 얼굴마담으로 방패막이로 써먹을 수 있는 덕후가 더 편합니다.(주인공 보정으로 겉보기는 쌔끈한 미남입니다.) 딱히 능력있는 놈이 없어도 가진 바로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점도 있고. 이런 이유들로 능력을 보여주지 않고 도라에몽 같이 만능 도우미 수준으로 한계를 그은 것입니다. (보통 무협이면 "나만 믿어~" 이렇겠습니다만.-_-;)
잡놈이 끼어드는 것은, 덕후의 신분으로 답이 되겠네요. 누가 미쳤다고 왕야를 건드립니까?; 정체를 모르고 시비 거는 놈이 있으면 그땐 주인공의 포스~! 가 아니라 히로인들을 도발시켜서 대신 처리하는 임기응변은 있습니다. 그리고 짐을 주는 성격의 히로인, 육룡사봉 같은 트러블메이커 여자 케릭터는 처음부터 열외 대상 입니다. 고집이 쎄서 자기가 반해서 대책없이 끌려다니거나, 상대편이 일방적으로 목메다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애당초 그럴 근거를 싹 뽑아버립니다. 플레그 성립시 계약조로 되었다함은 이런 부분 때문인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