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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여승무원, 연인, 여자 16

 

 
 

내게 마음을 열어요
그리고,
내 마음도 열어 줘요.
 

 

 

 


"야 이 씨팔년아, 이게 전부 너 때문이야~!!!"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혜미의 고개가 젖혀지며 몸이 비틀거린다.

휘청휘청하다 귓가에 찡~!!!!하는 소음을 느끼며 털썩 주저앉았다.

성욱의 주먹이 혜미의 턱을 작렬한 것이다.


"야 임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야 이 새끼야 그만해~!!"


친구들이 주위에서 성욱의 몸을 껴안고 말린다.


"놔! 이 씨팔~!!! 이거 안놔?? 니들도 다 죽고싶어?? 이 새끼들아 이거 놓으라고!!!"


성욱이 몸을 뒤흔들며 발악한다.
흥분하여 씩씩~!! 거리며 짐승처럼 가쁜 숨을 내쉰다.


"이 씨팔 거지같은 년 때문에 별놈의 꼬라지 다 당하네~!!! 에레이 창녀같은 년아~!!!"


친구들에게 붙잡힌 상태로 또다시 발을 내뻗어 간신히 다시 일어선 혜미를 들고 차버린다.


"흐윽...!"


혜미의 몸이 뒤로 비틀비틀 거리며 밀려나더니 바닥에 쳐박혀 버린다.


혜미의 의식이 점점 흐려져만 간다.....

온 몸이 무기력하다.

머리 속이 어지럽다.


아파...

너무 아파....


소용돌이.....

소용돌이가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닥이 차갑다.....


이 차가운 바닥에서....

난 지금 뭘 하고 있는거지.....

내가 왜 여기에 쓰러져있는 거지....


"야 구성욱 이 개새끼야~!!!"


"뭐야 이 씨팔, 어억...이이...!!"


..................................!!!

..................................!!!

..................................!!!


귓가에서 맴돈다....

귓가에서 맴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 하는 소리....

시끄럽다....


너무 어지러워.....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사방에서 맴돈다.....


여기가...여기가...

어디지....


희미해져가는 의식 사이로 한줄기 형상이 스며들고 있다...

그 한줄기의 형상은 점점 또렷한 형체를 만들어내며 혜미의 뇌리에 하나의 큰 그림처럼 펼쳐진다.


.....??

......

.....!


오빠....!

재성 오빠.....!


다음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혜미는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을 들어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나오질 않는다.

흠...어떤 놈이 장난을 치는걸까...


"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폰을 켜면서 내가 대뜸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다."


태화로군.


"태화냐? 지껄여 봐라."


"푸키키킥"


"무슨 일이냐?"


"라면 좀 끓여다고."


"어디냐?"


"너희 집 앞이다."


"Really?"


"Of course."


"영어 많이 늘었구나, 라면 얻어 먹을 자격 생겼다."


어머니께서 태화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무척 친한 놈이니까....집안끼리 서로 친하다.

잠시 후...내 방에 둘이 앉아 있었다.


"아버님은?"


"잘 알잖냐. 주말에도 정신 없으시다. 한잔 했나 보구나?"


"했으니까 해장하러 왔지."


"어디서?"


"나이트 죽돌이 하고 왔다."


"물 좋았겠네?"


"나만한 미남은 없었다."


"잘났네....좀 있다 라면국물에 밥도 말아먹어라."


"그렇잖아두 그럴 생각이다...담배 펴도 되냐?"


"내 방은 흡연실이다."


찰칵. 태화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하고 한모금 맛있게 빤다.

그 꼴을 보고 내가 물었다.


"담배 맛있냐?"


"꿀 맛이다."


"나이트에서 수확 좀 있었냐?"


태화가 다시 한모금 빨더니 연기를 내 뱉는다.

그러더니 눈을 들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뭘 봐, 임마?"


녀석의 음흉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방어자세를 취했다.


"피식~!!"


내 모양을 보고 태화 놈이 웃는다.

그러더니 슬며시 웃음기를 거두고 다시 날 바라보면 말을 건넨다.


"물어보자."


"좋지, 살살 물어라, 힘주면 죽는다."


"너랑 혜미랑 어떤 사이냐?"


"응?"


"혜미 맞지? 그애 이름이. 너랑 어떤 사이냐구?"


"친한 동생이잖아."


"친한 동생 맞는거냐?"


"당근이지."


"친한 동생 평소 땐 뭐하고 다니냐?"


"말했잖아, 비행소녀라고. 걸핏하면 비행을 일삼으면서 가출을 밥 먹듯이 하는걸로 알고 있다."


"장난치지 말고."


"스튜어디스잖아."


"그건 아는데....정말 네 요거 아니냐?"


"............................."


줄곧 장난을 치다가도, 갑자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혜미의 이야기로 장난을 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 좋다. 그 친한 동생이랑 요즘도 자주 연락하냐?"


"글쎄...사실 어젯밤이랑 오늘 아침에도 전화했는데 연락이 안가더라."


태화가 내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을 잇는다.


"네가 말을 안하려고 하니 난 잘 모르겠다.

난 그날 너랑 혜미를 보고 그냥 오빠동생 사이는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모르는 네 친한 동생이 또 어딨냐?

뭐 네가 오빠동생이라고 한다면 난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태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물어 봐야겠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데?"


"나 어제 혜미씨 봤다."


"어디서?"


"나이트. 강남에서."


"오호, 그애가 부킹 상대로 끌려왔던?"


"장난아냐, 임마. 어제 장난 아니었어."


"..................?"


"어제 어떤 남자애들이랑 저녁에 같이 들어오더라. 내 친구들이랑 구석에 앉아있다가 봤다.
큰 소리로 오랫만이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못들었는지 못들은 척 하는건지 그냥 룸으로 들어가더라."


"............................"


"네 애인이라면 남자애들이랑 룸으로 들어가선 안되겠고,
네가 아끼는 동생이라면 평소에 동생이 뭐하고 다니는지라도 신경 좀 써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무래도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태화 녀석의 낯빛이 납덩어리처럼 무겁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걸까?

태화가 담배를 빨며 말을 잇는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

그런데 나중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나도 그때 벌써 꽤 마셔서.

어떤 키 큰 남자가 혜미를 부축하면서 나오더라.

옷차림이 많이 흐트러져서 형편없었어.

술 취한 년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암튼 멀리서도 보기는 안좋더라.

그런데 같이 들어왔었던 놈들 같은데...

어떤 뚱뚱한 놈이랑 다른 두 놈이 막아서고 뭐라고 지껄이는 것 같더라고.

조금있다가 무슨 일인지 그 부축하던 키 큰 놈이랑 뚱뚱한 놈이랑 말다툼을 벌이고 실랑이가 일고
웨이터들이 뛰어가더만.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고....

근데 그 뚱뚱한 새끼가 갑자기 혜미한테 주먹을 날리더라.

같이왔던 일행놈들 말리고...뚱뚱한 새끼 소리지르면서 발악해대고...

또 막 혜미를 두들겨 패더라.

참 나...세상에 별의 별 놈 다 있다는 거 진작에 알고는 있었지만..그 새끼도 어지간한 새끼더구만.

혜미 개처럼 두들겨 맞더니 바닥에 철퍼덕하니 처박히더라.

그리고 그 뚱뚱한 놈 키 큰 놈한테 막 두들겨 맞고..."


"혜미가 맞았다고?"


내가 태화의 말을 급히 끊었다.

내가 생각해도 큰 목소리였다.

흥분하고 있었다.

태화가 잠시 내 반응에 순간적으로 놀란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많이 맞더라. 세상에 남들 보는데서 여자 그렇게 두들겨 패는 새끼는 또 첨 봤다."


내가 폰을 집어들었다. 혜미에게 전화를 건다.

신호가 간다....

그런데 받는 사람이 없다.


"나 좀 나갔다 올께."


내가 황급히 옷을 챙긴다.


"야!" 태화가 날 불러세운다.


"라면은 좀 먹고 가면 안돼?"


내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선다.

태화를 돌아보며 다시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 웨이터들이 사람들 막고 진정시키고 그 애들 어디론가 데려가고...

난 술 마시고 어리버리하고 황당하고,

엉겁결에 주변 사람들한테 휩쓸려서 나서보지도 못했다."


태화가 다시 담배를 한 대 꺼낸다.


"얘들아! 나와서 식사하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태화가 담배를 도로 담배갑에 집어넣으며 말을 한다.


"나가자, 우선 한 그릇 하자.

신경 좀 써라.

친한 동생이라면 친한 동생이 왜 그런 봉변 당하는지도 좀 알아보고 그래야 할거 아냐."


태화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나를 위로하는 듯 하다.

내 표정이 뭔가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것 같다.


시간이 좀 흘렀다.

태화가 돌아가고 나서도 마음이 안정이 되질 않는다.


혜미가 두들겨 맞았다구? 개처럼?

혜미가 왜?

같이 있었던 새끼들은 또 뭐야?


혜미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렇다고 남자친구가?

나랑 잤다는 게 탄로가 났나?

그럼 하필이면 나이트까지 가서 룸에 들어갔다 나와서?


뭐야 도대체....??

맞을 짓 하고 다닐 애는 아닌데....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혜미는 참 알다가도 모를 애다.

도대체 뭘까....


예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알고 싶다.

혜미에 관한 일이니까......

어느샌가부터 혜미에 관한 일은 알고 싶어져 버렸다.


갑자기 혜미가 맞고 나뒹굴었다는 태화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상상을 해본다.

혜미의 모습을....

혜미를 때리는....

아니 두들겨 패는 어떤 뚱뚱한 놈의 모습을...


두들겨 패?

여자를?

그것도 개처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져가는 혜미의 모습...


혜미가...

혜미야...


갑자기 숨이 탁 막혀왔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뜨거운 것이 내 안에서 밀려들어온다.


분노.

분노였다...


분노의 감정이 내 혈액을 타고 온 몸을 돌아 솟구치고 있었다.

정체모를 대상에 대한 어떤 분노가....


잠시 후에 그 분노는 더 활활 타올라 온 몸을 감싸온다.

참 상상력이 풍부해서 문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혜미는 누군가에게 맞고 다닐 짓을 할 아이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때린 놈이 나쁜 놈이라는 말이 되는데....


어떤 놈일까....

뭐가 그토록 맘에 들지 않아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혜미를 개패듯이 두들겼단 말인가....


키 큰 놈이랑 룸 안에서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라....

그럼 그 놈이랑 안에서 뭔가 썸씽이라도 있었나....

옷차림새까지 흐트러져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군.


그런데 자기가 건드린 여자를 부축해서 끌고 나왔다?

흠...파트너에게 감동을 받았다면 데리고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러니까 안에서 키 큰 놈이랑 하고나서 나오다가 뚱뚱한 놈한테 딱 걸렸다?

그래서 뚱뚱한 놈이 열받아서 선빵을 날리고, 방금 정을 나눈 키 큰 놈이 뚱뚱한 놈을 때렸다라....

그거 말되는군.


아냐아냐...뭔가 이상하잖아.


그럼 왜 뚱뚱한 놈은 키 큰 놈은 그냥 내버려둔대?

설마 두 놈이서 아는 사이?

아는 사이면 싸움 더 크게 나야 하는거 아냐?

배신감에 치가 떨릴텐데....


흠....약간 복잡해 지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쉽게 하고 있지만,
생각은 홀가분한듯이 하고 있었지만....


내 몸 속에선 혜미를 그렇게 만든 녀석에 대한 적개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혜미를...

혜미한테 그런 짓을 하다니....

그 착하고 상냥한 아이를......


머리 속에는 두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나는....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혜미를 염려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혜미를 그렇게 만든 녀석을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왜냐하면...

혜미는.....

나는 혜미를....

나는...


생각을 접고선 다시 전화를 걸어본다.


받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을 거다.


혜미의 웃음 띈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눈 앞에 떠오른다.

귀여운 보조개....

예쁜 눈....

그 눈빛....


담배를 들고있는 내 손가락이 갑자기 떨려온다....

손가락에서부터 시작해서...뭔가가....


마음을 진정시키자...진정시키고 냉정하게 생각하자....

그런데.....

그런데.....


상체가 부들부들 떨려온다...

온 몸에서 경련이 일어난다.....


마음이....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내 두 눈이 폰을 노려보고 있다.


혜미야...

혜미야...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심스러운걸까
용기가 없는걸까

모든걸 알면서도
다가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바보

전달되지 않는 진심은
언제나 지겨운 엇갈림을 예고하기 마련인데...



 

 

사람들이 참 어지럽게도 지나다닌다.

왔다갔다....웅성웅성....


무엇이 그토록 바쁠까.


대한민국에 아픈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구나.

근데 조용히 안정을 취해야 할 곳이 어찌 이리도 소란스러운가.


다시 바깥으로 내려와 담배를 또 하나 입에 문다.

불을 붙이고 한모금 빨았다 내뱉는다.


담배를 끊어야지....입에서 단 내가 난다.

싫다, 이 역겨운 냄새....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피워지는군.


예전에 담배 피우는 걸 주저할 때마다 태화는 항상 내게 말했었다.


“피워 임마, 이 좋은 걸 왜 안피우냐?”


어차피 피울거 왜 항상 피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어봤을까.
담배 피우는 것도 허락받고 피우나.


다 큰 놈이....참 난 순진했었구나.


혜미를 기다리고 있다.

혜미는 온다, 틀림없이 온다.


혜미가 어떤 놈에게 맞은 것이 금요일 밤이었고, 어제가 토요일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어제 하루 정도는 나름대로 요양하면서 쉬었을 테니,
어쩌면 오늘 쯤에는 몸을 가눌 수는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 어쩌면에 희망을 걸어보고 있다.

어제는 통화가 되질 않았다.

신호는 갔는데 사람이 안받는다라....


그렇다면 정말 의외의 경우가 아니고선 전화를 받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부러 전화를 피했다는 이야긴데....


그래서 결국 전술을 바꿨다.


혜미를 만나야겠다는 전략은 바뀐 것이 없다.

다만 혜미를 만날 수 있도록 전술을 바꾼 것이다.

전술은 바꿀 수 있지만 전략은 바꾸지 않는다.


태화 녀석으로 하여금 혜미에게 두어번 연이어 걸게 한 후에 문자를 치게 했다.


“혜미 씨, 연락이 안되네요, 문자를 남깁니다.

재성이가 사고를 당했어요, 교통사고입니다.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지금 강남 00병원 00에 있습니다.”


혜미가 사는 곳이나 우리 집에서도 거리상으로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신빙성이 가는 곳이다.


나는 지금 병원에 있다.

가르쳐 준 위치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맞다면....


혜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는 놈의 존재의 비중이
대략이라도 내 생각과 맞아떨어진다면,
별 이변이 없는 이상 혜미는 한번쯤이라도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이 있을까봐 두려워 병실까지는 못들어온다 하더라도
최소한 밖에까지 와서는 동정을 살피기라도 할 것이다.


긴가민가 할 수도 있겠지만,
다짜고짜 태화까지 동원해서 사기를 치리라고는 쉽게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 정도 의심을 한다 하더라도 혜미 성격에 쉽게 코방귀를 뀌며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혜미의 이번 달 스케줄은 알고있다.

스케줄 상으로 판단하더라도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쉽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문득 생각을 해본다.

내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접하고 혜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혜미가 누군가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태화에게 전해 듣고 나는 몹시 흔들렸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태연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혜미와 강화에서 섹스를 하던 날 밤 나는 울었다.

혜미의 꿈을 꾸던 날 밤 나는 내 침대에서 또 한번 울었다.


혜미 때문에 현실에서도 울었고, 꿈 속에서도 울었다.


혜미가 멀쩡해도 울었었는데,
어떤 놈한테 맞아서 이젠 멀쩡하지도 않게 된 애를 생각하면서
내가 어찌 태연자약 할 수가 있겠는가.


지금의 나는 혜미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사기까지 칠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혜미는 지금쯤 어떤 심정일까.


궁금하다.


조심스레 예상은 해보았지만, 혜미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내 존재의 비중이
어느 정도 무게를 점하고 있는지가 몹시 궁금하다.


이런 걸 신경쓰는 걸 보면 확실히...

확실히 혜미는 엔조이 상대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어서 오너라...어서 오너라...혜미야...”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2초쯤 후에 추가로 중요한 한마디가 더 보태졌다.


“보고 싶다....”


그래,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혜미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쨌든 얼굴이라도 한번 직접 보고 이야기해 보자.

냉수도 온수도 싫다면 서로 섞어서 미지근한 물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혜미는 나타나지 않는다.

상관없다.


나는 담배와 음료수만 있다면 내일 새벽까지라도 여기 죽치고 앉아서 기다릴 수 있다.

다행히 매점은 가깝다.


어차피 오늘은 휴일이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휴대폰까지 휴대하고 있으니 해결 못할 일은 없다.


지나가는 간호사 언니 혹은 동생들의 치마 아래 매끈한 혹은 굵은 다리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고 바지입은 간호사 언니 혹은 동생들의 늘씬한 혹은 그 반대의 몸매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다.
예쁜 얼굴까지 함께 눈에 띄면 더 좋고.


혜미가 안 나타나면 본전이고, 나타나면 나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어차피 "가능성"이라는 것에 승부를 걸어보는 것이니까.


나는 기다린다.

무조건 기다린다.

죽치고 기다린다.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나타나라....

나타나라....

나타나라....



가만, 지금부터 “나타나라” 라는 말만 계속 중얼거려 볼까?
몇번 째에 나타나는지?


1000 번 이내에 나타나면 다음에 섹스 할 때 최대한 부드럽게 해주고,  
1000번 이후에 나타나면 괘씸죄로 마구마구 아프게 쑤셔넣는 걸로?


헛, 그것도 재미있겠다, 한번 해볼까?

귀찮다.


그냥 한번만 간절하게 기도해보자.


나타나다오, 예쁜아!


..................

..................

..................

..................

..................


잠 온다...........



이러다가 꿈 속에서 먼저 만나겠다 젠장 -_-;;;


하지만....꿈 속에서 만나봐야 아무 소용도 없다.

그림의 떡일 뿐이지.


그렇지,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 있다.

비장의 무기 MP4를 준비했다.

동영상도 담아왔다,

새로 알게 된 좋은 노래도 몇 곡 있다.


현대인은 적당하게 현대문명의 이기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정보를 먼저 득하는 자가 유리한 세상이니까.


일본노래 전문가인 친구에게 이 노래를 아느냐고 멜로디를 흥얼거렸었다.

혜미가 흥얼거리던 그 일본노래 말이다.


친구녀석은 한번 듣더니 바로 알더군.

전문가는 전문가다.

그런 친구녀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今宵の月のように.


“오늘 밤의 달처럼”이라는 일본 노래였다.


파일을 다운 받아서 들어보았었다.

노래가 괜찮았다.

몇 번 들어봤더니 더 좋았다.


다음엔 혜미에게 불러 달래서 혜미의 맑은소리 고운소리 버전으로
한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혜미와는 아직 이런 화제를 갖고서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었구나....

깜빡 잊고 있었다.


혜미가 일본노래를 좋아하는 듯 해서 그 동안 다른 유명한 일본노래도 여러 곡 들어보며
나름대로 연구를 해 보았다.


X재팬이라는 이름만 익히 들었었는데, 그 외에도 쓸만한 녀석들의 노래가 꽤 있더군.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여러가지에 대해서 많이 알면 그만큼 인생이 더 다채로워진다.

물론 아는 것이 병이 될 때도 있겠지.


호기심이 생겨서 일본영화와 드라마들도 그 동안 틈나는대로 몇 편 더 보았다.

“데쓰노트”도 보았고,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도 보았다.


둘 다 괜찮았다.


그래서 데쓰노트에 혜미의 이름을 적어놓았다는 문자 장난도 칠 수 있었다.

혜미는 문자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기회가 된다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가지고도 한번 장난을 쳐봐야겠다.

빨리 그 기회가 왔으면 좋겠는데....


쓸데없는 생각도 이럴 땐 꽤 쓸데 있군,

나름대로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그 때였다.


저 멀리서....


낯익은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나의 승리다....


혜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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