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22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22 회 심계검풍(心計劍風) 1
에도성(江戶城) 본전 앞 넓은 뜰 안쪽에 마련된 단상(壇上)에 이에야스가 점잖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혼다 타다카츠 (本多 忠勝)를 비롯한 중진들이 자리해 있다.
어전(御前)의 무예경연이 시작되어 장중에는 목숨을 건 진검승부(眞劍勝負)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어전시합의 장원은 그 높은 무예를 자랑하며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등용될 수 있기에 조그만 재
주라도 가졌다는 낭인(浪人)들은 목숨을 담보로 그 기회를 잡기위해 모두 모여드는 자리였다.
「아핫..!」
「얏.. 야앗..!」
챙그렁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호흡..! 비무대에 오른 무사(武士)들은 상대를 일거에
제압하기 위해 살기(殺氣)등등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네노리의 곁에 함께 자리하고 있는 명(明)의 일행들은 모두 신경을 곤두세워 비무장을 노려
보고 있다. 그중 가장 긴장을 하고 넓은 마당에 꽉 찬 사람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인물은 고
로(吾郞)였다. 분명 이 무리들의 틈에 자객들이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라 짐작을 하고 촉
각을 곤두 세우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장중에 박수소리가 울리며 이에야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으하하하하.. 걸출한 무예의 솜씨로다. 이리 앞으로 오라!」
무예경연의 장원이 선출된 것이다.
어전시합의 진행은 도외시 하고 장내 인물들의 움직임에만 신경을 쓰고 있던 명(明)이 고개를
돌려 장원을 한 그 무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명(明)의 눈동자가 둥그렇게 커진다.
(엇.. 저놈은 야스다(安田)가 아닌가? 철군을 하자 곧 시국의 변화를 눈치 채고 시마쓰장군을
배신해 자취를 감추었던 저놈이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이곳에 왔구나! 으음.. 찾고 또 찾아 헤
매던 부모님의 원수를 여기서 만나다니.. 이제는 놓치지를 않는다!!)
그러나 내색을 않고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오늘의 중책때문이었다. 이곳에 나타날 자객의 움직임을 찾아 그들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 막중
하기에 비무따위는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제 장중에는 어전대회를 무사히 끝내고 울긋불긋 치장을 한 광대들이 축하의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장중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다섯 명의 광대..!
중앙에는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샤미센(三味線)을 품에 안고 천천히 걷고 있으며 그의 좌측은
붉은 깃발, 우측은 푸른 깃발을 든 광대가 뒤 따르고 있으며, 가장 후미에서 움직이는 두 사람
은 폭이 넓은 오색 천을 한끝씩 나누어 잡고 걷고 있었다. 이제 그 광대들에 의해 흥겨운 축하
의 공연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 순간 명(明)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어.. 저 여인의 걸음걸이는 남자의 걸음이다. 남자가 여장(女裝)을 한 것이 분명하다.)
의심스러운 눈길로 슬쩍 고로를 바라보는 명(明)에게 고로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저놈들이구나.)
명(明)는 살며시 윤충의 소매를 잡아 끌어 귓속말을 전했다.
「윤(尹)공.. 저 광대들이 자객이오. 저들의 가장 뒤쪽에 오색 천을 펼쳐들고 있는 저 두 사람
은 앗차.. 하는 순간 천을 넓게 펼쳐 장중의 시선을 가리려 할 것이외다. 윤공과 설아낭자는 은
밀히 저들 가까이에 다가가 유사시 천을 두 동강이를 내고 시야을 확보해 주시오. 그러나 저들
이 문초를 받을 수 있도록 목숨만은 살려두시오.」
살며시 당부를 한 명(明)은 이에야스의 뒤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 * * * * * *
잔잔하게 연주되던 샤미센(三味線)소리가 갑자기 격렬한 음(音)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맨 뒤에서 따르던 두 광대가 허공으로 뛰어 오르며 오색 천을 넓게 펼쳐 장중의 시야를
가린다.
그와 동시에 양쪽의 두 광대가 들고 있던 청홍(靑紅)의 깃발 속에 감추어져 있던 날카로운 창날
이 이에야스의 좌우에 앉아있던 중진들을 덮쳐가고, 샤미센(三味線)을 연주하며 한발 한발 다가
서던 남장 여인이 그 악기속에 감추어 진 검(劍)을 뽑아들고 이에야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어어.. 왠놈들이냐?」
당황해 소리 지르는 이에야스의 비명소리를 뒤로하고 흰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윤
충과 설아는 공중을 뒤덮고 있는 오색 천을 잘라 시야를 트이게 하며 두 광대의 허리를 칼등으
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윤충과 설아의 검을 받은 두명의 자객은 끽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뒹굴었다.
「타앗..!」
이에야스의 뒤쪽에서 암암리에 준비하고 있던 명(明)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라 이에야스의 가슴
을 노리고 날아드는 여인의 검을 지팡이로 쳐 내며 한 손으로는 여인의 복부를 번개같이 가격한
후 유유히 장중(場中)으로 내려앉았다.
- 퍽.. 챙거렁..!
검과 여인이 동시에 끈 떨어진 연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운신조차 못하고 뻗어 버렸다.
「내군(內軍)들은 무엇을 하느냐 어서 저놈들을 포박하라.」
다급한 위험에서 벗어난 이에야스가 시위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앞을 막아서 있는 무네노
리를 향해 질책을 한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더냐? 저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내 목숨이 사라질 뻔 하지 않았느냐! 어
서 저들을 가까이 부르라!!」
「예.. 주군(主君)」
* * * * * * * * * *
어수선 하던 장중의 소란이 가라앉고, 이에야스의 앞에 불려온 명(明)과 윤충 그리고 설아를 물
끄러미 바라보던 이에야스가 이상하다는 느낌으로 물었다.
「너희들이 나의 목숨을 구했다. 헌데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닌 것 같구나?」
그러자 곁에 있던 무네노리가 얼른 대답을 올린다.
「철군선을 탄 도공들을 호위하여 온 조선의 유민(流民;난세 또는 혹심한 억압에 못 견뎌 고향
을 떠나 타향을 떠도는 백성)입니다. 이곳에 정착하여 한 세상 편히 보내고 싶다 합니다.」
「오호.. 그렇더냐? 이 청년과 두 남녀의 덕에 내 목숨이 부지 되었다. 또한 재주들이 비상하니
잘 돌보아 주도록 하라. 어허.. 다행이로고. 그래 너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조금전 번개처럼 상대를 제압하던 이 들의 재주가 신기한 듯 묻는다.
「예.. 윤충이라 하오이다.」
「설아라 하옵니다.」
「소생은 명(明)이라 합니다.」
「좋은 이름들 이로구나! 내 큰 상을 내려야 겠구나!!」
이에야스의 기분좋은 칭찬에 명(明)이 앞을 나서며 말한다.
「상이라니요? 합하(閤下)..! 그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어느 누구라도
합하(閤下)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었을 겁니다. 다만 저희들이 한발 앞섰던 것 뿐이지요.」
「사양을 하는 마음도 아름답구나. 명(明)이라 했느냐? 옳치.. 내 앞에서 너의 기량을 한 번 더
보여줄 수 있겠느냐? 가만.. 가만, 오늘 장원을 한 무사가 어디 있느냐? 저자와 겨루어 이긴다
면 내, 너의 원하는 바를 한 가지 들어주마.」
수십 년을 전장에서 지나온 이에야스였다. 그 또한 뛰어난 재주를 지닌 이 청년의 솜씨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다시 한 번 자세히 보고싶은 욕심이 꿈틀거린 것이다.
잠시 말이 없던 명(明)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입을 열었다.
「합하(閤下)..! 진검(眞劍)승부 오이까?」
무네노리가 황급히 나선다.
「주군.. 무리입니다. 혹시 장원을 한 무사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명(明)의 무예를 짐작하고 있는 무네노리다. 때문에 다급히 만류하려는 무네노리에게 이에야스
의 노한 호통이 되돌아 왔다.
「에이 못난 놈..! 뛰어난 솜씨로 장원을 한 저 무인이 지기라도 한단 말이냐? 그 정도도 감당
못하는 놈이라면 정원의 자격도 없을 터..! 어떠냐? 진검으로 겨루어 보겠느냐?」
고개를 돌려 명(明)을 똑바로 주시하며 다시 한 번 의향을 묻는다.
「합하(閤下)..! 검에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도 좋으시다면 합하(閤下)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어전에서 상대를 베어도 무방 하냐는 명(明)의 물음이었다. 이에야스는 그런 명(明)의 모습을
보며 껄껄껄 웃는다.
「으하하하.. 검에는 눈이 없다? 그래.. 그만한 배포는 있어야지. 허락하마. 장원을 한 야스다
(安田)는 어디에 있느냐!」
이에야스의 부름에 야스다가 앞으로 나서자 그에게 다짐을 했다.
「오.. 야스다(安田), 이 청년의 말을 들었느냐? 진검에 자신이 없으면 겨루지 않아도 좋다. 어
찌하겠느냐?」
「염려 마옵소서.. 진검(眞劍)입니다. 진검(眞劍)으로 겨룰 것입니다.」
「허허허.. 과연 장원이로다. 자.. 시작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