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19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19 회 거친 여인(女人) 2
이미 어두움이 내려 사방이 어둑해진 시각..!
황망(慌忙)중 하루(春)와 사다에의 안내로 찾아 든 집은, 맑은 물이 흐르는 개천을 지나 에도성
(江戶城)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의 조그만 목당(木堂)이었다.
「저의 거처입니다. 누추한 곳입니다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실내로 안내해 촛불을 밝히며 자리를 권하는 사다에의 말에 따라 모두 방안에 앉은 후 사다에가
다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야규우(柳生) 마을의 아낙인 사다에라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윤충(尹忠)이라 하외다.」
「설아(雪娥)라 합니다.」
다소곳 손님을 맞는 사다에를 향해 윤충과 설아가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그녀의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명(明)이었다.
「예.. 예..? 야규우(柳生)라 하셨소? 과연..!!」
「조그만 재주로 여러분을 시험하려 했던 어리석음..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깊이 고개를 숙이는 사다에를 보며 윤충과 설아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야규우가(柳生家)라면..! 이에야스에게 신뢰를 받는 측근이며 병법 스승을 하고 있는 야규우 무
네노리(柳生宗矩)의 가문이 아닌가!
그 야규우 신카께류(柳生新陰流)의 검법을 익힌 여인이라..! 서로 대면을 하자마자 배포를 부려
볼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참 동안 상황을 살피던 하루(春)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다에님,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세요. 저는 무슨 말씀을 나누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습
니다.」
하루(春)뿐 만이 아니었다.
그 방에 모인 모두 사다에가 행한 의외(意外)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호호호.. 하루(春)님, 저보다 명(明)공자께 묻는 것이 더욱 명확하겠지요. 공자..! 목숨을 노
리고 날아드는 단검(短劍)앞에서 어찌도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는지 저에게도 알려 주시지요.」
생글생글 웃으며 명(明)을 바라보는 사다에의 눈길에는 연모(戀慕)의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하하.. 사다에님, 천하 제일가는 병법가(兵法家) 야규우(柳生) 가문의 사람이 소생을 놀리
려합니다 그려..!」
명(明)의 말에 사다에가 윤충을 가리키며 말한다.
「아니에요 공자님, 조금 전 우리 모두가 이분 공자의 발검(拔劍)을 보았을 겁니다. 한 치의 허
술함도 없이 몸을 놀려 저의 수리검을 털쳐 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순간이 윤공자는 온몸
에 허점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지요.」
사다에의 말을 듣고 있던 윤충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허.. 고얀..! 비겁하게 암공(暗攻)을 가한 그대가 어찌 나를 핍박하는가?」
「호호호.. 윤공자님, 그게 아닙니다. 저는 공자님의 무예(武藝)를 폄하(貶下)하려는 생각이 조
금도 없습니다. 다만 공자님의 기예(氣銳)는 공격만을 앞세운 무모(無謀)함 때문에 많은 틈이
드러났다는 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이이.. 그래도 잘못을 인정 않고 그런 억지를..! 부인..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나와 한번 겨
루어 보리까?」
화가 가라앉지 않는 표정으로 식식거리며 사다에를 향해 다그치는 윤충을 쳐다보며 명(明)이 슬
며시 끼어들었다.
「자자 윤충(尹忠)공.. 그만하시오. 사다에님의 말이 옳습니다. 윤공은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수리검을 쳐내며 뛰어오른 그 순간 윤공의 허리 쪽은 완벽히 비어있었습니다. 사다에님이 그 때
를 노려 검을 뽑아 휘둘렀다면 윤공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을 겁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다에를 바라보던 윤충이 눈을 감으며 그때를 되뇌다 얼굴색이 백짓장
처럼 변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상황을 돌아보던 윤충은 사다에의 말이 한 치도 틀리지 않
다는 것을 느낀 때문이었다.
그런 윤충의 표정을 살피던 사다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셨습니까? 금방 깨닫다니 역시 윤공자께서도 뛰어난 분이십니다. 그러니 윤공자님의 무예는
한눈에 드러나는 기량이라 금방 알 수 있었으나 제가 지금도 깨닫지 못한 점은 나뭇잎 한 장의
간극(間隙)이라 하신 명(明)님의 그 말씀입니다.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 비록 살기는 느끼지
않았다고는 하나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날아드는 수리검 앞에서 미동도 하지않고 서 있는 그 태
연함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지?」
사다에는 말을 마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명(明)을 쳐다보며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하하하.. 사다에님, 아무리 날카로운 칼날로 상대를 베려해도 그 칼날이 머리카락 한 올의 공
간이라도 남기고 상대의 앞에서 멈춘다면 그 검은 상대를 벨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나뭇잎 한
장 차이의 간극(間隙)이지요. 살기(殺氣)없이 날아드는 수리검에 목숨을 염려할 일은 없었던 거
지요. 다만 그에 앞서, 소생을 향해 날아들던 단검(短劍)은 소생의 곁을 스쳐 지나갈 것이라 이
미 짐작을 해 꼼짝 않고 있었던 겁니다.」
「혹여 날아드는 수리검을 막아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으셨던가요?」
「소생이 검을 빼들고 막으려 했다면 소생에게는 윤충공과 꼭 같은 빈틈이 생겨났겠지요. 그 빈
틈을 상대에게 보이지 않고 막으려 한다면 수리검을 쳐내는 동시에 부인께 뛰어들어 부인이 발
도를 하기 전에 부인을 베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부인의 몸에서는 살기가 감지되지 않았습
니다. 그런 부인에게 굳이 뛰어들어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지요.」
「그런 것이었습니까? 과연..!」
「어느 경우에도 당황하지 말고 오감(五感)을 곤두세워라. 슬픈 자리, 기쁜 자리, 감상에 젖을 자
리, 또한 여인을 가슴에 품어 절정의 고비를 넘고 있는 그 순간에도 단 한 순간 마음을 흐트리
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어라. 그렇지 않으면 무고한 생명을 다치게 할 것이니라!! 스승님의 엄격
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저의 고향인 야규우(柳生) 마을에도 그 같은 일화(逸話)가 있습니다.」
지난날의 생각에 젖어드는 향수(鄕愁)가 가득 깃든 표정이었다.
「어떤 일화가..?」
「마을의 오라버니께서 검술을 연마하고 계실 때 였습니다. 그 분의 아버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셨지요.」
「오호.. 그래서요?」
「그 연무장 한쪽의 낮은 나뭇가지 위에 산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아 있었지요. 그때 그 아비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뭐라고 말을 하셨는지?」
「한칼에 저 새의 목을 벨 수 있겠느냐고..? 아비의 말이 떨어지자 아들은 아비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소자가 수련을 한지 십 수년,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요. 말을 마치
자 마자 번개처럼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아들이 검(劍)을 뽑아 휘두르는 순간 그 산새는 한발 앞서 더 높은 나뭇가지 위로 휙.. 날아
올라 피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비는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습
니다.」
「그것 참..! 그리고 그 다음은..?」
「아비가 허리에 꽂힌 장도(長刀)를 빼어들고 높은 나뭇가지위의 새를 향해 천천히 휘둘렀습니
다. 그 순간 그 산새는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날이 시퍼런 장도위로 날아와 앉았습니다. 그리
고 아들을 향해 말했지요. `너의 검기(劍氣)는 이미 이 아비를 넘어섰다. 그러나 네가 빼어든
검에서는 무수한 살기(殺氣)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 조그만 새는 자연과 벗하며 스스로 살아
남는 법을 익힌 것이다. 너에게서 풍겨나는 그 가공할 살기를 어찌 느끼지 않았겠느냐! 그리고
는 말없이 돌아서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으음.. 아들에게 활인검(活人劍)을 가르치려 한 것이었구나!!」
「그렇습니다 명(明)공자님, 그 아비는 바로 그 점을 아들에게 가르치려 한 것이지요. 마치 공
자님이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과 같은 생각이었지요. 허나.. 저 윤공자께서는 자신의 기량만 과
신을 한 탓에 급히 서둘기만 하셨지요. 그 강한 호승심(好勝心)이 자신을 옭매어 변화무쌍한 상
대를 미처 살피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요.」
사다에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윤충(尹忠)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그도 사다에의 말을 깊이 새
겨 듣는 표정이었다.
* * * * * * * * * *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은 검(劍)의 극(極)을 서로 논하고 있는 말들이었다. 또한 그 대화
중 명(明)이 발검(拔劍)을 했다면 오히려 사다에가 목숨이 위험해질 뻔 했다는 내용이 아닌가?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하루(春)가 사다에를 향해 따지듯 물었다.
「저런 저런.. 휴우.. 시험을 하려했던 사다에님이 오히려 명(明)님의 손에서 목숨을 건진 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다에님, 왜 초면인 명(明)님을 시험하려 하셨어요?」
「호호호 하루(春)님..! 하루님이 어찌나 명(明)님을 자랑하시던지, 혹시나 귀공자(貴公子)에게
마음을 빼앗긴 아낙의 입에 발린 칭송이 아닌가 하여, 어떤 분인가 그 실체를 알고 싶었을 뿐이
었어요. 용서하세요 하루님..!」
슬며시 달아오르는 미음이 투기(妬忌)의 마음인가?
하루(春)의 얼굴이 화끈 붉어지는 모습을 본 명(明)이 얼른 그녀를 향해 말머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하루(春)님.. 소생이 알기론 야규우(柳生)가문과 하루님의 문중은 서로 동군과 서군으
로 나뉜 적(敵)으로 알고 있는데 두분은 매우 가깝게 지냈나 봅니다?」
명(明)뿐 아니라 에도성(江戶城)으로 잠입을 하려는 윤충과 설아도 역시 그 점을 궁금하게 여기
고 있는 중이었다.
「아하.. 그건..! 우리 가문과 가까워진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