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야설) 붉은 달(月)을 베다. 17 회
** 白雲俠(낭만백작)著/ 붉은 달(月)을 베다. **
제 17 회 혜안(慧眼)과 망집(妄執) 2
「고니시(小西)님은 내가 그렇게도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단 말인가?」
독백하듯 말하며 슬쩍 고로(吾郞)의 얼굴을 살피니 오히려 그의 얼굴이 더욱 긴장을 하여 굳어
져 있었다.
「그 때문에 주군께서는 저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셨습니다. `분명 명(明)님은 그 뛰어난 재주로
이에야스님의 가장 가까운 지근까지 다가 갈 것이다. 그리된다면 이에야스의 주변은 뜻밖에 혼
란스러워 진다. 그 혼란한 순간을 놓치지 말고 너희 닌자(忍者)들이 침투하여 이에야스를 암살
하라. 이것이 두 번째의 밀명(密命)이었습니다.」
들어서는 안 될 기밀(機密)이었다. 아니.. 도저히 발설해서는 아니 될 고니시(小西)의 밀명을
고로(吾郞)는 명(明)에게 태연히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해서는 안 될 말..! 그 말을 왜 내게 하는 것이오..?」
「명(明)님.. 앞서 가고 있는 저 두 명의 닌자(忍者)도 주군의 근황을 알리러 온 것 외에 그 암
살의 밀명을 저에게 확인하러 찾아 온 것입니다. 물론 고가(甲賀)의 마을을 찾아가 그 명령을
전하고 온 것이기에 지금쯤 마을에 있던 저의 동료들도 그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 다케(竹)언덕
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입니다.」
「헉.. 낭패로고..! 어찌 그 말을 내게 이리도 태연히..?」
「허허허 명(明)님, 우리가 만약 에도성에 입성을 하게 되면 제가 은밀히 소문을 낼 것입니다.
그러면 에도성의 중진들이 그 소문에 당황한 나머지 모두 뛰어 나오겠지요. 어쩌면 이에야스님
도 그 자리에 달려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리 된다면, 그 순간 명(明)님께서는 그들의
눈앞에서 암살을 하려 달려드는 닌자 무리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십시오.」
「그.. 그건 또 무슨 가당찮은 말이오..?」
그냥 가벼이 들어 넘길 말이 아니지 않는가..? 고로(吾郞)가 자신의 곁에 은근히 다가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명(明)은 도저히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고로(吾郞)님.. 지금의 말은 고니시(小西)장군이 목숨을 담보하고 고로(吾郞)님께 비밀히 지
시한 영(令)이라 생각합니다. 어째서 이 중요한 사항을 내게 털어 놓는 것이오..?」
「이유라..?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정국(政局)을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은 이에야
스님 뿐이지요. 이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의 전투가 끝난 후 전쟁에서 발생한 많은 낭인(浪人)
들이 오사카성(大阪城)의 히데요리 곁으로 모여들어 난국(亂局)을 부추기고 있으니, 겨우 진정
되어 가는 정국의 한 축이 무너져 버리면 전보다 더욱 극심한 혼란이 다가 올 것이라 여겨졌습
니다. 해서 암살은 또 다른 무질서만 불러 올 것이라 저 스스로 깊이 생각한 결론입니다.」
「오호.. 고로(吾郞)님의 뛰어난 혜안에 감복할 뿐입니다. 그런데 동료가 행하려는 그 중요한
비밀을 내게 알려 그 글들 제거하라는 이유는 또 무엇 때문이오..?」
「하하하.. 저처럼 주군을 모시는 닌자(忍者)는 동료보다 주군이 우선입니다. 주군께서 명한 두
가지 밀명 중 현시점에서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목숨을 걸고라도 이루어야 하겠지요..! 명(明)님
에게 협조하는 것이 하루(春)아씨를 지키는 첩경이라 저는 판단한 것입니다.」
* * * * * * * * * *
고로(吾郞)와 이야기를 나누며 행보를 거듭하던 사이 어느 듯 눈앞에 대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
이 보인다.
앞서 가던 두필의 말과 윤충(尹忠)의 일행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명(明)과 고
로(吾郞)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재빨리 달려간 고로(吾郞)가 하루(春)가
탄 말의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아씨.. 드디어 다케(竹)언덕입니다. 잠시 내려 쉬면서 정황을 보도록 하지요.」
대나무가 둘러쌓인 공터로 안내하는 지신의 뒤를 따라 모두들 쉴 자리를 찾아 앉는 것을 본 고
로(吾郞)가 명(明)의 표정을 살폈다.
「저 아래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지나나야 에도성으로 진입하는 관도가 열릴 것인데 저 곳을 지
키는 군졸들을 피하기가 난감합니다.」
그러나 명(明)은 고로(吾郞)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긴장한 표정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쉿..! 모두 저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지 마십시오.」
대나무 숲에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몇 명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명(明)이 몸을 숨기며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표정이었다.
「헛.. 그들인가..?」
고로(吾郞)도 명(明)의 심각한 기색(氣色)에 가까이 다가오는 숲속의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였다.
- 휙.. 휘이익..
- 스르륵.. 스르르륵..!
다섯 명..! 온몸에 검은 천을 뒤집어 쓰고 눈만 내어놓은 다섯 명의 무사들이 명(明)의 일행이
숨죽이고 은신해 있는 그곳을 지나 대나무 숲의 바람을 가르고 지나갔다.
「으음.. 고로(吾郞)님, 그 들이 맞는 듯 하오. 우리도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우선 하루(春)
님은 에도(江戶)와의 인연이 있으니 저 검문소를 통과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오. 마침 오카(岡
)님의 충고대로 우리 모두가 변복(變服)을 하고 있으니, 설아(雪娥)낭자는 하루(春)님의 몸종인
것처럼 위장을 하여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시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로(吾郞)님의 동료인 두
분은 하루(春)님을 호위해 주시기 바랍니다.」
「...............!!」
모두 숨을 죽이고 명(明)이 하는 말을 듣고만 있다.
「아마 지금 지나간 저 무사들도 검문소를 피해 입성을 하려 할 것입니다. 저들이 저토록 꺼리
낌 없이 달려가는 것을 보면 검문소를 피해 성안으로 들어갈 통로를 알고 있는 듯 합니다. 나와
고로(吾郞)님은 저들의 뒤를 은밀히 따르면 되리라 생각 됩니다.」
고로(吾郞)는 명(明)의 지시가 타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다.
「맞습니다. 우리 닌자(忍者)들은 우리들만의 독특한 침투 방법이 있습니다. 저들의 뒤를 쫒으
면 성안으로는 무사히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명(明)님과 윤충(尹忠)공께서 저들처럼 몸
을 놀릴 수 있을런지..?」
감히 닌자(忍者)들의 잠행술(潛行術)을 따를 재주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표하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명(明)의 얼굴에 빙긋 웃음이 떠오르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윤충(尹忠)의 입에서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 어쭙잖은 닌자(忍者)따위가 감히 누굴 시험하려 하느냐..? 네놈들의 재주가 어떤지
내가 한번 알아보아야겠다.」
- 펄럭.. 스르르릉..!
순간.. 검집에 든 검(劍)을 빼어든 윤충(尹忠)이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고로(吾郞)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어어어..?」
휘리리릭.. 그림자가 움직이듯 한발 뒤로 물러선 고로(吾郞)가 얼른 명(明)의 얼굴을 쳐다 보았
으나 명(明)은 모른 척 빙글거리고만 있었다.
먼눈 팔듯 모른 척 하는 명(明)의 의도를 금새 알아차린 고로(吾郞)가 쓰윽.. 윤충(尹忠)의 앞
으로 다가선다.
「크흐흐.. 윤충(尹忠)나리..! 닌자(忍者)들의 재주를 한번 보여 드리리까..? 어디 한번 덤벼
보시오..!」
「이.. 이놈이..?」
비웃는 듯한 고로(吾郞)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충(尹忠)이 분을 참지 못하고 부들부
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명(明)이 조용한 목소리로 윤충(尹忠)에게 한마디를 던진다.
「윤충(尹忠)공.. 싸우기도 전에 이미 그대가 졌소이다. 그만두시구려!」
「뭐.. 뭐라 했느냐..? 네놈도 저 닌자(忍者)놈과 한 통속이구나. 한번 더 입을 놀리면 네놈부
터 요절을 낼 것이다. 비켜라..!」
「쯧쯧쯧.. 어리석은 사람..! 고로(吾郞)님.. 모쪼록 기량만 겨루어 보도록 하시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로(吾郞)에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는 명(明)의 곁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설아(雪娥)가 달려와 급히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공자.. 어찌 싸움을 말리시지 않고 부축이십니까..?」
그리고 윤충(尹忠)을 향해 날카롭게 고함을 지른다.
「충(忠)오라버니.. 그만두세요..! 함께 마음을 합해도 힘든 이 상황에 어찌도 그리 경솔하십니
까..?」
윤충(尹忠)의 귀에는 그런 설아(雪娥)의 충고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명(明)
이 윤충(尹忠)을 향해 빈정거리며 말한다.
「하하하.. 설아(雪娥)낭자, 그냥 놓아두시구려. 잠시 힘을 겨루다 그만 둘 것이외다. 그 보다
하루(春)님.. 잠시 이곳에서 헤어지면 성안에서 만날 장소를 약속해야 합니다. 이 기회에 전에
부탁한 바와 같이, 하루(春)님과 허물없이 가까운 성안의 지인(知人)을 소개 받았으면 합니다
만..?」
「예.. 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지인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헤어져 성안으로 무사히 침입을
한다면 외성(外城)의 오층탑 아래로 오십시오. 모든 방편을 마련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하루(春)의 분명한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로(吾郞)와 윤충(尹忠)이 겨
루고 있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며 날카로운 검광(劍光)이 스쳐 지나간다.
윤충(尹忠)이 휘두른 칼날이 대나무의 잎을 날리며 고로(吾郞)의 머리위로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분명 보았다.
고로(吾郞)가 머리에 쓰고 있는 검은 두건이 검날에 두동강이가 나, 바람에 흩날리는 것을 윤충
(尹忠)은 두눈으로 똑똑히 본 것이다. 그러나..!
- 스르르.. 휘리리릭..!
그 순간 고로(吾郞)의 몸은 땅바닥에 납짝 엎드려져 그림자처럼 대나무 숲속으로 동화되어 사라
져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두동강이로 베어져 바람에 날리고 있는 두건..! 환영(幻影)이었다.
검으로 상대를 베었다고 자신해 고개를 든 윤충(尹忠)의 눈에만 보인 오직 환영이었던 것이다.
「어헉.. 이.. 이놈이..? 몸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거라..!」
윤충(尹忠)역시 검술에는 일가견을 이룬 인물..! 비록 적의는 없다하나 화가 잔뜩 올라 마음먹
고 휘두른 일검(一劍)이 아닌가..? 순간 연기처럼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고로(吾郞)의 모습에
당황하여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윤충(尹忠)의 고성은 공허하게 숲속을 울리고만 있었다.
「크흐흐흐 윤충(尹忠)니리..! 이 술법(術法)이 우리 닌자(忍者)들의 은신술(隱身術)이올시다.」
어리둥절 사방을 살피는 윤충(尹忠)의 서너 발자국 앞에 어느새 다시 나타난 고로(吾郞)가 두자
소검(小劍)을 윤충(尹忠)의 정안(正眼)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어허흑..!」
훌쩍.. 뒤로 몸을 날린 윤충(尹忠)이 긴칼의 한끝을 손바닥에 대고 눈앞 수평으로 들어올려 방
어의 자세를 취하며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조용히 고로(吾郞)의 움직임을 살핀다.
흔들.. 고로(吾郞)의 몸이 비스듬히 옆으로 눕는 듯 하며 윤충(尹忠)이 자세를 취하는 그 짧은
틈을 노리고 윤충(尹忠)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를 파고 들었다. 윤충(尹忠)이 달려드는 고로
(吾郞)를 향해 검을 뻗어 베려고 할 그 짧은 순간 노출된 겨드랑이의 헛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고로(吾郞)가 그림자처럼 파고든 것이었다.
이제 두 사람의 칼바람이 동시에 일면 분명 고로(吾郞)의 옷자락이 베이고 검을 휘두를 윤충(尹
忠)의 오른팔이 잘려나갈 다급한 일합(一合)이었다. 그 순간..!
「이제 그만..!」
명(明)의 입에서 조그만 기합소리가 울려나오며 손에든 지팡이가 휘익.. 바람을 갈랐다.
- 탁.. 타닥.. 휘이잉..!
눈 깜짝할 사이에 명(明)이 휘두른 지팡이가 달려들던 고로(吾郞)의 무릎을 치고 지나가며 한편
으로는 앞으로 내 뻗을 준비를 하던 윤충(尹忠)의 장도(長劍)을 멀리 날려버린 것이었다.
「두 분.. 그만하면 됐소이다. 더 이상 여기서 꾸물거릴 여가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 두도록
하십시오.」
조금 더 놓아두면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을 당할 것을 염려한 명(明)이 지팡이를 휘둘러 그 둘의
겨룸을 중단시켜버린 것이다.
고로(吾郞)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슬쩍 명(明)을 올려다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윤충(尹忠)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듯 벌겋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시큰거리고 있었다.
「윤충(尹忠)공.. 고정하시오. 고로(吾郞)님은 공(公)께 은형술(隱形術)의 시범을 보여주려 했
을 뿐이고 공(公)도 충분히 고로(吾郞)님께 자신의 기량을 보였다고 생각하오. 더 이상의 대결
은 백해무익하니 이제 그만 하시고 빨리 움직일 채비나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