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설 나향여협 (悖說 裸香女俠) 18
** 白雲俠 著/ 패설 나향여협 (悖說 裸香女俠) 18 **
제 18 장. 야릇한 인연(因緣) 1.
어리둥절..!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백룡검이 이윽고 정신을 차려 눈부신 듯 수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역용(易容)을 하고 계신 것이었군요..! 진즉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를 알아내었다는 그 말씀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지독한 얼굴과 뽀얀 속살의 부조화를 기이하게 생각했던 그 순간의 생각을 떠올리며 얼굴을 살
짝 붉히며 말하는 백룡검의 표정이었다.
「예.. 공자..! 환중도인이 말하던 그 한사람이 모용세가의 장주 모용환(慕容煥)이라고 실토를
했습니다. 이제 나머지 다섯의 정체만 밝히면 될 것입니다.」
「어헛.. 낭자가 어찌 그 일을..? 어찌하여 낭자가 그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오..?」
「호호호.. 소녀도 청성의 도인들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절박하게 알아내야만 할 사안이 있어
그 청성도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지요..! 그런데 공자께서도 그들을 주시(注視)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예의 불문하고 뒤를 따른 것입니다.」
「청성의 도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어.. 어.. 어..그렇다면 혹시.. 낭자가..?」
그 순간 갑자기 백룡검의 두 눈이 둥그렇게 커지며 놀란 표정으로 수린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
었다.
「예.. 공자..! 지금 공자께서 마음속으로 짐작하는 그 사람이 맞습니다. 때문에 그 천정위에
숨어들었고 방안에서 나누던 대화를 들어 보타암에서 일어난 저간(這間)의 사정도 모두 소상하
게 알게 되었습니다.」
백룡검은 이 여인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미행했고 또다시 환중을 추궁하려 했는가, 이제사 짐작
이 간 것이었다.
「아아.. 그랬군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공자..! 저는 수린(秀璘)이라 합니다. 그 남해를 저의 부모님이 찾지를 않았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저의 부모님께서는 오로지 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저
를 품에 안고 보련신니를 찾아뵌 것입니다. 그 행보가 억측을 낳아 보타암의 그 처참한 난행
(亂行)과 살육을 불러온 것입니다. 무어라 사죄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처절한 살인극..!
그 원인을 제공한 부모의 행위에 진사(陳謝)의 말을 하고 있는 수린을 향해 백룡검은 천만부당
가당치 않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수린낭자..! 그게 어찌 낭자의 부모님의 잘못이겠소..! 낭자의 부모님을 오직 낭자
를 구하려는 일념뿐이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틈타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 한 그놈들이 죽일놈
들 이지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 서로가 한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강호를 떠돌고 있었던 것이 아닌
가..! 오히려 수린을 위로하려는 마음이 담긴 백룡검의 말이었다.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아 참..! 환중도인에게 들은 말이 한가지가 더 있습
니다. 들으시면 혹시라도 짐작 가는 일이 있을런지..?」
「오.. 어서 말씀해 보세요. 무엇이라 하더이까..?」
백룡검의 얼굴엔 금방 화색이 돌며 수린을 향해 말하기를 재촉했다.
「환중의 말이 그들중 수괴인듯 한 인물의 행선지가 황산(黃山)이란 말을 언뜻 들었다 합니다.
혹시 짐작되는 곳이라도 있으신지..?」
「황산(黃山)이라..? 그곳은 남궁세가(南宮世家)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긴 한데..! 허기야 그 남
궁가의 장주인 남궁휘(南宮輝)란 자가 요즈음 갑자기 무림에서 그 위맹을 떨치며 새롭게 강남일
기(江南一奇)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합니다만..!」
말을 하다가 멈칫 말을 멈추며 가만히 수린의 얼굴을 바라보던 백룡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
다.
「낭자..! 혹시.. 혹시 말이외다. 그 소문의 장진도를 낭자께서 본적이 있습니까..?」
그 순간 수린의 얼굴에 싸늘한 표정이 흘러 지나갔다.
「아.. 아니오. 오해 마시오..! 그 황산이란 말에 요즈음 급작히 무공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
여 강남일기(江南一奇)라 존경받고 있는 남궁장주가 혹시나 그 장진도를 탈거(奪去;빼앗아 감)
한것은 아닌가 하여 물어본 말이외다.」
백룡검의 황급히 사과를 하는 말에 처연(悽然)한 얼굴빛을 보이던 수린이 오히려 한숨을 내 쉬
며 대답을 했다.
「괜찮습니다 공자..! 허나..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장진도에 관한 어떤 말도 한적이 없습니다.
때문에 장진도의 유무(有無)는 그 말조차 사실인지 거짓인지도 소녀는 모르고 있습니다.」
「허기야..! 만약 남궁장주가 장진도를 얻었다면 강호 무림에 소문이 파다(播多)했겠지요..!
알겠소이다. 소생이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요..!」
수린의 마음을 염려해 더 이상 그 말에는 입을 닫는 백룡검이었다.
「예.. 저도 수소문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그럼 공자님.. 저는 심양으로 가서 모용환을 만나볼
까 합니다. 공자께서는..?」
「하하하.. 나도 낭자처럼 낭자의 뒤를 미행 하리까..? 소생도 동행을 하리다..!」
* * * * * * * * * *
두 사람은 심양의 모용세가를 향해 숲이 우거진 천주산(天柱山)기슭의 고개를 넘고 있었다.
저멀리 유조호(柳條湖)의 주변의 노송(老松)들이 눈속에 들어오자 백룡검은 모용가에 도착하기
전에 수린에 관한 궁금한 점을 묻고 싶다는 듯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낭자의 부모님께서는 낭자의 천음절맥을 고치려 강호를 방황하다 그런 기구한 변을 당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생명을 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그 절맥이 말끔히 치료가 되었
습니다..?」
「호호호.. 그런 일쯤은 초연하리라 여겼는데..! 강호의 영걸이라는 백룡검 신웅대협도 그런
사소한 것을 궁금해 하시는 군요..?」
「허허.. 사소하다니요..! 생명을 유지시켜 이렇게 천하의 절색이 되어 있는데..! 소생 그 점이
궁금할 따름이지요..!」
「천산의 설봉에서 부모님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순간 기연을 만나, 이백년을 홀로 은거해
계시던 기인인 삼봉아라는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찾아내신 천년설과를 저에게 하사해 저의
절맥까지 치료를 해 주신 것이지요.」
「불행 중에 더 큰 호운(好運)을 만났습니다..! 감축(感祝) 드립니다.」
「아닙니다 신웅공자..! 그 천년설과를 이백년이나 기다려온 스승님이었습니다. 그 어른께서도
저처럼 절맥을 타고나신 분이었지요. 당연히 스승님께서 드셔야 할 천년설과를 저를 위해 양보
하신 것입니다.」
수린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헉.. 이백년을 기다려온 설과라..! 살신성인(殺身成仁)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물이 자신의 목
숨을 마다하고 양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낭자의 스승이십니다. 그 어른께서는 낭자에게
자신의 모든 진전을 물려주신 것이군요..!」
천하제일을 자랑하던 자신이 펼쳐낸 장력을 거리낌 없이 피해나간 수린의 무공이 아니던가..!
그렇게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웠던 수린의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무공..! 그 무공의 근원을 슬쩍
건드려 보는 백룡검이었다.
「호호호.. 별말씀을..! 스승님께서도 수행(修行)만 해 오신, 강호에 한번도 펼쳐 보인 적이 없
는 무공이라 하셨지요..! 그만큼 하잘 것 없는 무명(無名)의 무공(武功)일 뿐입니다.」
* * * * * * * * * *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듯 가까이 다가서자 백룡검이 모용세가(慕容世家)의 높은 담장
옆에 서있는 노송(老松)을 쳐다보며 수린에게 눈을 끔적거렸다. 노송에 날아올라 장원의 내부를
살펴보자는 신호였다.
「호호호.. 공자..! 그냥 대문으로 당당히 들어갑시다..!」
장주의 주변을 은밀히 살피러 온 주제에 이무슨 배짱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백
룡검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대문으로 다가간 수린은 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모용가의 경위무사의
앞으로 다가가 찌렁찌렁 울리는 큰소리로 자신들의 방문을 알렸다.
「강호소졸 수린(秀璘)이라 하오..! 모용장주를 뵈러 왔으니 어서 장주(莊主)께 통보(通報)를
해 주시오..!」
수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후원의 내실까지 들리도록 일부러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 것이었다.
그러한 수린의 행동을 이해 알 수 없는 백룡검은 끌끌..혀를 차며 어쩔 수 없이 슬금슬금 수린
의 곁에 다가와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수린의 고함소리에 우루루 달려 나온 모용가의 무사들이 두 사람을 막아서며 눈을 부라
렸다.
「웬 놈들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이냐..?」
앞을 막아서는 그 무인들의 태도는 제법 당당해 보였다.
앗차.. 소란이 일면 오히려 상황이 복잡해지겠다 생각한 백룡검이 한발 다급히 나서며 그들을
향해 정중히 입을 열어 요청의 말을 했다.
「장주를 뵙고자 멀리서 찾아왔으니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시라 전해주시오.」
그러나 호위무사들은 건들건들 거리며 얼굴에는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우리 장주님께서 너희처럼 어린 강호의 무명소졸들은 만나지를 않는다. 할 말 있으면 어서
뱉어내고 돌아들 가거라..!」
과연 심양에서의 모용가(慕容家)의 위세는 드높았다.
모용세가(慕容世家)라 하면 요녕성(遼寧省)의 포정사(布政使)조차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당
당한 위세를 부리고 있어 모용가(慕容家)의 넓은 뜰 한 곁에 있는 연무장(練武場)에는 수련에
열중인 무인들로 가득했고, 그 집안의 일개 경위무사들까지도 이처럼 기고만장하여 민초들을 깔
보며 우쭐해 하고 있는 것이다.
「어허.. 이놈들이..!」
백룡검의 얼굴에 순간 일그러졌으나 겨우 참고 있는 기색을 보며 수린은 얼굴에 슬며시 웃음
을 띠며 말했다.
「호호호.. 이놈들에게는 그리 예를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말을 듣지 않으면 회초리를 들
어야지요..!」
수린의 입에서 말이 끝나는 동시에 철썩.. 철썩..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소리가 문전을 울리고
호위무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아악..! 이.. 이 연놈들이..!」
그 순간 대문앞에서 울리는 비명소리를 들은 연무장(練武場)의 무인들이 열 댓명 달려 나오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오..?」
달려 나온 무인들이 수린과 백룡검 두 사람을 포위하듯 빙 둘러서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경위무사들에게 묻고 있었다.
「이.. 이 연놈들이 느닷없이 행패를 부리고 있다네..! 장주님이 알기 전에 어서 저놈들을 잡아
들이게..!」
* * * * * * * * * *
모용가의 열 댓명 무인들이 모두 손에 검을 빼어들고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백룡검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치며 그 자리를 슬며시 벗어나 담 옆에 만들어져 있는 화
단(花壇)옆 섬돌에 걸터앉으며 얼굴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백룡검..! 나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구나..!)
수린 역시 백룡검에게 고소(苦笑)를 지어 보이고는 무인들을 향해 한발 다가섰다.
「장주에게 전하라 했거늘.. 앞을 막지 말고 모두 비켜라..!」
손을 가슴위로 들어 올리며 한발 내딛는 수린의 표정에는 냉랭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 어린 계집년이.. 감히 모용가를 어찌 여기고..! 모두 이년을 쳐라..!」
그 순간.. 수린이 휘두른 손바닥에 졸지에 얻어맞아 뺨을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하던 경위무사가
달려 나온 무인들을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 휙.. 휙.. 휘이잉..!
- 창.. 창 창.. 펑 .. 퍼엉..!
그 고함 소리에 때맞추어 열 댓명의 무인들이 순식간에 수린을 가운데 두고 달려들어, 두 손을
내지르는 장풍과 달려드는 무인들의 칼바람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호호호.. 살수(殺手)라..! 이것이 세가를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대접이었더냐..?」
갑자기 자색의 운무(雲霧)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무인들의 시야에 흐늘흐늘 어른거렸다.
「어.. 어.. 어.. 어어..!」
- 우당탕.. 턱.. 턱.. 털석..!
십여명의 무인들이 저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며 뒤엉켜 땅바닥에 꺼꾸러졌다. 장(掌)을 날리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자색 그림자가 한 순간 뻔쩍하더니만 칼(劍)과 장(掌)을 후리며 내
려 치려던 목표물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 광경을 화단의 돌계단(石階)에 앉아 구경하고 있던 백룡검의 얼굴이 기이(奇異)하게 변하며
혼자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낭자가 펼치는 신법은 아무리 살펴 보아도 도저히 내력을 알 수 없는 무공이다. 저 무공에
공력까지도 충만하다면 감히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위력을 발휘하겠구나..! 혹시 장진도의 비급
속에 감춰진 무공..?」
짐작조차도 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심 가득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바로 그때..!
「어허.. 왜 이리도 문전이 소란스러운고..?」
장원의 안쪽에서 추상(秋霜)같은 호통소리가 문전을 향해 울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