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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香氣) - 16부


 

 

PS.보시고 난뒤의 짧은 리플과 살포시 찍어주시는 추천은 저의 글을 기름지게하고 길게 해주는 힘이 됩니다.
부디 잊지마시고 리플이나마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글은 1주일에 한편씩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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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학교가 끝난후 있던 지옥같은 네크로맨서와의 상담을 끝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넓은 운동장이 시야한 가득 훤히 들어왔다. 댐이 터지는 듯한 학생 대 방출이 한참 지난 시간어서인지 운동장은 아까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이었다. 저 구석 농구 코트에서 교복 마이를 벗고 이것이 사내다라는 듯 삐질삐질 땀흘려가며 농구하는 놈들 그 근처의 벤치에서 매점에서 사온 빵과 우유를 서로 나눠먹으며 잡담하는 여자애들.. 마치 EBS 청소년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우리들의 한적한 한때를 그대로 옮겨 논듯한 뭐 평범하고도 평범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전혀 평화롭지않은 정신상태와 몸 상태로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갔다.


  아..땅이 춤을 춘다..이리저리 흔들리며 울렁울렁 춤을 춘다.. 덴장맞을..정말 걷기 힘들정도로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망할 네크로맨서.. 네크로맨서와의 상담을 마치고 방금 교실 밖을 나온 나는 혼미한 정신을 좀처럼 가다듬지 못하고 젖은 빨래마냥 몸을 축 늘어뜨리며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설마 했지만 이 정도 일줄이야.. 마치 지옥의 문지방을 넘었다온 느낌이다.. 단 30분인데..1시간도 2시간도 아닌 30분인데..수업시간에 딴짓 했다고 윽박지르거나 야단치거나 하지도 않았다. 또 그렇다고 상담의 내용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끔씩 선생님이 하는 질문에 나는 대답하는 평범한 상담이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상황에서 들리는 그의 음산한 목소리와 주변 가득 풍겨나오는 검은 오오라는 나를 숨막히게 했고 마치 나의 생기를 빨아먹듯 내 몸을 감싸왔다. 아마 중간에 담임이 나를 구원해주지 않았다면(정말 이때는 담임이 천사로 보였다..등뒤에서 하얀 날개가 보일정도 였으니까..) 그 상태로 10분만 더 있었다면 창문을 깨고 나오거나 들것에 실려서 교실 밖을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난 운이 좋은거야..다른 사람들은 재기불능 상태까지 갔다니까..ㅋㅋ


부스럭..


순간 귓가에 들리는 낯선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지만 텅빈 도로만 보일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분명히 무슨 소리가...


<어~~!>
<악~!!>·


쿵!!


갑자기 내 앞으로 괴상한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인영에 심적으로 쇠약해져있던 난 비병을 지르며 뒷걸음쳐갔다. 근데 왜 갑자기 하늘이 내려오냐?? 몸이 뒤로 쏠리는 느낌을 받던 나는 쿵하는 소리와 함께 등쪽에서 둔탁한 통증을 받아야했다.


아이고..등에 돌박혔다..진짜..


<정말!! 어떤..새끼..>


길거리에서 자빠졌다는 쪽팔림과 뻐근한 통증에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킨나는 내뱉던 욕지거리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미안..>


언제 나타났는지 나의 눈앞에서는 한여자아이가 놀란듯한 눈초리로 날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오히려 나보다 당황한 듯 흑구슬처럼 까만눈을 더 크게 뜨고있는 소녀. 그녀.그애 였다. 얜 어서 나타난거야...


<괘..괜찮아??>


너 같음 괜찮겠냐??!! 맨땅에 다이빙했는데..


<어..괘..괜찮아..>


차마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키자 눈앞의 그녀가 불쑥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온다.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건지 뽀송뽀송하고 부드러워보이는 손. 아직 소녀티가 묻어있는 가늘고 고운 손가락. 손목에서는 왠지 유치해보이지만 귀여운 캐릭터 시계가 그녀의 발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저..안일어..나??>
<어??..어..>


어색하게 대답하며 그녀의 손을 잡자 부드러운 느낌이 손을 감싸왔다. 마치 손안에서 새어나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여~엉차..>


이런저런 생각에 잠깐 빠져있는 중 기합소리와 함께 몸이 끌려 올라가는 느낌에 당황해야했다. 뭐..뭐냐??난 힘도 안줬는데..순식간에 딸려올라가듯 일어난 나는 잠시 얼떨떨한 모습으로 멍하니 서있었다. 머냐구.. 이괴력은..


<정말 괜찮아??>


멍하니 서있는 내가 걱정됐는지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그녀의 물음에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곱게 눈을 까는 것이 나의 반응을 살피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괜찮아..>
<미안해..난 그냥 반가워서 장난 좀 친다는게..>
<어?? 아냐...>
<그래도..솔직히 그렇게 맥없이 넘어갈줄 몰랐거든..꽈당..하고..>
<하하..그..그래??>


사과냐?? 아님 맥없는 놈이라고 놀리는 거냐?? 헷갈리네..


<어디 다치진 않았어??>
<어..그냥 등쪽에 돌박히고 엉덩이에 나뭇가지 박힌 정도??>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증상을 얘기하는 내 모습에 다시 한번 어색모드로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


<농담이야..정말 괜찮아..>


다시 한번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말하자 그제서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덜어졌는지 이내 웃는 낯을 보인다.


<근데..왜 이제가??>
<어??친구...친구 기달렸어..넌??>
<나?? 난..상담..하고 오는 길이야..>
<상담?? 담임이랑 상담은 끝나지 않았어??>
<어..담임이랑은 끝났는데..오늘 우연찮게 네크로맨서가 나랑 상담하고 싶다고 해서..>
<아..아까...그거..>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근데..생각보다 멀쩡하네??>


하하..그러냐?? 넌 그럼 어떤꼴을 예상했길래 이꼴이 멀쩡해보이는 거냐??


<아니..난 소문이 되게 무섭게 나서 더 심할줄 알았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내 어색한 표정을 읽었는지 뒤늦게 수습에 말을 하는 그녀..말이 매서워..얘도..


<많이...힘들었어??>
<이런말 하고 싶진않지만..죽는 줄알았어..마치 지옥을 보고 온 느낌이랄까..몸에 힘이 없어..>
<그래..다시 보니까 니 상태 정상이 아닌 것 같긴해..>


하하..얘가 말을 이쁘게하네.. 이런애였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중 갑작스레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섰다.


<무슨 소리 안들려??>
<응?? 무슨 소리??>
<애기울음 소리 같은 거..>
<애기울음 소리?? 안들리는..>


으아앙..


들렸다.. 뭔가 우는 듯한 소리가..뭐지..학교에서 왠 애기 울음소리?? 혹시..귀신?? 아니지..귀신일리는 없지..아직 대낮인데..거기다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그래도 귀신 생각하니까 조금 무섭긴하네..


으아앙!!


조금 더 커졌다. 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다..점점 더. 발 내 뒤쪽에서. 갑자기 확실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나는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순가 무언가 조그마한 인영이 내 안쪽을 파고 들더니 나를 밀쳐냈고 그와 동시에 나는 다시한번 중심을 잃어갔다. 어이...잠깐...


쿵...


다시 한번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엉덩이 쪽에서 강한 통증이 전해져 왔다. 아고고.. 젠장...오늘 왜이렇게 자빠졌다 일어나냐..내가 무슨 오뚝이도 아니고..쪽팔리게...근데...뭐야?? 방금건..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 시선을 돌린 나는 잠시 동안 상황파악을 할 수 없었다.


울고 있는 아이.. 갑작스런 아이의 등장에 약간 놀란 듯한 그녀. 하지만 이내 그녀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달래갔고 난 그저 그 둘을 바라만 볼뿐이었다. 뭐 어떻게 보면 공익광고에서 나오는 친절한 여고생편의 아이를 달래는 여고생의 한 장면처럼 건전하고 또 건전한 장면. 근데 난 뭐냐..


근데..좀 이상하다..그냥 울면 되지 왜 저렇게 가슴에 파묻혀서 우냐?? 그것도 푸욱...말이다...


<너..왜 또 넘어져 있어??>


하하...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없다.. 맥없는 놈.. 


----------@--------------@--------------@-------------------@ 



<꼬마야..이름이 뭐니??>
<흑..흑...민재..장민재..요..>


그러다 콧물 다쳐먹어서 배 터지겠다.. 나오는 코를 들이마시듯 연신 훌쩍거리며 전형적인 울상의 아이라는 컨셉을 보이며 대답하는 소년. 그런 아이의 옆에서 그녀는 마치 자상한 엄마처럼 소년을 다독이고 있었다. 나는?? 멀뚱이 서있지...


(뭐해??뭐라고 말이라도 시켜봐..)


나를 보며 무언의 압박을 보내오는 그녀의 눈빛에 나는 어쩔수 없이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최대한 자상하고 고운 목소리로..


<꼬맹아..니네 집이 어디야??>


1초,2초,3초,


<흑흑..흐아앙...>


마치 시간이라도 세고 있었단 듯 정확히 3초만에 나의 물음에 울음을 터뜨리는 소년. 젠장..아까부터 계속 이런식이었다. 그녀가 물어 보면 잘 말하다가도 내가 물어보면 이런식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센서 달았냐?? 경보가 울리게.. 내가 무서워 보이나?? 아니 나처럼 선량하고 착해보이는 얼굴이 또 어딨다고... 그건 그렇고..저놈 또 저러네.. 울음을 터뜨린 소년은 자연스럽세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뭍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어..비비기까지..손..손봐라..허리까지 껴안고...제..젠장...은근히 부럽다..아


<울지마..울지마...민재..민재라고 했지?? 누나가 맛있는거 사줄테니까..울지만..민재야..>


그런 소년의 이상한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아이 달래기에 여념이 없는 그녀.
내가 이상한건가?? 하긴..저런 꼬마가 뭘 안다고..그냥 엄마같으니까 그런거겠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떨쳐내며 나는 멀뚱히 그녀와 소년의 뜨거운 포옹(?)을 바라보고 서있어야만 했다. 근데 좀.. 뻘쭘하다..


차츰 가장에서 도태된 외로운 아버지의 기분을 느끼고 있을때, 어디선가 잔잔한 벨소리가 울려왔다.


<잠깐만..민재야..누나 전화 좀 받을께..>


가슴에 포옥 파뭍혀 있는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듯 아이를 떼어놓아보는 그녀지만 아이는 절대로 떨어질수없다는 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숨 막혀죽겠다..자식아.. 아이의 완강한 의지에 체념했는지 그녀는 이내 떼어 놓기를 포기하고 전화를 받아 통화를 시작했다. 짧은 대화가 이어지고 무슨 일인지 그녀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품안의 아이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일이지?? 안좋은 일이라도 있나?


<어..알았어..그럼 내가 지금 바로 갈께.>


드디어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낸 그녀는 아이를 한번 보더니 이내 나에게로 시선을 옮겨왔다.뭔가 불안하다..저 무언가 해줄래?? 로 끝날 것 같은 표정.. 그리고 무언의 눈빛..


<저..강혁아..내가 지금 잠깐 학교에 다시 올라가봐야 할 것 같거든?? 그래서 말인데.. 얘 좀 데리고 있어 줄래??>


젠장...이런건 좀 틀려도 되는데..꼭 정확하단 말야..


<무슨일 있어??>
<아니..별건 아닌데 위에 친구가 좀 일이 생겼다고 해서..>


부탁하기 미안한 듯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 저런 표정까지 짓는데 싫다고 할도 없고,,


<알았어..내가 잘 보고 있을테니까 갔다와..>


결국 나의 승낙에 그녀는 고마운 듯 미소를 띄우며 학교로 올라갔다. 뭐..가지말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 아이를 떼어놓는데 잠깐 애를 먹긴 했지만 맛있는거 사준다는 그녀의 약속에 아이도 납득했는지 포기했다.


몇분이 지났을까..10분정도?? 안오네...시계를 들여다본 나는 나지막히 한숨을 쉬었다. 하아..근데 모냐구..이 어색한 공허함은..그녀가 간 이후 아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나에게 말을 시키지도..그저 묵묵히 주머니 속에서 손을 찔러 넣은 채 하교길의 화단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싫다 이런 분위기.. 어색한 분위기에 나는 힐끔 아이를 쳐다보았다. 제법 잘생긴 얼굴 이네...아니 확실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선이 분명한 턱..사내답지 않게 높고 가는 콧등에 눈은 고양이 마냥 크고 부드러운 눈매를 하고 있는 것이 잘만 크면 여자 여럿 울릴 그런 얼굴..
칫..웬지 기분 나쁘네..사내놈이 기집애 처럼 생겼냐.. 사내란 모름지기 나처럼 사내답게 생겨야지 나처럼...암..


<저기요...>


응?? 뭐야..나한테 말하는 건가??


<응??나??>
<여기 그쪽 말고 누구 또 있어요??>


그래..나밖에 없지...근데..그..그쪽??


<딴데 좀 볼래요??>
<딴데??>
<기분 나쁘니까 내 얼굴 그만보고 딴데 보라고요...>


마치 동급자 아니 하대를 하듯 냉소적인 표정으로 건방지고 도전적인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건넨 녀석의 모습에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뭐야..지금..이 녀석..아까는 나만보면 울더니만 아까랑 딴판이잖아.. 근데.. 저게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거 아닌가?? 뭔가 열받긴 한데 뭘로 화내야 될지 모르겠네.. 그래 뭐 자꾸 쳐다보면 기분 나쁠수도 있는 거니까..


<기분 나빴니?? 미안..>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아이에게 날려 준 나는 이때다 싶어 이 어색함을 타개 하가위해 말을 붙여 갔다.


<말 잘하네.. 울지도 않고..아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까들었잖아요..>
<아.... 아까 잘 못들어서..>


니가 나만 보면 울기만 해서 이름도 제대로 못들었다!!


<몰라요..알 필요 없잖아요..>


아!! 몰라도 돼지?? 이런 건방진...쉐뀌....귀찮다는 듯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석의 모습에 뭔가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꿈틀 거렸지만 이내 냉정을 찾았다. 그래..내가 형인데...참자..얘가 갑자기 나랑 단둘이만 있어서 그런걸꺼야.. 원래 그렇잖아 이맘때 꼬마 남자 아이들은 처음 본 형들을 무서워하고 다가가기 어려워한다는 거.. 그래 형인 내가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자..


<아..맞다...꼬마야..그럼 형이 좋은거 줄게..>


뭔가 생각난 나는 가방 앞주머니를 뒤적거려갔다..아마 이쯤에 있을텐데.. 찾았다..


<자..여기..>


그래..애들의 마음을 녹이는데 이것만한 것도 없지..암..


<자..딸기 포도 레몬..다있어..아무거나 하나 골라..>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해맑게 웃는 얼굴을 기대하며 나는 소년의 눈앞에 츄파츕스를 내밀었다. 얼굴 에 디밀어진 사탕을 물끄러미 보더니 찬찬히 나를 바라보는 아이.. 역시.. 애를 꼬시는 데는 먹을게 짱이라니까..다먹는다고 하면 어쩌지?? 나 나중에 먹을라고 안 먹고 모아논건데.. 뭐 착한 형으로서 다 줘도 상관없지..ㅋ


<안먹어요..>
<그래..암거나..응?? 안먹어?? 왜??>
<내가 애도 아니고..사탕이나 빨겠어요?? 그쪽이나 많이 드세요..>


하하...니가 애지 아님 개냐?? 그리고 사탕이 애들만 먹는거라는 편견은 버려~~!! 


무안해진 손을 조심스럽게 거둔 나는 사탕하나를 까서 입속에 넣었다.
칫...맛있는건데..애새뀌..


<저기요..>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아직 애라서 그런가 목소리도 기집애 같네..뭐 변성기가 안 지났을테니까...


<아까 그 누나랑 사겨요??>


뜬금없이 뭔소리야...이거...


<그러니까 사귀냐고요..애인..커플..뭐 러버러버 그런거냐고요..>


쌩뚱맞게 이상한걸 묻는 녀석을 바라보자 재차 확인하듯 물어왔다. 왠지 모르게 진지한 모습. 뭐라고 해야되나??


<으..음..그런건 아냐..그냥 같은 반 친구..뭐 니들 말로 하면 짝꿍정도??>
<그럼 그냥 단순한 클레스 메이트??>


유창하게 영어를 섞어가며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년. 뭘 그렇게 굴려대냐..어린놈이..그냥 내가 짝꿍이라고 했으면 짝꿍이라고 하지..


<뭐..그런거지..>
<그렇죠?? 그럼 그렇지..잠깐 오해 했잖아요..설마 사귀는 사인가 해서..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아니네..>


아하!! 그게 당연한 일이구나...젠장... 기분나쁜 꼬마놈이네...
확실히 기분 나쁜 놈이 었다. 아까의 그 징징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지금은 온몸가득 나는 시건방진 초딩이요 의 포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갑자기 딴놈이 되버렸네..이거..


<근데 넌 뭐야?? 왜 울고 있던 거야??>
<울어요?? 누가요?>
<누구긴 너지..>
<아..그거..운거 아니에요..그냥 우는척한거지..>
<응?? 우는 척?? 왜??>
<그래야 다가가기 쉽거든요..>


뭔소리야?? 뭘다가가..


<여자들은 말이죠..애들은 경계를 안해요..특히 우는 애들은...뭐 모성이라고 할까?? 암튼 그런 애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하죠..그게 저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애면 말할것도 없고..>


여자 박사라도 되는 양 아이는 마치 나에게 강의라도 하듯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마치 자신만의 대단한 무언가를 말한다는 건방지고 거만한 말투는 아이가 쓸 말투는 아니었지만 이 꼬마에겐 그게 본래 말투인지 이렇다할 위화감은 없었다.


<그렇게 경계를 풀어버리면 그때부턴 쉽죠..품에 안겨서 우는척 하면서 무슨 짓을 해도 여자들은 신경쓰지 않죠. 왜?? 애니까..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부벼도..손으로 만져도 허리를 안아도 뭐..아주 노골적으로만 하지 않으면 만지고 싶은덴 다 만질수 있죠..>


그런..거였냐?? 이거..아주 변태아냐.. 근데... 조금 부럽다..난 저 나이때 저런거 안하고 뭐했을까...


<그럼 아까도..>
<뭐..그런 거죠..>


용의주도하군....아니지...뭐 이런 놈이 다있어...


<그쪽은 뭐예요??>


또 그쪽이라네..이게..


<뭐..사귀는 것도 아니고..그렇다고 소꿉친구나 뭐 그런것도 아닌것 같고..좋아해요??>


뜬금없는 아이의 질문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좋아..하나?? 만나면 두근 거리고 같이 있으면 말도 잘 안나오고..요즘엔 말도 좀 하고 친해졌다는 느낌이 있긴하지만.. 그런가..아닌가.. 아니지...애가 물어 본거에 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냐..바보같이..


<하하..어린놈이 별걸다 물어보는 구나..>
<좋아하는 구나..>


뭐야..왜 단정 짓냐!!


<에구...근데 힘들겠네...아까 보니까 그 누나 진짜 이쁘던데..몸매도 뭐 그만하면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흠잡을데 없는것 같고..그런 사람인데..아무래도 힘들지 않겠어요??>


파직...이런 망할놈이 아까부터 자꾸 듣자듣자 하니까..머리에서 힘줄돋게 하네..


<뭐..짝사랑은 자기 맘이지만 안되는건 안되는 거구 더 깊어지기전에 끝내는 것도 여러모로 그쪽 입장에선..>
<우랴아!!>


휙하는 소리와함께 나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꼬마놈의 가르마를 가격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오는 충격에 꼬마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뒷걸음질 쳤다.


<뭐예요!! 갑자기..>
<갱생의 꿀밤이다..이 꼬마 변태놈아..>


이런놈은 좀 맞아야돼.. 어서 어린 놈이..싸가지 없게.. 이건 결코 내 사적인 감정으로 내린 폭력이 아니다..사회를 위해 그리고 이 아이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아픈 맘을 무릎쓰고 휘드룬 사랑의 꿀밤이란 말이다!!


<치..뭐야!! 괜히 맞는말만 하니까!! 열받아서 그런거죠!!>
<열받긴!! 누가!! 이 어린놈이 어서 어른한테!!>


다시 한번 타이르듯 윽박지르자 그녀석은 지지 않겠다는 듯 조그만 눈을 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아이구...눈에서 레이져 나오겠다.. 쉐꺄..어린놈이...


<어이구..그렇게 노려보면 어쩔거냐..이 꼬마쉐꺄..>
<사과해요...나 때린거..>
<사과?? 웃긴놈이네..이거...한대 더 맞는다!!>
<정말...안할거죠??>
<미쳤냐?? 내가??>
<후회해도 몰라요...>
<후회?? 후진은 알아도 후회는 몰라...>
<그래요?? 그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일까??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고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꼬마놈의 모습에 나는 약간 이상함을 느꼈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그래 지가 날뛰어봐야 초딩이지.ㅋㅋ


<근데 형..그 누나 정말 안좋아해요?? 그 누나 진짜 이쁘고 착하던데...차일거 걱정말고 대쉬라도 한번 해봐요..>


하아..진짜 이런 호로쉐끼.. 또 이러내.. 이런 놈은 한 대 더 맞야야돼..


팍!!


<안 좋아해!! 안좋아 한다고..그런애!! 가슴이 크던 몸매가 좋던!!나랑 상관 없고 그냥 반친구고 짝사랑도 아니고!! 아니..아예 관심이 없어..여자로 네버네버..절대 안느껴져!! 알아들어??>


하아..하아...나도 모르게 조금 흥분했다... 아까 상담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런가.. 근데...왜 웃지 이녀석?? 기분 나쁘게..


<응..알아 들었어...>


<그래.,진작 알아 듣...>


잠깐...지금 어디서 나온 목소리지?? 천천히 몸을 돌려 소리가 들린 등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아까 올라갔던 그녀가 내 뒤에서 방긋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서리내렸냐??


하하...젠장....맞을...웃고 있긴 한데...그게 더 무섭다..야..


들었겠지?? 아니 분명히 들었어.. 저 싸늘한 표정.. 처음 보는 표정이다. 웃고 있기는 했지만 시베리아 살얼음판 같은 차가운 그런 웃음.. 분명히 나를 향한 웃음이었다. 이건 아닌데.. 뭔가 해명을 해명을..


<저..저기..>
<됐어..아무말 안해도 돼..볼건 아까 다 봤고.. 들을건 아까 들었어..>


아...드라이 아이스다... 차가워 너무 차가워...말 하나하나가 얼음같아~~
현행범이라는 소리... 볼짱 다봤다...


그렇게 차갑게 내말을 딱 잘라버린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언제 그쪽으로 같는 지 그녀의 앞에는 그녀석이 치맛자락을 잡고 울고 있었다. 3옥타브가 넘을 것 같은 음역의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숨이 넘어갈 듯 울어 재끼는 그녀석의 모습에 나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와...대단하다...가수네...있는대로 질러대네...


<흐어엉~누..누나....>
<그래그래...민재야 왜 울어??>
<저...형이...저 형이...흐억...사탕...흑.....>
<사탕 뭐??>
<막...내가 먹던거...헉...뺐어서....흑...막...막...혼자 다 먹구...>


저..저게 뭐라는 거야?? 내가..뭘...어쨌다고??
꼬마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한번 나를 향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손에 들려있던 츄파춥스 3개를 향해서...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은 나의 마지막 변명마저 막아 버릴 정도로 착 가라앉아 버렸다. 아까의 웃음마저 지워진채..


하하...역시 츄파츕스는 애들만 먹어야 하는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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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젠장!! 제기랄!!>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거침없이 내뱉은 나는 피끓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젠장 왜 하필히면...하필이면 그때 딱 와가지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한 말도 다 들었고 내손에 들린 츄파춥스 역시 아이걸 뺏어먹었다는 증거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이제 날 벌레보듯 보겠지...아니 아예 상대도 안할거야...그 애 머릿속에서 나는 지금 지우개로 지워져가고 있을꺼야,,아니 이미 지워졌을지도.. 아아악~~!!


<크아아!!! 이 망할꼬마 쉐끼!!>


그래!! 다 그쉐끼 때문이야.. 그 쉐끼가.. 날 함정에 빠뜨렸어... 교묘하게 나에게 그말을 꺼내게 만들고 또 약삭빠르게 날 모함까지 한거야...얍삽한 녀석.. 그랬다 그녀석 분명히 마지막에 웃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차갑게 돌아서서 가던 그 순간 옆에서 손을 잡고 따라가던 그놈은 나를 돌아보며 아이답지 않은 가증스런 썩은 미소 한방을 날려줬다.


<아...죽여버릴 꺼야...죽여버릴꺼야..>


강한 살심이 용트림 하듯 끓어 올라온다.. 그런 꼬마 놈한 테 당하다니...이런 제길..
이런 썅..


깡...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길가의 캔을 그녀석의 머리라도 되는 양 강하게 까버린 나는 가만히 연신 식식대며 콧김을 불어댔다.


<악!!>


갑작스런 외마디 비명 소리. 뭐지?? 깡통이 아프다고 소리지른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궁금한 마음에 앞을 보니 조금 떨어진 길가에 누군가가 넘어져 있다. 하하...맞은...건가..


어떡하지 이대로 뺑소니?? 아님 가서 사과...그래 가서 정중하게 사과 하자...그래..


그래야 되는 데 발은 왜 뒤로 움직이냐.. 뒷걸음 쳐지는 몸을 다잡고 나는 그쪽을 향해 뛰어 갔다. 역시 캔에 맞은 것일까.. 한 여자가 머리를 문지르며 쭈그려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내가 찬 걸로 보이는 캔이 덩그라니 놓여있었다.


우선 증거...인멸...


여자 모르게 캔을 던져버린 나는 조심스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괜찮으세요..>
<네??..아..네...>
<어디 다치신거예요??>
<예..아뇨..그냥 갑자기 머리에 뭔가 부딪힌 것처럼 아파서...>
<예..그래요?? 뭐 맞을 만한 건 없는데...>
<그래요?? 뭔가 탁 하고 부딪힌 것 같은데...아닌가...>


워낙 갑자기 날라온 탓일까 여자는 뭐에 맞았는 지도 모르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뿐 그저 머리를 문지르고만 있었다. 하아...다행이다....내가 그런건줄은 모르는 것 같군..완전범죄..


<어디 다치신데 없으세요??>
<네...그냥 조금...그보다...고맙습니다...신경 써 주셔서...>
<네?..아..뭐...>


갑자기 나타나 걱정해주는 내가 고마운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여자의 모습에 나는 다시 한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었던가.. 어릴적 거짓말 한번 못해본 나였는데...세상은 힘들구나...거기다..이쁘니까 더 찔리네..


확실히 눈앞의 여자는 미인 축에 속하는 얼굴이었다. 선이 강한건 아니엇지만 요목조목 조화롭고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은 호감가는 얼굴이었고 뒤로 단정하게 묶은 머리나 화려하진 않지만 얌전 해보이는 주름 치마에 하얀색 스웨터는 평범하게 입고는 있었지만 단정하면서도 왠지 모르는 고귀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평범한 속에 묻어 나오는 아름다움 이라고 할까?? 키도 크진 않았지만 작다고 생각할만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맞는 정숙한 이미지였다.


왠지 좀 어른스런 분위기...나이가 그렇게 많아 보이진 않아 보이는데..


<어머!!>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도중 무엇을 찾던 그녀의 갑작스런 비명 소리에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 시선을 돌리자 하수구에 빠진 봉지 하나가 나의 눈에 들어 왔다. 아마도 여자의 것이리라.. 들고 있다 빠뜨렸나보네..


<다 빠져 버렸네...>


말그대로 빠져 있었다. 파도 야채도 고기도 오물로 양념이라도 한것처럼 푹..
안타까운 듯 힘없이 한숨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다시한번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에고...일부러 그런건 아니지만 마이 미한하네...


<못..쓰겠네요...>
<그러네요...저녘거리가 떨어져서 사온건데...>


잠깐을 아쉬운 듯 빠져버린 반찬거리를 바라보던 여자는 이내 어쩔수 없다는 듯 털고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정말 고마웠습니다.>
 
반듯하게 두손을 모으고 몸을 가볍게 숙이며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그녀의 모습은 예의바르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마움이 확실히 전해지게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나를 더 나쁜놈 만들게 할뿐이었다.. 아...진짜... 양심 팍팍 찔려온다.


<그럼 전...이만...>


볼일이 끝났는지 발걸음을 떼는 그녀. 왠지 이대로 보내기엔 도저히 양심상 힘들다...
뭔가 이 찜찜함을 없애긴 해야 되겠는데..어쩌지?? 아..맞다...그거라면...


<저기...다시 장보러...가시는 건가요??>
<네?? 아...뭐...그래야죠.>
<그럼.....제가 도와드릴까요??>
<네??>


갑작스런 나의 말이 약간 의외였는지 확인하듯 되묻던 여자에게 나는 다시한번 웃으며 확실하게 말했다.


<도와 드릴께요..장보는거..>


---------------------@---------------------------------@-------



<돼지고기..양파....대파...등등...다 샀네요..뭐..더 필요한거 없으세요??>
<네...없어요...다 샀어요...>
야채가게 앞에서 장거리를 확인한 나는 그녀에게 재차 확인을 받았다. 뭐..다됐네..임무완료.


지금 여기가 어디냐고?? 지금 여기는 내가 즐겨찾는 동네 시장이다. 차마 어린시절 선행상까지 받은 경력의 나로서는 그녀를 그대로 보낼수 없어 따라온 것. 뭐 그냥 대충 마트 같은데 가서 사려고 했지만 알뜰 살뜰 주부왕(?)인 나로서는 역시 그럴 수 없어 내가 자주 오는 시장으로 오게 된것이었다. 시끌시끌 여기저기서 물건파는 사람들과 물건사람들의 생기찬 목소리가 들려오고 손님을 부르는 듯한 아저씨아줌마들의 구수한 목소리들..이리저리 가게물건들을 옮기는 사람들이 보여온다..아..역시 이런게 사는거지..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벌고 또 열심히 사고..


하지만 지금 상황이 뭔가 얼떨떨한 듯 상당히 당황한듯한 표정의 여자는 장바구니를 끼고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 보고 있다. 하긴 뭐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같이 장 봐 주겟다고 하면 황당할수도 있겠지.. 근데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보신다.. 뭐야?? 그 외계생물 보는 듯한 표정은..


<왜..요??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그냥..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그냥 조금 신기해서..>
<신기..요?? 뭐가요??>
<보니까 학생같은데..보통은 그쪽 나이에 이런거 잘 모르지 않나요?? 근데..너무 잘알아서....아니 저보다 훨씬 더...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의문 스러운 얼굴로 나를 조심스레 바라보는 그녀..그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나는 이게 생활인데..그래도 집에서 살림한다고 말하기는 쪽팔리니까...대충 얼버무리자..


<뭐...조금 가사생활에 관심이 많아서요..>
<보니까...여기 분들이랑 친하신 것 같은데..자주 오시나 봐요??>


그렇지...여기 다닌지도 어언 4년이 다되가는데... 아줌마들 인적사항에 가정사항 건강상태까지 다 알껄?? 그 집 강아지 새끼 수 까지..


<그냥..가끔...>


아..자꾸 그렇게 묻지마..안되겠다..화제를 돌려야겠어..


<뭐..그건 그렇고..진짜 더 살건 없으세요?? 뭐 필요한거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아뇨..괜찮아요..고마워요..덕분에...물건도 아까보다 싸게 사고..>
<상태도 좋을 거예요..여기 물건들 제대로 사면 다 상급들이거든요.>
<그런 것 같네요..야채도 싱싱하고..고기도 그렇고..>


장바구니의 물건 들을 보며 감탄하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왠지 흡족함에 미소를 지었다. 뭐 내가 샀는데 당연하지..


나에게 시장은 익숙했다. 아니 편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전에도 말했다 시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가사일은 모두 나의 부담이 었으니 장보는 것 역시 내 일이었으니까..
물론 처음부터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 고등학교도 안 들어간 사내놈이 어린나이에 장보기가 쉬울 리가 없으니까.. 시장은커녕 동네 슈퍼에서 물건 사기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배부른 소리도 배가 불렀을때나 하는 소리.. 매일같이 반찬 투정 하는 누나의 닦달에 멋모르고 쓴 돈에 쪼들려오는 생활비.. 이런저런 사정에 결국 나는 얼마 안되 생존을 위해 가계부를 써야 했고 자연히 음식 값도 아껴야 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동네 마트 매장에서 눈을 돌려 자연스레 더 싸다는 시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시행 착오도 많이 겼었다. 꼬마놈이 뭘 알겠냐고 안 좋은 물건을 주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 씌워서 덤탱이 쓴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달을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 다니며 이런 저런 정보와 싸게 물건 사는 법 물건값 반으로 깍기 좋은놈 골라내기등 여러 가지 팁을 익혀가자 점차 장보는 일이 쉬워져갔다. 뭐..장사 하지는 분들도 내 사정을 듣고는 안 됐는지 어느 순간 부터는 나를 손님으로 대하기 보다는 자식처럼 대하며 기특해 하는 분들도 계셔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나.. 시장이 나에게 놀이터처럼 느껴졌던 것은.. 친구들이 피씨방 가서 놀때면 나는 생선집 아주머니와 수다를 떨고 있었고 방과후에 남아서 써클 활동을 할때는 야채가게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리고 있었다. 뭐..누가보면 우울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즐거웠다. 나를 반겨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 그곳은 언제나 생기 넘치고 활기찼다. 뭐..말하자면..삶에 현장..이라고할까??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여러모로...신경써주신것도 고마운데 이렇게 장보는 것 까지 도와주시고..>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인사를 그녀의 모습은 아까와 같이 예의가 넘쳐났다. 과하지 않은 짓에 짤막하지만 확실하게 감사의 뜻이 전해지는 그녀의 인사는 어딘가 정숙한 양갓집 규수라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뭐..아뇨...어려운 사람있으면 돕는게 당연한 거죠..하하..>


그래..그렇지..그 어려움에 빠뜨린 장본인이 나라라는게 문제지만..하하..


<친절하시네요...요즘 학생들 같지 않게...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어요..착하고 거기다 장까지 잘보는 아드님을 두셔서..>


진심이라는 듯 정감 있는 목소리로 나를 칭찬하는 그녀의 말에 머쓱해진 나는 그저 실실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일부러 말할 필욘 없겠지...부모님이 안계시다고...


<아뇨..뭐..>


과분한 칭찬에 뒷머리를 긁젉이며 다시 한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발한발 내 옆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걷고 있는 그녀는 아까부터 전혀 흐트러짐 없이 곧은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몸에 밴것일까?? 전혀 어색하다거나 부자연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몸이 이곳 저곳에서 반듯함과 정숙함이 확실하게 베어 나와 흐른다.


하아..몇살인가..꽤 젊어 보이는데.. 화장을 한건지 안 한건지 구분이 안 갈정도의 옅은 메이크 업은 그녀의 단정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동시에 한떨기 백합처럼 우아한 분위기를 풍기게하고 있었다. 귀에 걸린 단조로운 방울 귀걸이도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며 반짝 빛나는 것이 묘하게 매치가 잘 되고.. 맨 얼굴이 저 정도면..선생님이나 누나하고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는데..ㅋㅋ 내가 한번 꼬셔봐..이걸 계기로...


<저희 애도 그쪽처럼 말도 착하고 엄마 말도 잘들었으면 좋을텐데...>
<네..그러면 좋겠네..엥??애요??> 


지금 애라고 했냐?? 무슨 애??


<네...딸이 하나 있거든요..초등학생짜리...>
<정말요??>


뜻밖의 말에 놀라 되묻자 그녀 역시 약간 당황한 듯 고개를 기울이며 살짝 대답해 왔다.


<네?? 아..네..>


아..쇼크다...유부녀였냐?? 하긴 가만 보니 웬지 모르게 성숙한 분위기가 난다 했어. 뭐랄까 원숙함과 포근함?? 이라고 할까...뭐..내가 그렇지..


<아...그렇구나..>
<왜..왜요?? 잘못 됐나요??>
<아뇨..그런 건 아니고...전 그냥 아가씨가...아닐까 생각했거든요..뭐 남자친구는 있겠지만 서도 그래도 결혼은 안 하지 않았을까..뭐..>


아직까지 상황정리가 되지 않아 횡설수설하고 있는 나를 보는 그녀는 뭔소린지 알아들을수 힘든 듯 고개를 갸웃 거릴 뿐이었다. 나도 내가 뭔말하는 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젊어보인다는 소리??>
<아!!뭐 그런거죠..하하..>


간단하네...하하..


민망함에 헛웃음을 짓는 내가 재밌었는지 그녀는 살포시 잔잔한 미소를 띄운다. 포근한 미소..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후훗...빈말이라도 고맙네요..>
<아뇨..정말로..젊어 보이세요...>
<됐어요..벌써 애까지 있는 아줌만데요..뭐..그래도 젊은 학생 한테 그런애기 들으니까 싫진 않네요..>


나를 보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는 그녀의 옆얼굴에는 내 칭찬이 그리 싫지는 않은 듯 고운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아..웃는 것도 이쁘네.. 뭔 놈의 아줌마가 이러냐..
내가 아는 아줌마들은 다 배에 비엔나 두루고 다니는데..한겹 두겹...만복이네 식당아줌마는 세겹이었지..ㅋㅋ


<하아.. 우리애도 정말 그쪽 같으면 좋을텐데...워낙에 말괄량이라 말썽만 피우고 말도 안 듣고..>


하소연이라도 하듯 한탄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맞장구 칠뿐이었다.   


<뭐..그 맘때 애들이야 그렇죠..>


다 그렇지..어린 놈들이야..그래도!! 아까 그 꼬마놈 같지만 않으면 돼지..암..그놈은 떡잎자체가 틀려먹었어..변태 꼬마놈..아 또 생각하니까 열받네..


<그런가?? 암튼..부럽네요...그쪽 어머니.>
<하하..뭐...>


아이고...너무 띄워 주시네..


<무겁지 않으세요?? 제가 들께요...>
<네?? 아뇨..괜찮아요..>
<이리 주세요.. 일꾼 뒀다 뭐해요..이럴때 써먹지..>


미인을 도와주는 것은 남자의 의무!! 뭐..그런거지..나의 계속 된 권유에 그녀는 이내 어쩔수 없다는 듯이 바구니를 내주었고 우리들은 천천히 시장을 빠져나와 거리를 걸어갔다. 시끄러운 장터를 빠져 나오자 거리는 한적했다. 어느새 해는 늬웃늬웃 져 붉은 노을을 만들고 있었고 거리에는 낮과는 다른 저녘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들로 분주해 보였다.


<저..집이 어디세요??>


잠깐의 침묵을 깨고 조심스레 물어오는 그녀. 하긴 집까지 갈순 없으니까..뭐 나야 상관없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것 까지는 부담스러웠나 보다.


<저는 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되요..>
<왼쪽이요??아..저도 왼쪽인데...>
<그래요?? 그럼 거기까지 가죠 뭐..>
<아..정말로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다시 한번 손사레를 치며 나를 말리는 여자. 뭐 이왕한거 끝까지 하지뭐..


<아니예요.. 뭐 혼자 안가서 전 좋은데요 뭐..>


더 이상 신세지기 싫은 듯 말한 그녀 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나의 어거지에 어쩔수 없다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럼..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아..근데...여기 오신지 얼마 안되셨나봐요??>
<네. 얼마 전에 새로 이사 왔거든요..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아..뵌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반상회나 부녀회 바자회 모임...뭐 그런데서요..>
<네...이사 온 지 얼마 안되서 잘 모르거든요..그런거...>
<그럼 나중에 반상회 나오세요..거기 분들 다 좋아요..회장님도 친절하지고 사람들 사귀기도 쉽고..오시면 제가 그분들 소개시켜 드릴께요..>
<소개..요?? 혹시..나가세요?? 반상회??>


아...이런...잘못 말했나?? 그냥 말할까..나 집에서 살림해요~~취미는 바느질 특기는 하루만에 대청소 끝내기등등
자주가는 클럽은 동네 반상회 예요~ 라면 이상하잫아!!


<아뇨..나가는건 아니고 그냥 친해요..그분들이랑..고등학생인데..설마...그런데 나가겠어요??>
<그렇죠?? 잠깐 설마 했어요...아직 학생이신데...그럴리 없죠..보통은..>


하하..그래...보통은...그럼 나는 보통 인간이 아닌건가...


<다 왔네요..여기에요>


걸음을 멈춘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빨간 지붕의 아담한 집 한채가 들어왔다.
깔끔하게 하얀색으로 칠해진 외형에 화려하진 않지만 왠지 모를 잔잔함이 묻어나오는 집이었다. 어..꽤 좋은 집인데..


<집이..좋네요..깔끔하고...아담한게..>
<예...저도 처음보고 너무 맘에 들어서 딴데 안 둘러보고 고른 집이에요..안은 더 좋아요..뒤에 마당도 있어서 애가 놀기에도 좋고...>


집이 상당히 맘에 들었던 듯 만족 스러운 얼굴로 집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엔 소소한 행복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저런 얼굴..어서 봤더라...뭐..아닌가...


근데..말야...이 집도 익숙하네..와본적 있나?? 왠지모를 익숙한 풍경 익숙한 구도..알 수 없는 익숙함에 주위를 훑어보던 나는 그제서야 이유를 알수 있었다. 하하..그런..거였어...


<그쪽은 어디로 가세요?? 더 들어 가세요??>
<네?? 아뇨..저도 다왔어요...>
<네?? 어딘데요?? 가까운데 사시나봐요??> 


그래 가깝지...암...


<전...여기...>


나는 찬찬히 손가락을 들어 우리집을 가르켰다. 아담한 하얀 집 바로 옆에 놓여진 조금 크다 싶은 2층자리 파란 지붕의 주택을..


<옆집....사네요..하하..>
<네?? 아...>


잠깐 뜻밖의 상황에 놀란 듯 나를 보던 그녀는 이내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며시 웃음지었다.


<후후...이웃..사촌이네요??>
<네..뭐...그렇네요..하하>


뭐랄까 알 수 없는 기가막힌 우연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고 그녀 역시 이 상황이 재밌는지 입가에 손을 올리며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이것도 인연...이겠네요...>
<인연...뭐..그렇겠네요..>
<더 좋아 지겠네요..이집이...>
<네??>


어느새 나를 향해 몸을 곧게 펴고 선 그녀는 아까와는 사뭇 다른 예의 바름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왔고 나는 약간 당황한채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뿐이었다.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옆집에 이사 온 송시연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군더더기라곤 하나 없는 그녀의 예의바른 인사에서는 가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한참은 어린 나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은 상관 없는지 그야말로 정중함이 절로 느껴지게 인사를 해왔다.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집 아가씨같다고 할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끌려 나 역시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네...전..옆집 사는 한강혁이라고 합니다..저도..잘부탁 드리겠습니다..>


마주본 눈앞의 그녀는 어느샌가 다시 허리를 펴고 날 보고 밝게 웃고 있었다. 노을빛 아래 조명을 받은 듯 아름답게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그 모습에 나역시도 그녀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실실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낮게 깔려버린 붉은 빛이 주위를 감싸오며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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