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제 53 부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제 53 부 **
제 17 장. 심심상인(心心相印; 마음으로 서로의 뜻이 통하다) 3.
훤하게 서문인걸의 복심(腹心;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관명(上官明)은 한걸음이라도 빨
리 병주(幷州; 당나라때의 太原)에 당도하기 위해 무영능공비(無影陵空飛)의 경공을 펼쳐 음영
(陰影)조차도 남기지 않는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순간..!
휙.. 휙.. 눈 아래로 지나가는 거목(巨木)의 가지사이로 언뜻 보이는 그림자..!
갈기부터 꼬리까지 온통 하얀털로 뒤덮힌 백마(白馬) 한필이 등에 묘령의 낭자를 태우고 달려
가는 모습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연신 채찍질을 해가며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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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그 시기에 태원(晉陽:太原)에서 반란군을 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의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등과 더불어 그곳에서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
령하고 당(唐)나라를 세운 유서 깊은 도시 태원(太原)..!
당왕조(唐王朝)에서는 태원부(太原府)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주재시켜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송국(宋國)이 들어선 후 송의 태종(太宗)이 양곡현(陽曲縣)을 이곳으로
옮겨 태원을 병주(幷州)라고 이름을 바꾸고 안무총사(按撫總司)를 두어 국경을 침범하는 만이
(巒夷)들을 막아내고 있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 병주(幷州)에 위치한 군영(軍營)의 영문(營門)앞..!
으스름 날이 저물어가고 적막이 감도는 그곳에는 멀리서 보아도 한 눈에 알아 볼만한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한 여인(女人)이 머리에는 화옥잠(花玉簪;옥으로 만든 꽃모양의 비녀)을 꽂
아 그 화려함을 돋보이며 펄럭이는 연록의(軟綠衣)를 바람에 하늘거리고 서 있었다.
「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곧 연락을 해 드리겠습니다. 」
영내로 들어가려는 여인을 막아서며 난감함 표정을 짓는 위병(衛兵)을 보며 여인이 답답한 듯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 안무총사(按撫總司)의 부친인 평장사(平章事)대인께서 보내는 급한 연락이니 어서 물러 나
시오..! 」
나즈막하나 위엄이 가득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백리총(몸과 갈기가 하얀 백마의 일종)의 등위에 올라 시간을 재촉해 이곳 병주(幷州) 달려온
이 여인(女人)..! 부친인 황보승(皇甫承)의 밀언(密言)을 가지고 새로이 안무총사(按撫總司)의
자리를 차지한 황보정(皇甫程)을 찾아온 황보여경(皇甫如璟)이었다.
겨우 사정을 하여 영문(營門)을 들어선 여경(如璟)은 넓은 군영(軍營)의 연병장(練兵場)을 지
나 군막(軍幕)들이 모여 있는 그 중앙의 총사(總司)의 집무실이 있는 막사(幕舍)로 다가갔다.
그러나 총사의 집무실을 단단히 경비하고 있어야 할 위병들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 어.. 지휘관(指揮官)의 호위(護衛)를 어찌 이리도 허술하게 하고 있는가..? 」
마음속으로 의아히 생각하며 부관(副官) 참모의 업무실로 들어가 안무총사(按撫總司)의 면회를
청(請)하려 해도 그곳 역시 남아있는 참모들은 한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안쪽의 총사
(總司) 집무실로 가까이 다가가 출입문을 열려는 순간..! 집무실 안에서 소근거리는 여인의 목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어어.. 누군가 선객(先客;먼저 온 손님)이 계시는구나..! 」
멈칫 발걸음을 멈추고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 있던 여경(如璟)의 얼굴이 순간
긴장을 하며 굳어졌다.
「 이 음성은 서문화령(西門華怜)의 목소리가 분명한 듯 한데..! 그 아가씨가 무슨 일로 오라
버니를 찾아 온 것일까..? 혹시 서문대인의 사주는 아닌가..? 」
언뜻 마음에 스치는 불안감..!
여경(如璟)은 문 앞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문틈으로 안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였다.
* * * * * * * * * *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는 안무총사(按撫總司) 황보정(皇甫程)의 앞에 한손으로 책상을 짚고 서
있는 서문화령(西門華怜)의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흘렀다.
「 공자.. 너무하세요..! 이 먼 길을 오직 공자 한사람을 보고 싶어 찾아온 저에게 이토록 무
심히 대하시다니..! 」
투정부리듯 얼굴을 찡그리며 콧소리를 내는 화령(華怜)의 말에 황보정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화령(華怜)낭자..! 어쨌든 서문어르신의 말씀은 잘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제는
나라의 녹(祿)을 먹는 관인(官人;벼슬아치)의 몸..! 저보다 우선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겠지요..! 」
「 흐흥..! 공자께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누구의 힘인데..! 」
황보정의 입지(立志)를 도운 사람이 누구인데 백성을 들먹여 감히 부탁을 거절을 한다..? 점점
얼굴에 홍조를 띠며 언성이 높아지는 화령(華怜)을 보며 황보정은 조용조용 달래듯 말하고 있
었다.
「 그 점은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인께서는 너무 무리한 요구를 저에
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
「 아버님께서 공자님의 대답은 분명히 지금과 같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공자께서 그렇
게 대답을 하시면 한마디 말씀을 더 전하라고 저에게 일렀지요..! 」
「 무슨 말을 더 전한다는 것이오..? 」
아무리 발뺌을 해도 서문인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피식..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고 황보정을 보며 응석부리듯 소근 거렸다.
「 아버님께서도 제가 공자의 여인(女人)이 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저와
공자가 하루 빨리 맺어져 일가(一家;가정)를 이루기를 바란다고 전하라 하셨지요. 그리 된다면
우리의 서문가와 공자님의 황보가는 이나라 제일가는 가문(家門)이 될 것이라 하시며 우선 가
문이 튼실해 지면 그 다음에 백성을 돌아도 충분하며 모든일이 한결 수월해 질 것이라고 공자
께 전해 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
문틈으로 엿보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경(如璟)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한 충격을 받았다.
(헉..! 일가(一家)를 이루다니..? 그리고 화령(華怜)소저(小姐)가 오라버니의 여인이 되었다니
그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 또한 아버님께서 오라버니를 만나 전하라고 한 말과 한 치도 틀리
지 않고 꼭 같은 말을 화령(華怜)소저가 서문대인의 전언이라 하며 오라버니에게 말하고 있다.
어찌 두 분 어른의 심계(心計)가 이토록 같을 수가 있는가..? 아무래도 서문대인이 화령(華怜)
소저를 앞세워 오라버니를 자신의 편에 서도록 끌어 들이려는 것 같구나..! )
부친과 서문인걸의 속내가 너무나 닮은 점에 놀며 황보여경(皇甫如璟)은 그 두 어른의 과욕을
제지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답답한 마음이었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살피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틈 사이를 노려보던 여경(如璟)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당한 광경이 벌어지고 실내의 상황에 얼굴을 찌푸렸다.
「 어어.. 저.. 저 소저(小姐)가 뭘 하려는 짓인가..? 저.. 저.. 저런..! 」
여경(如璟)의 눈에 뜨인 집무실내의 모습..!
황보정의 앞에 서있던 서문화령(西門華怜)이 한쪽 다리를 슬며시 황보정이 앉아 있는 의자에
걸치며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있는 모습이 여경(如璟)의 눈 속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화령(華怜)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으흥.. 공자님..! 아버님의 말씀은 차치(且置;내버려 두고 문제 삼지 아니함)하더라도 저의
정조(貞操)를 허물어 놓고 어찌 이렇듯 한 번도 뒤돌아 보지를 않으시는지요..! 」
원망이 가득 담긴 듯 눈망울에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을 보이며 걷어 올린 치마를 홱.. 젖히
고 황보정의 무릎위에 걸터 앉아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화령(華怜)을 본 것이었다.
그 순간 화령(華怜)의 아래 내의(內衣)속에 숨어 비부(秘部)를 가리고 있던 빨간 천 조각이 무
릎위에 걸터 앉아 벌어진 다리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 어어어.. 화령(華怜)낭자 이러지 마시오. 이곳은 나의 집무실이외다. 어찌 이리도 경망스럽
단 말이오..? 」
당혹(當惑)해 하는 황보정을 힐끗 흘켜보는 화령(華怜)의 눈동자 속에는 질시(嫉視)가 가득 담
겨져 있었다.
조금 전 황보정에게 말을 건네는 순간 문밖 공기의 흐름을 타고 미약하게 흘러드는 여인의 지
분(脂粉;연지와 분) 냄새를 맡은 화령(華怜)이었다.
(흥.. 묘령의 여인에게서 풍겨오는 향기라..! 이 바람둥이 같은 남정네가 집무실 가까이에는
위병까지도 자리를 피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필시 여인을 불러 들이고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 황보정.. 네놈이 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마..!)
화령(華怜)의 눈에 고인 눈물은 결코 황보정을 향한 애잔한 연모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서 끓어 오르고 있는 원망과 질투를 참을 수 없는 패악(悖惡)의 눈물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황보정이 측근들에게 자리를 비켜나게 한 것은 화령(華怜)이 찾아왔다는 위병의 연락을
받은 황보정은, 화령(華怜)낭자가 이 먼 곳까지 불시에 찾아왔다면 필시 어떤 비밀스러운 의논
이 있을 것이라 짐작을 하여 측근들을 물리치고 혼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 호호호.. 공자..! 공자께서는 나의 낭군이나 진배없습니다. 아버님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
시고요. 그런데 뭘 망설이고 계십니까..! 」
입으로는 연신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하며 허리는 들어 올려 속 고의(袴衣)를 발아래로
밀어 내리고는 아랫도리를 벌겋게 황보정의 눈앞에 드러내 흔들며 그순간 한손을 슬며시 머리
뒤로 가져가 나비모양의 옥잠(玉簪;옥비녀)를 황보정이 눈치 못 채게 뽑아 들었다.
뒷머리에서 옥잠이 뽑혀져 나오는 순간..! 옥잠의 뚜껑이 스르르 열려 그 옥잠 속에서 아지랑
이 같은 증기가 양 갈래로 피어올라 서서히 황보정의 호흡속으로 빨려 들어 갔다. 그리고 다른
한 갈래는 눈에 보이지도 않게 닫겨진 문틈사이로 뻗어가 여경(如璟)의 숨결을 따라 콧속으로
쓰며 들고 있었다.
「 나의 이 기독(奇毒)을 너희 연놈들이 얼마나 견뎌내는가 살펴 보아야겠다. 황보정 이놈..!
이제 내 앞에 엎드려 나의 육체를 탐하기 위해 두손을 싹싹 빌어가며 발버둥을 치겠지. 내앞에
무릎 꿇고 제발 살려 달라 사정을 할때까지 네놈을 다루어 줄 것이다. 호호호..! 」
화령은 은연중(隱然中) 옥잠(玉簪)속에 숨겨 두었던 색정미혼산(色情迷魂散)을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손에 공력을 실어 뿜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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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어질..! 갑자기 황보여경(皇甫如璟)은 신체를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현기증이 밀려오며 온
몸에 힘이 쑤욱..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뚫어지게 실내를 살피던 그 순간..!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색정미혼(色情迷魂)의 음독(淫
毒)에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 순간.. 막사의 천정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앗차..! 내가 방심을 했다. 저 두 사람은 한바탕 음행이 지나면 저절로 해독이 될 것 이라
여겨 두 사람 방사(房事)의 도중에 서문인걸이 화령(華怜)을 시켜 황보정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피려 했는데..! 저 문뒤에 숨어 엿듣고 있는 여경(如璟)낭자를 잠시 소홀히 하고
있었구나..!)
그림자는 연기처럼 화하여 벌써 비틀거리는 여경(如璟)을 품속에 안고 으스름 하늘을 날아
허공으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