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제 50 부 ( 전반부 마지막회)
** 낭만백작著/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제 50 부 **
제 16 장. 황궁(皇宮)에 삭풍(朔風)이 불다 3.
급히 전음으로 알리고 빈청의 입구로 내려앉아 지금 막 도착한 듯 실내로 들어서는 상관명 이
었다.
「 오.. 명(明)이로구나..! 어서 이리로 오르거라..! 」
「 예.. 폐하..! 」
상관명은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한 번 더 깊이 고개를 숙인 후 곁에 있는 자혜공주에게 다가
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학련은 열심히 상관명에게 귓속말
로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반색을 하며 반기는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는 서문인걸의 표정은 의아스러움이 가득했다.
(역시 저 공자가 나타났구나..! 학련이라는 여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황궁에까지 나타난 것은 뜻밖이다. 그 또한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긴다. 명(明)이라.. 저 공자도 황실과 인연이 있는 것인가..?)
의문이 가득했으나 우선은 황제와의 다툼에서 지휘권을 되찾아 오는 것이 급선무..! 일단은
상관명의 존재를 무시하고 다시 황제의 면전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 폐하..! 아직도 조평환의 잔당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을 색출하려면 당분간 조정의
병력이 필요합니다. 」
「 허허.. 오늘의 거사도 그 주된 병력이 서문인걸 그대의 사병이 아니던가..? 그 많은 병력
을 놓아두고 어찌 짐의 병력까지 그대의 손에 넣으려 하는가..? 」
상관명의 출현이 황제에게는 더욱 든든한 배경(背景)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조심스러움을 벗
어나 당당하게 서문인걸을 추궁하고 있는 황제의 말이었다.
「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소인이 그들을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고 조정의 수장이 되실 황보
승 대인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 신료들을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사병(私兵)이 동원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만부당한 사안인 것입니다. 」
서문인걸의 말에 빙긋 웃음을 보이는 상관명이었다. 그런 상관명을 돌아본 황제가 알았다는
듯 서문인걸에게 다시 말했다.
「 서문인걸..! 그대의 말이 옳다. 지금까지는 그대들 끼리 획책을 하여 거사를 이루느라 그
대의 사병을 움직인 것을 짐은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대의 사병들이 황궁내
에서 움직인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순간부터 당장 철수시키도록 하라..! 」
서문인걸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지금 이 황궁은 소림과 진양문 그리고 암암리에 맹약을 맺은
숭정방(崇正邦)의 제자들로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황제가 갑자기 무
엇을 믿고 이리도 당당해 졌는가..? 그러나 황제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자신이 한말이 그
대로 꼬투리가 잡혀 자신에게 되돌아 온 것이 아닌가..! 저 공자의 조언이 분명할 것이다..!
당황한 서문인걸이 서둘러 황제께 아뢰고 있었다.
「 황.. 황상폐하..! 지당한 분부입니다. 조정의 혁신을 이루는 거사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사병을 동원한 것입니다. 즉시 철수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사의 마무리를 위해
어림군과 혈잠령의 지휘권은 황보대인에게 남겨주시기를 청하옵니다. 」
서문인걸의 말을 들은 자혜공주가 상관명을 바라보며 조언을 구했다.
「 상관오라버니..! 서문대인의 제안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
자혜공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서문인걸은 깜짝 놀라 귀가 번쩍 뜨였다.
(헉.. 상관(上官)이라..! 황제는 그를 명(明)이라 불렀다..! 상관명(上官明).. 상관명..!
그렇다면.. 옛날의 그 아이..?)
서문인걸이 잠깐 옛 생각에 젖어드는 그때 상관명이 황제를 향해 말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 폐하..! 서문대인의 말씀이 합당(合當)합니다. 아직 어수선한 조정을 정비하려면 황보대인
께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힘은 조정의 정당한 힘이어야 하므로 혈잠령을 조
정의 중서(中書)에 귀속시켜 중서의 황보 평장사(平章事)대인께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
다. 그리 윤허해 주십시오..! 」
뜻밖에 서문인걸의 손을 들어주는 상관명의 말이었다.
「 명(明)아..!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
황제가 의아한 듯 상관명에게 묻는다.
「 예.. 폐하, 황보대인이 조정의 난신(亂臣) 조평환을 제거할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저쪽에
계시는 서문대인의 조력(助力)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사후의 처리도
황보대인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
「 허허.. 명(明)아..! 그런 일이라면 짐(朕)이 직접 어림군과 혈잠령의 군사를 지휘하여 처
리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 」
황제에게는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다. 이 기회를 틈타 어림군과 혈장령의 무인들은 손아귀에
넣어 스스로 황권(皇權)을 확립하고 명실상부하게 힘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 하하하 폐하.. 폐하에게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난신(亂臣)을 척결
(剔決)해 폐하와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있습니다. 이러한 충신을 앞에 두고 어찌 직접
손에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제의 머릿에는 번쩍 한줄기 청량(淸亮)한 소리가 스쳐지나는 듯 했다.
(그렇구나..! 명(明)이 하는 말의 뜻이 그것이로구나..! 아직은 불안한 정국(政局).. 황실이
완벽한 능력을 갖출 때 까지 이들을 힘을 충분히 이용을 하라는 의미였구나..!)
「 알겠다..! 명(明)아의 생각이 옳도다. 평장사 황보승은 들으시오. 어림군은 황궁을 호위해
야 하는 고유한 임무가 있으니 차치(且置;내버려둠)하고, 혈잠령은 중서(中書)에 귀속시킬 것
이니 조평환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고 엄격히 관리하도록 하라..! 」
「 예.. 폐하..! 명심하여 황명(皇命)을 받들겠습니다. 」
고개 숙여 대답하는 황보승을 바라보는 서문인걸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를 않았다. 다행
히 상관명의 고언을 황제가 받아들여 혈잠령의 지휘권은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황궁의
정보를 더욱 자세히 파악하려 한다면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고 있는 어림군이 아니던
가..? 그러나 절반의 성공을 거둔 지금의 상황은 더 고집을 피워 황제를 몰아갈 수는 없는 정
황(情況)이었다.
허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황제는 더욱 기고만장 해질 것..! 물러서더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각인을 시켜준 후 물러서야 앞으로의 행보가 편하리라..! 서문인걸은 마음속으
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 황상폐하..! 지금 황도(皇都) 개봉(開封)의 치안은 소인 서문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으므로
그 안온(安穩;조용하고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황궁 내에는 어림군이 질서를 유지하겠
지만 황궁 밖은 혹여 간신들의 잔당들이 준동하는 것을 방비(防備)하기 위해 당분간 철수하기
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안무총사(按撫總司)로 승차(陞差;벼슬이 오름)된 국경의 황보정총사에
게 신속히 그곳의 병력을 재정비하여 다시는 변방의 나라들이 침범을 못하도록 교지를 보내셔
야 할 것입니다. 감읍(感泣)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
말은 거리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국경의 방비를 간언하는 충언이었다. 그러나 황도(皇
都) 개봉(開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국경의 대군(大軍)은 황보정의 휘하에 두어 황제를
황궁 속에 가두어 두겠다는 말이 아닌가..? 또한 황제에게 감읍(感泣)하라고 한다. 자신의 충
언(忠言)을 눈물로 고마워하며 받아들이라는 강요의 표현이 아닌가..!
꿈틀 황제(皇帝)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있던 상관명이 재빨리 황
제의 앞으로 다가섰다.
「 폐하.. 서문대인의 태도는 불손하나 그 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노기를 참고 서문의 참뜻
을 물어 보십시오. 」
상관명이 황제에게 주청(奏請)하는 말소리가 서문인걸의 귀에도 들려왔다.
「 공자.. 연환서숙의 구(龜)공자와 저 뒤 공주마마의 옆에 서있는 학련(鶴蓮)낭자가 주군이
라 부르던 공자의 성함이 상관명(上官明)이라 하셨소..? 」
서문인걸이 조심스럽게 상관명을 향해 물었다.
「 하하하.. 서문(西門)어르신..! 맞습니다. 십여 년 전 어르신에게 은혜를 입은 그 거지아이
가 맞습니다. 그때 거두어 주셨던 은공(恩功)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정중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상관명을 바라보는 서문인걸의 눈동자에는 당혹(當惑)함이 스
쳐 흘렀다.
「 어어어.. 맞구나.. 그때의 명아가 맞구나..? 허허.. 몇 번을 서로 만났건만 내가 어찌 알
아 보지를 못했던고..! 이놈.. 너는 이미 나를 알아보았을 것인데 왜 그때 너의 정체를 밝히
지 않았느냐..? 」
그 순간 서문인걸이 바라보는 상관명은 눈부시게 뛰어난 헌헌장부 기남(奇男)의 모습.. 어릴
때 그 총명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서문인걸과 얼굴을 마주칠 순간 순간마다 기변연
환(欺變撚幻)의 공력(功력)을 펼쳐 얼굴의 모습을 바꾸어 왔던 그 기공(奇功)을 지금 이 순간
만은 운용을 하지 않고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더욱 혼란스러워 졌다.
(어엇..! 명(明)아와 서문인걸이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와 서문인걸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오히려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상관명이 서문인걸과 야합을 한 술책에 스스로 휘말려드는 것은
아닌 가 초초함이 묻어나는 황제였다.
「 명(明)아..! 너도 서문가(西門家)와의 사연(事緣)이 깊구나..! 그래.. 어릴 적의 인연이더
냐..?」
황제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 예.. 폐하..! 십여 년 전 사고무친(四顧無親) 고아로 길거리를 떠돌고 있던 저를 거두어
주신 분입니다..! 」
상관명이 대답을 하고 있는 그때 서문인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 폐하.. 저 아이가 오갈 데 없어 거렁뱅이 생활을 하고 있던 어린 시절 소인이 저의 집으로
데려가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역시 어릴 때 부터 비범함을 보여 왔었는데 저리도 잘 자라 늠
름한 청년이 되어 있습니다. 명(明)아.. 이리 가까이 와 보아라..! 」
은근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명(明)아 부르며 친밀(親密)함을 보이는 상관명을 향해 더욱 예부터 절친(切親)한 관
계임을 과시하려는 다정한 목소리인 것이다.
빙긋 웃음을 띠우며 서문인걸을 향해 내려 가려는 상관명의 곁으로 학련(鶴蓮)이 다가와 귓속
말로 소근 거렸다.
「 주군(主君)..! 서문인걸의 부친이라는 저 백염(白髥)의 노인이 조평환의 집에서 흑의복면
을 하고 진두지휘를 하던 인물입니다. 유념(留念)하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귀에 소근 거리는 학련의 말에 상관명의 눈동자가 빤짝 빛을 발(發)하며 고개를 끄득였다.
(아하.. 이제야 서문인걸이 조정을 놓아두고 마음 편히 국경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의문이 풀
린다. 자신의 아버지를 믿고 있었구나..! 그리고.. 으음..!)
상관명은 학련의 말을 단단히 마음속에 간직하며 천천히 단(壇)아래로 내려와 서문인걸의 앞
으로 걸어갔다.
「 서문 어르신.. 일찍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옛날 거두어 주신 은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화령(華怜)아가씨도 잘 계시는지..?」
「 하하하.. 아니다.. 아니다. 정말 훤칠한 대장부가 되었구나.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정말
고맙다. 화령(華怜)은 네가 물려준 연환서숙을 잘 지키고 있단다. 」
가까이 다가온 상관명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호탕한 웃음을 웃고 있는 서문인걸에게 나
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르신.. 어린 제가 어르신의 집에 들어가던 그날.. 저의 성이 상관(上官)이라는 말을 들
으시고 가문을 물어보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
「오.. 그랬지..! 그러나 그때 너는 밝히지를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
「 예.. 그때는 저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예.. 짐작대로 후주(後周) 말엽의 재상을 지낸 상
관후(上官侯)어른이 저의 할아버지입니다. 」
「 어엇..! 역시 그랬었구나..! 어릴 때의 그 기백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구나..! 」
서문인걸이 감탄의 소리를 뱉어내고 있는 그 순간 그의 곁에 서있던 백염(白髥)노인이 더욱
놀란 얼굴로 상관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 뭐.. 뭣이라고 했느냐..? 얘야.. 너의 할아버지가 상관후(上官侯)라 하였느냐..? 」
순간 당황한 서문인걸이 백염(白髥)노인 앞을 가로막으며 상관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상관명이었다.
「 명(明)아..! 이 어른은 나의 가친인 상(相)자 현(賢)자 어른이시다. 」
「 아하.. 그렇습니까..? 소생 상관명이라 합니다. 」
「 그래.. 나는 인걸의 아비가 되는 서문상현(西門相賢)이라 한다. 너의 할아버지와는 전 왕
조에서 인연이 있었다. 」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상관명을 향해 반가운 듯 옛 왕조의 인연을 이야기 하는 서문상현
을 보며 상관명은 빙긋 얼굴에 웃음을 흘렸다.
「 예.. 큰 어르신..! 후주가 멸망할 때의 그 인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이신 상관후(上官侯)어른께서는 백성의 고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스스로 목
숨을 버리고 신왕조의 건국을 용인(容認;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함)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자리에 온 것은 폐하에게 백성을 천심(天心)으로 보살피라는 충언(忠言)을 드리고자 함이
그 첫째 이유이며 무(武)를 과시해 권세를 탐하는 무리를 응징하기 위함이 그 두 번째의 이유
올시다. 그런데 서문 큰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금까지 추밀사 조
평환을 뒤에서 조종을 하고 계셨습니까..? 」
용정장원(龍亭莊園)에서 서문상현과 조평환의 마지막 대치 순간..! 복면이 벗겨져 얼굴을 드
러낸 서문상현과 조평환이 나누던 이야기를 학련이 상관명의 귀에 소근 거리며 알려 주었던
것이다.
「 헉.. 이.. 이놈 그것이 무슨 말이냐..? 」
잘못 들으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 자리는 황제가 내려다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닌가..! 겨우 거사를 꾸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려는 이 순간이 자칫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 난감한 말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서문상현보다 오히려 서문인걸이 더욱 당황을 해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 명.. 명(明)아..! 그 무슨 망언이냐..!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
이러한 모습들은 단상위에 앉아있는 황제는 귀추(歸趨)가 자못 주목된다는 듯 흥미 가득한 얼
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서문어르신..! 다행히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내는 조평환의 악명이 너무나
높아 그를 제거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복이 되는 명분이 있는 거사였습니다. 때문에
저도 그 거사에 도움이 되도록 어르신의 주장에 동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 과욕
을 부린다면 이 상관명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이.. 이놈이..! 」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서문인걸이 황제의 어전인 것도 잠시 잊고 손을 높이 쳐
들어 올렸다. 공력이 가득 모아진 손으로 상관명을 내려치려는 자세가 아닌가..! 그 순간 빈
청의 모든 사람이 긴장한 눈으로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 이놈아.. 어전이다. 어찌 이리도 경망스러우냐..? 」
서문상현이 재빨리 아들의 손을 잡으며 슬며시 옆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서문인걸의 귀에 입
을 가까이 하여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 저 아이를 주군이라 부르는 학련처자 때문에 용정장원(龍亭莊園)에서 조평환을 죽이지 못
하였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저 처자의 무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절(超絶)한 무
공이었다. 처자가 그럴 진데 주군이라 불리는 저 아이의 무공은 오직하겠느냐..! 함부로 나서
지를 말거라..! 」
「 아닙니다 아버님. 저 아이는 제가 몇 번 대면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살펴본 결과 아마 저
아이의 무공보다 지혜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여러 말들이 나오는 지금 황제도
모든 말을 들어 가슴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이 순간에 황제를 포함한 저들의 기를 꺾어 놓지
못하면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
「 그러냐..? 그래도 조심은 하거라..! 」
두 사람이 소근 거리다가 다시 상관명의 앞으로 다가온 서문인걸이 한층 소리를 높여 상관명
에게 호통을 쳤다.
「 이놈아.. 어릴 적의 인연을 생각해 그 말은 묻어 두겠다. 다시 허언을 지껄인다면 내가 너
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줄 것이다. 」
「 예.. 그리해 주십시오. 저도 큰 어르신의 행위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
다. 그러나 이 시간 이후 조금이라도 천심(天心)에 어긋나는 일을 벌인다면 제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서문어르신께서 야욕을 갖고 계신다면 이 자리에서 털어 버리십시오. 」
상관명의 근엄(謹嚴)한 모습이었다.
「 그래도 이놈이..! 도저히 안되겠구나..! 」
휘익.. 상관명의 눈앞으로 서문인걸의 양손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 순간..!
「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
상관명의 입에서 소성(笑聲;웃음)이 조용히 울려 나왔다.
「 어억..! 」
움직여 지지 않는다. 빈청(賓廳) 어전(御前)에 서있는 모든 사람이 마치 마비가 된 듯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양손을 휘두르던 서문인걸조차 체내의 내공을 모두 끌어내어 위로 들어 올려 진 손을 아무리
거두어들이려 해도 단 한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 이놈이..! 어헉.. 공.. 공주에게 뿌렸던 독(毒)도 네가 해독을 한 것이구나..! 」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벙긋 열었다 닫을 뿐이었다.
천궁(天宮)의 절기 무극천성공(無極天聲功)을 빈청의 모두에게 조용히 들려준 것이었다.
* * * * * * * * * *
자혜공주가 기거하는 자혜궁(慈惠宮)의 상석에 황제가 앉아 있다. 그 황제의 앞에 공주와 학
련 그리고 상관명이 마주해 자리를 하고 있었다.
「 아바마마.. 어찌 소녀의 궁(宮)으로 오자고 하셨습니까..? 민망하옵니다. 」
공주가 황제의 앞에서 부끄러운 듯 말하고 있었다.
「 아니다. 자주 공주를 보러 오고 싶었으나 짐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오늘은 우리 공주의
방을 꼭 보고 싶었구나..! 」
「 아이.. 아바마마도..! 소녀도 기뻐옵니다. 」
이제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된 것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공
주의 마음인 것이었다.
황제가 상관명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명(明)아.. 고맙다. 네가 있어 정말 든든하구나..! 수천 년 전 그 옛날.. 하(夏)나라의 걸
왕(桀王)이 황음(荒淫)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는 그를 응징한 천궁(天宮)
의전설(傳說)은 이 황실(皇室)에도 면면이 이어져 왔다. 오늘의 황제인 짐(朕)도 수천 년을
이어온 그 천궁이 절실히 바라는 요순의 후예가 되라는 바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황궁
도 천궁과 일맥을 함께해 요순의 치(治)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
「 예 폐하..! 옳으신 결심입니다. 부디 백성을 향한 그 천심(天心)을 버리지 마십시오. 서문
인걸 역시 그런 조그만 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의 복심은 자세히는 모르나 서문
인걸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야욕(野慾)이 숨겨져 있습니다. 」
「 오오.. 알았다. 짐의 치세(治世)는 이 나라의 백성을 으뜸으로 삼을 것이니라..! 」
황제의 다짐에 자혜궁(慈惠宮)에 앉아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모두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전반부 이야기 ㅡ 끝 ㅡ *******************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의 후반부의 내용은 서문인걸이 역심을 품고 강호의 세력을 규합하여
왕조를 전복 시키려 하며 상관명은 천궁의 세력을 넓혀가며 그 역모를 막으려 하는 강호에서
의 대결로 전개시켜 갈까 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낭만백작 올림.
제 16 장. 황궁(皇宮)에 삭풍(朔風)이 불다 3.
급히 전음으로 알리고 빈청의 입구로 내려앉아 지금 막 도착한 듯 실내로 들어서는 상관명 이
었다.
「 오.. 명(明)이로구나..! 어서 이리로 오르거라..! 」
「 예.. 폐하..! 」
상관명은 황제의 곁으로 다가가 한 번 더 깊이 고개를 숙인 후 곁에 있는 자혜공주에게 다가
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학련은 열심히 상관명에게 귓속말
로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었다.
반색을 하며 반기는 황제의 모습을 지켜보는 서문인걸의 표정은 의아스러움이 가득했다.
(역시 저 공자가 나타났구나..! 학련이라는 여인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혹시나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황궁에까지 나타난 것은 뜻밖이다. 그 또한 황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긴다. 명(明)이라.. 저 공자도 황실과 인연이 있는 것인가..?)
의문이 가득했으나 우선은 황제와의 다툼에서 지휘권을 되찾아 오는 것이 급선무..! 일단은
상관명의 존재를 무시하고 다시 황제의 면전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 폐하..! 아직도 조평환의 잔당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을 색출하려면 당분간 조정의
병력이 필요합니다. 」
「 허허.. 오늘의 거사도 그 주된 병력이 서문인걸 그대의 사병이 아니던가..? 그 많은 병력
을 놓아두고 어찌 짐의 병력까지 그대의 손에 넣으려 하는가..? 」
상관명의 출현이 황제에게는 더욱 든든한 배경(背景)이 된 것이었다. 이제는 조심스러움을 벗
어나 당당하게 서문인걸을 추궁하고 있는 황제의 말이었다.
「 그것이 아닙니다 폐하..! 소인이 그들을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고 조정의 수장이 되실 황보
승 대인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조정 신료들을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사병(私兵)이 동원된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만부당한 사안인 것입니다. 」
서문인걸의 말에 빙긋 웃음을 보이는 상관명이었다. 그런 상관명을 돌아본 황제가 알았다는
듯 서문인걸에게 다시 말했다.
「 서문인걸..! 그대의 말이 옳다. 지금까지는 그대들 끼리 획책을 하여 거사를 이루느라 그
대의 사병을 움직인 것을 짐은 불문에 부치겠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대의 사병들이 황궁내
에서 움직인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 순간부터 당장 철수시키도록 하라..! 」
서문인걸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지금 이 황궁은 소림과 진양문 그리고 암암리에 맹약을 맺은
숭정방(崇正邦)의 제자들로 물샐 틈 없이 둘러싸고 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황제가 갑자기 무
엇을 믿고 이리도 당당해 졌는가..? 그러나 황제의 말에는 허점이 없었다. 자신이 한말이 그
대로 꼬투리가 잡혀 자신에게 되돌아 온 것이 아닌가..! 저 공자의 조언이 분명할 것이다..!
당황한 서문인걸이 서둘러 황제께 아뢰고 있었다.
「 황.. 황상폐하..! 지당한 분부입니다. 조정의 혁신을 이루는 거사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부득이 사병을 동원한 것입니다. 즉시 철수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사의 마무리를 위해
어림군과 혈잠령의 지휘권은 황보대인에게 남겨주시기를 청하옵니다. 」
서문인걸의 말을 들은 자혜공주가 상관명을 바라보며 조언을 구했다.
「 상관오라버니..! 서문대인의 제안을 어찌 생각하시는지..? 」
자혜공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서문인걸은 깜짝 놀라 귀가 번쩍 뜨였다.
(헉.. 상관(上官)이라..! 황제는 그를 명(明)이라 불렀다..! 상관명(上官明).. 상관명..!
그렇다면.. 옛날의 그 아이..?)
서문인걸이 잠깐 옛 생각에 젖어드는 그때 상관명이 황제를 향해 말하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
들었다.
「 폐하..! 서문대인의 말씀이 합당(合當)합니다. 아직 어수선한 조정을 정비하려면 황보대인
께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 힘은 조정의 정당한 힘이어야 하므로 혈잠령을 조
정의 중서(中書)에 귀속시켜 중서의 황보 평장사(平章事)대인께 맡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
다. 그리 윤허해 주십시오..! 」
뜻밖에 서문인걸의 손을 들어주는 상관명의 말이었다.
「 명(明)아..!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
황제가 의아한 듯 상관명에게 묻는다.
「 예.. 폐하, 황보대인이 조정의 난신(亂臣) 조평환을 제거할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저쪽에
계시는 서문대인의 조력(助力)이 있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사후의 처리도
황보대인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
「 허허.. 명(明)아..! 그런 일이라면 짐(朕)이 직접 어림군과 혈잠령의 군사를 지휘하여 처
리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 」
황제에게는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다. 이 기회를 틈타 어림군과 혈장령의 무인들은 손아귀에
넣어 스스로 황권(皇權)을 확립하고 명실상부하게 힘을 행사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 하하하 폐하.. 폐하에게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난신(亂臣)을 척결
(剔決)해 폐하와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있습니다. 이러한 충신을 앞에 두고 어찌 직접
손에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 」
그 말을 듣는 순간 황제의 머릿에는 번쩍 한줄기 청량(淸亮)한 소리가 스쳐지나는 듯 했다.
(그렇구나..! 명(明)이 하는 말의 뜻이 그것이로구나..! 아직은 불안한 정국(政局).. 황실이
완벽한 능력을 갖출 때 까지 이들을 힘을 충분히 이용을 하라는 의미였구나..!)
「 알겠다..! 명(明)아의 생각이 옳도다. 평장사 황보승은 들으시오. 어림군은 황궁을 호위해
야 하는 고유한 임무가 있으니 차치(且置;내버려둠)하고, 혈잠령은 중서(中書)에 귀속시킬 것
이니 조평환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말고 엄격히 관리하도록 하라..! 」
「 예.. 폐하..! 명심하여 황명(皇命)을 받들겠습니다. 」
고개 숙여 대답하는 황보승을 바라보는 서문인걸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를 않았다. 다행
히 상관명의 고언을 황제가 받아들여 혈잠령의 지휘권은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러나 황궁의
정보를 더욱 자세히 파악하려 한다면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고 있는 어림군이 아니던
가..? 그러나 절반의 성공을 거둔 지금의 상황은 더 고집을 피워 황제를 몰아갈 수는 없는 정
황(情況)이었다.
허나 이대로 물러선다면 황제는 더욱 기고만장 해질 것..! 물러서더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각인을 시켜준 후 물러서야 앞으로의 행보가 편하리라..! 서문인걸은 마음속으
로 다짐을 하고 있었다.
「 황상폐하..! 지금 황도(皇都) 개봉(開封)의 치안은 소인 서문의 수하들이 지키고 있으므로
그 안온(安穩;조용하고 편안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황궁 내에는 어림군이 질서를 유지하겠
지만 황궁 밖은 혹여 간신들의 잔당들이 준동하는 것을 방비(防備)하기 위해 당분간 철수하기
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안무총사(按撫總司)로 승차(陞差;벼슬이 오름)된 국경의 황보정총사에
게 신속히 그곳의 병력을 재정비하여 다시는 변방의 나라들이 침범을 못하도록 교지를 보내셔
야 할 것입니다. 감읍(感泣)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
말은 거리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국경의 방비를 간언하는 충언이었다. 그러나 황도(皇
都) 개봉(開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국경의 대군(大軍)은 황보정의 휘하에 두어 황제를
황궁 속에 가두어 두겠다는 말이 아닌가..? 또한 황제에게 감읍(感泣)하라고 한다. 자신의 충
언(忠言)을 눈물로 고마워하며 받아들이라는 강요의 표현이 아닌가..!
꿈틀 황제(皇帝)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황제의 모습을 보고 있던 상관명이 재빨리 황
제의 앞으로 다가섰다.
「 폐하.. 서문대인의 태도는 불손하나 그 말은 새겨들을 만합니다. 노기를 참고 서문의 참뜻
을 물어 보십시오. 」
상관명이 황제에게 주청(奏請)하는 말소리가 서문인걸의 귀에도 들려왔다.
「 공자.. 연환서숙의 구(龜)공자와 저 뒤 공주마마의 옆에 서있는 학련(鶴蓮)낭자가 주군이
라 부르던 공자의 성함이 상관명(上官明)이라 하셨소..? 」
서문인걸이 조심스럽게 상관명을 향해 물었다.
「 하하하.. 서문(西門)어르신..! 맞습니다. 십여 년 전 어르신에게 은혜를 입은 그 거지아이
가 맞습니다. 그때 거두어 주셨던 은공(恩功)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정중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상관명을 바라보는 서문인걸의 눈동자에는 당혹(當惑)함이 스
쳐 흘렀다.
「 어어어.. 맞구나.. 그때의 명아가 맞구나..? 허허.. 몇 번을 서로 만났건만 내가 어찌 알
아 보지를 못했던고..! 이놈.. 너는 이미 나를 알아보았을 것인데 왜 그때 너의 정체를 밝히
지 않았느냐..? 」
그 순간 서문인걸이 바라보는 상관명은 눈부시게 뛰어난 헌헌장부 기남(奇男)의 모습.. 어릴
때 그 총명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서문인걸과 얼굴을 마주칠 순간 순간마다 기변연
환(欺變撚幻)의 공력(功력)을 펼쳐 얼굴의 모습을 바꾸어 왔던 그 기공(奇功)을 지금 이 순간
만은 운용을 하지 않고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황제가 더욱 혼란스러워 졌다.
(어엇..! 명(明)아와 서문인걸이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와 서문인걸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오히려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상관명이 서문인걸과 야합을 한 술책에 스스로 휘말려드는 것은
아닌 가 초초함이 묻어나는 황제였다.
「 명(明)아..! 너도 서문가(西門家)와의 사연(事緣)이 깊구나..! 그래.. 어릴 적의 인연이더
냐..?」
황제의 목소리는 다정했으나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 예.. 폐하..! 십여 년 전 사고무친(四顧無親) 고아로 길거리를 떠돌고 있던 저를 거두어
주신 분입니다..! 」
상관명이 대답을 하고 있는 그때 서문인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 폐하.. 저 아이가 오갈 데 없어 거렁뱅이 생활을 하고 있던 어린 시절 소인이 저의 집으로
데려가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역시 어릴 때 부터 비범함을 보여 왔었는데 저리도 잘 자라 늠
름한 청년이 되어 있습니다. 명(明)아.. 이리 가까이 와 보아라..! 」
은근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명(明)아 부르며 친밀(親密)함을 보이는 상관명을 향해 더욱 예부터 절친(切親)한 관
계임을 과시하려는 다정한 목소리인 것이다.
빙긋 웃음을 띠우며 서문인걸을 향해 내려 가려는 상관명의 곁으로 학련(鶴蓮)이 다가와 귓속
말로 소근 거렸다.
「 주군(主君)..! 서문인걸의 부친이라는 저 백염(白髥)의 노인이 조평환의 집에서 흑의복면
을 하고 진두지휘를 하던 인물입니다. 유념(留念)하십시오. 그리고 또 한 가지...!」
귀에 소근 거리는 학련의 말에 상관명의 눈동자가 빤짝 빛을 발(發)하며 고개를 끄득였다.
(아하.. 이제야 서문인걸이 조정을 놓아두고 마음 편히 국경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의문이 풀
린다. 자신의 아버지를 믿고 있었구나..! 그리고.. 으음..!)
상관명은 학련의 말을 단단히 마음속에 간직하며 천천히 단(壇)아래로 내려와 서문인걸의 앞
으로 걸어갔다.
「 서문 어르신.. 일찍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옛날 거두어 주신 은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화령(華怜)아가씨도 잘 계시는지..?」
「 하하하.. 아니다.. 아니다. 정말 훤칠한 대장부가 되었구나. 이렇게 잘 자라주어서 정말
고맙다. 화령(華怜)은 네가 물려준 연환서숙을 잘 지키고 있단다. 」
가까이 다가온 상관명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호탕한 웃음을 웃고 있는 서문인걸에게 나
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르신.. 어린 제가 어르신의 집에 들어가던 그날.. 저의 성이 상관(上官)이라는 말을 들
으시고 가문을 물어보신 일을 기억하십니까..? 」
「오.. 그랬지..! 그러나 그때 너는 밝히지를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
「 예.. 그때는 저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예.. 짐작대로 후주(後周) 말엽의 재상을 지낸 상
관후(上官侯)어른이 저의 할아버지입니다. 」
「 어엇..! 역시 그랬었구나..! 어릴 때의 그 기백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구나..! 」
서문인걸이 감탄의 소리를 뱉어내고 있는 그 순간 그의 곁에 서있던 백염(白髥)노인이 더욱
놀란 얼굴로 상관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 뭐.. 뭣이라고 했느냐..? 얘야.. 너의 할아버지가 상관후(上官侯)라 하였느냐..? 」
순간 당황한 서문인걸이 백염(白髥)노인 앞을 가로막으며 상관명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
나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상관명이었다.
「 명(明)아..! 이 어른은 나의 가친인 상(相)자 현(賢)자 어른이시다. 」
「 아하.. 그렇습니까..? 소생 상관명이라 합니다. 」
「 그래.. 나는 인걸의 아비가 되는 서문상현(西門相賢)이라 한다. 너의 할아버지와는 전 왕
조에서 인연이 있었다. 」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는 상관명을 향해 반가운 듯 옛 왕조의 인연을 이야기 하는 서문상현
을 보며 상관명은 빙긋 얼굴에 웃음을 흘렸다.
「 예.. 큰 어르신..! 후주가 멸망할 때의 그 인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이신 상관후(上官侯)어른께서는 백성의 고난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스스로 목
숨을 버리고 신왕조의 건국을 용인(容認;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정함)했던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자리에 온 것은 폐하에게 백성을 천심(天心)으로 보살피라는 충언(忠言)을 드리고자 함이
그 첫째 이유이며 무(武)를 과시해 권세를 탐하는 무리를 응징하기 위함이 그 두 번째의 이유
올시다. 그런데 서문 큰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지금까지 추밀사 조
평환을 뒤에서 조종을 하고 계셨습니까..? 」
용정장원(龍亭莊園)에서 서문상현과 조평환의 마지막 대치 순간..! 복면이 벗겨져 얼굴을 드
러낸 서문상현과 조평환이 나누던 이야기를 학련이 상관명의 귀에 소근 거리며 알려 주었던
것이다.
「 헉.. 이.. 이놈 그것이 무슨 말이냐..? 」
잘못 들으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이 자리는 황제가 내려다 보고 있는 자리가
아닌가..! 겨우 거사를 꾸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려는 이 순간이 자칫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는 난감한 말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서문상현보다 오히려 서문인걸이 더욱 당황을 해 말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 명.. 명(明)아..! 그 무슨 망언이냐..!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
이러한 모습들은 단상위에 앉아있는 황제는 귀추(歸趨)가 자못 주목된다는 듯 흥미 가득한 얼
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서문어르신..! 다행히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빨아내는 조평환의 악명이 너무나
높아 그를 제거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복이 되는 명분이 있는 거사였습니다. 때문에
저도 그 거사에 도움이 되도록 어르신의 주장에 동조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상 과욕
을 부린다면 이 상관명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
「 이.. 이놈이..! 」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서문인걸이 황제의 어전인 것도 잠시 잊고 손을 높이 쳐
들어 올렸다. 공력이 가득 모아진 손으로 상관명을 내려치려는 자세가 아닌가..! 그 순간 빈
청의 모든 사람이 긴장한 눈으로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 이놈아.. 어전이다. 어찌 이리도 경망스러우냐..? 」
서문상현이 재빨리 아들의 손을 잡으며 슬며시 옆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서문인걸의 귀에 입
을 가까이 하여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 저 아이를 주군이라 부르는 학련처자 때문에 용정장원(龍亭莊園)에서 조평환을 죽이지 못
하였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저 처자의 무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초절(超絶)한 무
공이었다. 처자가 그럴 진데 주군이라 불리는 저 아이의 무공은 오직하겠느냐..! 함부로 나서
지를 말거라..! 」
「 아닙니다 아버님. 저 아이는 제가 몇 번 대면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살펴본 결과 아마 저
아이의 무공보다 지혜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듯 합니다. 여러 말들이 나오는 지금 황제도
모든 말을 들어 가슴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이 순간에 황제를 포함한 저들의 기를 꺾어 놓지
못하면 앞으로의 행보에 많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
「 그러냐..? 그래도 조심은 하거라..! 」
두 사람이 소근 거리다가 다시 상관명의 앞으로 다가온 서문인걸이 한층 소리를 높여 상관명
에게 호통을 쳤다.
「 이놈아.. 어릴 적의 인연을 생각해 그 말은 묻어 두겠다. 다시 허언을 지껄인다면 내가 너
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 줄 것이다. 」
「 예.. 그리해 주십시오. 저도 큰 어르신의 행위에 대한 말은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습니
다. 그러나 이 시간 이후 조금이라도 천심(天心)에 어긋나는 일을 벌인다면 제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서문어르신께서 야욕을 갖고 계신다면 이 자리에서 털어 버리십시오. 」
상관명의 근엄(謹嚴)한 모습이었다.
「 그래도 이놈이..! 도저히 안되겠구나..! 」
휘익.. 상관명의 눈앞으로 서문인걸의 양손이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 순간..!
「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
상관명의 입에서 소성(笑聲;웃음)이 조용히 울려 나왔다.
「 어억..! 」
움직여 지지 않는다. 빈청(賓廳) 어전(御前)에 서있는 모든 사람이 마치 마비가 된 듯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양손을 휘두르던 서문인걸조차 체내의 내공을 모두 끌어내어 위로 들어 올려 진 손을 아무리
거두어들이려 해도 단 한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이.. 이놈이..! 어헉.. 공.. 공주에게 뿌렸던 독(毒)도 네가 해독을 한 것이구나..! 」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저 입만 벙긋벙긋 열었다 닫을 뿐이었다.
천궁(天宮)의 절기 무극천성공(無極天聲功)을 빈청의 모두에게 조용히 들려준 것이었다.
* * * * * * * * * *
자혜공주가 기거하는 자혜궁(慈惠宮)의 상석에 황제가 앉아 있다. 그 황제의 앞에 공주와 학
련 그리고 상관명이 마주해 자리를 하고 있었다.
「 아바마마.. 어찌 소녀의 궁(宮)으로 오자고 하셨습니까..? 민망하옵니다. 」
공주가 황제의 앞에서 부끄러운 듯 말하고 있었다.
「 아니다. 자주 공주를 보러 오고 싶었으나 짐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오늘은 우리 공주의
방을 꼭 보고 싶었구나..! 」
「 아이.. 아바마마도..! 소녀도 기뻐옵니다. 」
이제 황제가 자신의 의지로 황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된 것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공
주의 마음인 것이었다.
황제가 상관명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명(明)아.. 고맙다. 네가 있어 정말 든든하구나..! 수천 년 전 그 옛날.. 하(夏)나라의 걸
왕(桀王)이 황음(荒淫)에 젖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백성을 핍박하는 그를 응징한 천궁(天宮)
의전설(傳說)은 이 황실(皇室)에도 면면이 이어져 왔다. 오늘의 황제인 짐(朕)도 수천 년을
이어온 그 천궁이 절실히 바라는 요순의 후예가 되라는 바램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 황궁
도 천궁과 일맥을 함께해 요순의 치(治)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
「 예 폐하..! 옳으신 결심입니다. 부디 백성을 향한 그 천심(天心)을 버리지 마십시오. 서문
인걸 역시 그런 조그만 틈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의 복심은 자세히는 모르나 서문
인걸의 마음속에는 무서운 야욕(野慾)이 숨겨져 있습니다. 」
「 오오.. 알았다. 짐의 치세(治世)는 이 나라의 백성을 으뜸으로 삼을 것이니라..! 」
황제의 다짐에 자혜궁(慈惠宮)에 앉아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모두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 전반부 이야기 ㅡ 끝 ㅡ *******************
서검연풍록 (書劍戀風錄)의 후반부의 내용은 서문인걸이 역심을 품고 강호의 세력을 규합하여
왕조를 전복 시키려 하며 상관명은 천궁의 세력을 넓혀가며 그 역모를 막으려 하는 강호에서
의 대결로 전개시켜 갈까 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낭만백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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