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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정풍운(雷霆風雲) -18-

 낙약란이 돌아가고 혼자 남은 이현성은 연공실에서 자신의 무공
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와서 익힌 것은 뇌정천왕의
복마대구식과 뇌정심결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완벽은커녕 반쪽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낮은 수준의 무공으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것
은 (이현성 자신은 용정혈지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차원
이동의 효과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내공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그에게 있어서 용정혈지로 인해 생긴 막대
한 내력은 돼지 목에 진주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차원
이동에 의해 생긴 마이스너 효과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죽
은 목숨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몸속을 관조했다. 이는 지난 몇 개월
간의 운기를 통해 요 근래에야 겨우 가능해진 것으로 비로소 제
대로 된 운기행공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현성은 혈도의 위치만 겨우 외우고, 꿈틀거리는
 기운을 호흡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환하도록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자신의 신체 내부가 그림처럼 그려졌다. 단전에
서 빛나고 있는 하얀 빛은 그 자신의 내력이 틀림없으리라. 하
지만 기가 통하는 혈맥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잠력(潛力)은 단전
에 자리 잡은 내력의 수십배는 될 듯 보였다.


 “일단 이 기운들을 단전에 모아야겠지..”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운기를 시작했다. 미약했던
진기가 혈도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점점 그 크기를 불려
갔다. 몇 번의 소주천을 했을까, 혈맥 속에 잠들어 있던 기운이
조금씩 그의 내력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양은 미약하기 그지
없어 이 상태로는 평생을 해도 모든 잠력을 흡수할 수 없을 것이
란 걸 이현성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현성이 시도하려 하는 것은 뇌정복마심결을 운용하는 것
이었다. 처음에 이 세계로 와서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로는
 포기하고 있던 그였지만, 매부용을 구하면서 하게 된 청년과의
 싸움에서 확실히 느꼈다. 이대로 어영부영하고 있다가는 시류
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순식간이라는 것을...


 자신은 착각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처럼 여
기고, 연기처럼, 유희를 하듯 이 세상에 자신을 맞춰 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이렇게 살다간 진짜로 죽는다는 걸.
자신이 처한 세계는 여복이 가득한 살색 무협지 세계가 아니라,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자신이라
고 비껴가지 않는다.


 -천지가 합일되면 음양이 조화되며 하나의 벽력을 낳으니 그것이
바로 뇌정(雷霆)이라.-


 ‘뇌는 목기이니 행공을 할 때에는 목, 화, 토, 금, 수의 순서로 해
야 한다. 복마뇌정심결은 단전이 아닌 소상에서부터 운기가 시
작되는 데 그 행로는 수태음폐경을 따라 정목혈인 소상에서부터
 어제, 태연, 경거, 척택.....’


 뇌온려가 읽어주었던 뇌정복마심결의 구결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서 떠올렸다. 잔잔히 흐르던 내기가 요동치기 시작하며, 전신의
혈맥에 아련한 고통이 떠오르며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언제나
 이쯤에서 심법의 운용을 그만두곤 했었던 이현성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부르르


 이현성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뇌정심결에 따라
흐르기 시작한 진기는 강한 응집력을 가지고 혈맥 속에 잠든 진
기의 조각조각들을 끌어당겼고, 이윽고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번도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이 전신을 달렸다. 진기는 순식간에
그의 통제를 벗어나 환골탈태를 거쳐 한 점의 탁기도 없는 그의
 혈도를 야생마처럼 미친 듯 질주했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면 또 다시 원
점일 뿐이다. 게다가  이미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이는 진기를
 억지로 멈추려 하면 그 무섭다는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었다.


 이현성에게는 군생활보다도 길게 느껴질 시간이 반 시진쯤 지났
을 때. 고요하던 주변의 대기가 천천히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돌이 던져진 것처럼 주위로 퍼져나가던 잔잔한
 바람은 서서히 강풍으로 변했고, 강풍은 곧 미친 폭풍이 되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 속에 이현성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찌직


 그리고 그 때 마치 눈에 보일 듯 새하얗게 휘몰아치는 바람의 기
류 사이 미약한 소성과 함께 무언가가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쩌저정!


 커다란 굉음과 함께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려 꽂히는 번개. 그리
고 순식간에 연공실 안을 하얗고 푸른 뇌전의 흐름이 마치 나뭇
잎의 수맥처럼 천지사방을 가득 채웠다.


 인세에 다시없을 기사(奇事)였다. 어느덧 비 오듯 흐르던 땀은 모
두 증발하였고, 고통도 사라져 이현성의 표정은 득도한 고승처럼
 평온해 보였다. 무공의 성취로 인한 무심열락(無心悅樂)의 현
상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공실 안을 가득 채우던 뇌전이 사그
라지고, 회오리바람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이현성의 눈이 뜨였다. 엄청난 기사를 일으킨 장본인인
만큼 눈 속에서 휘황찬란한 광채라도 번뜩여야 할 것 같지만,
약간의 기쁨이 어린 것을 제외하면 그의 눈빛은 평소처럼 담담하
기 그지없었다.


 ‘성공했다!’


 이제야 처음으로 뇌정심결을 운공한 그였지만 그에게 잠재되어
있던 막대한 내력은 그의 뇌정심공을 십성에 이르게 하였고, 그
러고서도 십분의 일 정도 흡수되었을 뿐이었다.


 이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자신의 몸을 돌아보았다. 외견
상으로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지만, 왠지 뿌듯하고 자랑스러
웠다.


 “이제 복마대구식을 수련해야겠지만, 피곤하니까 내일 하자.”


 가볍게 중얼거리며 연공실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이현성은 흠칫
놀라 멈추어섰다.


  “…!”


 어둑한 연공실의 철문 앞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는 것을 발
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신에 소복(素服)을 걸치고 있었다.
이현성은 그 초췌한 안색의 미부가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살을 섞게 된 장강용왕의
미망인인 매부용이었다.


 “여긴 어떻게…!”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시간에 매부용과 마주친 이현성은 순간
적으로 당황을 금치 못했다. 엉겁결에 튀어나온 물음에 매부용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은공께서… 안에서 닷새 동안이나 기별이 없으시기에….”


 ‘엑! 닷새?’


 길어야 한 두시진쯤 지났을 거라 생각했던 이현성은 자신이 5일
동안이나 운공을 하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멍하게 매부용을
 바라보았다.


 이현성이 한참동안이나 말이 없자 살그머니 고개를 들었던 매부
용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매부용의 초췌하던 옥용은 순식간 목덜미까지 사과빛으로 물들어
버렸다. 자신을 직시하는 이현성의 시선에 그녀는 무의식중에
괴한에게 동조했던 부끄러운 치태와 최음제 때문에 해야했던 이
현성과의 격렬했던 정사가 떠올라 그녀는 한 순 몸둘바를 몰랐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면서 매부용은 손에 들고
있던 수건을 머뭇거리며 이현성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현성은 멋적은 표정으로 별 필요도 없는 수건을 받았다. 수건
을 받아 들던 그의 손끝이 매부용의 섬섬옥수에 슬쩍 맞닿았다.
 순간, 그녀는 마치 불덩이를 만진 듯한 충격에 전신을 떨었다. 이
어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고, 잠깐의 침묵이 그들을 감싸 안
았다.


 ‘이거 참 과민반응이네.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맺게 된 여자 맘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씁쓸함에 매부용의 눈길을 피한 이현성은 어색함을 감추려 급히
수건으로 있지도 않은 얼굴의 땀을 닦았다.


 그런 이현성에게 매부용은 고개를 떨군 채 기어들어가는 소리 로
말했다.


 “두 번씩이나 신세를 져서… 극(極)과 초하(楚河)를 대신하여…
감사….”


 뒤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


 고개 숙인 매부용의 모습을 이현성은 다소 당혹스러운 눈길로 내
려다 보았다.


 ‘이거 참. 이럴 땐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 거지. 겸양을 해야되는
건가. 아니면 사죄를 해야 되는 건가?’


 이현성은 내심 고소를 지으며 머리에 떠오르는 무협지의 대사를
말했다.


 “부인께 제가 끼친 누는… 죽음으로 사죄해도 부족합니다만 그
중의 만 분의 일이라도 보상해 드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말만 해 주십시오!”
 “…!”


 이현성의 말에 매부용의 두 볼은 한층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녀는 가슴이 요동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순간 전신의
 뼈마디도 녹여낼 듯하던 이현성의 그 행위를 떠올리며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마음에 두실 것 없어요. 공자께서 서씨가문에 베푼 은혜를 갚으
려면 그 이상도… 감수할 수 있으니…!”


 매부용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


 순간, 이현성은 아찔한 충격을 받았다. 따지지 못할 작자의 농간
(弄奸)인가, 말 못할 여인의 마음인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매부
용의 그 말에는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제안이 담겨 있었기 때
문이다.


 그것은 언제라도 이현성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완곡한 표현이 아
닌가. 매부용의 숙부에게 이상한(?) 선물을 받고 당황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
던 이현성은 얼굴이 붉게 물들이며 매부용을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상복에 감싸인 무르익은 여체가 그의 두 동공 깊숙이 쏘아져 들
어왔다. 사과빛으로 물든 그녀의 매끄러운 목덜미와 불룩한 가
슴에 시선이 닿자 이현성의 내부에서는 한가닥 강렬한 충동이 불
끈 치솟았다.


 ‘시험삼아 당장 여기서 하자고 해볼까.’


 순간 떠오르는 주책스러운 생각.


 ‘이 무슨 망상이냐?’


 이현성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매부용은 부끄러움을 견
디기 힘든 듯 깊숙이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총총히 연
공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현성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다가 지상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은 이미 황혼녘이라 하늘빛도 매부용의 얼굴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아침 일찍 연공실로 돌아온 이현성은 품속에서 한자쯤 되는 소검
을 꺼냈다. 대검(帶劍)이었다. 자신의 모든 군장은 수월암에 맡겨
 둔 상태.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자신이 이계에서 왔다
는 증거는 이 대검뿐이었다.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 그는 지금
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대검으로 복마대구식을 익힐 생각이었다.


 ‘한 자가 길면 그만큼 강하다. 누가 했던 말이더라?’


 무기가 짧을수록 적 가까이 붙어야 하기에 이현성도 짧은 무기가
불리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처럼 강기와 장
풍을 날려대는 세계에서는 병기의 장단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게다가 이현성은 이곳 무인들의 단점과 자신의 장점을 떠올
리고 있었다.


 그가 파악하기엔 왜인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강기가 거의 통하
지 않았고, 이곳의 무인들은 강기를 발하기 위한 실질적이기보
다는 형이상학인 무공으로 인해, 근접전에는 약한 편이었다. 그
렇기에 자신이 장기로 해야 할 것은 근접전. 근접전이라면 무기
가 짧을수록 유리하다.
 
 그는 내력을 주입하지 않은 채 대검을 종횡으로 마구 휘둘렀다.
검학의 시작과 끝이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복마대구
식(伏魔大九式)이 그의 손에서 처절하게 망가지고 있었다……….
===========

 

세상에서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초심을 끝까지 유지하는 일이라..

그것을 항상 실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뇌정풍운을 시작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허접스러운 글이 되더라도.

끝을 내고말리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약해지는 마음.

너무 좋은 글들을 많이 읽어서인지, 능력은 안 되면서 눈만 높아져서

스스로도 창피한 글을 계속 써가기보다는 차라리 다시 새로 시작을 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지요.

그러면서도 이런 짜깁기 무협도 완결 짓지 못하면서 또 새로운 글을 쓴다고 해서 끝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새 글이라고 잘 쓸 수 있냐는 스스로에 대한 의문.

그래서 그냥 되는대로 막 나가기로 했습니다.

재미가 있던 없던 글이 좋던 않좋던 말이 되던 안되던 어떻게 해서라도 이 글을 끝낼 수 있다면.

그 때에는 좀 더 나은 글쟁이가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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