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정풍운(雷霆風雲) -13-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 가운데 홀로 남겨져 있던 그 때 홀연히 나타나 배신자들을 베어넘기던 신장과도 같은 모습. 거기에 부드러운 얼굴과 행동은 거친 수로맹의 남자들과는 전혀 달랐으니 옛 이야기에 나오는 협객을 동경하던 서초하의 마음이 흔들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밤 사이 잠 못 이루던 그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이현성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뒤를 쫒게 된 것이다.
이현성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얼굴을 사과빛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배 위에서의 의연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뭐라고 말을 걸까 망설이던 현성은 짐짓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아… 안녕하시어요.”
서초하는 안절부절 못하며 겨우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제 저녁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잖아. 자기소개해야지. 난 이현성이야. 어쩌다보니 여기에 신세를 지게 됐네.”
“소… 소녀는 서… 초하…라고 하….”
뭘 그리 긴장했는지 말이 끝날 때쯤에는 그녀의 입안에서만 웅얼거릴 뿐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 초하라고. 예쁜 이름이네. 어제는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그렇지.”
예쁜 이름이라는 말에 서초하의 표정에는 살짝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소…소녀를… 위난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 남자라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위험해 처해 있는데 당연한 거 아냐.”
“으…으…은공!”
그녀는 이미 귀까지 빨갛게 되어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
이어진 현성의 말에 그녀는 깜짝 눈을 크게 뜨더니 할 말을 찾듯 입을 뻐끔거렸다.
“으…은공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려고….”
서초하는 될 수 있는 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지만 현성은 어린 여자애가 그러는 것이 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에이 정말 감사는 무슨. 그리고 그 은공 소리 진짜 껄끄럽다야. 그냥 오빠라고 불러.”
“에… 에엣!?”
“왜 싫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너무 당황하는 서초하의 모습에 현성은 바로 말을 철회했다. 어린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엽기는 하지만 이 이상 계속하는 건 놀림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생각 없이 반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신분이 높은 여자애인 만큼 존댓말을 해야 했던 걸까하는 고민도 들었다.
그런데.
“아니에요. 싫을 리가..”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서초하의 목소리. 이현성은 반색을 하고는 그녀를 추궁했다.
“그럼 한번 불러봐.”
“.....”
서초하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쳇. 싫은 모양이군.”
오빠 소리가 그리 창피한가. 조금은 어이가 없어 내뱉은 이현성의 말에 서초하는 얼굴을 숙인 채로..
“오.. . 니”
“응?”
현성은 귀에 손을 대고 다시 물었다.
“현성… 오라버니….”
“아냐 아냐. 오라버니는 또 뭐야. 오빠라고 해. 오빠.”
“오…오 빠.”
“우하하. 잘 하네.”
왠지 모를 성취감에 기뻐하는 이현성.
서초하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듯 그대로 새처럼 팔랑팔랑 뛰어가 버렸다.
가만히 서서 서초하가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어느새 이현성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사내.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 서극의 직속수하 중 한명이다.
“이 공자님.”
“무슨 일입니까?”
“맹주께서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맹주?”
맹주라고 하면 분명 과해룡 서극을 일컫는 것이다. 이현성은 턱을 문질렀다.
‘무슨 일이지.’
“안내하세요. 따라가겠습니다.”
----
이현성이 안내된 곳은 수룡보 내부에 위치한 작은 정자였다.
“맹주님. 이공자님을 모셔왔습니다.”
이현성을 이곳까지 안내해 온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물러갔고, 이현성만 홀로 정자에 오르니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과해룡(過海龍) 서극(徐極)과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다.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현성을 무척이나 어색하게 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를 서극이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이형.”
“무슨 일이십니까? 서맹주께서 저를 직접 만나자고 하시다니?"
그의 분위기에 조금은 긴장한 이현성에게 서극은 담담하게 말을 했다.
“나는 이형이 우인의 여동생을 구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있소이다.”
“예…예에.”
“그런데 한가지 알게 된 사실 때문에 마음이 쓰리오.”
“예?”
“이형은 왜 나를 속였소이까?”
“에!?”
이현성은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과연 서극은 자신의 무엇을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서극은 말을 계속했다.
“장강의 물길은 우리 수로 연맹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이형이 이곳까지 오게 된 행로를 알게 되었소이다.”
“…….”
“동릉현(銅陵縣)이 섬서성에 있소이까? 나는 안휘성에 있는지 알았소만.”
“…….”
술자리에서 되는대로 꺼낸 말인데 그런 작은 조각배를 타고 온 자신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까지 알아내 꼬투리를 잡아오다니, 과연 장강의 물길이 손바닥에 있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이현성도 할말은 있었다.
“변명은 하지 않을 생각이오?”
“변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저는 당당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표정관리다. 이현성은 맞받아치기로 했다.
“무슨 뜻이오?”
“저는 섬서에 있어 난을 피했다고 했지, 섬서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서맹주가 아닙니까?”
“내가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이오?”
“어제 말씀 드렸지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본각의 흉수를 찾기 위해서라고, 서맹주는 뇌정검호각의 참변에 장강수로연맹이 관여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어 보시지요.”
단도직입적인 이현성의 말에 서극이 당황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를 대신해 말을 이어 받은 것은 묵자강이다.
“이공자는 우리 수로연맹을 의심하고 계시오?”
“예.”
이현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무협지의 패턴대로라면 이 두사람은 뇌정검호각의 참변과는 관계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묵자강이 위협하듯 말했다.
“만약 진짜로 우리가 뇌정검호각의 멸문에 관여하였다면 어쩔 것이오? 그럼 지금 당장 이공자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할 수도 있소만.”
‘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말과 같아.’
이현성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겉으로는 초연하게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죠.”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묵자강의 몸에서 강대한 기세가 스물스물 일어났다. 그러나 이현성은 아무렇지 않게 서서는 머릿속으로 ‘아! 어른은 공경해야 되는데, 이렇게 말대꾸하는 건 좀.’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원이동으로 인한 기연 때문에 묵자강의 기세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제야 서극이 그 둘을 말리고 나섰다.
“묵채주 말씀이 심하오. 이형 진정하시오.”
잠시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고 한숨을 내쉰 이현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 이곳으로 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극은 묵자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우리 수로연맹에서는 이형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최대한의 요구를 들어 드릴 테니 우리를 도와주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우리 수로맹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소. 전 맹주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맹의 권위가 약해지며 각 채주들이 독존을 시도하고 있소이다.”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뇌정검호각의 일에 끼어든 채주들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일 것이오. 하찮은 수적취급을 받던 우리가 당금 무림에서 이만큼 행세를 하고 지낼 수 있는 것은 하나로 뭉쳐있기 때문인데 예전처럼 열 여덟개의 수채로 갈라진다면 또다시 지리멸렬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나는 그것을 막고 싶소이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현성이 우회적으로 거절을 표하자 물러나 있던 묵자강이 나섰다.
“본래 수적의 무리에서 출발한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고수의 숫자가 부족하오. 게다가 노부나 서맹주 휘하의 세력이 움직인다면 형제들 간에 피를 흘리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분열을 촉진시켜 저들이 바라는 대로 되고 말 것이오. 우리는 이공자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니까 제가 무슨 힘으로요?”
“뇌정검호각의 흉수를 찾고 계시다 하지 않았소. 흉수를 찾는 것은 복수를 위함이고, 복수를 논한다는 것은 복수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오. 뇌정검호각은 대문파인 만큼 공자와 같은 이유로 위난을 피한 분이 한둘이 아니겠지요.”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남은 세력도 별로 힘은 없거덩….’
이현성은 내심을 감추고 되물었다.
“수로맹을 도와서 본각이 얻는 이득이 뭐가 있습니까?”
“공자도 본맹과 귀각의 흉수들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소. 우리를 도우면 흉수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고 일이 해결되면 본연맹은 귀각의 일을 발 벗고 도와주겠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자신이 능벽운에게 받은 부탁은 흉수와 수로맹 사이의 관련성을 조사해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자신에겐 어떠한 권위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거부를 해야겠지만 그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알겠습니다. 수로맹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도 비슷한 우려를 한 것일까 묵자강이 물었다.
“실례일지 모르지만 한 가지 묻겠소? 현재 뇌정검호각에서 이공자의 지위가 어떻게 되시오?”
실제로 이현성에게는 지위고 뭐고 없다. 하지만 능벽운에대한 반감 때문일까 이현성은 심호흡을 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해 버렸다.
“저는 뇌정검호각의 십팔대 각주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
드넓은 정원(庭園). 잘 가꾸어진 관목들이 즐비하다. 휘늘어진 가지. 추풍(秋風)이 볼 때마다 가지 끝에 달린 이파리가 바르르 떨었다. 단풍 든 홍엽(紅葉)이 어느새 낙엽을 떨구려 함인가?
널찍한 연못. 시원한 추수(秋水)가 언뜻 부는 바람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켰다. 연못이 자리한 가산(假山)은 온통 기이한 암석들이 가득했고, 암석들 사이로는 한 채의 정자(亭子)가 있었다.
정자 안,
한 명의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묵과 고요가 그 청년을 감쌌다.
“........”
청년은 무심히 연못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십대 후반 정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녹록치 않은 기운이 뿜어지고 있다. 그런 그의 옆에 서 있는 이는 하얗게 샌 머리에도 불구하고, 철탑처럼 강건한 육체의 노인이었다. 그 둘은 과해룡(過海龍) 서극(徐極)과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었다. 이현성을 보내고도 두사람은 아직 정자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묵자강이다.
“맹주는 그가 믿을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오.”
“저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묵채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을 수 있는 자요. 하지만 믿으면 안 되오.”
“예?”
서극은 묵자강의 대답이 매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묵자강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맹주의 무공이 나를 넘어선지 오래지 않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보이더까?”
“모르겠습니다. 무공을 익힌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 데, 때때로 벼락같은 기세가 느껴지더군요. 저보다 하수는 아니겠지요.”
“내 생각도 그러하오. 그라는 인물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공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외다. 분명 현시점의 우리에게는 필요한 사람이지만, 후에는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오. 그래서 말인데. 맹주. 미안한 말이오만”
“예.”
“배에서의 행동이나, 낙채주를 대하는 것을 보냐 그는 여자에게 매우 약한 것 같소이다.”
묵자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도 서극이 그 속에 담긴 뜻을 짐작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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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죄송한 분량입니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시험을 보고 글을 다시 손에 잡으려니 그냥 연중하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는 게 힘들었습니다.
패러디건 헛짓거리건 비록 오래걸리더라도 끝을 볼 때까지 저를 마구 구박해서 계속 이어나가게 해주세요.
가을이라 마음이 심란해진건지 여러분의 구박이 필요합니다.
이현성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얼굴을 사과빛으로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배 위에서의 의연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뭐라고 말을 걸까 망설이던 현성은 짐짓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아… 아… 안녕하시어요.”
서초하는 안절부절 못하며 겨우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 어제 저녁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잖아. 자기소개해야지. 난 이현성이야. 어쩌다보니 여기에 신세를 지게 됐네.”
“소… 소녀는 서… 초하…라고 하….”
뭘 그리 긴장했는지 말이 끝날 때쯤에는 그녀의 입안에서만 웅얼거릴 뿐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 초하라고. 예쁜 이름이네. 어제는 정말 큰일 날 뻔 했다. 그렇지.”
예쁜 이름이라는 말에 서초하의 표정에는 살짝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소…소녀를… 위난에서… 구해 주셔서… 감사….”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 남자라면 이렇게 예쁜 아가씨가 위험해 처해 있는데 당연한 거 아냐.”
“으…으…은공!”
그녀는 이미 귀까지 빨갛게 되어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웠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
이어진 현성의 말에 그녀는 깜짝 눈을 크게 뜨더니 할 말을 찾듯 입을 뻐끔거렸다.
“으…은공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려고….”
서초하는 될 수 있는 한 예의를 갖추어 말했지만 현성은 어린 여자애가 그러는 것이 더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에이 정말 감사는 무슨. 그리고 그 은공 소리 진짜 껄끄럽다야. 그냥 오빠라고 불러.”
“에… 에엣!?”
“왜 싫어.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다.”
너무 당황하는 서초하의 모습에 현성은 바로 말을 철회했다. 어린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귀엽기는 하지만 이 이상 계속하는 건 놀림 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아서다. 그리고 생각 없이 반말을 하기는 했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신분이 높은 여자애인 만큼 존댓말을 해야 했던 걸까하는 고민도 들었다.
그런데.
“아니에요. 싫을 리가..”
들릴 듯 말 듯 조그마한 서초하의 목소리. 이현성은 반색을 하고는 그녀를 추궁했다.
“그럼 한번 불러봐.”
“.....”
서초하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들였다.
“쳇. 싫은 모양이군.”
오빠 소리가 그리 창피한가. 조금은 어이가 없어 내뱉은 이현성의 말에 서초하는 얼굴을 숙인 채로..
“오.. . 니”
“응?”
현성은 귀에 손을 대고 다시 물었다.
“현성… 오라버니….”
“아냐 아냐. 오라버니는 또 뭐야. 오빠라고 해. 오빠.”
“오…오 빠.”
“우하하. 잘 하네.”
왠지 모를 성취감에 기뻐하는 이현성.
서초하는 더 이상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듯 그대로 새처럼 팔랑팔랑 뛰어가 버렸다.
가만히 서서 서초하가 도망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현성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어느새 이현성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사내. 이름은 모르지만 분명 서극의 직속수하 중 한명이다.
“이 공자님.”
“무슨 일입니까?”
“맹주께서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맹주?”
맹주라고 하면 분명 과해룡 서극을 일컫는 것이다. 이현성은 턱을 문질렀다.
‘무슨 일이지.’
“안내하세요.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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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성이 안내된 곳은 수룡보 내부에 위치한 작은 정자였다.
“맹주님. 이공자님을 모셔왔습니다.”
이현성을 이곳까지 안내해 온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물러갔고, 이현성만 홀로 정자에 오르니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과해룡(過海龍) 서극(徐極)과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다. 말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이현성을 무척이나 어색하게 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그를 서극이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이형.”
“무슨 일이십니까? 서맹주께서 저를 직접 만나자고 하시다니?"
그의 분위기에 조금은 긴장한 이현성에게 서극은 담담하게 말을 했다.
“나는 이형이 우인의 여동생을 구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있소이다.”
“예…예에.”
“그런데 한가지 알게 된 사실 때문에 마음이 쓰리오.”
“예?”
“이형은 왜 나를 속였소이까?”
“에!?”
이현성은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과연 서극은 자신의 무엇을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서극은 말을 계속했다.
“장강의 물길은 우리 수로 연맹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래서 나는 본의 아니게 이형이 이곳까지 오게 된 행로를 알게 되었소이다.”
“…….”
“동릉현(銅陵縣)이 섬서성에 있소이까? 나는 안휘성에 있는지 알았소만.”
“…….”
술자리에서 되는대로 꺼낸 말인데 그런 작은 조각배를 타고 온 자신들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까지 알아내 꼬투리를 잡아오다니, 과연 장강의 물길이 손바닥에 있다고 할만하다. 하지만 이현성도 할말은 있었다.
“변명은 하지 않을 생각이오?”
“변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군요. 저는 당당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것이 표정관리다. 이현성은 맞받아치기로 했다.
“무슨 뜻이오?”
“저는 섬서에 있어 난을 피했다고 했지, 섬서에서 이곳으로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변명을 해야 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서맹주가 아닙니까?”
“내가 무슨 변명을 해야 한단 말이오?”
“어제 말씀 드렸지요.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본각의 흉수를 찾기 위해서라고, 서맹주는 뇌정검호각의 참변에 장강수로연맹이 관여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어 보시지요.”
단도직입적인 이현성의 말에 서극이 당황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를 대신해 말을 이어 받은 것은 묵자강이다.
“이공자는 우리 수로연맹을 의심하고 계시오?”
“예.”
이현성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무협지의 패턴대로라면 이 두사람은 뇌정검호각의 참변과는 관계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어서 묵자강이 위협하듯 말했다.
“만약 진짜로 우리가 뇌정검호각의 멸문에 관여하였다면 어쩔 것이오? 그럼 지금 당장 이공자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할 수도 있소만.”
‘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는 법이지.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나를 죽이지 않겠다는 말과 같아.’
이현성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겉으로는 초연하게 대답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죠.”
순간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묵자강의 몸에서 강대한 기세가 스물스물 일어났다. 그러나 이현성은 아무렇지 않게 서서는 머릿속으로 ‘아! 어른은 공경해야 되는데, 이렇게 말대꾸하는 건 좀.’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차원이동으로 인한 기연 때문에 묵자강의 기세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제야 서극이 그 둘을 말리고 나섰다.
“묵채주 말씀이 심하오. 이형 진정하시오.”
잠시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고 한숨을 내쉰 이현성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 이곳으로 나를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극은 묵자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더니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우리 수로연맹에서는 이형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최대한의 요구를 들어 드릴 테니 우리를 도와주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지금 우리 수로맹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해 있소. 전 맹주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맹의 권위가 약해지며 각 채주들이 독존을 시도하고 있소이다.”
이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뇌정검호각의 일에 끼어든 채주들도 그런 자들 중 하나일 것이오. 하찮은 수적취급을 받던 우리가 당금 무림에서 이만큼 행세를 하고 지낼 수 있는 것은 하나로 뭉쳐있기 때문인데 예전처럼 열 여덟개의 수채로 갈라진다면 또다시 지리멸렬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오. 나는 그것을 막고 싶소이다.”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현성이 우회적으로 거절을 표하자 물러나 있던 묵자강이 나섰다.
“본래 수적의 무리에서 출발한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고수의 숫자가 부족하오. 게다가 노부나 서맹주 휘하의 세력이 움직인다면 형제들 간에 피를 흘리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분열을 촉진시켜 저들이 바라는 대로 되고 말 것이오. 우리는 이공자께서 그것을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오.”
“그러니까 제가 무슨 힘으로요?”
“뇌정검호각의 흉수를 찾고 계시다 하지 않았소. 흉수를 찾는 것은 복수를 위함이고, 복수를 논한다는 것은 복수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오. 뇌정검호각은 대문파인 만큼 공자와 같은 이유로 위난을 피한 분이 한둘이 아니겠지요.”
‘그 말이 맞기는 한데, 남은 세력도 별로 힘은 없거덩….’
이현성은 내심을 감추고 되물었다.
“수로맹을 도와서 본각이 얻는 이득이 뭐가 있습니까?”
“공자도 본맹과 귀각의 흉수들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소. 우리를 도우면 흉수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고 일이 해결되면 본연맹은 귀각의 일을 발 벗고 도와주겠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자신이 능벽운에게 받은 부탁은 흉수와 수로맹 사이의 관련성을 조사해달라는 것뿐이었다. 그 자신에겐 어떠한 권위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거부를 해야겠지만 그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튀어나왔다.
“알겠습니다. 수로맹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들도 비슷한 우려를 한 것일까 묵자강이 물었다.
“실례일지 모르지만 한 가지 묻겠소? 현재 뇌정검호각에서 이공자의 지위가 어떻게 되시오?”
실제로 이현성에게는 지위고 뭐고 없다. 하지만 능벽운에대한 반감 때문일까 이현성은 심호흡을 하고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해 버렸다.
“저는 뇌정검호각의 십팔대 각주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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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정원(庭園). 잘 가꾸어진 관목들이 즐비하다. 휘늘어진 가지. 추풍(秋風)이 볼 때마다 가지 끝에 달린 이파리가 바르르 떨었다. 단풍 든 홍엽(紅葉)이 어느새 낙엽을 떨구려 함인가?
널찍한 연못. 시원한 추수(秋水)가 언뜻 부는 바람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켰다. 연못이 자리한 가산(假山)은 온통 기이한 암석들이 가득했고, 암석들 사이로는 한 채의 정자(亭子)가 있었다.
정자 안,
한 명의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침묵과 고요가 그 청년을 감쌌다.
“........”
청년은 무심히 연못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십대 후반 정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녹록치 않은 기운이 뿜어지고 있다. 그런 그의 옆에 서 있는 이는 하얗게 샌 머리에도 불구하고, 철탑처럼 강건한 육체의 노인이었다. 그 둘은 과해룡(過海龍) 서극(徐極)과 철면노호(鐵面怒虎) 묵자강(墨滋康)이었다. 이현성을 보내고도 두사람은 아직 정자를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묵자강이다.
“맹주는 그가 믿을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시오.”
“저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묵채주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을 수 있는 자요. 하지만 믿으면 안 되오.”
“예?”
서극은 묵자강의 대답이 매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묵자강은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맹주의 무공이 나를 넘어선지 오래지 않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보이더까?”
“모르겠습니다. 무공을 익힌 흔적도 잘 보이지 않는 데, 때때로 벼락같은 기세가 느껴지더군요. 저보다 하수는 아니겠지요.”
“내 생각도 그러하오. 그라는 인물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공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외다. 분명 현시점의 우리에게는 필요한 사람이지만, 후에는 오히려 우리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오. 그래서 말인데. 맹주. 미안한 말이오만”
“예.”
“배에서의 행동이나, 낙채주를 대하는 것을 보냐 그는 여자에게 매우 약한 것 같소이다.”
묵자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말만으로도 서극이 그 속에 담긴 뜻을 짐작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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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죄송한 분량입니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시험을 보고 글을 다시 손에 잡으려니 그냥 연중하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마음을 다잡고 글을 쓰는 게 힘들었습니다.
패러디건 헛짓거리건 비록 오래걸리더라도 끝을 볼 때까지 저를 마구 구박해서 계속 이어나가게 해주세요.
가을이라 마음이 심란해진건지 여러분의 구박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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