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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獨奏 [단편]



-독주獨奏-



당신의 앞에는 밤하늘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창이라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당신과 밤하늘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환하게 켜진 가로등 위의 하늘 속에 빠르게 구름이 흐른다. 그 탓인지 달이 캄캄한 밤하늘을 홀로 흘러가는 듯하다. 인간의 눈은 종종 이렇게 쉽게 착각하기도 한다. 당신은 눈을 세게 깜박인다.

당신은 밤하늘을 좋아한다. 별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을 당신은 좋아한다. 덩그러니 떠있는 달을 당신은 좋아한다. 남자라는 인간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당신은 저 고독해 보이는 달 속에 스스로를 대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당신은 가끔 생각한다. 달을 보면서 자위를 하면 마약보다도 더한 쾌락일거라고. 그러나 생각만할 뿐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당신은 소심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상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다. 왜 바이올린을 처음 잡게 되었는지 당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십년 전 당신이 좋아하던 여자아이 앞에서 바이올린을 들고 거들먹거리던 어떤 녀석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툴기 짝이 없는 실력으로 그 녀석은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아마 <미뉴에트>였다고 당신은 기억한다. 그 여자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연주가 끝나고 여자아이의 입가에 맺히던 환한 미소를 당신은 기억한다. 그 미소는 당신의 어린 가슴에 열을 지피듯 쿵쾅거리게 했다. 당신이 어머니에게 바이올린을 사달라고 조른 것은 이때였다.

당신은 바이올린의 줄을 만진다. 왼손에 깊게 베긴 굳은살이 새삼스레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한다. 그로부터 십 년. 당신은 음대에 다니고 있다. 질투심에서 잡은 바이올린은 당신의 이십 이년 인생을 휘감아 돌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창가에 앉아 당신은 <미뉴에트>를 연주한다. 기억 한 구석에 박혀있는 그 악보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그 선율이 당신의 귀에 내려앉는다. 문득 잘 생각도 나지 않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눈앞을 감싼다.


***


긴 머리의 그녀를 당신은 알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앞에서 당신과 같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무릎 부분이 찢어진 청바지, 검은색 블라우스, 흔하지 않은 역삼각형 무늬를 가진 백금의 목걸이. 그녀다운 의상 컨셉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정식연주회에서조차 그녀는 그 흔한 격식을 차린 검은 슈트 따위도 입은 적이 없다. 하얀 민소매 셔츠 차림에 홍치마. 그녀가 ‘런던 칼 플래쉬 콩쿨’에서 연주했을 때 입었던 의상이다. 그리고 그녀는 권위 있는 그 세계적인 콩쿨에서 1위를 차지했다.

천재라는 수식어는 요즘은 흔하게 쓰인다. 그래서 그 의미가 퇴색한 면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언론은 누군가를 띄어주기를 원하며 그것은 곧, 누군가가 가진 조금의 실적이라도 그들의 입맛을 다실 좋은 기사거리가 되는 것이다. 스포츠는 물론 음악에서도 그것은 예외는 아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수십 명쯤은 순식간에 꾸며낼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눈을 감고 바이올린을 켠다. <카르멘 환타지>의 선율이 그녀의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온다. 정열적인 에너지가 담긴 숨 가쁜 상승기류가 선율 속에 묻어나오는 것을 당신은 느낀다. 그녀의 연주에는 범인(凡人)이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가 담겨있다. 차갑게 가라앉은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그 무언가가.

기교의 문제는 아니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바이올린의 기교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유스의 콩쿨에서조차 파가니니의 이중 플레절렛, 왼손 피치카토 같은 것은 식상한 레퍼토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기교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에게는 있다. 아름답게 꾸미는 연주가 아닌 진정으로 혼을 담은 연주를 그녀는 펼쳐낼 수 있었다. 그것은 연주에 감정을 싣는다는 것과는 그 격이 달랐다. 그녀는 바이올린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함께 죽는다. 그녀는 살아있는 바이올린 그 자체다. 천재. 당신이 조그맣게 중얼거렸을 때 그녀의 연주는 끝났다.

괜찮았어?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대답한다. 언제나 훌륭해요, 선배는. 당신은 애써 웃는다. 그 웃음 속에 담긴 복잡한 감정의 파편을 그녀는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짐작하지 못하는 척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세계 유수의 음대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녀가 이 조그맣고 교육환경이 열악한 나라의 음대를 다니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사의한 일일지도 모른다. 추측은 난무했지만 아무도 이유는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판단했으며 실행으로 옮겼다. 그저 그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졸업하면 바로 외국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덜컹. 그때 문이 열렸다. 당신은 상기된 안색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그가 있다. 왼뺨에 반창고를 붙인 당신의 후배가.


***


당신은 음악에는 재능이 없다. 그렇다고 믿는다. 당신의 연주는 언제나 빛이 난적이 없다. 당신은 폭풍우 같은 폭발력도 악마 같은 섬세함도 지니지 못한 어중간한 선율을 켠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음이 너무 얇아. 교수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지적하자 당신은 활을 쥔 왼손에 더욱 힘을 싣는다. 교수가 또 말한다. 음이 투박해. 당신은 한숨을 쉬며 음정을 맞춰보려 애써보지만 교수는 냉정하게 또 한 번 말한다. 자네는 왜 그렇게 음감이 둔하지? 계속 이러면······. 당신은 교수의 시선을 억지로 외면한다. 그리고 다시금 현실을 파악해낸다. 아무도 감동시킬 수 없는 당신의 처지를.

그는 달랐다. 왼뺨에 반창고를 붙인 당신의 후배는. 집에서 기르는 애완고양이에게 뺨을 할퀴였다고 했다. 그 집 고양이는 손톱이 하나인가보지? 그러나 당신은 마음속의 생각을 말할 용기가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 당신은 이미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할 말을 구별하는 방법 따위는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피아노를 연주해 본 것은 열여덟 살이라고 했다. 친구 집에서 심심풀이로 연주해 본 피아노는 그의 인생을 바꿔버렸다. 그는 느끼고 만 것이다. 자신이 피아노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물의 유희>를 피아노를 잡은 지 단지 삼 개월 만에 완벽하게 연주해버린 것으로 현실화 되어버렸다. 그는 절대로 무난한 연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막을 수 없는 자유분방함. 심장을 쿵하고 자극할 정도로 즉흥적이고 충격적인 발상의 연주를 그는 해낸다. 가요와 클래식을 결합한 소위 퓨전적인 곡을 작곡하는 것은 그의 취미였다. 천재적인 재능을 왜 그런 데에 낭비하느냐며 핀잔을 주던 교수들도 끝끝내 그를 말릴 수는 없었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스테미너로 그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겨댄다. 그럴 때면 남자인 당신조차도 참을 수 없는 그로테스크하고 섹슈얼한 향기를 느낀다. 부럽다. 처음에 당신은 단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학교의 축제 때는 음악의 연습이 금지되어 있다. 당신도 오랜만에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고 굳은살이 두껍게 잡힌 손으로 농구를 한다. 농구가 끝난 후 지친 눈으로 학생회관에서 음료수를 빼어먹던 당신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정확히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생전 처음 듣는 생경한 곡이다. 당신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육층으로 향한다. 계단을 한 걸음씩 올라갈수록 바이올린의 음색이 뚜렷해진다. 그리고 당신은 알았다. 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금방이라도 연주가 창출한 소나기에 푹 젖어버릴 듯한 이런 환상적인 선율은 오직 한 명밖에는 가능하지 않을 터였다. 당신의 여선배 외에는.

왜 발걸음 소리를 죽였는지 모른다. 당신은 도둑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조심조심 연습실에 다가갔다. 활짝 열린 문의 왼쪽 벽에 당신은 몸을 감춘다. 고목에 붙은 매미처럼 당신은 그렇게 내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잠시 후 연주가 멈추자 당신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이대로 계속 몸을 숨기고 있어도 괜찮을까? 혹시 나오기라도 한다면······. 당신의 고민은 후배의 목소리에 해갈됐다.

그가 묻는다. 무슨 곡이죠? 당신은 그의 목소리 속에서 자신과 똑같은 호기심을 읽어낸다. 그도 생전 처음 듣는 곡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대답한다. <프리즘>. 원래는 협주곡이야. 독주로는 그 맵시를 완전히 끌어낼 수가 없어. 원래 그렇게 작곡된 거거든.

그곳에 선배와 후배가 같이 있다는 사실보다 먼저 그를 자극한 것은 <프리즘>이라는 곡명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든 곡 중 하나. 어렵다는 것이 곧 음악성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리즘>은 달랐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필생의 역작, 그렇게 불릴 정도로 <프리즘>은 환상적인 곡이었다. 그 난해하기로 소문난 어려운 곡의 바이올린 부분을 완벽하게 연주해낼 정도의 실력이 그녀에게 있다는 것인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부러움을 넘어선 파도 같은 경외심이 꿈틀거린다.

그가 말한다. 정말 재밌는 곡이네요. 제게 가르쳐 주시겠어요, 선배? 그녀가 반문한다. <프리즘>을? 그가 답한다. 네, 그 곡이요.

당신은 별똥별에 대고 소원을 비는 것처럼 무언가를 간절히 기원한다. 거절하세요, 선배······. 그러나 당신의 기원은 빗나간다.

알았어. 시간은 있어?
당신은 그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헐떡이며 뛰었다. 그때 당신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불타고 있었다.


***


후배와 선배를 만난 것은 며칠 후 연주회 레퍼토리를 결정하는 평의에서였다. 악장과 임원들이 모인 그 자리에서 그는 웃으며 말했다. <프리즘>으로 하죠. 그때 그의 눈은 불길 같은 자신감에 차있었다. 뭐? 순식간에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그녀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박또박 다시 말한다. <프리즘>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가능할까? 바이올린은 윤은혜가 하면 된다지만······.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지만 피아노를 잡은 지 고작 삼 년밖에 안된 그에게 <프리즘>은 무리일 거라고. 그도 그런 생각을 읽고 있었는지 미소를 흘리며 말한다. 원하신다면 연주해 보이겠습니다.

그가 제 이 악장까지 아무 흠 없이 연주해 보였을 때야 승낙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번 연주회는 대박이야. 문득 열등감이 불러온 고통이 당신을 짓눌렀다.

그러나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녀가 <프리즘>연주를 거절한 것이다. 난······ 싫어. 안개같이 흐릿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스치듯 당신의 시선은 그녀의 시선과 엇갈린다. 그 찰나의 순간 당신은 어젯밤에 보았던 달을 떠올린다. 흐릿하게 저물어가는 잔월을.

어째서죠?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있다. 당신으로서는 처음 보는 표정이다. 때어낸 반창고 자리에 길게 그어진 왼뺨의 상처 자국이 실룩였다. 그가 말을 잇는다. 전 잘 할 수 있어요, 선배. 그녀는 대답이 없다.

악장이 입을 열었다.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시현이 입장도 생각해줘야 하지 않니? 그렇게 시작된 설득은 임원들에게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오직 당신만이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집요한 설득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에는 승낙하고 말았다. 그때 당신은 그녀의 눈 속에서 또 한 번, 달을 보았다. 비원에 찬 달을.


***


연주회 날이었다. 대기실에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눈을 감고 차분히 바이올린을 매만진다. 그는 악보를 뚫어져라 다시 보고 있었다. 그답지 않은 긴장감이 그에게서는 풍기고 있다. 당신은 짐작한다. 곡이 <프리즘>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닐 거라고. 그는 그녀와의 첫 번째 협주이기 때문에 긴장을 하는 것일 것이다. 협주, 감성의 교환······. 당신은 불현듯 목이 탄다.

관객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당신은 잘 알고 있다. 이번 연주회의 백미이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녀의 연주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들러리. 그 말이 딱 맞았다. 이 정도 실력차이라면. 사람들의 감정을 온통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의 선율을 창출할 수 있는 그녀에게 그것은 당연한 기대였다.

드디어 그녀의 차례다. 당신은 마음속으로 그를 지우려 애쓴다.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끝나고 그녀와 그의 협주가 시작된다. 먼저 들어가는 것은 피아노의 반주다. 평소와 같이 톡톡 튀는 음색으로 그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오른손이 잠시 멈췄을 때 그녀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곧이어 고요하면서도 세련된 환상된 연주가 관객들의 숨통을 틀어잡는다. 피아노의 음색을 찢으며 바이올린 소리는 귀를 울린다. 이건 협주가 아니야······. 독주야. 당신은 놀란 숨을 뱉어낸다. 언제나 들어도 월등하다. 당신이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그리고 이제 초라해지는 것은 그였다. 뺨에 상처 자국이 남아있는 당신의 후배.

처음으로 그의 눈이 흔들린 것은 제 이 악장에 들어섰을 때였다. 피아노를 치는 손길이 떨리는 것이 멀리서도 느껴졌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 한 방울이 떨어져 피아노 건반을 적신다. 점점 음색이 흐려졌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당신은 힘을 주어 손을 꽉 움켜쥔다. 당신의 찌푸린 눈매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반짝인다. 누군가가 중얼거린다. 시현이 얼었어.

피아노 소리는 점점 바이올린 소리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다. 결국 박자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지휘를 하던 악장의 눈에 당혹감이 서린다. 그는 어떻게든 박자를 잡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음정마저도 엉망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동요 없이 바이올린을 켠다. 바이올린과 완벽하게 동화된 그녀는 하얀 손을 움직여 또 한 번 관객들을 황홀경에 빠트린다. 흐트러진 피아노의 음색도 그녀의 환상적인 선율의 방해물이 될 수는 없었다. 당신은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다. 영원 같던 연주가 끝났다. 술렁이는 객석, 그 감탄성안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먼저 일어선 것은 그였다. 그는 슬픔과 원망이 서린 눈빛이다. 당신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의 눈길을 그녀는 외면한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하는 그의 등은 아마 초라해보였을 거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대기실에 있는 당신에게 다가간 그가 말한다. 선배······ 술 사주세요.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른다. 위로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 거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근처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당신과 그는 연신 소주를 들이킨다. 당신들은 아무런 말도 주고받지 않는다. 오직 의무적으로 소주를 마실 뿐. 그렇게 세 병은 마셨을 것이다. 취기로 어지러운 가운데서 당신은 처음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은혜 그년······. 연습 때는 나를 놀려 먹었어······.


***


할 말이 있어요, 선배. 당신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조용히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당신은 그녀의 눈동자를 진지하게 응시한다. 뭔데? 그녀가 말했다. 저와 연애하지 않을래요? 당신은 말을 마치고 상기된 뺨을 돌려 천장을 바라본다. 어젯밤에 달을 보며 생각했던 수많은 고백의 레퍼토리의 결과는 겨우 이거였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내뱉고 마는 것. 그렇게 차여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당신은 그녀와 당신 자신에게 암시한다. 침묵이 길게 밀려들었다. 그녀의 엷게 루즈를 바른 입술이 열리기를 당신은 계속해서 기다린다. 쿵쾅대며 요란하게 울려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시계가 정각 네 시를 가리켰을 때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
당신은 어지러움을 느낀다. 억지로 미소를 띤 입가가 부르르 떨린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따위는 알고 있다. 그녀는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바이올린이다. 그녀는 바이올린 독주다. 어떤 악기도 그녀와 어우러질 수는 없다. 당신은 안다. 그녀는 고독하다는 것을.

당신은 말한다. 그럼······ <미뉴에트>의 협주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당신의 마음속에 간직된 가장 아름다운 곡, 그것을 당신은 입 밖으로 꺼낸다. 또 한 번 초라해질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말하고 만다.
그녀가 대답한다. 응.
당신은 달을 떠올린다. 그리고 대입한다.


***


+1)프리즘-소설적 상상에 의한 가상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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