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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로리 - 21부

21. Crush





……

애고, 오늘도 재미없는 참고서 보다가 하루가 가는군. 지난 2년 동안 풀었던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한 달 동안에 해치운 느낌이 든다. 맞나? 아마… 맞겠지. 멍하니 문제를 풀다가 (정말 멍~하니. 멍)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도 든다. 역시 난 공부할 팔자는 아니야.

다른 누군가… 그렇지, 할머니나 이안 오빠가 없으면 난 공부따위는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뭐, 누군가가 기뻐해 준다면 그것으로 괜찮아. 하지 뭐.

…에이, 나도 참 대책 없는 애다.



어쨌거나 내 마음은 그랬지만, 현실의 나는 마냥 힘들다고 보채는 중이시다.



“우엥… 오늘 고만 해. 어제도 거의 못 잤단 말야~!”

“아 당연히 그래야지, 너 지금 아직도 상황이 파악 안 되냐?”



또다시 성적표를 펼쳐 놓는 그.



“아우, 그 성적표 쫌 그만 꺼내애~”

“…꺼내지 않게 좀 해 봐라. 네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생각나게 해 주려구 그런다. 도대체…”



책상 위 성적표에 잠시 얼굴을 처박고 있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본다.

참고서를 쳐다보면서 뭔가 열심히 잔소리를 하고 있는 이안 오빠. 이렇게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는 건 처음인 거 같다. 헤헤. 밑에서 보니 턱에 짧은 수염이 삐죽삐죽 나와 있네.



“…아니 도대체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한 게 이틀 전인데 지금 이러면…”

“…오빠 턱에 수염…”

“응…? 수염?”



뜬금 없는 내 말에, 오빠는 말을 멈추고 턱을 매만진다.



“어… 야, 이거 오늘 깎은 거야. 오늘 아침에 연구실 가느라 일찍 깎아서 그래.”

“…누가 뭐래?”

“…….”



보기 흉하다고 할까봐 이것저것 변명하는군.

그 정도로 당황하다니 놀랍다.



“어이 아가씨, 지금 남의 수염이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럼 뭐 할 땐데?”

“몰라서 물어?”



답답하다는 듯 내 참고서를 들어 가슴에 안겨주는 이안 오빠.

난 성적표를 고이 접어, 참고서 사이에 끼워 넣은 뒤 참고서를 덮었다.



“……? 뭐야 책 덮구…!”

“…저기 오빠.”

“왜?”

“키스해죠.”

“…….”



그의 얼굴이 순간 확 달아올랐다.

아하하, 귀여워라.



“…너, 이딴 식으로 공부 그만 하려거든…”

“…안 해 줄거야?”

“…….”



책상에 살짝 엎드린 채,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오빠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애써 냉정해지려던 그가 깊게 한숨을 쉬더니 책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으이그,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왜애~ 공부 더 안 하구우~”

“사람 좀 그만 놀려라. 엉?”



어느새 외투를 챙겨 입고 가방을 드는 그.

무슨 도망이라도 가는 사람 같다.



“어디 가.”

“학교 간다. 책 빌리러.”

“다녀오세요~”

“…야아.”



침대에 걸터앉아 손을 흔드니, 오빠는 기가 찬 듯 날 바라본다.



“웅?”

“…너 안 가냐? 여기 내 집이야…”

“뭐 어때. 나 오빠 여친인데.”

“…지금은 학생이다.”

“그래서 뽀뽀두 안 해줘?”



짐짓 삐진 척 고개를 돌리자, 방구들이 떠나갈 듯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온다.



“얘 노리야. 여기 좀 봐라. 해 줄게.”

“시러, 됐어… 나 뽀뽀 안 하구 여기 있을거야.”

“…….”



아예 침대 구석에 웅크리고 드러누우니 그가 가방을 내려놓고 다가온다.



“야, 무슨 처녀애가 남자 침대에 발랑발랑 드러눕고 그래… 엉? 안 일어나?!”

“그 애랑 같이 누운 사람이 누군데… 멀라. 나 잘거야. 어어…”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붕 뜬다. 우아. 나 들려서 신발장까지 가고 있네.

그건 그렇고, 오올, 생각보다 오빠 힘 센데~ 내가 가벼운 건가? 히히.



“헉…헉… 자자, 코트, 걸치고… 핵~”



…역시, 무리했구나.



(츄우~)



간신히 내 몸을 내려놓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볼에 뽀뽀해 주었다.



“뭐… 뭐야.”

“으응, 귀여워서.”

“…메야?!”



그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재미있다. 나보다 열 두 살 많지만, 가끔 저렇게 귀여운 표정도 짓곤 한다.



“하하, 진짜야. 아유, 얼굴 빨개진 거 봐.”

“…….”



귀여워 귀여워~



……

……



다시 어두운 내 방.

오빠랑 만난 다음부터 하루하루가 즐거워졌지만,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은 두 배가 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공부할 게 많아서 잘 된 건지도 몰라. 아~아.



책가방을 열고 아직도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한 참고서를 꺼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와 키스하지 않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쉽다.

사실, 하지 못한 것이 하나 더 있긴 하지만…



“칫, 오늘도 얘기 못했네…”



그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란, 내 생일에 대한 얘기였다. 2월 28일.

발렌타인 데이도 그냥 지나간 마당에, 생일 정도는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우, 갑자기 지난 발렌타인 데이 전날에 통화하던 생각이 난다.



-------------------------------------------------------------------

(오바, 낼 무슨 날인지 알지? ㅎㅎ)

(…무슨 날인데?)

(어, 진짜 몰라?)

(글쎄…아아, 초코렛 장사들 활개치고 다니는 날?)

(에, 뭐야….)

(세상에, 족보도 모르는 날에 이렇게 떠들썩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거야. 설마 너도 초코렛 사구 그러냐?)

(뭐…….)

(그게 다 축제문화의 부재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아, 이거 나중에 논술문제로 나올 수도 있겠다. 어.)

(…….)

(하긴, 아직 네가 논술시험 보는 대학에 지원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하하, 응? 노리야, 듣고 있냐? 여보세요?)

(……에에엥…)

-------------------------------------------------------------------



…그러면서 학회 있다구 사라져서 아무것도 못 했었지.

상업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렇다 쳐도… 그래도 뭔가 챙길 건 챙기구 넘어가야 되지 않나?

가령 백일이라든지… 생각해보면 차암, 이안 오빠랑 난 도대체 언제부터 사귀었는지조차 애매하다. 같이 잔 건 작년 11월 11일이니까… 헉, 오늘이 백일인가! 그래도 그 날은 좀 그렇고… 첫 키스로 따지면 12월 24일인데 이것도 좀… 아아, 모르겠다.



어쨌든 내 생일에는 뭔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딱히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마우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노라니, 포털 사이트에서 순간적으로 자극적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NEW/ 내 남자친구 만족시키는 방법!)



클릭.

그리고 쏟아지는 별 볼일 없는 상업정보들.

…뭐야, 사람 기대하게 만들어 놓구.



뜻하지 않게 자극된 나는, 계속해서 지식검색의 문을 두드렸다.



(검색: ‘남친 만족 시켜주기’)



- 남친이 성관계를 원하는데 어쩌면 좋죠? 키스만으로는 만족하지…

- 남친을 만족시킬만한 화이트데이 선물은 뭐가 있을까요? 역시 직접…

- 저기요, 남친이랑 사귄지 6개월인데 관계시마다 너무 아파…



허거걱.

이런 피와 살이 되는 질문들이 올라와 있었다니.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질문들을 클릭하기 시작했다.



……

……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지만, 보충수업은 한창 계속되고 있는 2월 말의 교정, 옥상.

바람을 맞으며 병든 비둘기마냥 색색거리고 있는 나를 은진이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야야, 그렇게 졸려…?”

“으응… 졸려 죽겠어… 아함.”



8시간씩 꼬박꼬박 자던 생활이 갑자기 변하니 사실 견디기 힘들다.

아~아. 오빠랑 같이 공부하면 마냥 로맨틱한 나날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이게 현실인가.

근데 대학 이렇게까지 해서 꼭 가야 되는거야?



“얘, 좀 엔간히 해라. 과외하다 몸 버리겠다.”

“우웅…”



사실 어제는 웹서핑 삼매경에 빠져 잠이 더 줄긴 했지만…

지식검색으로 시작해서 이상한 사이트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후딱 갔다.



“나아, 정신적으로 더럽혀진 거 같애.”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리래.”

“저기, ooo 사이트 들어가 봤어?”

“에에~! 그런 거 왜 봐?!”



그녀가 얼굴을 찡그리며 날 쳐다본다.

어떨 땐 얘가 진짜 엄마 같다니까.



“아니, 그냐양. 궁금해서…”

“그, 그런 거 보면 안 돼… 근데 뭐 있든?”



…그러면서 물어보는 건 또 뭐야.



“그냥 뭐… 잘 모르겠어. 도통…”

“아 그래.”

“…은진아.”

“어?”

“…아니야, 암것두.”

“얘도 참.”



남친한테 내 생일 챙겨달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아직 얘한테 소개할 마음의 준비가…

그것도 그렇고, 요즘 오빠는 내 남친이라기보단 과외선생님에 가깝지 않은가!



“아참, 지난번 초콜렛 맛 어땠어?”

“어 그거…?”



발렌타인데이를 위해 애써 초콜렛을 만들었지만, 상업주의 혐오증의 남친에게 차마 줄 수 없었기에… 대신 우정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 물론, 남친한테 줄 거 대신 받았다는 걸 은진이는 모르겠지. 미안쿠나~ 되게 좋아하던데.



“에… 아직 냉동실에 있어.”

“어 머야~ 냉동실에 넣으면 맛 없어지는데. 그렇게 맛 없어 보여?”

“아, 아니… 그게… 하하. 아니야. 먹기 좀 아까워서…”



이래서야 테스터로서의 가치가 없잖아.

은진이는 한참 동안 걔답지 않은 멋적은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

……



“…아직 안 잤니?”

“네…”

“요즘 너 자주 늦게까지 안 자는 거 같다.”

“공부 시작했거든요.”

“정말?”



언제나처럼 늦게 돌아온 엄마가 신발을 벗다 말고 저으기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나도 적응이 안 되어요 사실…



“그런데 너무 쉬어서 좀 힘들어요. 저기, 과외 하면 안돼요?”

“뭐… 못할 건 없지만, 갑자기 과외 한다고 다 되니.”

“…….”



맞는 말씀이지만, 요새 제가 하는 걸 아시면 얘기가 달라지실걸요…

동기야 어쨌든 간에 코에서 단내나게 하고 있는데…

그리구 빨랑 정식으로 고용하지 않으면 이안 오빠가 코피 쏟고 쓰러질지도 몰라요.



“…선생님 알아봐 줘?”

“아뇨. 사실 벌써 친구 선생님을 소개받았는데 괜찮아 보여서…”

“그래…? 그럼 언제 집에 한번 오시라고 해라. 시간을 내 볼 테니.”

”고맙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엄마를 본다.

세상 사람들은 왜들 이렇게 다, 피곤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그건 그렇고 엄마, 내일 내 생일인데 뭐 없어요?



“저기 엄마.”

“응…?”

“낼 저녁 같이 먹음 안돼요?”

“어… 엄마 내일 밤에 부산 내려가는데…”

“또 출장 가세요.”

“어.”



아, 뭐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7시쯤에 회사 근처로 올 수 있니? 거기서 같이 먹자. 응?”

“네...!”

“아, 그 과외 선생님 연락처 있니? 한번 여쭤 봐라. 혹시 내일 시간 되시면 같이 식사하시면 어떻겠냐고… 엄마가 다음주 내내 좀 바빠서 따로 시간 못 낼 거 같거든.”

“예에.”



과외선생님 부르라는 거 보면 엄만 확실히 내 생일 잊은 거 맞다. 뭐야… 과외선생님이 이안 오빠가 아니었으면 나 울었을지도 몰라.

뭐, 과정은 어쨌거나 낼 엄마랑 외식하네. 오빠도 돈 벌구…

문자를 찍는 손이 한결 가벼웠다.



……

……



“은진아. 저기… 오늘 말인데…”

“아~ 이런, 미안. 노라,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엥…”

“아, 오늘 먼저 가라, 나 약속 있어.”

“어…알았어.”



우아… 진짜 너무들 한다. 은진이까지 배신을 땡길 줄은 몰랐다.

저기 여러분, 심심한 2월말이라곤 해도 사람은 태어나거든요?

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거야아~

…흐윽,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민망해도 오빠한테 미리 얘기할 걸 그랬어.



어제 미리 사다 쟁여놓은 초콜릿 케이크가 안쓰럽다.

…뭐, 어때.

앗, 시간이 벌써… 서두르지 않으면 늦겠는걸. 여의도까지 가야 되니까.

난 황급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

……



“저 선생님 괜찮아 보인다. 착실해 보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좋은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오늘의 (생일) 만찬.

이안 오빠가 자리를 비우자, 엄마는 다행히 만족스럽다는 표시를 했다.



“…그쵸?”

“음… 귀엽기도 한데.”

“에…하하.”

“너 얼굴보고 과외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지?”

“어, 엄마…”



…엄마가 농담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게다가 이 경우, 이쪽에서는 농담이 아니라는 점이 참 찔리면서도 죄송하다.



“솔직히 좀 놀랐다. 네가 과외 선생님까지 구해오다니… 대학 갈 생각이 있긴 있나 보네.”



새삼 놀랐다는 듯한 엄마의 반응. 아무리 엄마라도 딸이 고3되는 거는 신경쓰였나 보다. 난 커피잔을 들며 심드렁하게 말을 받았다.



“뭐, 때 되면 공부할 생각이었어요.”

“난 무슨 바람이 불었나 했다.”

“엄마두… 이제 맨날 학교 끝나고 또 왔다갔다 할 거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하네.”

“어딜 가는데?”

“아…”



아차. 지금껏 오빠랑 과외하고 있던 걸 안 들키는 데 집중하다가, 어이없는 실수를 해 버렸다. 당연히 신촌을 왕복한다고 생각했으니… 이걸 어쩌지.



“아니 저기…”

“저 선생님, 너더러 집에 오라구 그러디?”

“네 뭐…”

“아까 들어보니까,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신다며.”

“…….”



…와, 엄마 자세히도 기억하시네요. 그런 건 잊으셔도 되는데. 이래서야 둘러댈 방법이 없다.

때맞춰 이안 오빠가 자리로 돌아왔다.



“저기 얘한테 방금 얘기 들었는데요. 선생님 집에서 수업하신다면서요…”

“아…예.”



오빠가 날 흘끔 본다. 아우, 미안해. 어떻게 해바바 쫌.



“선생님은 나이에 비해 꽤 어려 보이시는데… 아무래도 애가 총각 선생님 혼자 사시는 데 가는 건 좀 그래서요.”

“아, 그렇겠죠.”



오빠도 방법이 없겠지. 별다른 추궁이 없으면 인정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다.

내 입이 방정이지…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하도록 하시죠.”

“…좋습니다. 제가 댁으로 가도록 하지요. 다만…”

“……?”



엄마의 말에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이안 오빠가 나직한 목소리로 조건을 달았다.



“제가 방문하는 날엔 어머님께서도 일찍 퇴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저기…”

“오…(!) 선생니임…”

“어차피 제가 가더라도 따님과 저 밖에 없으면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갑작스런 오빠의 발언에 너무 놀라, ‘오빠’란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아휴휴.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오빠에게 집중하느라 난 신경 안 쓰고 계시군.

그의 진지한 얼굴… 하긴 항상 바보처럼 진지하지만, 오늘은 또 달라 보인다. 뭔가… 정말 어른의 느낌.



“…딸애한테 무슨 얘기를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그건 좀 약속드리기 힘들겠네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엄마의 당연한 대답.

사실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다. 엄마가 화가 나서 과외 안 시켜 주면 어쩌나 하고.

다행히도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네. 오빠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



“그렇습니까… 주제넘은 말씀을 드린 것, 죄송합니다.”



이안 오빠의 얼굴에 한 줄기 아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



“다녀오세요.”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전화할게.”

“엄마…”

“왜?”

“아, 아니에요.”



엄마는 택시 문을 닫을 때까지, 나한테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다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도 갈까.”

“…….”



나를 보던 이안 오빠가 순간 엷게 웃더니,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빼어 내 등을 찰싹 때린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나 역시 웃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택시 탈래?”

“아니… 그냥 걸어… 바래다 줄 거지?”

“그럼.”



그는 묵묵히 내 말에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차군.



“저기.”

“응?”

“…손… 잡아주지 않을래.”



그의 포근한 오른손이 가만히 내 언 왼손을 감싸주었다.

아…



“너 이럴려구 장갑 안 끼구 다니는 거지?”

“……후후.”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싫지 않은 놀림.



……



지하철 안에서, 나는 이안 오빠가 한 말의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방문하는 날엔 어머님께서도 일찍 퇴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 곁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날 위해서…



“……?”



훔쳐보는 듯한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내 쪽을 본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 달아올라 있을까?



……



지하철 역으로부터 집까지 걷는 길엔 엷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우린 계속해서 말 없이 걸었다.



아까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오빠 얼굴을 보면 아까의 진지했던 표정이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되어 버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이에 집 앞까지 왔다.



“…다 왔어.”

“어…어. 여기야?”

“…….”



잠시 말 없이 서 있다가, 그가 살짝 내 팔을 토닥였다.



“……나 간다. 잘 자…”

“…아까.”



자, 그에게 이 마음을 알려 주지 않으면 안 되겠지.

아까 내가 느낀 고마움을… 그리고…



“아까, 날 위해 엄마한테 말해 준 거…”

“…….”

“진짜… 고마웠어.”



그렇지! 이노리… 여기서는 웃어 줘야지.

오빠가 별 거 아니라고 하면 한 번 더 고맙다고 해 주고…



“야, 뭘. 그 정도야.”

“아니, 고마워… 정말… 어…”



예상대로의 대화가 진행되었는데, 그의 따스한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그 온기가 느껴지자, 순간적으로 감정이 달아올랐다.



“웃…”

“…….”



눈물이 쏟아지기 전에, 다행히 그가 나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하하. 얘도 참…”

“…….”



아, 이게 무슨 꼴이야. 제대로 몇 마디 말도 못 하구.

미처 말하지도 못했는데…

오빠 오늘 너무 멋있었고, 정말 반해버린 것 같다고.

그저, 얼굴 한 번 만져준 것 가지구 울어 버리다니…



“…괜찮아.”

“으응.”

“…….”

“오빠…”



그에게서 몸을 약간 떼고 눈을 감자, 부드러운 입술이 내 얼굴을 눌러온다.

가만히 팔을 올려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뭐 괜찮겠지.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 줘도.

지금 그는 내 품 안에 있고 (아, 그 반대인가) 이렇게 입 맞추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은 지금 꼭 해야 하겠지.

오늘 내 생일이야…



“…우, 우리 집에… 들어왔다 가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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