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수라기(獸羅記) 41번째 올림
(2)
시체일까?
허옇다 못해 푸르딩딩한 기운이 도는 피부를 가진 아주 심하게 비쩍 마른 보통 키의 한 사람이 객점의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회칠을 한 듯 이질적인 하얀 피부에 머리를 풀어헤쳐 앞의 얼굴을 가렸다. 그 앞으로 내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시퍼런 귀광이 파르스름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회색의 장포를 걸친 괴인은 전신을 회색광이 도는 쇠사슬로 칭칭 감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까의 쇳소리는 아마 이 괴인의 몸에 둘러진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혹은 땅에 끌리며 일으키는 소리였다.
중인들은 처음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괴이하다 느꼈고 이내 그의 귀안(鬼眼)을 보고서는 일체의 동작이 없이 그 상태에서 숨을 죽였다. 객점 내의 앉아 있는 강호의 밥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은 문에 막 들어선 사람의 모습에서 바로 한 공포스러운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으헛! 유명삭(幽冥索)…”
“웃! 유명사신(幽冥死神) 혁사락..”
“어찌 저 전대의 마두가..헉”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소리들..그 중 맨마지막 마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자에게 꽂히는 귀광(鬼光), 시퍼런 귀화가 일렁이는 눈이 검회색빛의 머리카락을 뚫고 이글거렸다. 유명사신의 목덜미나 손의 피부색에 버금갈정도로 창백하게 질리는 마두란 말을 꺼내었던 사내. 유명사신은 시선을 돌리고는 느릿 느릿 발걸음을 옮겨 객잔안으로 들어섰다.
크르르..철커덕..철럭…
쇠사슬이 부딪히며 괴음을 토해내었다. 유명사신이 한걸음 한걸음 뗄 때 마다 마찰음이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유명사신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몸을 향하더니 계단을 오르기 사작하였다.
이층에서 유가형과 악서령을 훔쳐 보다 괴인의 행보에 예의 주시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길을 돌려 자신의 탁자만 쳐다 보며 고개를 들지 않고 젓가락만 놀리며 음식을 먹었다.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이 희대의 살성이라 불리우는 유명사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크르륵..철커덕…
유명사신이 이층의 한 창가의 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치로 따지자면 아환 등이 있는 자리하고는 정반대의 대치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유명사신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점소이가 질린 얼굴로 유명사신 쪽의 자리로 다가갔다.
“저..”
유명사신의 고개가 돌아가고 예의 귀광이 뻗쳤다.
“헙!”
“소채, 화주.”
짧은 말. 점소이는 창백한 얼굴로 일순 유명사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접수가 되지 않다 간신히 그 말 뜻을 알아듣고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뛰다시피 뒤로 물러섰다.
“예?,.예. 알겠습니다. 옙!”
우당탕탕…
뛰듯 계단을 내려가서 사라지는 점소이.
숨막힐 듯한 공기가 무겁게 객점에 내려앉았다. 그 중에서도 이층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 누구하나 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질식할 심정이겠지만 자신의 목숨보다는 소중할 터 중인들은 애써 유명사신에게서 신경을 떼는 척하였다.
아환은 유명사신이 누구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였다. 힐끗 악서령을 쳐다 보았다. 악서령이라고 별 수 없었다. 면사로 얼굴의 태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악서령이 심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환의 시선이 마주치자 악서령은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기 힘든 것인지 말할 자리가 아닌지 악서령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아환은 시선을 회수하며 잠시 눈길을 유가형에게 주었다. 그런 아환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
‘유명사신 혁사락은 삼년 동안에 일으킨 혈사로 그 살명이 무림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혁사락이 무림에서 그의 무공을 펄친 적은 다섯번 이지만 매번 그 자리가 피에 젖어 그의 이름이 공포로 자리매김 되었어요. 일설에 그는 그 혈사를 일으키는 원인이 복수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려지진 않았어요. 저 몸에 휘감긴 쇠사슬이 그의 독문병기인 유명삭입니다.’
전음성. 아환은 그 소리를 듣고 그 내용보다는 소리가 들려온 방식에 내색은 안했지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음! 전음이라니. 화경의 고수들이 내공에 음파를 실어 원하고자 하는 상대에게 음성을 전달하는 상승절예인 전음이다. 아환 역시 전음을 하는 요령은 대충 조설하에게서 들었으나 한번도 실행해 본적이 없었고, 강호에 나와서 아직 전음을 쓰는 이를 본적이 없던 아환에게 드디어 화경이라 짐작되는 고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환이 살짝 고개를 꺾어 유가형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잔 마신 후 다시금 빈잔을 채웠다. 쥐죽은 듯 고요한 객잔에 어쩌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침 넘어가는 소리 외엔 일절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소이가 슬그머니 음식을 들고 와서 혁사락의 자리에 음식을 내려놓더니 쏜살같이 물러섰다. 유명사신은 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빈잔에 술을 따랐다. 입으로 향하던 술잔은 한 반쯤 그 내용물을 비우더니 아래로 내려가 탁자 위에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한잔의 술을 마신 후 혁사락은 재차 술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묵묵히 창밖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 혁사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층의 사람들이 하나 둘 조심스럽게 일어선다. 발끝을 들어 올리고 행여 혁사락의 눈치를 거스릴까 살그머니 계단을 내려가 계산대에 은자를 던져 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어느새 일층의 사람들은 얼굴이 울상이 된 주인만 남겨 놓은 채 한 무리도 남김 없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악서령도 마찬가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유가형은 사뭇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옆의 두 쌍둥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래도 분위기가 무거운지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보게. 청년.”
쇠가 긇히는 듯한 탁한 음성이 나지막이 객점 안에 들려 왔다. 저 밑 유부에서 들려 오는 듯 착 가라앉은 칙칙한 음색. 객점안이 음울한 기운으로 덮이는 듯 했다. 그 소리에 객점내의 몇 안되는 사람들, 아환의 일행과 객점의 점소이, 주인의 몸이 일순 움찔 떨렸다.
아환이 문득 고개를 돌려 시선을 좌우로 훑었다. 주위를 둘러 보자 객점 안에는 자신들뿐 다른 무리들은 이미 다 나가버리고 텅 빈 탁자들과 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아환은 고개를 돌려 유명사신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있는 검은 회색 머릿결 사이로 빛나는 두 푸르스름한 안광이 눈에 들어왔다.
“소생을 부르셨습니까?”
“이리 와서 나랑 술 한잔 하지 않겠나?”
나즈막하고 칙칙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에 담겨 있는 의미는 틀림없는 자리를 청함이었다. 아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틀어 유명사신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게.”
아환이 자리에 앉자 유명사신은 자신의 잔, 반잔 정도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아환에게 내밀었다. 아환이 그 잔을 받자 유명사신은 술병을 잡아 아환이 잡고 있는 잔을 가득 채웠다. 아환은 그때 혁사락의 손을 볼 수 있었다. 회칠은 한 것마냥 기분나쁜 희디흰 피부의 손, 자세히 보니 거미줄 같은 상처가 수없이 손에 새겨져 있었다. 그 손 역시 유명삭에 휘감겨 손등을 휘감고 있었다.
“한잔하게.”
아환은 손을 들어 잔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내밀었다. 혁사략이 손을 펴서 아환이 내민 잔을 받았다. 그 손바닥, 하얀 피부는 다른 곳과 똑같으나 차이점이 있었다. 유명삭이 혁사락의 손바닥을 뚫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환은 순간적으로 움찔하였지만 묵묵히 두 손으로 혁사락의 잔을 채웠다.
예와 같이 반잔을 마시고는 탁자에 잔을 내려 놓는 혁사락, 그러더니 손을 비스듬히 옆으로, 유가형과 악서령이 있는 쪽으로 내뻗었다.
취리리릭..
기괴한 음향과 함께 혁사락의 장심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회색빛 사슬. 여인들이 자신쪽으로 날아오는 쇠사슬에 일순 얼굴이 창백해질 때 유명삭은 아환의 자리쯤에서 갑자기 밑으로 방향을 틀더니 아환의 앉아 있던 자리의 탁자쪽으로 그 끝이 움직이고는 아환이 좀전까지 잡고 있었던 술잔을 휘감고는 다시금 혁사락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자네 잔일세.”
“감사합니다. 신기한 능력이시군요.”
“신기? 크큭큭..”
아마 목청이 파열되어 그런지 혁사락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거칠고 탁했다. 혁사락은 괴소를 흘리며 아환을 쳐다 보다 잔에 손을 가져가더니 입에 나머지를 털어 넣었다. 아환이 다시 그 잔을 채워주었다.
아환은 혁사락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자 자신도 그를 따라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가져갔다. 별다는 것은 없었다. 단지 아까는 오지 않던 비가 어느새 그리 세지 않은 굵기로 내릴뿐..호남성의 기후가 원래 온난다습한지라 우기엔 비가 종종 내렸다.
아환은 혁사락의 얼굴쯤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보이던 귀광이 사라짐에 혁사락이 눈을 감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이 희대의 대마두라 평함받는 이가? 잔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파리 목숨 보다 가볍게 끊었다 평가 받는 이 앞의 사내가 감상에 젖은 것일까?
“참 술이 그립네.”
밑도 끝도 없는 말. 지금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술이 그립다니..
“자네 술을 잘하는가?”
“예.”
“그럴 것 같았네. 덩치하며..전신 곳곳에 배어 있는 수련의 흔적하며..많은 일을 하였나?”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이라..이렇게 비가 오는 시간이면 다른 이들 처럼 난 술을 원없이 마셔 보고 취했으면 좋겠네.”
“그러시면 되지 않습니까?”
“크큭..”
번쩍!
새파란 광채가 섬전처럼 아환의 눈에 작열했다. 혁사락이 눈을 떠 예의 그 귀광을 쏟아내었다. 아환은 일순 정(精)이 흔들렸으나 곧 자세를 잡고 그 귀광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큭큭..그런데 말일세. 그게 안된다는게 문제지.”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러기엔 내 손에 묻힌 피가 너무 진하네. 철철 흘러 내릴 정도로 넘치고 넘쳐. 내가 누군지 알겠지? 보아하니 아까 저 처자가 내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만..”
“예. 선배.”
“그렇겠지. 혈사(血事)를 다섯 번이나 일으킨 대마왕 같은 존재로 말했겠지.”
“…”
“그런 짓을 내가 한 것을…”
철컥..커르르르..
혁사락이 유명삭을 부딪히며 술잔을 들고는 입에 갖다 대고 반을 입에 부어 넣었다.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네. 감상에 빠진 것인가? 요즈음 부쩍 비가 오면 전신에 통증이 심해져 술을 찾게 된다네. 취하지도 못하면서 왜 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디 편찮으십니까?”
“크크큭..자네는 내 손을 못 보았나? 이렇게 손뿐만 아니라 전신 곳곳에 유명삭이 심어져 있는 데 그럼 아프지 않겠는가? 이건 저주일세. 조금 전 신기한 능력이라고 했나? 이건 신기한 것이 아니고 비참한 것일세.”
비관적이다 못해 염세적인 느낌마저 주는 혁사락의 비감어린 어조가 특유의 칙칙한 음색에 어울려 암울한 느낌을 아환에게 전해 주었다. 아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채 혁사락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 술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주는 것을 반복하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술잔만 탁자에 닿는 소리, 쇠사슬이 철커덕 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숨쉬는 소리가 그나마 객잔 안의 정적을 균열시키고 있었다. 아환 역시 술잔을 들고 차분히 한잔 한잔 마셨다. 거마(巨魔)라 여기어지는 혁사락의 앞이라서 그런지 몇 잔의 독한 화주가 들어 갔지만 전혀 취하는 기미가 없었다. 그에 반해 혁사락은 몇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의 말과는 틀리게 미세하게 상체를 휘청이는 것으로 보아 꽤 취기가 올라 온 듯 했다.
창 밖의 비가 그 굵기를 더해가 이젠 제법 비다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절 자체가 여름의 초입이다 보니 다소 후덥했는데 비로 인하여 시원한 느낌이 들게 했다.
차르르르..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염병할. 왠 비야.”
목소리는 영롱하고 아리따운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투박한 사내들이나 할 그런 의미의 말이 조용한 객점안에 울려 퍼졌다. 부조화의 조화라 할까? 거친 말과 곱디 고운 음성의 어울림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이 말은 뱉은 여인이 그러한 말투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상스러운 어투가 객점 안을 울리자 이층에 앉아 있던 두 여인, 유가형과 악서령의 눈가에 반가운 기색이 떠 올랐다. 유가형과 악서령, 두 여인은 자연스레 그 음성이 들려온 곳, 객점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 붉은 옷, 붉다 못해 핏빛으로 보이는 홍의를 입은 한 여인이 문앞에 서서 우산을 탁탁 털며 접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좀 모자른 부분이 있다. 양쪽으로 살짝 치켜 올라간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눈매와 연한 붉은 빛을 띄는 피부색, 콧날은 반듯히 서있었고 입술은 마치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붉디 붉었다. 적당한 길이의 목선에 어깨의 선이 퍼져 있었고 의복에 가려 있어 그 모양을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은 봉긋 튀어나와 결코 처지거나 퍼진 모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혈장미, 세칭 무림사화 중 독서시라 불리우는 석영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림제일염(武林第一艶)답게 육감적인 아름다움에 있어 다른 사화를 압도하는 자태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석영은 객점 안을 보다 일층에 사람이 없자 눈길을 돌려 이층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가형과 악서령의 모습이 보이자 환하게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성큼 성큼 계단쪽으로 걸어가 계단을 올랐다.
차르르르..
객점의 주렴이 또 한번 걷혔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주렴이 걷히는 소리만 날뿐 이 사람이 발걸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어선 사람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지닌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진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별다른 병기를 가지지 않았지만 눈에서 예리한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으며 어떤 보법을 체계적으로 습관화 할 때까지 익혔는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객점 안에 들어서더니 예의 발걸음으로 석영의 뒤를 따랐다. 특이한 점은 왼손에 검은 윤기가 나는 장갑을 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면 띄었다.
“언제 왔어? 유언니. 서령아, 잘 있었냐?”
석영이 성큼 성큼 두 여인쪽으로 다가가더니 악서령의 옆에 털썩 주저 않는다.
“어서 오너라. 고생했지?”
“얘는 머스마 같은 말투는 아직 그대로구나. 그래 잘있었어?”
유가형과 악서령이 반갑게 맞이한다.
“제길..말도 마! 왠 같지도 않은 것들이 깝죽대기는..”
석영이 고개를 도리질하다 이층을 막 올라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빽 지른다.
“빨랑 빨랑 좀 못오나? 에구. 남자새끼가 저리 동작이 굼떠서는..쯧쯧쯧..”
석영의 입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말이 나왔음에도 연한 미소를 얼굴에 짓는 사내, 두 여자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다.
“사천의 당철의가 두분 여협을 뵙습니다.”
“유가형이 천수독룡 당소협을 뵈어요.”
“악서령이 당소협께 인사드려요.”
사천의 당철의, 천수독룡 당철의를 의미함이다. 사천 당가의 적자로서 차기의 당가를 이끌어갈 무림의 대표적인 후지기수이자 칠룡 중의 하나인 남자무인이었다.
당철의가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에 그냥 멀뚱하게 서있자 석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툭 내뱉는다.
“인사를 했으면 앉아야 할꺼 아냐? 어구, 저것도 불알달린 사내라고..”
말이 막 나온다. 유가형과 악서령은 그러한 석영의 말에 곱게 눈살이 찡그려졌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 여기는지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철의는 별다른 거리낌이 없는지 슬쩍 아까 아환이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언제 왔어? 남궁 공자는? 얘들은 또 누구야? 객점에 왜 이리 사람이 없어?”
“하나 하나 천천히 물어라. 원 성질하고는..우리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 근데 유언니는 혼자 온거야? 남궁비는?”
유가형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악서령이 혈장미 석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얘는..”
“아니 왜? 그 작자는 왜 그리 언니를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지가 그리 잘났어? 참내! 아니 유언니가 혼담을 받아 주었으면 감사히 인사를 드리고 넙죽 받아야지, 벌써 몇 년째야? 왜 그리 뜸을 들이냐고? 혼담을 청해 정혼을 해놓고 그리 차일피일 미루면 어쩌겠다는 거야? 주변에서 오냐 오냐 한다고 너무 하는 거 아냐? 언니, 그거 파혼하고 내가 다른 남자 소개시켜줄까?”
“얘가 얘가 정말..영아! 너 조용히 해. 입다물란 말이야.”
악서령이 듣다듣다 못하겠는지 황급히 손을 들어 석영의 입을 틀어 막았다.
“왜 이래. 할말은 해야 할 것 아냐?”
유가형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에 바로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 유가형이 손을 들어 반대쪽을 검지로 가리켰다. 막 말을 내뱉을려다 유가형의 손짓에 말을 멈추고는 유가형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돌리던 석영, 그 손끝이 향하는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남자가 앉은 자리의 특성상 그런지 석영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아환과 유명사신이 앉아 있어 석영은 아환의 커다란 덩치에 가린 혁사락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냥 한 사람이 더 앉아 있구나 하는 느낌 밖에 갖지 못했다.
“젠장, 더럽게 크네. 덩치도 크고 칼도 되게 크네.”
또 거친 말.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아환이었다. 거기다가 그 체격에 걸맞아 보이는 검은 색의 큰 칼이 흔히 길가다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아환은 석영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지만 응대할 생각도 없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고 유명사신 혁사락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창밖을 바라 보는 자세 그대로 술잔만 느긋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오히려 몸이 달은 것은 석영을 제외한 두 여자들. 악서령이 손가락으로 자꾸 그 쪽을 가리키며 눈으로 주의를 주자 그제서야 석영이 몸을 일으켜 아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혁사략을 보았다.
처음에는 누군가 하고 쳐다보던 석영의 연한 붉은 홍조가 돌고 있는 안색이 일순 하얘졌다. 그제서야 누군가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다른 무인들과 같은 공포심이 아니라 분노였다. 아미가 좁혀지고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아랫 입술을 꼭 깨물고는 허리춤을 슬쩍 매만져 보곤 석영은 자리를 박차고 객점을 가로질러 아환과 혁사락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끼이이..
잔뜩 발에 공력을 불어 넣은 채 이층의 목재로 된 바닥을 힘주어 밟으며 한발 한발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악서령이 깜짝 놀라 황급히 팔로 석영을 잡을려고 하였지만 그런 그녀의 손을 잡는 다른 손, 유가형이 있었다. 악서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유가형을 쳐다 보았다. 그러자 유가형은 턱으로 슬며시 한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당철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영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환은 뒤에서 험한 기세가 전해져 옴을 느꼈다. 강렬한 기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펼치는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격하고 아환의 등에 따갑게 와닿았다. 살기와 분노가 범벅이 되어 팽팽한 공기가 객잔 이층에 가득찼다. 아환은 혁사락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기세를 느꼈을텐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음에 의아했다.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그 목표가 내가 아닌 이상 굳이 나설 필요가 없겠지.’
아환이 내심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싸늘하게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당신이 유명사신 혁사락이 맞나요?”
그제서야 혁사락이 창밖에서 눈을 거두어 석영을 바라 보았다. 도드러진 가슴을 앞으로 향한 도발적인 절세의 미녀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귀광 어린 눈으로 석영의 눈을 쳐다 보았다.
석영은 시퍼런 귀광이 눈에 들어오자 흠칫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긴장감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석영은 그러한 두려움을 지우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혁사락을 향해 쏘아 붙였다.
“당신이 현성문(玄星門)을 멸문한 바로 그 혁사락이냐고 물었어요?”
“그대는 누군가?”
“본녀는 석영이라고 해요. 당신 손에 무참히 꺾인 현성문의 금지옥엽인 현미미의 의언니기도 하지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당신의 잔인한 손속에 스러진 한 여린 처자를 기억하나요?”
“…”
답이 없이 퍼런 안광만 석영의 눈에 들어왔다.
창! 휘리리릭..쭝.
석영의 허리춤에서 그녀의 병기, 연검을 뽑아 들었다. 일견해도 범상치 않은 예기가 흘러내리는 보검이다. 연검의 특성상 휘청거리던 검신이 석영이 주입한 내공으로 인하여 곧게 뻗지어 일자로 곧게 섰다.
“피는 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게 무림의 철칙! 그동안 당신이 벌인 살행의 응보를 본녀가 하겠어요. 여기서 본녀가 당신의 잔혹한 마수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그 업보를 벗어나지는 못할 거예요.”
혁사락이 자리에 낮은 자세에서 유명삭에 되덮인 손으로 탁자를 짚고 느릿하게 일어섰다.
일촉즉발의 험한 공기가 휘몰아치는 이곳, 사화지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형산의 한 봉우리 밑 객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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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전이 20:30 분이라..지금부터 맥주를 까고 있는데..
-.야설인데 야한 장면이 별로…아마 다음 회 정도 나오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의 예상이 맞을 듯..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체일까?
허옇다 못해 푸르딩딩한 기운이 도는 피부를 가진 아주 심하게 비쩍 마른 보통 키의 한 사람이 객점의 주렴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회칠을 한 듯 이질적인 하얀 피부에 머리를 풀어헤쳐 앞의 얼굴을 가렸다. 그 앞으로 내린 머리카락들 사이로 시퍼런 귀광이 파르스름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회색의 장포를 걸친 괴인은 전신을 회색광이 도는 쇠사슬로 칭칭 감고 있어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까의 쇳소리는 아마 이 괴인의 몸에 둘러진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며 혹은 땅에 끌리며 일으키는 소리였다.
중인들은 처음에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괴이하다 느꼈고 이내 그의 귀안(鬼眼)을 보고서는 일체의 동작이 없이 그 상태에서 숨을 죽였다. 객점 내의 앉아 있는 강호의 밥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은 문에 막 들어선 사람의 모습에서 바로 한 공포스러운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으헛! 유명삭(幽冥索)…”
“웃! 유명사신(幽冥死神) 혁사락..”
“어찌 저 전대의 마두가..헉”
비명처럼 터져나오는 소리들..그 중 맨마지막 마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가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자에게 꽂히는 귀광(鬼光), 시퍼런 귀화가 일렁이는 눈이 검회색빛의 머리카락을 뚫고 이글거렸다. 유명사신의 목덜미나 손의 피부색에 버금갈정도로 창백하게 질리는 마두란 말을 꺼내었던 사내. 유명사신은 시선을 돌리고는 느릿 느릿 발걸음을 옮겨 객잔안으로 들어섰다.
크르르..철커덕..철럭…
쇠사슬이 부딪히며 괴음을 토해내었다. 유명사신이 한걸음 한걸음 뗄 때 마다 마찰음이 객잔 안에 울려 퍼졌다. 유명사신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몸을 향하더니 계단을 오르기 사작하였다.
이층에서 유가형과 악서령을 훔쳐 보다 괴인의 행보에 예의 주시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길을 돌려 자신의 탁자만 쳐다 보며 고개를 들지 않고 젓가락만 놀리며 음식을 먹었다.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이 희대의 살성이라 불리우는 유명사신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크르륵..철커덕…
유명사신이 이층의 한 창가의 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위치로 따지자면 아환 등이 있는 자리하고는 정반대의 대치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는 유명사신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르고 점소이가 질린 얼굴로 유명사신 쪽의 자리로 다가갔다.
“저..”
유명사신의 고개가 돌아가고 예의 귀광이 뻗쳤다.
“헙!”
“소채, 화주.”
짧은 말. 점소이는 창백한 얼굴로 일순 유명사신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접수가 되지 않다 간신히 그 말 뜻을 알아듣고는 황급히 머리를 숙이고는 뛰다시피 뒤로 물러섰다.
“예?,.예. 알겠습니다. 옙!”
우당탕탕…
뛰듯 계단을 내려가서 사라지는 점소이.
숨막힐 듯한 공기가 무겁게 객점에 내려앉았다. 그 중에서도 이층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웠다. 누구하나 소리를 내지 못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하였다. 질식할 심정이겠지만 자신의 목숨보다는 소중할 터 중인들은 애써 유명사신에게서 신경을 떼는 척하였다.
아환은 유명사신이 누구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였다. 힐끗 악서령을 쳐다 보았다. 악서령이라고 별 수 없었다. 면사로 얼굴의 태반이 가려져 있었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악서령이 심한 공포심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환의 시선이 마주치자 악서령은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말하기 힘든 것인지 말할 자리가 아닌지 악서령이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아환은 시선을 회수하며 잠시 눈길을 유가형에게 주었다. 그런 아환의 귓가로 들려오는 소리.
‘유명사신 혁사락은 삼년 동안에 일으킨 혈사로 그 살명이 무림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혁사락이 무림에서 그의 무공을 펄친 적은 다섯번 이지만 매번 그 자리가 피에 젖어 그의 이름이 공포로 자리매김 되었어요. 일설에 그는 그 혈사를 일으키는 원인이 복수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알려지진 않았어요. 저 몸에 휘감긴 쇠사슬이 그의 독문병기인 유명삭입니다.’
전음성. 아환은 그 소리를 듣고 그 내용보다는 소리가 들려온 방식에 내색은 안했지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전음! 전음이라니. 화경의 고수들이 내공에 음파를 실어 원하고자 하는 상대에게 음성을 전달하는 상승절예인 전음이다. 아환 역시 전음을 하는 요령은 대충 조설하에게서 들었으나 한번도 실행해 본적이 없었고, 강호에 나와서 아직 전음을 쓰는 이를 본적이 없던 아환에게 드디어 화경이라 짐작되는 고수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환이 살짝 고개를 꺾어 유가형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자신의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잔 마신 후 다시금 빈잔을 채웠다. 쥐죽은 듯 고요한 객잔에 어쩌다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침 넘어가는 소리 외엔 일절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점소이가 슬그머니 음식을 들고 와서 혁사락의 자리에 음식을 내려놓더니 쏜살같이 물러섰다. 유명사신은 별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빈잔에 술을 따랐다. 입으로 향하던 술잔은 한 반쯤 그 내용물을 비우더니 아래로 내려가 탁자 위에 다시금 자리를 잡았다.
한잔의 술을 마신 후 혁사락은 재차 술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묵묵히 창밖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런 혁사락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층의 사람들이 하나 둘 조심스럽게 일어선다. 발끝을 들어 올리고 행여 혁사락의 눈치를 거스릴까 살그머니 계단을 내려가 계산대에 은자를 던져 놓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어느새 일층의 사람들은 얼굴이 울상이 된 주인만 남겨 놓은 채 한 무리도 남김 없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악서령도 마찬가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안절부절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유가형은 사뭇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고 옆의 두 쌍둥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래도 분위기가 무거운지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이보게. 청년.”
쇠가 긇히는 듯한 탁한 음성이 나지막이 객점 안에 들려 왔다. 저 밑 유부에서 들려 오는 듯 착 가라앉은 칙칙한 음색. 객점안이 음울한 기운으로 덮이는 듯 했다. 그 소리에 객점내의 몇 안되는 사람들, 아환의 일행과 객점의 점소이, 주인의 몸이 일순 움찔 떨렸다.
아환이 문득 고개를 돌려 시선을 좌우로 훑었다. 주위를 둘러 보자 객점 안에는 자신들뿐 다른 무리들은 이미 다 나가버리고 텅 빈 탁자들과 의자들만이 남아 있었다. 아환은 고개를 돌려 유명사신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향해 있는 검은 회색 머릿결 사이로 빛나는 두 푸르스름한 안광이 눈에 들어왔다.
“소생을 부르셨습니까?”
“이리 와서 나랑 술 한잔 하지 않겠나?”
나즈막하고 칙칙한 음성이지만 그 음성에 담겨 있는 의미는 틀림없는 자리를 청함이었다. 아환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몸을 틀어 유명사신쪽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앉게.”
아환이 자리에 앉자 유명사신은 자신의 잔, 반잔 정도 남아 있는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잔을 아환에게 내밀었다. 아환이 그 잔을 받자 유명사신은 술병을 잡아 아환이 잡고 있는 잔을 가득 채웠다. 아환은 그때 혁사락의 손을 볼 수 있었다. 회칠은 한 것마냥 기분나쁜 희디흰 피부의 손, 자세히 보니 거미줄 같은 상처가 수없이 손에 새겨져 있었다. 그 손 역시 유명삭에 휘감겨 손등을 휘감고 있었다.
“한잔하게.”
아환은 손을 들어 잔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는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내밀었다. 혁사략이 손을 펴서 아환이 내민 잔을 받았다. 그 손바닥, 하얀 피부는 다른 곳과 똑같으나 차이점이 있었다. 유명삭이 혁사락의 손바닥을 뚫고 나와 있었던 것이다. 아환은 순간적으로 움찔하였지만 묵묵히 두 손으로 혁사락의 잔을 채웠다.
예와 같이 반잔을 마시고는 탁자에 잔을 내려 놓는 혁사락, 그러더니 손을 비스듬히 옆으로, 유가형과 악서령이 있는 쪽으로 내뻗었다.
취리리릭..
기괴한 음향과 함께 혁사락의 장심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가는 회색빛 사슬. 여인들이 자신쪽으로 날아오는 쇠사슬에 일순 얼굴이 창백해질 때 유명삭은 아환의 자리쯤에서 갑자기 밑으로 방향을 틀더니 아환의 앉아 있던 자리의 탁자쪽으로 그 끝이 움직이고는 아환이 좀전까지 잡고 있었던 술잔을 휘감고는 다시금 혁사락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자네 잔일세.”
“감사합니다. 신기한 능력이시군요.”
“신기? 크큭큭..”
아마 목청이 파열되어 그런지 혁사락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들은 거칠고 탁했다. 혁사락은 괴소를 흘리며 아환을 쳐다 보다 잔에 손을 가져가더니 입에 나머지를 털어 넣었다. 아환이 다시 그 잔을 채워주었다.
아환은 혁사락이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향하자 자신도 그를 따라서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가져갔다. 별다는 것은 없었다. 단지 아까는 오지 않던 비가 어느새 그리 세지 않은 굵기로 내릴뿐..호남성의 기후가 원래 온난다습한지라 우기엔 비가 종종 내렸다.
아환은 혁사락의 얼굴쯤이라 생각되는 부분에서 보이던 귀광이 사라짐에 혁사락이 눈을 감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이 희대의 대마두라 평함받는 이가? 잔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파리 목숨 보다 가볍게 끊었다 평가 받는 이 앞의 사내가 감상에 젖은 것일까?
“참 술이 그립네.”
밑도 끝도 없는 말. 지금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술이 그립다니..
“자네 술을 잘하는가?”
“예.”
“그럴 것 같았네. 덩치하며..전신 곳곳에 배어 있는 수련의 흔적하며..많은 일을 하였나?”
“아직 부족합니다.”
“부족이라..이렇게 비가 오는 시간이면 다른 이들 처럼 난 술을 원없이 마셔 보고 취했으면 좋겠네.”
“그러시면 되지 않습니까?”
“크큭..”
번쩍!
새파란 광채가 섬전처럼 아환의 눈에 작열했다. 혁사락이 눈을 떠 예의 그 귀광을 쏟아내었다. 아환은 일순 정(精)이 흔들렸으나 곧 자세를 잡고 그 귀광을 정면으로 응시하였다.
“큭큭..그런데 말일세. 그게 안된다는게 문제지.”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그러기엔 내 손에 묻힌 피가 너무 진하네. 철철 흘러 내릴 정도로 넘치고 넘쳐. 내가 누군지 알겠지? 보아하니 아까 저 처자가 내 얘기를 하는 듯 하더니만..”
“예. 선배.”
“그렇겠지. 혈사(血事)를 다섯 번이나 일으킨 대마왕 같은 존재로 말했겠지.”
“…”
“그런 짓을 내가 한 것을…”
철컥..커르르르..
혁사락이 유명삭을 부딪히며 술잔을 들고는 입에 갖다 대고 반을 입에 부어 넣었다.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은지 모르겠네. 감상에 빠진 것인가? 요즈음 부쩍 비가 오면 전신에 통증이 심해져 술을 찾게 된다네. 취하지도 못하면서 왜 술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디 편찮으십니까?”
“크크큭..자네는 내 손을 못 보았나? 이렇게 손뿐만 아니라 전신 곳곳에 유명삭이 심어져 있는 데 그럼 아프지 않겠는가? 이건 저주일세. 조금 전 신기한 능력이라고 했나? 이건 신기한 것이 아니고 비참한 것일세.”
비관적이다 못해 염세적인 느낌마저 주는 혁사락의 비감어린 어조가 특유의 칙칙한 음색에 어울려 암울한 느낌을 아환에게 전해 주었다. 아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채 혁사락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다 술이 떨어지면 다시 채워주는 것을 반복하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술잔만 탁자에 닿는 소리, 쇠사슬이 철커덕 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숨쉬는 소리가 그나마 객잔 안의 정적을 균열시키고 있었다. 아환 역시 술잔을 들고 차분히 한잔 한잔 마셨다. 거마(巨魔)라 여기어지는 혁사락의 앞이라서 그런지 몇 잔의 독한 화주가 들어 갔지만 전혀 취하는 기미가 없었다. 그에 반해 혁사락은 몇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까의 말과는 틀리게 미세하게 상체를 휘청이는 것으로 보아 꽤 취기가 올라 온 듯 했다.
창 밖의 비가 그 굵기를 더해가 이젠 제법 비다운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계절 자체가 여름의 초입이다 보니 다소 후덥했는데 비로 인하여 시원한 느낌이 들게 했다.
차르르르..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에잇, 염병할. 왠 비야.”
목소리는 영롱하고 아리따운데 그 속에 담긴 내용은 투박한 사내들이나 할 그런 의미의 말이 조용한 객점안에 울려 퍼졌다. 부조화의 조화라 할까? 거친 말과 곱디 고운 음성의 어울림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이 말은 뱉은 여인이 그러한 말투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상스러운 어투가 객점 안을 울리자 이층에 앉아 있던 두 여인, 유가형과 악서령의 눈가에 반가운 기색이 떠 올랐다. 유가형과 악서령, 두 여인은 자연스레 그 음성이 들려온 곳, 객점의 문으로 눈을 돌렸다. 붉은 옷, 붉다 못해 핏빛으로 보이는 홍의를 입은 한 여인이 문앞에 서서 우산을 탁탁 털며 접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엔 좀 모자른 부분이 있다. 양쪽으로 살짝 치켜 올라간 도발적인 느낌을 주는 눈매와 연한 붉은 빛을 띄는 피부색, 콧날은 반듯히 서있었고 입술은 마치 금방이라도 피를 흘릴 듯 붉디 붉었다. 적당한 길이의 목선에 어깨의 선이 퍼져 있었고 의복에 가려 있어 그 모양을 알 수는 없지만 가슴은 봉긋 튀어나와 결코 처지거나 퍼진 모양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다.
혈장미, 세칭 무림사화 중 독서시라 불리우는 석영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림제일염(武林第一艶)답게 육감적인 아름다움에 있어 다른 사화를 압도하는 자태가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석영은 객점 안을 보다 일층에 사람이 없자 눈길을 돌려 이층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유가형과 악서령의 모습이 보이자 환하게 얼굴에 웃음을 짓고는 성큼 성큼 계단쪽으로 걸어가 계단을 올랐다.
차르르르..
객점의 주렴이 또 한번 걷혔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주렴이 걷히는 소리만 날뿐 이 사람이 발걸음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어선 사람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 였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지닌 제법 준수한 외모를 가진 무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별다른 병기를 가지지 않았지만 눈에서 예리한 신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으며 어떤 보법을 체계적으로 습관화 할 때까지 익혔는지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객점 안에 들어서더니 예의 발걸음으로 석영의 뒤를 따랐다. 특이한 점은 왼손에 검은 윤기가 나는 장갑을 끼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면 띄었다.
“언제 왔어? 유언니. 서령아, 잘 있었냐?”
석영이 성큼 성큼 두 여인쪽으로 다가가더니 악서령의 옆에 털썩 주저 않는다.
“어서 오너라. 고생했지?”
“얘는 머스마 같은 말투는 아직 그대로구나. 그래 잘있었어?”
유가형과 악서령이 반갑게 맞이한다.
“제길..말도 마! 왠 같지도 않은 것들이 깝죽대기는..”
석영이 고개를 도리질하다 이층을 막 올라오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소리를 빽 지른다.
“빨랑 빨랑 좀 못오나? 에구. 남자새끼가 저리 동작이 굼떠서는..쯧쯧쯧..”
석영의 입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말이 나왔음에도 연한 미소를 얼굴에 짓는 사내, 두 여자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를 한다.
“사천의 당철의가 두분 여협을 뵙습니다.”
“유가형이 천수독룡 당소협을 뵈어요.”
“악서령이 당소협께 인사드려요.”
사천의 당철의, 천수독룡 당철의를 의미함이다. 사천 당가의 적자로서 차기의 당가를 이끌어갈 무림의 대표적인 후지기수이자 칠룡 중의 하나인 남자무인이었다.
당철의가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에 그냥 멀뚱하게 서있자 석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어조로 툭 내뱉는다.
“인사를 했으면 앉아야 할꺼 아냐? 어구, 저것도 불알달린 사내라고..”
말이 막 나온다. 유가형과 악서령은 그러한 석영의 말에 곱게 눈살이 찡그려졌지만 원래 그런 성격이라 여기는지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당철의는 별다른 거리낌이 없는지 슬쩍 아까 아환이 앉아 있던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언제 왔어? 남궁 공자는? 얘들은 또 누구야? 객점에 왜 이리 사람이 없어?”
“하나 하나 천천히 물어라. 원 성질하고는..우리도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 근데 유언니는 혼자 온거야? 남궁비는?”
유가형의 얼굴에 다시금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악서령이 혈장미 석영의 옆구리를 슬쩍 찌른다.
“얘는..”
“아니 왜? 그 작자는 왜 그리 언니를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지가 그리 잘났어? 참내! 아니 유언니가 혼담을 받아 주었으면 감사히 인사를 드리고 넙죽 받아야지, 벌써 몇 년째야? 왜 그리 뜸을 들이냐고? 혼담을 청해 정혼을 해놓고 그리 차일피일 미루면 어쩌겠다는 거야? 주변에서 오냐 오냐 한다고 너무 하는 거 아냐? 언니, 그거 파혼하고 내가 다른 남자 소개시켜줄까?”
“얘가 얘가 정말..영아! 너 조용히 해. 입다물란 말이야.”
악서령이 듣다듣다 못하겠는지 황급히 손을 들어 석영의 입을 틀어 막았다.
“왜 이래. 할말은 해야 할 것 아냐?”
유가형이 손을 들어 자신의 입에 바로 세웠다. 조용히 하라는 의미. 유가형이 손을 들어 반대쪽을 검지로 가리켰다. 막 말을 내뱉을려다 유가형의 손짓에 말을 멈추고는 유가형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돌리던 석영, 그 손끝이 향하는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두 남자가 앉은 자리의 특성상 그런지 석영의 시선과 일직선으로 아환과 유명사신이 앉아 있어 석영은 아환의 커다란 덩치에 가린 혁사락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냥 한 사람이 더 앉아 있구나 하는 느낌 밖에 갖지 못했다.
“젠장, 더럽게 크네. 덩치도 크고 칼도 되게 크네.”
또 거친 말.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아환이었다. 거기다가 그 체격에 걸맞아 보이는 검은 색의 큰 칼이 흔히 길가다 마주칠 수 있는 그런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아환은 석영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고소를 지었지만 응대할 생각도 없고 해서 그냥 앉아 있었고 유명사신 혁사락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창밖을 바라 보는 자세 그대로 술잔만 느긋하게 기울이고 있었다. 오히려 몸이 달은 것은 석영을 제외한 두 여자들. 악서령이 손가락으로 자꾸 그 쪽을 가리키며 눈으로 주의를 주자 그제서야 석영이 몸을 일으켜 아환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혁사략을 보았다.
처음에는 누군가 하고 쳐다보던 석영의 연한 붉은 홍조가 돌고 있는 안색이 일순 하얘졌다. 그제서야 누군가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이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된 얼굴에 떠오른 것은 다른 무인들과 같은 공포심이 아니라 분노였다. 아미가 좁혀지고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아랫 입술을 꼭 깨물고는 허리춤을 슬쩍 매만져 보곤 석영은 자리를 박차고 객점을 가로질러 아환과 혁사락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끼이이..
잔뜩 발에 공력을 불어 넣은 채 이층의 목재로 된 바닥을 힘주어 밟으며 한발 한발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악서령이 깜짝 놀라 황급히 팔로 석영을 잡을려고 하였지만 그런 그녀의 손을 잡는 다른 손, 유가형이 있었다. 악서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유가형을 쳐다 보았다. 그러자 유가형은 턱으로 슬며시 한쪽을 가리켰다. 어느새 당철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영의 뒤를 쫓고 있었다.
아환은 뒤에서 험한 기세가 전해져 옴을 느꼈다. 강렬한 기도,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펼치는 무형의 기운이 공간을 격하고 아환의 등에 따갑게 와닿았다. 살기와 분노가 범벅이 되어 팽팽한 공기가 객잔 이층에 가득찼다. 아환은 혁사락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기세를 느꼈을텐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음에 의아했다.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그 목표가 내가 아닌 이상 굳이 나설 필요가 없겠지.’
아환이 내심 결정을 내리고 있을 때 싸늘하게 들려오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당신이 유명사신 혁사락이 맞나요?”
그제서야 혁사락이 창밖에서 눈을 거두어 석영을 바라 보았다. 도드러진 가슴을 앞으로 향한 도발적인 절세의 미녀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귀광 어린 눈으로 석영의 눈을 쳐다 보았다.
석영은 시퍼런 귀광이 눈에 들어오자 흠칫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조리 곤두서는 긴장감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석영은 그러한 두려움을 지우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혁사락을 향해 쏘아 붙였다.
“당신이 현성문(玄星門)을 멸문한 바로 그 혁사락이냐고 물었어요?”
“그대는 누군가?”
“본녀는 석영이라고 해요. 당신 손에 무참히 꺾인 현성문의 금지옥엽인 현미미의 의언니기도 하지요.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당신의 잔인한 손속에 스러진 한 여린 처자를 기억하나요?”
“…”
답이 없이 퍼런 안광만 석영의 눈에 들어왔다.
창! 휘리리릭..쭝.
석영의 허리춤에서 그녀의 병기, 연검을 뽑아 들었다. 일견해도 범상치 않은 예기가 흘러내리는 보검이다. 연검의 특성상 휘청거리던 검신이 석영이 주입한 내공으로 인하여 곧게 뻗지어 일자로 곧게 섰다.
“피는 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는게 무림의 철칙! 그동안 당신이 벌인 살행의 응보를 본녀가 하겠어요. 여기서 본녀가 당신의 잔혹한 마수에 쓰러진다 하더라도 결코 당신의 그 업보를 벗어나지는 못할 거예요.”
혁사락이 자리에 낮은 자세에서 유명삭에 되덮인 손으로 탁자를 짚고 느릿하게 일어섰다.
일촉즉발의 험한 공기가 휘몰아치는 이곳, 사화지연을 얼마 남기지 않은 형산의 한 봉우리 밑 객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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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전이 20:30 분이라..지금부터 맥주를 까고 있는데..
-.야설인데 야한 장면이 별로…아마 다음 회 정도 나오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의 예상이 맞을 듯..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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