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내 인생썰도 들어줄게이있냐?.Ssul&Long
간간히 인생썰이 보이길래 한심한 내 인생좀 질타해줬으면해서 한탄좀 해볼께
브금같은건 넣을줄 몰라서 생략할께 이해 바란다.
나는 지잡대 4학년 24세 미필게이다. 군대를 안간이유는 특례예정중이라 그래...ㅎ 딱히 군대가는게 싫다거나 이런건 없다.기타 이유는 쓰면서 ㅇㅇ
어디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내인생이 꼬이기 시작한건 2010년 10월 말경이다. 절대 이때를 잊을수가 없다. 내가 2학년 재학중일때지
우리 아버지는 자영업을하신다. 솔직히 그냥 백수라해도 무방해, 내가 중학생때부터 아버지는 소득의 전무하셨거든
그렇다고 가난하게살지는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의사를 하신걸로 알고있고, 재산을 많이 모으신걸로 알아 내가 1살때 돌아가셔서 기억도 없지만ㅎ
솔직히 집에 재산이 얼마나 있다거나 그런건 모른다. 대충아는건 멍청남도 공주인가? 그쪽에 선산이 있어 해마다 찾아가곤했었는데
산에 올라가 예를 지내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항상 아버지께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우리땅이다라곤 말씀하셨고 넓이가 좀 ㅎㄷㄷ했다. 요즘엔 안가봐서 잘 모르겠다.
지금 살고있는 부산에서도 아버지는 XX동 땅부자라고 불리는걸로 알고있다. 그래도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자신이 집안의 재산을 다 갉아먹었다고..
그도 그럴게 전화국을 다니다 명퇴당하시고 015시절 대리점을 하셨다. 것도 시간이 지나 망하고 호프집, 당구장, 레스토랑 등등.. 남기지 못하는 장사만 계속해오셨다.
지금은 양산에다가 공장짓고 투자하시는중이다. 이게 내가 중학생때부터 봐온건데 10년째다... 당연히 성공할것 같지는 않고 ㅎㅎ..
내 한심한 얘기를 쓰려다 삼천포로 빠져서 미안하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10년이 넘게 아버지의 소득이 전무하다는것이다.
나는 인간쓰레기다.
내가 초등학생때 우리아버지는 호프집하시는 단계였다. 하루에 100만원에서 200만원까지 늘 그날 매출을 집으로 가져오셔서 장부와 함께 놔두셨다.
나는 그 현금더미에서 한두장 없어져도 모르겠지 하는 아둔한 생각에 매일같이 만원짜리들을 빼가며 아이들에게 사주고 다니기 바빳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당시 학교앞 문방구에 소위불리는 불량식품들이 대게다 100원 200원하던 시절이다 매일같이 만원 이만원 몰래훔쳐쓰는 나를 보는 아버지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아직도 내 컴퓨터 책상서랍에는 수백장의 게임CD들이 있다. 스타크래프트가 유행했고, 디아블로2가 유행했다. 나는 그모든 CD들을 훔친돈으로 2개씩샀다.
BB탄총이 유행했다. 친구들 2,3천원하는 싸구려 권총가지고 놀때, 나는 훔친돈으로 커다란총을 샀다 연사는안됬다ㅎ
얼마나 한심했을까.. 나를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런 거짓말쟁이새끼를 아들이라고 두고 예쁘다는 말 한마디 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중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당구장을 거쳐 레스토랑을 하고계셨고, 레스토랑이 망할쯤이다.
나는 초등학생때부터 수학을 못했다. 공식을 외워도 대입을 하지 못하는 멍청한새끼였다. 특보라 해서 매일아침 1시간일찍 등교해 특별보충을 받았다.
중학생이 되고 나는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대충 수준을 알아본다고 테스트를 받는데 분수 사칙연산도 못풀었다. 쪽팔려서 죽고싶었다.
다행히도 영어점수는 높았다. 자신있는건 아니었는데 2개이상 틀려본적이 없었다. 높은 영어성적때문인지 수학을 개죽을쒀도 나는 나름 상위반에 들어갔다.
S반이 최상위 그뒤로 A반부터 N반?까진가 있었다. 나는 B반에 들어갔고, 얼마 후에는 A반까지 올라갔다. 중학교 성적은 나름 상타취였다ㅎ
수학은 싫었다. 아무리 대가리를 굴려도 40점을 못넘겼다. 학원 수학선생은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했다 지금 생각해도 개쌍년이다.
수업시간에 일부러 나를 지목하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고, 뭐랄까 정말 얄밉게 나를 놀려대었다. 강냉이를 후려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전에 한번 욕했다가 집으로 전화가 와서 털렸던터라 참는수 밖에 없었다. 자기가 털리면 늘상 집에 전화를 하곤했다.
학원가는게 싫어졌다. 당시 나는 크로노스라는 게임에 빠졌다. 학원에 간다하곤 피시방으로 갔다. 피시방에는 랭커가 있었는데 약간 장애인이다. 일게이같노ㅎ
아이디도 기억한다. 청룡화검 당시 전섭랭킹 3윈가 그랬다. 장애인은 아니고 말하는게 어설퍼서 난 그냥 장애인으로 생각했다.
학원비를 떼먹었다. 한달 학원비 27만원 고스란히 피시방에 갖다 바쳤다. 어머니께 또 거짓말을 하고 돈을 받아내어 학원비를 매꾸었다.
아버지는 늘 집에 계셨다. 사업을 구상중이라는데 집에 앉아 컴퓨터로 바둑을 두신다. 나는 너무 싫었다. 내가 게임을 하지 못했기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뭔가의 보상심리로 더 피시방을 가게되었다. 학원에 이상한 카드제가 도입되었다. 카드를 대기만 하면 출석여부가 자동으로 전송되었다.
당시 나는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 어머니 휴대폰으로 거짓출석문자를 보내었다. 꼬리가 길면 잡하는 법이지 학원에서 어머니에게 전화가 갔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맞아보았다. 나는 울었다 반성하지 않았다. 그냥 서러워서 울었다. 아주 한심한 쓰레기였다.
아버지도 우셨다. 자는척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바둑을 두셨다. 우셨다.. 바둑을 두시며 우셨다.. 나는 이불속에서 한번더 울었다.
하지만 쓰레기같은 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중학교 3년은 점차 하락과 함께 마무리가 되어갔다.
나는 남중을 나왔다. 바로 근처에 여중이 있어 등교길엔 쎾씨한 여중생들을 보며 다녔다. 그래설까 나는 고등학교만은 공학을 가고 싶었다.
고등학생이 되었다. 원하던 대로 남녀공학에 왔다. 어머니는 아직도 뺑뺑이 돌려 당첨된줄 알지만 사실 내가 1지망을 쓴거다.
학교는 꼴통학교로 소문나있었다. 시럽계는 아니다ㅎ 꼴통학교 답게 쎾씨한 여고딩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원하던 로맨스는 없었다.
나는 여자 울렁증이 생겼다.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게 너무 힘들었다. 먼저다가오는 여자도 막아버리는 신기한 능력이었다. 24살인 지금도 여전하다.
폭풍로맨스를 기대하고 간 공학이지만 보기좋게 운지하고 나는 다시 게임의 길로 빠졌다. 프리스타일이라는 농구게임이었다. 지금도 가끔한다ㅎ
성적은 생각보단 괜찮았다. 언수외점수만 합쳐서 등수대로 결과를 내곤했는데, 항상 반에선 2등이었다. 우리반 1등은 전교1등이었다. 개썎끼..3년동안 같은반...
내꿈은 파일럿이었다. 어릴때 꿈이 집시였는데 그게 거지새끼인걸 알고 난 뒤로 부턴 여행가로 바꼈다. 여행가는 스폰이 필요할것 같아 파일럿을 꿈꾸었다.
이리저리 세계를 돌아다니는 그런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파일럿의 장벽은 내게 너무나도 높았고, 길이 좁았다... 꿈을 잃었다.
파일럿 외에는 하고싶은것이 없었기에 목표를 잃었다. 내성적으로는 항공대는 넘사벽이었고, 한서대조차 간당간당했다.
당시 기억으로 국내 항공사 시력기준이 대한항공 0.5 아시아나 0.8인가 그랬다 둘이 바꼈을지도.. 여튼 내 시력은 0.3 교정시력을 제외한 나안?기준인가 그랬다.
접었다... 정말 꿈을 포기해버렸다. 시력회복안경이라하여 사보았지만 구멍몇개 뚫어논 십쓰레기 장물이었다. 그러던중 항공유학이라는 희망을 찾았다.
2억이었나 3억이었나 기본적으로 드는 돈이 그랬다. 존나 애미없이 비쌌다. 또 접어야했다. 말을 꺼낼 엄두도 못내는 금액이었다.
근데 항공운항과를 나와도 저돈 깨먹는거나 마찬가지라는걸 알게되었고, 니미 시발 좃같아서 파일럿꿈을 접었다. 2학년 1학기때의 일이다.
내 성적은 점점 운지하고있었다. 내신도 개밥말아먹고 성적표는 매번 조작질하여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그래도 나름 모의고사는 선방하였다.
내 고딩 3년은 또 게임과함께 흘러갔다. 3학년이 되고 대학을 알아보는데 갈수있는곳이 없다. 아니 있었겠지 하지만 담임은 상담해 주지 않았다.
내가 살면서 제일 싫었던 인간이 고3담임이다. 사람보기를 쓰레기같이 하는새끼, 성적이 낮은 애들은 대놓고 애미애비드립까지 날리던 새끼다.
부산대 갈만한 애들만 불러내어 상담을 하였다. 반에서 3,4명정도 됬던거 같다. 한놈은 병신같이 밀양캠퍼스를 간걸로 알고, 한놈은 고대 자율전공인가 갔다.
두놈은 운지했다. 씨발 담임새끼 병찐모습이 너무도 통쾌했다. 나는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말했다 싶이 돌아다니는게 꿈이라 영어는 꼭 하고싶었다.
수시는 포기했다. 영문학과와 간호학과 두곳을 썼는데 영문학과는 학교수준이 너무 낮은것 같았고, 간호학과는 가고싶지 않았다.
정시를 노리기로 하고 수리점수를 올려보기 위해 인강을 듣기시작했다. 수포자 어쩌고 유명하다는데 하라는 수업은 안하고 개잡소리가 70%였다.
수능날이 되었고,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로 들어갔다. 어떻게 쳤는지는 잘모르겠고, 시험이 끝나고 나오는데 개고생했구나 하며 돌아가는길에 울었다
집에가서 가채점을 했다. 수리는 잘찍어서 4등급이나 뜰거 같았는데, 영어듣기를 밀려쓴거 같다. 진심으로 자살하고 싶었다. 부모님께 말도 못했다. 또울었다.
여차저차하여 결과가 나왔고, 부산 지잡대 영문학과 대기 60번대가 떳고, 지잡국립대 경찰과 대기2번이떴다. 지잡 간호학과 대기 30번대가 떳다.
간호과는 왜자꾸 썼는지 모르겠다ㅎ 다음날이 되니 국립대는 합격상태가 되었고, 그다음날엔 영문학과에서 합격됬다고 전화가 왔다 간호사 OUT!!!
나는 영문학과가 가고싶었다. 하지만 지잡국립대라도 국립대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차마 비싼돈내고 영어배우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무원 열풍이 불던터라 아버지께서는 경찰학과를 나와 철밥통이 되기를 더욱더 바라셨는지도 모르겠다. 여튼나는 경찰과를 가게되었다.
여기서부터가 내인생의 진짜 오류였다.
미안하다 게이들아 밤새고와서 너무 졸립다. 한숨자고 일어나서 지금 우울증겪고 있는거랑 자살시도 했던거 마저풀께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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