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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 4부2장(2)

“어떻게 하죠?”


“왜 이게 상자채 버려져 있는 거야…?”




당황스런 표정으로 얼굴만 마주 본 채 서 있는 남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유미의 손이 남자의 손에서 반지를 빼앗아 들었다.




“이봐 아가씨.. 멋대로 만지지 말라고”




“…희성아..”




반지 안쪽에는 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희성이가 준비한 것이 틀림 없었다. 희성이 자신을 위해서 준비한 반지. 유미가 받았어야 될 반지였다. 이게 왜 이곳에.. 구체적인 것까지는 알 수 없어도 대충 짐작은 되었다. 자신의 탓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 이 반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쁘던 연구 중에서 짬을 내어서 돈을 모았던 것이 이 반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틀림없이 빨개진 얼굴로 샵에 가서.. 고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던 것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 그랬는데… 자신은 희성을… 희성이가 그 사실을 깨닫고… 그래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떨리는 손에서 반지가 굴러 떨어졌다. 건조한 소리를 내며 마루 바닥을 반지가 굴러가고 있었다.




“나.. 어떻게 해… 어떻게 하면…”




유미는 반지가 그렇게 굴러가는 것도 비틀비틀 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윤기를 잃은 갈색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렇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이봐 아가씨.. 혹시.. 이 집… 이 반지.. 혹시… 아가씨 거야?”




뒤에서 소리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몽유병자가 된 것만 같은 걸음이었다. 그렇게 유미는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저기.. 이 반지 이거.. 어떻게 하죠?”




“일단 짐 안에 넣어 두자고.. 오늘 작업은 이걸로 끝내고.. 정리하자고 자.. 서둘러”






‘희성아…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이제 와서…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이렇게… 안되었겠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은.. 이제 유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희성이와의 연결점이 있는 곳은 이곳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끊어질 듯한 가는 실낱 같은 연결점이었지만 이곳 밖에 없어서 였다. 몇번이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집이 없어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제 여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얼굴을 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좋았다. 그리운 온기의 흔적만이라도 느낄 수만 있다만… 만져 볼 수 있다면… 그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렇게 멍한 생각으로 겨우 도착한 곳이 이 곳이었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연구실에서 희미하지만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안에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손잡이를 잡은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네?”




뒤를 돌아 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연구원이 서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차림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본 적이 있는 남자였다.




“다들 집에 가서 아무도 없어요.. 연말이다 보니.. 누가 이런 연구실에… 어? 당신은… 설마…?”




희미한 복도의 불빛 아래서 유미의 얼굴을 본 남자의 표정이 갈수록 일그러졌다.




“당신은.. 희성이…”




목소리도 적의에 차 있었다. 강한 적의가 느껴지는 눈초리였다.




“당신이 여길 왜 왔어? 여길 어떻게… 당신도 자격 없는 거 잘 알지? 뭐야? 이제와서 희성이가 잘 나갈 거 같으니까 그 꼬라지를 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거야? 그렇게 몸을 내 굴리고서?”




“… 그런… 전… 그런 게…”




“따라와 봐.. 보여줄 게 있으니까”




혀를 차던 남자가 유미의 가는 팔목을 잡아 끌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망설이지도 않고 희성의 책상 앞으로 유미를 끌고 갔다.




“당신 무슨 생각으로 희성이랑 사겼던 거야? 양다리 걸치면서.. 희성이 같이 착한 자식을.. 잘도 가지고 놀았더군”




“아.. 아니에요.. 그런 적 없어요…”




남자가 희성이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없긴 뭐가 없는데? 내가 똑똑히 봤다고… 키 큰 남자애와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걸.. 빨간 리본에 긴 머리를 하고 다녔으니 내가 잘못 봤을리가 없지.. 암 틀림없이 당신이었다고”




“그.. 그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훈이와 러브호텔에 갔던 건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아서 언제 그가 자신을 봤는지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유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자신의 말을 긍정이라고 생각한 남자는 거칠게 유미를 밀어젖혔다.




“지금 이꼴은 도대체 또 뭐야?”




그의 시선은 유미의 미니스커트 차림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희성이를 유혹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나본데.. 안됐군.. 희성인 더 이상 이곳에 없어”




“어.. 없어요?”




“새해부터 희성이 연구를 기반으로 시작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출범하거든. 당연히 그 녀석도 중심 멤버 중 한사람이라고.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 그런…”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실낱 같은 연결고리도 끊어지고 말았다.




“희성이 한테는 해외 유명 연구소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와 있는 상황이라고. 알기나 해? 그 자식은 이제 연구자로써 장래가 확실해져 있는 남자야. 우리랑은 다르다고. 그런데 당신 같은 여자가 가당키나 한 거 같아?”




컴퓨터가 커졌다. 남자는 모니터를 가르켰다. 남자의 손을 따라 눈을 돌린 유미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사진… 이걸.. 희성이가… 지금껏…?”




유미의 사진이 바탕화면으로 되어 있었다. 뺨을 맞대고 어깨를 감싸안고 V자를 그려보이고 있는 사진. 빨간 얼굴에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 이제 막 연인이 되었을 무렵의 두사람의 사진이었다. 대학 입학식 직전, 소꿉친구가 아닌 연인으로써 첫 데이트를 했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기쁨에 넘치는 유미와 희성이의 웃는 얼굴이 화멱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 당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 녀석이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당신이 알기나 해? 우리가 걱정을 해도 괜찮다고 웃기만 하고.. 무리하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고… 그랬는데도.. 그 자식 해 낸 거라고…”




자신이 그렇게 심한 짓을 했는데도… 그랬는데도 희성이는 자신을… 끝까지 자신을… 그랬는데… 결국 자신은 희성이에게… 상처만 주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유미에게 남자는 덧붙였다.




“그 바쁜 연구 중에도 틈만 나면 그 자식.. 이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고. 그 녀석이 어떤 기분으로 이 사진을 보고 있었을지 알기나 해?”




드디어 남자의 분노가 폭발했다.




“꺼져버려. 지금 당장 여기서 꺼져버리라고.. 그리고 잘 들어! 이제 두번 다시 희성이 앞에 나타나지 마! 너 같은 게 얼쩡거리면 희성이 경력에도 흠이 될 뿐이야. 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져버리라고!”




신기하게도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희성이 가버렸다. 이제 만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어디를 가도 만날 수가 없었다. 유미는 비틀거리듯 복도를 나왔다.




“어떻게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희성이에게 어떻게 하면…”




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문이 닫히고 유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흐트러트린 후 전화기를 꺼냈다.




“아.. 선생님.. 접니다.. 실은.. 네… 연구실에.. 네.. 왔었어요… 그런데.. 울컥해서.. 그만… 네.. 알겠습니다…”






“저기.. 채원씨.. 선생님은요? 아침부터 안계시던데…”




“아. 본가에 갔어.. 정초잖아.. 오늘 늦게 돌아온다고는 했는데.. 왜? 볼 일 있어?”




침대에 엎드린 채 뒹굴거리던 채원은 다리를 흔들면서 잡지를 보거나 하며 오랜만의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급한 일이면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보던가”




하지만 여전히 잡지에서 눈을 떼지는 않았다.




“… 그렇군요.. 아 저.. 잠깐 편의점에 좀 다녀올게요”




“그건 안돼”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화장을 하지 않고 있어서인가 TV에서 볼 때 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말투는 딱딱했다.




“아.. 왜.. 왜 그러세요? 잠깐만 다녀온다는데…”




“뻥치시네. 그래놓고 유미한테 가 볼 생각이잖아”




“아..아니에요”




“뭐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니까. 지영이가 그랬거든. 널 이방에서 한발도 못나가게 하라고”




“거의 간수군요”




유미가 있을 것만 같은 지훈의 아파트에 가 볼 생각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읽어낸 채원에게 아무리 빈정거려 보아도 채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가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단다.. 저 열쇠는 안에서는 안열리거든”




“그런 게 어딨어요”




하지만 채원은 여전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포기한 듯한 얼굴로 현관을 확인하고 돌아온 희성이 힘 없이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봐 이봐.. 뭘 그런 일로 남자가… 정말 너란 애는 알기 쉬운 거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네 여자친구라면.. 지금쯤 지영이가 손을 써 놓았을 테니까.. 더 이상 심한 일을 당하거나 하진 않을 거야.. 지영이를 믿으라고.. 지영이만 믿고 있으면 다 잘될 테니까.. 지영이가 널 도와주겠다고 했다면서… ? 그럼 아무 걱정 안해도 된다니까”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되는 거죠? 선생님이 괜찮아..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은 일인 거에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선생님이 그랬으니까.. 그냥 믿으라구요? 그럼 채원씨는 선생님이 ‘내일 지구가 멸망해..’라고 하시면 그대로 믿을 거에요?”




“응 믿어”




채원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하고는 또 다시 페이지만을 넘기고 있었다.




“어머? 이 가방 괜찮네.. 까르띠에 신상?”




가끔씩 그렇게 혼자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커다랗고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햇살이 채원의 새하얀 블라우스를 노을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 방에서 지내는 동안 희성은 지영과 채원을 보면서 두 사람이 강한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채원은 지영이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고 지영은 채원을 감싸안듯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주고 받는 말과 눈빛, 작은 손짓 하나하나까지 서로의 모든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로의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모든 것이 채워지고 있다는 듯이…. 서로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없었다. 이해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존재만이 모든 것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순수한 관계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희성이로써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채원씨는 선생님을 믿을 수 있는 거죠?”




단순하고도 소박한 의문이었다. 희성의 물음에 채원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한마디로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지영이를 사랑하니까.. 물론 지영이도 날 사랑하고”




대답을 짧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채원의 표정은 한없이 기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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