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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립스틱* - 31부

전산실로 들어서는 송나희는 강민우가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음식점에 있는지 생각한다. 별다른 의미 없이 강민우의 사무실에 들였지만 식사를 늦게 하는 것인지, 혼자는 아닐 테고 누구와 같이 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예전 같으면 지나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집착을 하는 것은 아닌지 송나희는 자신을 돌이켜 본다. 집착은 아니더라도 그녀가 그에게 관심이 깊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전산실로 들어간 그녀는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요원들을 둘러본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는 유서연의 등 뒤로 다가섰다. 유서연이 다가서는 송나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언니! 전파 장애가 생겨 주파수를 조정해도 시스템이 불안정하네. 북한에서 또 고주파를 발사해 통신망을 교란시키는 것 아닌가?”

“음, 잠간만........”



송나희가 UPS와 ES 통신장비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좌판을 두들겨 중앙 컴퓨터 접근을 다시 시도하였다. 불안정하게 나타났던 모니터의 서버통신망이 정상으로 회복 되었다.



“간혹 번개천둥이 치면 임피던스 문제로 오작동이 날 수도 있어.”

“아~!”



유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나희는 잠시 그녀의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이 오늘 야간작업 조니?”

“응.”

“그럼, 나 먼저 나갈게. 무슨 일 있으면 호출해?”

“알았어. 언니.”



모니터링 작업에 열중인 유서연이 뒤도 안돌아보고 대답했다. 송나희는 강민우가 있다는 음식점으로 가볼 생각이다.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그의 표정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손가방을 챙겨들고 NTIS 건물을 나온 그녀는 우산을 펴들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대로를 건너 느티나무 식당을 향해 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간 송나희는 우산을 접으며 두리번거렸다. 비가 쏟아지는 날씨 탓인지 이른 시간인데도 식당 안에는 많은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구석진 자리에 선정적인 모델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달력 밑에 강민우의 모습이 보였다. 강민우와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등을 지고 있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고 벌써 술이 거나한지 두 사람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왕릉에서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보고서 봤냐고? 죄악이야! 죄악."

"그건,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간한 단행본에 대응하는 보고서 아닌가요?"



강민우의 질문을 되묻고 있는 홍성식은 조금은 짜증스러웠다. 평소와는 다르게 싸울 듯이 맹렬하게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강민우를 대하기가 난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식탁 앞으로 송나희가 다가섰다. 강민우가 취기어린 눈빛이 송나희를 향했다. 홍성식은 구세주를 만난 듯이 송나희를 반겼다.



"어~! 송 실장님이 여긴 웬일로? 하여튼 앉으세요."

“술 많이들 드셨나 봐요.”



식탁위에는 여러 개의 비어있는 소주병들이 있었다. 홍성식이 종업원에게 술잔과 소주를 추가로 시켰다. 의자를 당겨 앉는 송나희가 강민우를 힐끔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한 강민우는 쓴 웃음을 띠며 다시 홍성식에게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우도 왕릉에서 작성한 보고서를 봤다면서!?”

"그건 북한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간한 단행본에 대응하는 정략적인 보고서로 아는데요."

"아니 엄연히 존재했던 사실이야. 그 당시의 치욕적인 기억을 체념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아."

"어떻게 하겠어요. 시대적인 일이니 감수할 수밖에. 언젠가 역사가 판단할 거 같은데."



"감수한다고!? 괴물 같은 시대에 고통 받는 피해자들은 어떻게, 누구에게 보상받고, 자신의 욕망을 목적으로 역사를 오판하게 만든 가해자들은 누가 처벌하나? 나는 싫어. 용서할 수 없는 그 놈들이 싫다고. 그건 범죄가 아니고 죄악이야!"

“범죄와 죄악은 같은 것 아닌가요?”



송나희는 너무나 열변을 하는 강민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소 그는 말수가 적었으나 취해버리면 억압이 풀린 것처럼 달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토록 감정을 승화시키는 경우는 없었다. 어쩌면 내면에 감추어졌던 침묵의 외침이었다.



종업원이 소주와 술잔을 가져다 놓았다. 강민우에게 질문을 던진 홍성식이 송나희에게 술잔을 건네고 술을 따라 주었다. 벌컥 술잔을 비우는 강민우의 앞머리가 내려와 눈썹을 덮고 있었다. 뚫어지게 허공을 주시하는 그의 표정은 광적인 인상마저 풍겼다.



“범죄와 죄악이 같다고!? 예를 들어 집세를 지불하지 못한다고 세든 사람을 쫓아내는 것은 범죄가 아니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죄악이네. 그렇지만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빵을 훔쳐 먹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범죄이네. 죄악이라고 할 수 없지.”

“그건 형님 말이 맞아요. 거북한 얘기는 그만하시고 술이나 들고 기분 푸세요. 송 실장님도 한 잔 하시고.”



홍성식이 술잔을 들어 송나희의 술잔에 부딪히고 술을 들이켰다. 시간이 갈수록 홍성식은 강민우의 푸념을 상대하기가 거북해졌다. 송나희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 강민우도 술잔을 비웠다. 송나희는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절규하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강민우를 애잔하게 느낄 뿐이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강민우의 아픔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민우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진지하게 생각해봐. 광주사태 같은 사건에서 개인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다면 국가는 가해자와 피해자, 누구를 옹호할 것인가. 국가는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할 수는 없어. 배고프다고 빵을 훔쳐 먹는 것과 뭐가 다른가?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자신의 욕망으로 어린 여학생들을 유린했다면, 범죄인가, 죄악인가? 피해를 당한 여학생은 시대의 제물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인가?”

“글쎄요. 그것이, 같은 경우인지 모르겠네요.”



“모른다고!? 자네 생각에는 가장 무거운 죄악이 뭐라고 생각하나?”

“가장 무거운 죄악........!?”

“절망을 느끼게 하는 거야. 그것은 죄악이지 범죄는 아냐. 절도죄보다 살인죄가 중한 벌을 받는 것을 알고 있잖아. 살인이란 인간의 생명을 훔치는 것, 살인자에게 엄하게 벌하는 것은 생명을 도둑질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여자의 생명 같은 정조를 훔치는 강간은 어떤가? 어쩌면 순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문제이지.”



강민우는 지구 전체를 상대로 싸우는 사람처럼 열기를 높여 갔다. 하지만 홍성식은 그의 말을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고 있었다. 더 이상 강민우를 상대하기가 민망하였다. 공연히 호출기를 꺼내들고 들여다보던 홍성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 전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응! 그래. 가보라고.”



초점을 잃은 듯이 눈동자를 꾸벅이는 강민우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리고 사냥감을 빼앗긴 야수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였다. 홍성식이 송나희에게 눈을 찡긋 감아 보이고 음식점을 나갔다. 취하고 있는 강민우를 상대하기 힘들어 피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의미였다.



대화 상대를 잃은 강민우는 술잔을 들어 벌컥 들이키고 머리를 숙였다. 송나희는 고개 숙이고 있는 그를 바라보면서 술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나.......!?”



강민우가 고개를 들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새삼스럽게 송나희가 곁에 있음을 의식하였다. 취하기는 했어도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강민우에게 송나희는 이진아와는 다른 이미지를 주는 여자였다. 송나희만의 여자다운 색채와 빛깔은 그의 가슴 한쪽에 자리 잡은 감정의 상징이었다. 보호해야할 의무를 지닌 이진아와는 다르게 의지하고 싶은 여자였다. 그것을 애정이라는 단어라고 부정할 수 없는 강민우는 감정이 여려져 울컥해졌다.



“진아가 갔어. 불쌍한 진아가........”

“무슨 말예요? 진아가 가다니. 정말 취했나 봐요.”



“아니, 술주정할 만큼, 취하지 않았어. 정신이 말짱해. 내가 나희 씨에게 진실을 말해 줄게.”

“무슨.......!?”



송나희는 갑자기 강민우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강민우는 언젠가는 이진아와의 인연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송나희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자신의 진면목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 취기에 용기를 얻은 그는 가슴속에 뭉쳤던 지난 시간들의 멍울을 토해냈다.



“광주사태는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었어. 하루아침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놈들에게 잃었지........! 휴가 중이었던 나는 정신없이 놈들을 뒤쫓았어. 원생들이 잠들고 있는 고아원을 군화발로 짓밟고 불태운 놈들을 추적해 갔는데, 공교롭게도 놈들이 어린 소녀를 집단 유린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넋두리하듯이 지난 시간을 말하는 강민우의 눈동자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강민우는 기억속의 고통스러웠던 아픔들을 되살리며 이진아에 대한 인연을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진아와 한 몸이 되었던 사실만은 말 할 수 없었다. 이따금 횡설수설하는 강민우의 말을 듣는 송나희는 애잔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진아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

“아마도 자신 스스로의 목표를 위해 떠난 것 같으니 알 수 없지.”



“진아가 나간 이유가 뭔데요?”

“글쎄........!? 과거의 치욕적인 상처를 체념하지 못했으니까. 놈들을 찾아다닐지도........”



송나희는 이진아를 만났을 때 반항적인 행동과 말을 들었었다. 강민우의 말을 듣고 보니 이진아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았다. 아울러 이진아에 대한 질투일가, 강민우의 애정과 열정이 대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아를 사랑했어요?”

“사랑.......!? 그만큼 애증과 애정을 쏟는 시간이 흘렀으니, 사랑이 아니면 애착심이 없겠지.”

“아뇨! 여자로 보여서......”

“남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송나희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강민우가 대답했다. 강민우는 울분을 토하듯이 술잔을 들어 왈칵 들이켰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강민우의 감정만 생각했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송나희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단지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은 의외로 정에 약한 강민우의 진솔함이었다.



강민우는 소주잔을 들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먼지 낀 형광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울먹이는 이진아의 눈빛 같았다. 송나희는 말없이 천장을 응시하다가 일어서는 강민우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는 듯이 비틀거리며 강민우가 발걸음을 옮겼다. 송나희는 그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기어코 몇 걸음 가지 못해서 강민우는 의자를 붙잡고 쓸어졌다.



“어 멋! 민우씨........!?”



쳐다보고 있던 송나희가 부리나케 일어서서 강민우를 잡아 일으켰다. 그녀의 부축을 받고 일어선 강민우가 휘청거렸다. 송나희는 더 이상 동공이 풀린 그가 술을 마실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다시 의자에 앉히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음식 값을 지불한 그녀는 강민우가 있는 탁자로 돌아왔다. 그는 정신없이 탁자위에 엎드려 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강민우였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그를 부축해서 음식점을 나왔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를 부축한 그녀는 빗줄기 속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택시는 능동에 있는 송나희의 집으로 향했다. 골목까지 들어간 택시는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인사불성이 된 강민우를 부축해서 택시에서 내리게 했다. 어둠속에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고 천둥소리와 함께 번개 치는 불빛에 주위 주택가건물이 들어나 보였다. 택시에서 내린 강민우는 조금 정신이 드는지 엉뚱하게 주택가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지!? 나, 가야 돼.”

“민우씨! 정신차리고 들어가요. 나 힘들어요.”

“힘들다고........!? 아! 나희구나.......”



강민우는 몽롱한 눈동자로 부축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휘청거렸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들을 적셨다. 송나희는 그를 부축하여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는 강민우를 침대위에 눕히고 겉옷을 벗기고 모포를 덮어 주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그녀는 거실로 나왔다.



송나희는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탔다.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 웅크리고 앉았다.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거실 유리창을 흔들었다. 스산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송나희는 왈칵 추위를 느꼈다. 으스스하게 느끼는 감정은 외로움을 동반하는 빗물이었다. 술이 취해 잠들어 있는 강민우의 품속에라도 안겨 온기를 느끼기 좋은 시간이다.



잃어버리고 있던 배반당한 사랑의 아픔이 올올이 살아나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배반당한 사랑쯤이야, 강민우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난 아픔을 삼켜 버리듯이 커피 한 모금을 훌쩍 들이마셨다. 자신보다 큰 상처를 갖고 방황하는 그의 곁에 있다는 것에 어쩌면 위안이 된다.



아침 햇살이 밝게 비추고 밤새도록 바람을 몰고 오던 빗줄기가 멈추어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이 부신 강민우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눈이 부셔서인지 숙취를 느껴서 깨어난 것인지 강민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어느 시점에서인가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것은 확실했다. 방안에는 여자의 체취가 흐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민우는 현기증을 느끼며 방에서 나왔다. 잘 정돈된 실내의 구조가 낯설지 않은 것을 보고 그제야 송나희의 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수는 하지 않았나. 송나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열린 건넌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책상과 반듯하게 정렬된 책꽂이들이 있는 서재였다. 책상위에 놓인 액자의 사진이 눈에 띠였다. 방으로 들어가 액자에 담긴 사진을 들고 보니 송나희의 미소 담긴 모습이었다.



송나희에게 부축을 받았던 기억이 살아났다. 그러나 집안 어느 곳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고요하기만 하다. 대충 세면을 하고 나오는데 거실 탁자위에 놓인 메모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열십자로 곱게 접은 메모지를 펴들었다.



[너무 술에 취한 것 같아서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곤하게 자기에 먼저 출근할게요. 식사 준비를 해 놓았으나 입맛에 맞을는지 모르겠네요. 맛있게 들고 과음하지 마세요. -나희가-]



강민우는 자신의 약한 모습이 들어나 보인 것 같아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주방으로 가서 식탁위의 식탁보를 들쳐보았다. 아직도 온기를 느끼는 음식들이 정성스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정겨운 마음을 느끼며 수저를 들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생선찌개였다. 숙취에 시달린 그는 찌개국물을 떠서 마시고 맛깔스러움을 느꼈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군산 옥산면. 청암산 중턱의 나무 그늘에서 이진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정면에는 용두목장이 한 눈에 바라보였다. 목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송아지만한 도베르만들이 이따금 산을 오르는 등산객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한동안 강민우가 작성했던 흑사회 놈들의 정보 파일들을 몇 번이고 정리해 왔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놈들에 관한 정보와 신상명세가 암기되어 있었다.



이진아는 그동안 계획했던 일들을 실천에 옮기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역경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각오했다. 그녀에게서 최태웅과 남경식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이제부터 흑사회 놈들을 처리하는 것은 그녀의 몫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과거를 말끔히 지우고 새롭게 탈바꿈한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 옮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시때때로 이진아의 가슴속에는 지울 수없는 정신적인 고통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려고 했다.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강민우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녀 혼자만의 고통이었다. 죽음은 의심할 가치가 없이 명백한 사실로 받아 들여져야만 했다. 이제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그녀 앞에 펼쳐질 나머지 삶은 지극히 교묘하게 위장되어야 한다.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짧게 커트를 쳤을 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눈을 현혹시킬 몸매에 남루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체념할 수 없는 과거를 지우지 않으면 죽음도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도저히 망상의 삶을 받아 드릴 수는 없었다.



과거를 지을 수 있을 때 죽음이 아니면 강민우와 안락한 삶을 선택 할 것이라고 그녀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이진아는 많은 생각과 고심 끝에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강민우 곁을 떠난 것이다. 강민우의 곁을 떠난 그녀는 우선 부동산을 찾아갔다. 그녀가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있는 것은 강민우에게서 받은 신용카드뿐이었다. 그녀의 계획을 알고 있는 듯이 강민우가 큰 금액을 통장 잔액으로 남겨 놓아서 힘들지 않게 오피스텔을 임대할 수 있었다.



이진아가 소유하고 있는 것은 신용카드와 망각의 시간표였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짓밟았던 곽춘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제 시작은 그녀의 여정을 알리는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무기는 놈들에게 짓밟힌 자신의 육체뿐이다. 남자들은 여자를 성(SEX)에 대한 충동적인 감정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여자는 스스로의 육체를 삶의 목적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힘이 있다.



나무그늘에 앉았던 이진아가 손가방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이미 오랫동안 거듭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앞을 향해 전진하는 실행만 남은 것이다. 용두목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죽음도 불사하게 독한 마음가짐이지만, 누가 보아도 그녀의 발걸음은 지쳐보였다. 인생은 연기라고 했던가! 그녀 스스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측은하게 보이는 연기였다.



손가방을 가슴에 안은 이진아는 목장 입구의 철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았다. 철문 안쪽 깊숙한 곳에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주택이 있었고, 주택 오른쪽 철망으로 지어진 규모가 큰 울타리 안에는 몇 마리 되지 않는 사슴들이 보였다. 담쟁이 넝쿨나무가 지붕까지 덮은 주택의 출입문은 굳게 닫혀있고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목장안의 도베르만들이 그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짖어대기 시작했다. 도베르만들의 사납게 짖어대는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녀를 볼 수 있는 철문 입구의 도베르만은 묶여있는 목줄까지 끊고 달려들 기세로 게거품을 물고 짖어댔다. 그래도 목장 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굳게 닫혀있던 건물의 출입문이 열렸다. 출입문에 나타난 사람은 오십대의 중년남자와 삼십이 넘어 보이는 여자였다. 파자마 차림의 중년남자를 자세히 보면 얼굴에 흉터자국이 들어나 보였다. 그가 바로 이진아가 첫 번째로 노리는 곽춘호였고, 여자는 그의 정부였다가 아내가 된 김애경이었다.



그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있다가 참다못해 나온 것이다. 풍만한 몸에 원피스를 걸치고 휘적거리고 나온 김애경이 철문 앞에 앉아있는 이진아에게 다가서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얘! 너 거기서 뭘 해!? 개들이 짖잖아! 빨리 가지 못해. 시끄러워서 못 살겠네.”

“아줌마! 배고파서 그래요. 밥만 먹여주시면 뭐든지 시키는 일을 할게요.”



초라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있던 이진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흘렸다. 도베르만은 여전히 짖어대고 있었다. 파자마 차림의 곽춘호가 뒤에서 어슬렁거리고 다가와 짖어대는 도베르만에게 앉으라고 명령을 했다. 날뛰던 도베르만이 순한 양처럼 앉아 날카로운 이빨을 내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진아를 바라보던 김애경이 팩 쏘아 붙였다.



“여기가 복지시설인줄 알아. 나이도 든 계집애가! 다른데 가서 알아봐.”

“제발 부탁해요. 강원도에서 왔는데, 어디로 갈 기운도 없어요.”

“딴 데로 가라니까, 말귀도 못 알아들어?”



독살스러운 여자의 말에도 이진아는 눈물까지 흘리며 애걸복걸하였다. 뒤에서 바라보고 있던 곽춘호가 앞으로 나서며 이진아를 살펴본다. 초라해 보이기는 해도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 청초한 미모의 이진아의 모습이 그의 시선을 끈 것이다. 그는 허름한 스커트 위로 들어난 그녀의 몸매를 훑어보며 물었다.



“너, 몇 살이니?”

“열아홉 살이요.”



“고향이 어디고, 이름이 뭐냐?”

“고향은 광주고, 강애리에요.”



웅크리고 앉았던 이진아가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대신 강민우의 성과 자신이 안고 다니던 인형의 이름을 말했다. 김애경은 이진아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관심 있게 바라보는 곽춘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곽춘호의 독선적이고 포악한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김애경은 내색을 할 수 없었다. 곽춘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이 이진아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너 정말 시키는 대로 집안 일 할 수 있어?”

“네. 시키는 일, 열심히 할게요.”



이진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곽춘호가 돌아서면서 김애경의 의사를 물었다.



“그럼, 집안 일 좀 거들게 해보지?”

“........”



하지만 곽춘호는 김애경의 대답도 하기 전에 건물로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김애경의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질문이었고 곽춘호의 말은 명령이었다. 불만을 표현할 수도 없는 김애경은 시답지 않은 표정으로 철문 모퉁이의 작은 쪽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이가 갈리는 금속성 소리와 함께 쪽문이 열려졌다.



“빨리 안 들어오고 뭘 해.”

“감사합니다. 아줌마!”



이진아는 허리를 굽혀 쪽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사납게 짖어대던 도베르만이 이방인인 이진아를 바라보고 금방이라도 달려들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김애경의 흔들리는 치마꼬리를 따라 손가방을 움켜쥔 이진아의 모습은 붉은 벽돌집 출입 문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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