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로리 - 6부
6. Closer (후편)
“집에 안 바래다 줘도 괜찮겠어?”
“...혼자 갈 수 있어.”
난 순간적으로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집’ 얘기가 나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로선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네온사인을 헤치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왠지 개운치 않다.
……
어두운 방.
그 아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난 이 순간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어두운 방에 홀로 들어오면서 불을 켜야 하는 순간, 난 굉장히 진한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난 혼자다… 그런 느낌.
지난 달까지만 해도 증상이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었다.
가끔 혜경이가 들러줘서 그랬을까.
그다지 크지 않은 원룸이지만, 나 하나만으로는 너무나 넓게 느껴진다.
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아…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먹었나. 식곤증이 밀려온다.
……
……
“오빠…”
“혜경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혜경과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혜경의 혀가 내 혀를 빨아당긴다.
항상 그렇지만 그녀는 정말 키스를 잘한다.
키스만으로 더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서둘러 그녀를 내 침대 위로 쓰러뜨린다.
“아이~ 오빠 오늘 왜 이리 서둘러…”
“헉… 혜, 혜경아…”
그녀의 옷 위로 팽팽한 가슴을 더듬다가 곧바로 단추를 끄른다.
생각보다 꽤 큰 단추의 느낌. 슬며시 몸을 떼고 쳐다보니 교복이다.
…왜 혜경이가 남색 교복을 입고 있는 거지?!!
……
“…아이씨…”
잠깐 졸았더니 또 망상이다.
켜 놓았던 형광등이 우웅-하고 미세하게 울고 있다. 으, 눈이 부시다.
요새 왜 이러지.
오래 굶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놈의 고딩 때문인가…
부시시한 머리를 흔들며 냉장고로 가 캔커피 하나를 꺼낸다.
“후우…”
입 안에 퍼지는 지나치게 단 맛을 음미하면서, 노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예쁜 아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오늘도 마치 통제가 어려운 여동생을 돌보는 느낌이었다.
연애감정 같은 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정말인가? …정말이다. 아마도.
내가 이 아이와 연락을 취하고 가끔 만나는 것은… 글쎄.
단지 처음부터 그랬듯이 그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왠지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기도 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녀와 이미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족쇄처럼 나를 붙잡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1년쯤 지난 일처럼 생경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밀크 냄새가 날 것 같은 교복 입은 그녀와, 젖은 머리를 쓸어내리던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이 생각된다.
그 날. 비가 오던 그 날.
난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탐했던 걸까.
……
혼란스럽다.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누굴 만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다.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그냥 친구 녀석의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여보세요…”
“(시끌시끌) 여보세요…! 어, 이안이냐?”
전화를 받는군. 밖에 나와 있는지 전화기 저쪽이 꽤나 시끄럽다.
“웬일이냐? 이 시간에…”
“아니… 그냥. 뭐하냐?”
“안 그래도 지금 니네 집 근처에서 영철이랑 한 잔 하고 있어. 나올래?”
“…그래.”
옷 안 갈아입고 있었는데 잘 됐군.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파카만 걸치고, 다시 집을 나섰다.
불은 그냥 켜 놓고 나왔다.
……
“김병현이 기자 밀긴 밀었대는데.”
“그 전에 너라구 불렀대매. 좌우간 찌라시 색기들… 에휴.”
집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포장마차 근처에 도착하니,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두 녀석이 소주를 까고 있는 곳이 여기렸다.
“어이.”
“어, 이안이 왔냐?”
날 맞는 두 녀석은 한석과 영철.
무역회사랑 증권사 다니는 직딩들이다.
“웬일이냐? 여기까지 술 먹으러 다 오고…?”
“어, 영철이가 이 근처로 근무지 옮겼잖냐. 앞으로 종종 올 거야.”
“그래?”
“어, 야, 이안아, 니도 돈 모아둔 거 있으면 주식 좀 사라. 헤헤. 내 불려 줄게.”
“야야, 돈 있어도 안 한다.”
영철이 녀석은 얼굴이 벌개진 게 벌써 꽤 마신 품이다.
“에에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형님이 섭하지이~ 아, 니 쭉빵 여친 잘 있나?”
“…….”
“…야, 헤어졌다고 했잖아. 자식도 참.”
한석이 곤혹스런 얼굴로 내 눈치를 보면서 핀잔을 준다.
사실 이런 때 참 난처하다.
“…괜찮아.”
“아~ 왜 헤어졌노? 니 그리 이쁜 가시나 찾기 쉬운 줄 아나… 아깝네~”
“내가 차였다니까.”
“아~ 씨발 간수좀 잘 하지이…”
“아쒸~ 야야, 술이나 먹고 가만히 좀 있어라.”
잔을 부딪히면서 영철의 입을 막는 한석.
근데 원샷은 영철이 녀석만 하는군.
뭐, 그러라지.
……
얼마 지나지 않아서 뻗은 영철이를 가운데 두고, 나는 한석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니 이상하군.
“…무슨 일 있냐?”
“……응?”
침묵을 깨고 한석이 말을 건다.
“아까 할 얘기 있던 거 아니었냐? 너 밤 늦게 전화 잘 안 하잖아.”
“아, 뭐, 그렇지.”
나는 분명히 말을 잇지 못하고 소주잔만 만지작거린다.
“역시 혜경씨 얘기였냐?”
“아니, 그 때부터 연락 없는 건 똑같은데 뭐.”
“그럼...?”
“아니, 좀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어서.”
“후배?”
“아니, 후배라기보다…”
“여자야?”
“아니 그게…”
원조교제로 만난 여고생이라고 말해야 되나?
소심한 날 아는 녀석들한텐, 말해줘도 안 믿을 얘기다.
“그럼 뭔데… 무슨 사고라도 쳤냐?”
“…사고는 무슨.”
“하긴 네가 무슨 사골 치겠냐.”
“…무슨 뜻이냐?”
“별로.”
“…….”
난 말없이 잔을 비웠다.
한석이 잠자코 잔을 채워주며 나직하게 말한다.
“누군진 몰라도… 네가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다니 의외인걸.”
“응…?”
“너 말야, 네가 진짜 재미있는 거 아니면 대개 무관심하잖아.”
“……그랬나.”
“사실 혜경씨한테 미치기 전까진 여자도 안 만나길래, 너 게이인가 했었다니까.”
“야야.”
그랬나.
사실 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한석이 이 녀석은 평소엔 별 말이 없는데, 이럴 땐 굉장히 예리한 구석이 있다.
“글쎄, 모르겠어.”
“좌우간 너한테 진짜 중요한 거 아니면 신경 끊어. 너 그거 잘 하잖아?”
“…….”
…노리는 나한테 어떤 존재인가?
신경을 끊는 편이 좋을까?
“그리고… 혜경씨한테 전화 걸어 보지? 후회하기 전에…”
“됐어…”
“뭐,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
“그래…”
친구 만나서 술 먹었지만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좀 더 생각해 봐야… 아아, 귀찮다.
“애고, 이 자식 내 방에 재워야 될 것 같다. 완전히 맛이 갔네.”
“괜찮아. 내가 데려가면 돼.”
“괜찮겠냐?”
“그럼. 글구… 어차피 네 집보다 내 차가 가깝다.”
그러면서 옆에서 자고 있는 영철을 흘끔 본다.
“…이 녀석 끌고 가려면.”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던 영철이 게슴츠레 눈을 뜬다.
“뭐, 이아니 집? 야아… 안되… 내 정조가 위허매… 끅….”
“…….”
“…….”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어이없는 개그를 지껄여대는 영철.
한석이 장탄식을 한 번 내뱉은 다음 중얼거렸다.
“내 이 색기 이럴 줄 알고 몇 잔 안 마셨다니까.”
……
한석이 차를 대 놓은 곳은 포장마차에서 꽤나 떨어진 골목길이었다.
아… 멀다…
(삐리비리빗~ 삐리비리빗~)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린다. 누구야. 도대체 지금 이 시간에.
“야, 전화 온 것 같은데?”
“애혀,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 없어.”
시체로 화한 영철을 들쳐 메고 가는 도중이었다.
중간에 그를 내려 놓고 전화 받기엔 한석이한테 미안했고, 귀찮기도 했다.
일단 차까지만 간 다음에 전화를 받든지 하자.
(~삐릿.)
비교적 오랫동안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끊겼다.
뭐, 아쉬우면 지가 또 하겠지.
근데 정말 멀다…
“휴우… 야,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왔어. 웃ㅤㅆㅑㅤ.”
영철의 팔을 고쳐 메며 한석이 대답할 때,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삐리비리빗~ 삐리비리~)
“와, 걔 누군지 몰라도 끈질기다. 히유… 급하면 문자라도 보내지.”
“그러게.”
“애인 아닌 담에야 이런 늦은 시각에…”
…애인.
무심히 나온 한석의 말에 난 뭔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야, 잠깐만 있어봐.”
“어 왜… 헉… 애고고…”
밀어 던지다시피 영철을 떠맡기자 한석이 비틀거린다.
한석의 푸념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넣는 나.
아, 왜 전화기가 이렇게 안 빠지지…
“야아… 왜, 왜 그래?”
핸드폰을 간신히 뽑아내었을 때는 이미 벨소리는 멈춘 상태였다.
나는 황망히 발신자번호를 확인해 본다.
02*******.
모르는 번호다. 쳇. 허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난 뭔가에 홀린 듯 번호 1번을 누르고 있었다.
아직 지우지 않은 번호. 017-****-****.
혜경의 번호다.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무미 건조한 멘트.
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방금 온 전화가 그녀에게서 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내가 전화를 먼저 해서 어쩌려고.
이미 다른 사람 따라간 여자한테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사랑을 구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 가자… 누구야?”
“… 모르는 번호야.”
……
간신히 한석의 차에 영철을 처넣었다.
“히유~ 수고했다.”
“그래, 조심해서 가라.”
“…너 아까 전화 다시 걸어 봤어?”
역시 한석이 녀석은 예리하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본 것이겠지.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혜, 혜경이한테 전활 내가 왜 걸어.”
“내가 언제 혜경씨 전화라고 했냐?”
“…….”
녀석이 피식 웃는다. 쳇.
“아니, 이 시간에 전화 걸어서 어쩌게.”
“어차피 그 쪽에서 먼저 건 거잖아. 궁금하면 걸어봐.”
“그럴까…”
(부웅~)
시체를 태운(?) 차가 출발하고,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전화해 볼까.
가만히 최근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난 순간 내 자신에게 다시 모멸감이 들면서,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폴더를 닫으며 슬몃 본 화면에 찍힌 시각은 어느덧 새벽 1시.
신촌의 밤거리는 여전히 밝고, 천박한 네온사인들이 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집에 안 바래다 줘도 괜찮겠어?”
“...혼자 갈 수 있어.”
난 순간적으로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집’ 얘기가 나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나로선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네온사인을 헤치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왠지 개운치 않다.
……
어두운 방.
그 아이처럼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난 이 순간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다.
어두운 방에 홀로 들어오면서 불을 켜야 하는 순간, 난 굉장히 진한 고독감을 느끼곤 한다.
난 혼자다… 그런 느낌.
지난 달까지만 해도 증상이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었다.
가끔 혜경이가 들러줘서 그랬을까.
그다지 크지 않은 원룸이지만, 나 하나만으로는 너무나 넓게 느껴진다.
난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털썩 쓰러졌다.
아…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먹었나. 식곤증이 밀려온다.
……
……
“오빠…”
“혜경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혜경과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혜경의 혀가 내 혀를 빨아당긴다.
항상 그렇지만 그녀는 정말 키스를 잘한다.
키스만으로 더 참을 수 없게 된 나는 서둘러 그녀를 내 침대 위로 쓰러뜨린다.
“아이~ 오빠 오늘 왜 이리 서둘러…”
“헉… 혜, 혜경아…”
그녀의 옷 위로 팽팽한 가슴을 더듬다가 곧바로 단추를 끄른다.
생각보다 꽤 큰 단추의 느낌. 슬며시 몸을 떼고 쳐다보니 교복이다.
…왜 혜경이가 남색 교복을 입고 있는 거지?!!
……
“…아이씨…”
잠깐 졸았더니 또 망상이다.
켜 놓았던 형광등이 우웅-하고 미세하게 울고 있다. 으, 눈이 부시다.
요새 왜 이러지.
오래 굶어서(?) 그런가… 아니면 이놈의 고딩 때문인가…
부시시한 머리를 흔들며 냉장고로 가 캔커피 하나를 꺼낸다.
“후우…”
입 안에 퍼지는 지나치게 단 맛을 음미하면서, 노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매우 예쁜 아이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오늘도 마치 통제가 어려운 여동생을 돌보는 느낌이었다.
연애감정 같은 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정말인가? …정말이다. 아마도.
내가 이 아이와 연락을 취하고 가끔 만나는 것은… 글쎄.
단지 처음부터 그랬듯이 그녀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왠지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기도 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녀와 이미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족쇄처럼 나를 붙잡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1년쯤 지난 일처럼 생경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밀크 냄새가 날 것 같은 교복 입은 그녀와, 젖은 머리를 쓸어내리던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이 생각된다.
그 날. 비가 오던 그 날.
난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탐했던 걸까.
……
혼란스럽다.
시계는 어느덧 11시를 넘어가고 있다. 누굴 만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다.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그냥 친구 녀석의 전화번호를 눌러본다.
“여보세요…”
“(시끌시끌) 여보세요…! 어, 이안이냐?”
전화를 받는군. 밖에 나와 있는지 전화기 저쪽이 꽤나 시끄럽다.
“웬일이냐? 이 시간에…”
“아니… 그냥. 뭐하냐?”
“안 그래도 지금 니네 집 근처에서 영철이랑 한 잔 하고 있어. 나올래?”
“…그래.”
옷 안 갈아입고 있었는데 잘 됐군.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파카만 걸치고, 다시 집을 나섰다.
불은 그냥 켜 놓고 나왔다.
……
“김병현이 기자 밀긴 밀었대는데.”
“그 전에 너라구 불렀대매. 좌우간 찌라시 색기들… 에휴.”
집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포장마차 근처에 도착하니,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린다.
두 녀석이 소주를 까고 있는 곳이 여기렸다.
“어이.”
“어, 이안이 왔냐?”
날 맞는 두 녀석은 한석과 영철.
무역회사랑 증권사 다니는 직딩들이다.
“웬일이냐? 여기까지 술 먹으러 다 오고…?”
“어, 영철이가 이 근처로 근무지 옮겼잖냐. 앞으로 종종 올 거야.”
“그래?”
“어, 야, 이안아, 니도 돈 모아둔 거 있으면 주식 좀 사라. 헤헤. 내 불려 줄게.”
“야야, 돈 있어도 안 한다.”
영철이 녀석은 얼굴이 벌개진 게 벌써 꽤 마신 품이다.
“에에이~ 그런 식으로 나오면 이 형님이 섭하지이~ 아, 니 쭉빵 여친 잘 있나?”
“…….”
“…야, 헤어졌다고 했잖아. 자식도 참.”
한석이 곤혹스런 얼굴로 내 눈치를 보면서 핀잔을 준다.
사실 이런 때 참 난처하다.
“…괜찮아.”
“아~ 왜 헤어졌노? 니 그리 이쁜 가시나 찾기 쉬운 줄 아나… 아깝네~”
“내가 차였다니까.”
“아~ 씨발 간수좀 잘 하지이…”
“아쒸~ 야야, 술이나 먹고 가만히 좀 있어라.”
잔을 부딪히면서 영철의 입을 막는 한석.
근데 원샷은 영철이 녀석만 하는군.
뭐, 그러라지.
……
얼마 지나지 않아서 뻗은 영철이를 가운데 두고, 나는 한석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니 이상하군.
“…무슨 일 있냐?”
“……응?”
침묵을 깨고 한석이 말을 건다.
“아까 할 얘기 있던 거 아니었냐? 너 밤 늦게 전화 잘 안 하잖아.”
“아, 뭐, 그렇지.”
나는 분명히 말을 잇지 못하고 소주잔만 만지작거린다.
“역시 혜경씨 얘기였냐?”
“아니, 그 때부터 연락 없는 건 똑같은데 뭐.”
“그럼...?”
“아니, 좀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어서.”
“후배?”
“아니, 후배라기보다…”
“여자야?”
“아니 그게…”
원조교제로 만난 여고생이라고 말해야 되나?
소심한 날 아는 녀석들한텐, 말해줘도 안 믿을 얘기다.
“그럼 뭔데… 무슨 사고라도 쳤냐?”
“…사고는 무슨.”
“하긴 네가 무슨 사골 치겠냐.”
“…무슨 뜻이냐?”
“별로.”
“…….”
난 말없이 잔을 비웠다.
한석이 잠자코 잔을 채워주며 나직하게 말한다.
“누군진 몰라도… 네가 신경쓰이는 사람이 있다니 의외인걸.”
“응…?”
“너 말야, 네가 진짜 재미있는 거 아니면 대개 무관심하잖아.”
“……그랬나.”
“사실 혜경씨한테 미치기 전까진 여자도 안 만나길래, 너 게이인가 했었다니까.”
“야야.”
그랬나.
사실 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다.
한석이 이 녀석은 평소엔 별 말이 없는데, 이럴 땐 굉장히 예리한 구석이 있다.
“글쎄, 모르겠어.”
“좌우간 너한테 진짜 중요한 거 아니면 신경 끊어. 너 그거 잘 하잖아?”
“…….”
…노리는 나한테 어떤 존재인가?
신경을 끊는 편이 좋을까?
“그리고… 혜경씨한테 전화 걸어 보지? 후회하기 전에…”
“됐어…”
“뭐,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
“그래…”
친구 만나서 술 먹었지만 그래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좀 더 생각해 봐야… 아아, 귀찮다.
“애고, 이 자식 내 방에 재워야 될 것 같다. 완전히 맛이 갔네.”
“괜찮아. 내가 데려가면 돼.”
“괜찮겠냐?”
“그럼. 글구… 어차피 네 집보다 내 차가 가깝다.”
그러면서 옆에서 자고 있는 영철을 흘끔 본다.
“…이 녀석 끌고 가려면.”
인사불성으로 쓰러져 있던 영철이 게슴츠레 눈을 뜬다.
“뭐, 이아니 집? 야아… 안되… 내 정조가 위허매… 끅….”
“…….”
“…….”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어이없는 개그를 지껄여대는 영철.
한석이 장탄식을 한 번 내뱉은 다음 중얼거렸다.
“내 이 색기 이럴 줄 알고 몇 잔 안 마셨다니까.”
……
한석이 차를 대 놓은 곳은 포장마차에서 꽤나 떨어진 골목길이었다.
아… 멀다…
(삐리비리빗~ 삐리비리빗~)
호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린다. 누구야. 도대체 지금 이 시간에.
“야, 전화 온 것 같은데?”
“애혀,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 없어.”
시체로 화한 영철을 들쳐 메고 가는 도중이었다.
중간에 그를 내려 놓고 전화 받기엔 한석이한테 미안했고, 귀찮기도 했다.
일단 차까지만 간 다음에 전화를 받든지 하자.
(~삐릿.)
비교적 오랫동안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끊겼다.
뭐, 아쉬우면 지가 또 하겠지.
근데 정말 멀다…
“휴우… 야, 아직 멀었냐?”
“거의 다 왔어. 웃ㅤㅆㅑㅤ.”
영철의 팔을 고쳐 메며 한석이 대답할 때,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삐리비리빗~ 삐리비리~)
“와, 걔 누군지 몰라도 끈질기다. 히유… 급하면 문자라도 보내지.”
“그러게.”
“애인 아닌 담에야 이런 늦은 시각에…”
…애인.
무심히 나온 한석의 말에 난 뭔가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혹시…?!!!
“야, 잠깐만 있어봐.”
“어 왜… 헉… 애고고…”
밀어 던지다시피 영철을 떠맡기자 한석이 비틀거린다.
한석의 푸념은 아랑곳하지 않고 호주머니 속에 손을 쑤셔 넣는 나.
아, 왜 전화기가 이렇게 안 빠지지…
“야아… 왜, 왜 그래?”
핸드폰을 간신히 뽑아내었을 때는 이미 벨소리는 멈춘 상태였다.
나는 황망히 발신자번호를 확인해 본다.
02*******.
모르는 번호다. 쳇. 허탈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난 뭔가에 홀린 듯 번호 1번을 누르고 있었다.
아직 지우지 않은 번호. 017-****-****.
혜경의 번호다.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무미 건조한 멘트.
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방금 온 전화가 그녀에게서 온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내가 전화를 먼저 해서 어쩌려고.
이미 다른 사람 따라간 여자한테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사랑을 구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야, 가자… 누구야?”
“… 모르는 번호야.”
……
간신히 한석의 차에 영철을 처넣었다.
“히유~ 수고했다.”
“그래, 조심해서 가라.”
“…너 아까 전화 다시 걸어 봤어?”
역시 한석이 녀석은 예리하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본 것이겠지.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혜, 혜경이한테 전활 내가 왜 걸어.”
“내가 언제 혜경씨 전화라고 했냐?”
“…….”
녀석이 피식 웃는다. 쳇.
“아니, 이 시간에 전화 걸어서 어쩌게.”
“어차피 그 쪽에서 먼저 건 거잖아. 궁금하면 걸어봐.”
“그럴까…”
(부웅~)
시체를 태운(?) 차가 출발하고, 나는 집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긴다.
…전화해 볼까.
가만히 최근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난 순간 내 자신에게 다시 모멸감이 들면서,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폴더를 닫으며 슬몃 본 화면에 찍힌 시각은 어느덧 새벽 1시.
신촌의 밤거리는 여전히 밝고, 천박한 네온사인들이 내 눈을 찌르고 있었다.
추천53 비추천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