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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최상위 포식자 - 10


 



 





10. 육식 동물





“그러니까 정말 훔친 것이 아니라니까요.”


경찰 앞에서 영주가 극구 부인했다.


“이봐요, 아가씨. 그러면 왜 사고 현장에서 도망쳤어요? 켕기는 구석이 없으면 도망쳤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조회를 해 보니까 이거 한영주 씨 차량이 아닌 걸로 나오는데, 솔직히 말해요. 이거 훔쳤죠?”


“정말 훔친 게 아니라니까요.”




지금 영주는 경찰서에 와 있다.

물론 잡혀 왔다.

이유는 [도난 차량으로 의심되는 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졸음운전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음주 운전은 더더욱 아니다.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고 하필이면 검문검색하는 경찰을 본 것이 이유라면 이유다.

음주 단속을 하고 있는 경찰을 보는 순간 와락 겁을 먹고 운전대를 튼 것이다.



설이현의 차를 훔쳐서 달아난 지 벌써 이틀이 넘었다.

당연히 설이현이 도난 신고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차적 조회가 들어가면 도난차량인 것이 밝혀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설이현에게 다시 잡히고 만다.

그게 무서워서 운전대를 틀어 반대쪽으로 달아나려다 급하게 서두르는 바람에 차가 미끄러져 전봇대를 박았고, 사고가 나는 순간 차를 버리고 뛰었다.

물론 300미터도 못 가서 경찰들에게 잡히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날, 잠든 설이현을 두고 몰래 도망쳤었다.

자신을 쫓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의 휴대폰과 옷을 욕조에 넣어 버리고 지갑에서 신용 카드와 현금을 전부 빼낸 다음 밖으로 나왔다가 그의 차를 발견했다.

다행히 그는 혼자 왔었고 그의 차를 본 영주는 다시 방으로 돌아가 그의 차 열쇠까지 가지고 내려와 차까지 가지고 달아났다.

차를 가지고 온 것은 그 밤에는 버스도 다니지 않고 택시를 부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밤길을 걸어서 도망칠 수도 없어서 일단 차를 가지고 왔다.

그렇게 이틀 동안 차를 버리지 못했다.

마땅히 갈 곳을 정하지 못해서 차 안에서 자면서 어디로 갈지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 진짜 기가 막히게 사고가 나고 경찰서까지 왔다.

이상한 것은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설이현이 차를 도난차량으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창피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이건 일단 알려지면 정말 뉴스 감이니까…….’



설이현이 차량 도난 신고를 안 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

유산 분쟁 중인 피 안 섞인 여동생이 차를 가지고 달아났다, 이런 것은 정말 가십 거리다.



“음주도 아닌데 검문검색 보고 차 돌린 것도 수상하고, 전봇대 박고 사고 났는데 차 버리고 달아난 것도 수상하고, 그런데 차는 또 다른 사람 명의 차량이야. 이러면 뻔하잖아 아가씨.”



“도난 차량이면 신고가 되어 있겠죠. 그거 우리 오빠 차예요.”

“오빠 차?”



거짓말이 아니다.

그 차는 [오빠] 차가 맞다.

아직까지는 설이현은 법적으로는 오빠다.

호적 정리가 안 끝난 이상 법적으로 그는 [오빠]고 자신은 오빠의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것밖에 없다.



‘그러니까 쫄지 마. 쫄지 마, 괜찮아.’



영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직 할 변명은 많다.



“오빠 찬데 오빠 몰래 몰고 나왔다가 사고를 내서 혼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지, 정말 훔친 거 아니에요.”

“오빠 이름 불러 봐요.”

“왜, 왜요?”

“그래야 차주인지 아닌지 확인할 거 아닙니까.”

“오빠가 알면 저 죽어요.”

“그럴 것 같네요. 그 비싼 차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으니.”



경찰관이 혀를 찼다.

그의 동정심은 진심으로 보였다.



설이현의 차는, 정말 비싼 차다.

아무렴 설이현 회장님께서 타시는 차인데 안 비쌀 리가 없다.



의전용으로 타는 차가 아니라 설이현이 개인적으로 운전하는 차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영주도 알 정도로 고가의 스포츠카다. 문이 위로 열리는 그런 차 말이다.

그리고 전봇대를 박으며 보닛이 아주 박살이 났다.

에어백이 멋지게 터져 준 덕분에 영주는 다친 곳 하나 없지만, 이쯤 되면 설이현은 자신을 보자마자 죽일 게 뻔하다.


“아가씨가 말 안 해도 이미 차주에게 연락 갔습니다. 차주가 와서 도난 차량 아닌 거 확인해 줘야 아가씨도 여기서 나갈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갑니다.”

“연락을 하셨다구요?”


설이현에게 연락을 했다는 말에 영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기, 아저씨. 저 그러면 정말 죽어요. 제가 가출한 거라서, 오빠 차 몰래 끌고 가출한 거라서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젊은 아가씨가 가출을 왜 해요? 고등학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그냥 나오고 싶으면 나올 것이지 가출은 왜 하고, 오빠분 차는 왜 허락 없이 가지고 나왔어요? 가족끼리도 절도죄가 성립된다는 건 알고 있죠?”

“저 정말 훔친 거 아니구요. 저 그냥 가면 안 될까요? 오빠가 절 죽일 거예요. 정말이라구요. 무서운 사람이라니까요.”



이미 벌써 한 명 죽였어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차를 진즉에 버릴 걸…….’



영주가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날 바로 차를 버릴걸.

설이현이 도난 신고를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괜히 차를 버리는 걸 미루다가 결국 이 꼴이 되고 말았으니 누굴 원망하겠는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원망해야지.



‘이제 어떻게 하지? 설이현이 오기 전에 도망쳐야 하는데…….’



도망친다고 쳤는데 사흘 만에 잡히고, 또 도망친다고 쳤는데 이틀 만에 잡히게 생겼다.

이번에는 설이현도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하다


.

‘여기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날 데리고 나가서, 차에 싣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죽이려고 할까?’



이틀 동안 도망치는 내내 영주에게는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대체 왜 설이현은 자기와 섹스를 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중간에는 저도 살짝 미쳐서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설이현보다 더 막장으로 치달으며 온갖 야한 말들을 쏟아 내긴 했지만, 먼저 시작한 건 설이현이다.

그가 갑자기 키스하고 그가 갑자기 제게 [세 번]을 하겠다고 덮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가 제게 그런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다.



‘오기 전에 약을 했었나?’



그럴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설마 그렇게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인간이 약물을 하고 운전대를 잡았겠는가.



‘지금 중요한 게 그건 아니지만…….’



섹스하는 내내 그가 자신에게 쏟아부었던 말들이 간헐적으로 기억이 난다.



[씨발, 돌겠네, 사람 미치게 하네, 죽여 버리고 싶어 한영주.]



어떤 말에도 일말의 애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설이현이 제게 애정을 가지고 섹스를 했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서웠지만 그때의 나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그런 설이현에게 매달리며 좋다고 소리를 질러댔었다.



그런 걸 보면 자신은 정말 속물 중의 속물이 틀림없다.

엄마만큼의 속물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였지만 이틀 전의 일로 그나마 위안거리도 사라졌다.

설주원과 손을 잡고 그런 일을 할 정도로 자신은 속물이었고, 쫓아온 설이현을 무서워하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그와 다섯 번이나 하고 말았다.

도중에 다정(?)하게 라면도 끓여 먹으면서 말이다.



다섯 번이라니.

그때는 미쳤던 게 틀림없다.

두 번까지는 설이현이 주도했었고 세 번째부터는 자신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네 번째였나 다섯 번째였나, 그때는 제 스스로 설이현의 위에 올라타고 엉덩이를 흔들기까지 했었다.



그때는 정말 약을 한 것처럼 미쳐 있었다.

첫 번째 사고는 술과 약 때문이었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두 번째 사고는 핑계도 못 댄다.

그걸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결국 자신은 돈과 쾌락에 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만약, 아주 만약에 설이현이 이곳으로 와서 자신을 끌고 나가 또다시 그런 짓을 한다고 해도 자신은 어쩌면 그에게 다리를 벌리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며 [더]를 외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땐 내가 미쳤었지… 어쩌자고…….’



하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섹스가 원래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건지, 설이현이 잘하는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좋았던 것만은 사실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외모로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남자다, 설이현은.

대단한 배경에, 모두가 부러워하는 재력에, 미친 외모까지 가졌지만 성격은 파탄이 났고 험악하고 사나운 육식 동물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울타리 안에 있을 때가 가장 좋은 상태인 맹견을 보는 기분이랄까, 그렇다.



잘 생기고 멋진 맹견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보는 것이 정석이다.

동물원의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는 울타리라는 안전 책이 있을 때에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것이지 안전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1대 1로 마주하면 그건 자살 행위인 것처럼 말이다.



“차량 주인 곧 올 겁니다.”



경찰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정말 죽겠지? 설주원과 같은 곳에 묻힐까? 그런 인간과 같이 묻히기는 싫은데.’



설주원은 어떻게 죽었을까.

땅에 생매장? 아니면 시멘트가 채워진 드럼통 째로 바다에 빠뜨렸을까? 그것도 아니면 갈아서?



갈아서.



[설주원 그 새끼는 내가 갈아 버렸으니까.]



그렇다. 갈아 버렸다고 했다.

갈려서 어느 산에 뿌려졌을지 모른다.



‘갈리는 건 싫은데…….’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 통할까? 두 번이나 도망쳤는데 용서를 빈다고 그 인간이 용서해 줄까?’



이틀 전에 도망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설이현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처분을 기다렸다면 적어도 갈리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섹스까지 그렇게 해놓고 사람을 갈아 버렸겠는가.

충분히 그럴 인간이지만 그래도 좋으니까 세 번에서 다섯 번으로 늘어난 거고, 다섯 번이나 하면서 내내 제게 키스를 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함께 욕실에서 씻기까지 했으니까, 그 정도면 자신을 죽일 마음은 없는 걸로 봐도 될까.



물론 설이현이 왜 그랬는지, 그냥 충동적인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뭔가 숨겨진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정확히 아는 건 하나도 없지만 적어도 갈아서 죽이거나 생매장할 여자와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다.

이건 순전히 희망 사항이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아직은 일말의 희망이 있다고, 지푸라기를 놓고 싶지 않다.



“저,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이런 상황에서도 화장실은 가고 싶다.



“네, 다녀오세요.”



경찰관이 손으로 가리키는 화장실은 안쪽에 있었다.

절대로 도망치지 못할 곳이다.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하니 경찰관도 그냥 다녀오라고 손짓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리라.






쏴아아아-.



세면대에서 손을 씻은 영주가 거울을 쳐다봤다.

제 꼴은 지금 엉망이다.

가벼운 사고였지만 일단 보닛이 찌그러질 정도였고 에어백까지 터졌었다.

머리카락도 엉망이고, 놀란 나머지 눈물까지 나와서 지금 얼굴도 엉망이다.

목도 뻐근한 느낌이고, 놀란 탓에 근육이 경직되었는지 전신이 조금씩 전부 다 아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일까.



처음부터 죽은 설 회장의 호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뭐라고 말하건 간에 설 회장의 호적에도, 그 집에도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설이현과는 아예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지금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갤러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숨까지 걸 정도는 아니다.

들어서지 말아야 할 영역이 있고 자신은 그 영역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초식 동물은 초식 동물의 영역에서, 육식 동물은 육식 동물의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의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었던 걸까.

육식 동물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항시 목전에 죽음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초식 동물은 결국 잡아먹히고 만다.

자신이 지금 그런 꼴이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미 자신은 먹잇감이 된 건지도 모른다.



‘이젠 모르겠어. 그냥… 그냥 다 포기하고…….’



두 번이나 도망쳤지만 결국 이 꼴이라면 다시 도망친다고 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손을 닦은 영주가 화장실 문을 열다 말고 깜짝 놀라 멈췄다.

문틈 사이로 설이현이 보였다.



‘벌써 왔네. 빠르기도 하다…….’



연락을 받자마자 곧장 왔을까.

이 늦은 시간에?

그룹 회장이 스케줄이 그렇게 없나?

지금이 가장 바쁠 때 아닌가?



잘은 몰라도 막 회장 자리를 이어받은 지금이 가장 바쁠 때라는 것 정도는 영주도 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뉴스에 등장하는 것도 그가 지금 하루를 48시간처럼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빨리 왔다는 건 그만큼 스캔들을 막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옷과 휴대폰을 망가뜨리고 차까지 훔쳐 달아난 자신을 그만큼 빨리 응징하고 싶다는 뜻일까.



‘어떡하지? 나가야 하나?’



영주가 뒤를 돌아봤다.

작은 창문이 전부다.

저 창문으로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통과는 한다고 해도 저 창문을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자신은 운동 신경이 좋지 않다.



‘하아…….’



한숨을 내쉰 영주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한영주.”



화장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설이현이 미간부터 찡그렸다.

그 표정을 보며 문득 영주가 생각했다.

언제부터 이현은 자신을 보며 저렇게 미간을 찡그렸던 걸까.

자신이 적어도 설이현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들 정도의 존재는 된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이상하지만 말이다.



최상위 포식자는 그 발아래를 기어 다니는 벌레는 신경도 쓰지 않는 존재라고 늘 생각했었다.

조금의 시선도 받을 수 없고, 신경 하나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벌레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주는 이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말 한마디 나눈 적이 없다.

눈길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같은 공간에 있다고 여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설이현은 몇 번 정도 갤러리에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영주도 그곳에 같이 있었지만 우연찮게 고개를 들어도 설이현의 시선은 항상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영주의 인식 속에서 설이현은 저와는 절대로 같은 공간에 설 수 없는 존재였고 상위 포식자였으며 다른 차원의 인간이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제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그런 차원의 인간이었었다.



그래서 어쩌면 안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 것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거나, 아니면 그 정도의 위협거리가 되어야만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은 그 정도도 되지 않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변했다.

이제 자신은 설이현이라는 포식자의 수염 정도는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수염 정도를 위협하는 자신을 향해 저 육식 동물은 기어이 이빨을 드러냈다.



설이현이 저를 향해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 위협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신분 상승이긴 하지만 이런 신분 상승을 바란 적은 없다.



그냥 가치 없고 존재감 없는 개미로 살 때가 좋았다.

설이현은 그냥 다른 공간에서 볼 때가 좋았다.

손이 닿지 않는 존재라 여기면서, 그저 동물원 안의 사자를 보듯이, 아니면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초원의 사자를 보듯이 그렇게 자신과 상관없다 생각하며 볼 때가 가장 좋은 존재였다.

그때의 설이현은 적어도 멋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최상위 포식자는 매력이 넘쳐났고, 그 치명적인 매력에 눈길이 저절로 갔던 것이 사실이지만 맨 몸뚱이로 그 앞에 내던져졌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구경하는 입장에서 먹잇감이 될 수 있는 상황으로 내던져지면 멋지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두려움만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금처럼.






“지금 저분께서 차량을 훔친 것이 아니라 오빠분의 차량을 가지고 나온 거라고 하셨는데 확인 부탁드립니다.”



경찰이 이현에게 건네는 말을 들으며 영주가 긴장했다.

이현이 [훔친 것]이라고 한마디만 하면 자신은 유치장에 갇히게 될 거다.



‘아니다. 차라리 유치장에 갇히는 게 더 낫나? 그러면 적어도 죽진 않잖아’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유치장에 들어가면 적어도 설이현의 마수는 피할 수 있다.



“동생 맞습니다.”



그러나 이현이 대답하는 순간 영주의 모든 기대가 와르르 무너졌다.

역시 설이현은 자신을 그의 손으로 처단할 생각인 것이다.



“제가 차를 빌려준 것도 사실입니다. 사고는 제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전화를 받지 않아서 염려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얼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저런 말을 하는 설이현이라니.

염려. 염려라는 단어가 저 남자와 어울리기나 하나?

그때였다.



“안 다쳤어?”



뜻밖의 다정한 목소리에 영주가 깜짝 놀랐다.

이건 정말 깜짝 놀라야만 하는 사건이다.

설이현이라는 인간을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든 시간을 통틀어서 설이현이 제게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건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맹세코 지금이 처음이다.



‘뭐지? 대외용인가? 그럴 수도. 지금은 보는 사람도 많고 저기에 CCTV도 있으니까…….’



그렇다.

저건 대외용 다정함이다.

양자 입양으로 생긴 여동생이 유산 분쟁 중에 차를 훔쳐 갔기 때문에 성질을 냈다,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는 건 바라지 않을 테니까 최대한 다정한 오빠인 척 포장을 할 생각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저렇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리라.

저 설이현이, 저 포식자가 자신을 저렇게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그러니까, 그게… 차가 좀 많이 망가져서…….”

“차는 걱정하지 마.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으니까, 그보다 다치진 않았어? 병원에는 가 봤어?”

“아직…….”

“병원부터 가자.”



이현이 영주의 손을 잡았다.



‘미쳤나?’



하지만 그 손을 뿌리칠 수도 없다.

어쨌든 자기 입으로 오빠 동생이라고 해놨으니 말이다.



“이제 가 봐도 됩니까? 동생을 병원으로 데려가 봐야 해서 말입니다.”

“아, 네. 여기에 사인하시고 가 보셔도 됩니다.”



경찰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하는 순간까지도 이현은 영주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정말 동생이라도 된 것인 양 말이다.





***






“타.”

“손을 놓아줘야 타지요.”



그때까지 제 손을 잡고 있는 이현의 손을 쳐다보며 영주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망치는 것을 워낙 잘하니.”



혀를 차며 이현이 그제야 손을 놓아 줬다.

그러면서도 뒤에서 버티고 서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도주를 막는 것처럼 보였다.



‘못 믿겠다 그거지.’



영주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사고로 망가뜨린 스포츠카와는 달리 이번에는 얌전하게 생긴 세단이다.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이현이 운전석에 타자마자 영주가 사과부터 했다.



“병원부터 가고 난 후에 말해.”

“벼, 병원이요?”



정말 병원에 가려는 걸까?

대외용이 아니라 정말 병원에 데려가려는 걸까? 왜?



“저, 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구요, 차가 망가진 것이나 그때 그렇게 도망친 것은…….”

“에어백이 터질 정도로 사고가 났는데 괜찮다는 게 말이나 돼? 나중에 골병들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병원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진료 준비해 놓으라고 했으니까 서울로 곧장 가서 검사부터 받아 봐.”

“그냥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가도 되는데…….”



서울까지 갈 일은 아니다.

목과 어깨가 뻐근하긴 하지만 부러진 것도 아닌데 굳이 서울 큰 병원, 아마도 설이현의 주치의가 있는 병원까지 갈 일은 절대로 아니다.



“입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해.”

“네…….”



결국 영주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10분 정도 대화 없이 운전만 하는 남자를 영주가 힐끗 쳐다봤다.

표정은 싸늘하게 굳은 것이 경찰서에서 본 다정함은 역시 찾아볼 수가 없다.



“저는 정말 몰랐어요. 그건 진심이에요. 

설 사장님께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고, 그날 도망친 것은 그냥 너무 무서워서 그런 거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도망을 치느라 그렇게밖에는 못했습니다. 그 일은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그때 망가뜨린 휴대폰이나 그런 것은 변상…….”



설이현이 그런 것을 변상 받을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예의상 변상을 입에 담기는 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 영주는 조금, 아주 조금 긴장이 풀렸다.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게 한다는 것은 적어도 죽일 생각은 없다는 뜻이니까.

죽일 사람을 왜 검사를 받게 하겠는가.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은 어쩌면 피한 건지도 모른다.



‘차는 보험을 들었겠지? 그렇게 비싼 차니까…….’

“왜 도망친 건지 그것부터 설명해 봐.”



그야, 무서웠으니까.

아주 간단명료한 정답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면 화를 낼 게 분명하다.



“설 사장님이 어떻게 되신 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제가 처한 상황이 무섭기도 하고, 일단은 도망치자는 생각밖에는 없어서…….”

“그래서 두 번이나 도망쳤다는 거야?”

“네…….”

“내가.”



이현이 뭐라 말하려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설이현이 한숨을 쉬는 것을 영주는 처음 봤다.

이 남자도 한숨을 쉬는구나.



“그날 내가 방에 가 있으라고 했었지. 설주원부터 처리한 다음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풀어 나갈 계획을 설명할 수 있으니까 방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도망쳤어. 그렇지?”

“그야 엄청 화가 나셔서…….”

“그래. 그날은 내가 화를 냈다 치고. 이틀 전에는? 그때도 내가 화를 내서 도망쳤어? 그때 난 화낸 기억이 없는데?”

있어요. 있다고. 화를 냈으면서 기억에 없다고 하면 단가?



그때 분명히 갈아 버린다, 찢어 버린다, 죽여 버린다, 씨발, 막 이런 말을 했으면서 화를 낸 기억이 없다고?

그 기억은 필요할 때면 사라지는 기억인가?



“화… 내셨어요…….”



개미만 한 목소리로 그래도 영주가 기어이 대답을 했다.



“뭐?”



목소리가 사나워진다.



“화… 내셨다구요… 그때…….”

“내가 언제.”

“무섭게 막 화를 내시고…….”

“화낸 적 없어.”

“지금처럼 화를 내셨는데…….”

“나 지금 화난 거 아니야.”



화났는데?



“화는 내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원래 이래, 말투가.”



그건 알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화가 났는데?



“화나신 거 알고 있어요.”

“화 안 났다니까.”

“왜 화를 안 내세요? 제가 도망치고 폰도 망가뜨리고 옷도 망가뜨리고 지갑에서 카드와 현금도 빼오고 차도 망가뜨렸는데…….”



자기 입으로 열거해 보니 자신이 정말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설이현이 아니라 자신이 악당처럼 느껴지는 이 일말의 일들은 대체 뭘까.



‘내가 더 나빴던 건 맞잖아… 그렇지.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내가 더 나쁘지…….’



감정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정말 나빴다.

설이현이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는 조금 격한 말과 집에서 나가라는 위협 그게 전부였지만 자신은 그를 속여 이상한 사진을 찍히게 만들려고 했다.

그걸로 협박하는데 동참하려고 했다. 


그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그의 차를 훔쳐서 망가뜨리고, 그의 신용 카드를 잘라서 버리고, 현금을 지갑에서 강탈했다. 

거기에 휴대폰을 망가뜨렸으며, 옷까지 전부 적셨다.



그날 아마 설이현은 입을 옷이 없어서 무척이나 곤란했을 것이다.

곤란하라고 한 짓이기도 하고.



이렇게 늘어놓고 보면 자신이 진짜 악당이지 설이현은 악당도 아니다.

포식자라고 해서 항상 악당인 것은 아니다.

가끔은 포식자의 먹이밖에 되지 못하는 사슴이나 토끼가 악당이 될 수도 있다.

자신처럼 말이다.



“그 정도로는 화 안 내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도망치지나 마.”



영주가 이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여전히 차갑고 사나운 얼굴이다.

화가 나지 않았다고 하는 남자는 원래 자신의 말투가 그렇다고 한다.



그럴 수도 있다.

사자는 사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미 충분히 무서운 것처럼 이 남자는 그냥 무섭게 생긴 걸 수도 있다.

무서운 목소리에 무서운 모습, 남들을 압도하는 포식자로서의 박력. 그런 것에 자신이 지레 눌려서 그가 화났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화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왜 화를 안 내는 걸까?

마음이 넓은 것도 아니면서?



“화를 내시는 편이 더 좋은데…….”

“내가 진짜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아, 아니요.”

“그러면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화나면 그때는 감당 못 할 테니까.”

“그런데 정말 왜 화를 안 내시는 건지…….”

“내가 왜 화를 내야 하는 건데?”

“제가 한 짓이…….”

“열이 받기는 했지만 화낼 정도는 아니었어. 창피? 당할 수 있지. 하지만 그 정도로는 화 안 내.”



나는 자비롭다, 뭐 그런 건가?



“화가 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쫓아온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화가 안 났다고?

그런데 왜 그렇게 죽자 살자 쫓아왔을까?

아주 기를 쓰고 쫓아왔는데 그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고?



“혹시 제가 또 다른 영상 사본이나 원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저는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없는 거 알아.”

“그러면 대체 왜…….”

“네가 있어야 입양 무효 소송도 끝낼 수 있고 호적도 정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일단 너저분하게 깔린 관계는 해결해야지.”



그게 있었다.

호적.

입양.

유산.



“저 유산은 이제 관심 없어요. 정말이에요. 이제 갤러리도 관심 없고 유산도 관심 없고, 지방 갤러리에 이력서를 내놓은 것도 통과되어서…….”



물론 면접 날짜에 가지 못해서 물 건너간 취업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또 찾아올 거다.

죽은 설 회장의 유산이 없이도 자신은 살아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리고 엄마도 이젠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그걸 잊고 있었네요. 죄송합니다. 호적 정리가 빨리 되어야 하는데…….”

“당연히 빨리 처리되어야지.”



그래야 남남이 되지.

아무리 이 남자라도 아마 호적에 피도 안 섞인 자신이 올라 있는 것이 신경 쓰일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 오점이 남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추방, 그러니까 그의 영역에서 추방하려고 자신에게 이렇게 집요한 것이라면, [용서]가 전제가 된다면 자신은 깔끔하게 영역 밖으로 사라져 줄 수 있다.

기꺼운 마음으로 말이다.



“그래야 약혼을 할 수 있으니까. 일단 근친 소리는 피해야 하잖아?”



그렇지. 그래야 기꺼운 마음으로 약혼도 하고… 응? 약혼? 무슨 약혼?



“네?”



놀란 영주가 이현을 쳐다봤다.

이현의 표정은 미동이 없다.

놀란 것은 영주뿐이다.



영주는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약혼이라니.



“혹시 약혼하세요? 그래서 주변 정리가 빨리 필요하다든가…….”



그런데 약혼을 할 인간이 왜 저를 덮친 걸까.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죽은 설 회장의 피를 이어받아 역시 아랫도리 간수가 힘든 타입인 걸까?



“한영주.”

“네?”

“너하고 내가 약혼하는 거야.”

“네?”



끼이익-.

그때 차가 멈췄다.

이현이 브레이크를 밟은 것이다.



“귀가 먹었어? 너하고 내가 약혼할 거라고. 약혼 몰라? 결혼 전에 하는 거.”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하고 하시는 건가요?”

“같이 잤잖아.”

“같이 자면 무조건 약혼하고 그러시는 성격이세요?”



같이 잔 건 맞다.

그것도 두 번이나 같이 잤다.

한 번은 영주 자신이 덮쳐서, 한 번은 설이현이 덮쳐서.

그래서?

설이현은 같이 잔 여자와는 약혼을 해야 할 정도로 책임감이 투철한 남자인 걸까?



“아무나 하고 약혼할 생각 없어.”

“그런데 왜 저하고 약혼을 할 생각을…….”

“아무나가 아니니까.”

“네?”

“아무나가 아니라고, 한영주.”

“하지만…….”

“넌 내가 전부터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지? 둔해 빠져서.”



보고 있었다고?

그런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뜻인가?

관심이 있는데 왜 처음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런 식으로 협박해서 내쫓은 걸까.



“하지만 그때 막 그림도 찢고 화를 내면서 나가라고…….”

“눈앞에 왔다 갔다 하면 안아 버리고 싶어지니까 그랬어.”

“…….”



“계속 옆에 두고 싶은데 영감탱이가 멋대로 호적에 올려 버렸잖아. 

난 동생 설영주가 아니라 내가 바라볼 수 있는 한영주를 원했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한영주가 설영주가 되어 버렸으니까 내가 화가 안 나?”



“그런 거라면…….”

“그런 집구석에 들어와 봤자 좋을 일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더 어울리는 곳에 있기를 바랬어. 

그 갤러리 같은 곳. 거기 있어야 한영주가 빛나니까.”


“…….”


영주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설마 날 놀리나? 하지만 놀릴 이유가 없잖아.’



뭘까?

설이현이 왜 이러는 걸까.



‘설마 날 좋아한다는 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뭔가 만남이 있어야 좋은 마음이 싹트기라도 하지, 갤러리에서 말 한 번 걸지 않았으면서…….’



하지만 설이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설을 대입하면 지금까지 풀리지 않았던 방정식이 풀린다.

자신의 꿈을 꿨다는 것이나, 꿈인 줄 알고 자신과 약 기운에 섹스를 했다거나. 자신을 그 바닷가 마을까지 기어이 찾아와서 갑자기 섹스를 다섯 번이나 했다거나. 바로 데려가지 않고 자신을 품고 잠까지 잤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이 전부 이해가 된다.

설이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설을 배경으로 깔면 모든 것이 이해가 간다.



“혹시…….”



영주가 바짝 긴장하며 물었다.



“저 좋아하세요?”



포식자가.

그것도 최상위의 육식 동물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왜? 안 돼?”



돌아오는 대답이 좀 이상하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널 좋아한다 치고, 너는 어떤지 말해 봐.”

“네?”

“너도 날 좋아하냐고.”



그럴 리가요.

아니, 미치지 않고서야 육식 동물을 좋아하는 초식 동물은 없다.



‘하지만 안 좋아한다고 하면… 안 되겠지?’



짧은 순간 영주가 열심히 생각했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설이현은 분명 더 사나워질 거다.

태어나서 거절이라는 걸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남자가 거절을 당하면 어떻게 돌변할까.

미친 사이코가 될 수도 있다.

설이현은 충분히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당장 약혼하고 결혼하자고 하겠지?

설이현과 결혼?

죽은 설 회장의 호적에 양녀로 들어갔다가 그 아들 설이현과 결혼으로 엔딩?



막장 중의 대 막장이다.

아마 희대의 스캔들이 되지 않을까.

그 스캔들과 세간의 관심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까.

결정적으로 설이현과 정말 평생 같이 살 수 있을까.



‘잘 생각해야 해. 결혼하고 나중에 정 못 살겠으면 이혼도 있잖아. 명색이 SC그룹 회장이 이혼하면서 그냥 하겠어? 위자료가…….’



이런 때조차 버리지 못한 속물근성이 올라온다.



‘내가 손해 보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같이 자기도 했고…….’



설이현과 두 번이나 같이 잤다.

그런데 그 두 번 모두 기분이 좋았다.

특히 두 번째의 섹스는 자신도 거의 미쳐 버렸었다.

남편으로 설이현은 거의 완벽하다.

이런 완벽한 남자를 또 만날 기회가 있을까.



‘좋아한다고 해야겠지?’



그때였다.



“안 좋아해도 좋아한다고 해.”

“네?”



속마음을 들켰나 싶었다.



‘내 얼굴에 전부 드러났나?’



영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지금은 안 좋아해도, 나중에는 좋아하게 될 거니까 일단 좋아한다고 거짓말이나 좀 해.”



아니,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에서 샘솟는 걸까.

이 역시 천적이 없는 최상위의 포식자이기에 가능한 자신감일 수도 있다.



“거짓말도 괜찮으니까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끝까지 안 좋아지면요?”



솔직한 심정이 나오고 말았다.

돈도 좋고 위자료도 좋고 다 좋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 남자에게 정말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중에 가서 시간을 버렸다. 괜히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면 어떡하시려구요?”

“손해를 봐도 내가 보니까 상관없어. 네가 손해 볼 건 없잖아.”



그렇긴 하다.



“중간에 제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요?”

“그 새끼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농담이겠지만 진담처럼 들리는 이유가 뭘까.



“농담이야.”



아니요, 진담처럼 들렸어요.



“진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곱게 보내 줄게.”



아니,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는 남자가 왜 이러는 걸까.

갑자기 신데렐라에 꽂히기라도 한 걸까?

그러기에는 자신은 그의 아버지의 정부의 딸이다.

속물 그 자체인 엄마도 알고 있고 그 딸인 자신이 저지른 짓도 이미 충분히 당해 본 남자가 대체 왜 이럴까.



“호적부터 정리하고 나서 생각해 볼게요.”



그래, 아직 호적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약혼이나 결혼은 아직 이르다.

천천히 생각해 봐도 늦지는 않다.



“병원부터 가자.”



이현이 다시 차를 움직이자 영주가 얌전히 앞을 주시했다.

그러나 자꾸만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앞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남자의 옆모습을 힐끔거리며 영주가 내내 생각했다.

저 남자와 자신에 대해서.

포식자와 피식자에 대해서.

저 남자가 지금까지 해 왔던 언행들에 대해서.



“그런데 설 사장님은…….”

“갈아 버렸다고 했잖아.”

“…….”

그러니까 무서운


거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갈아 버렸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이라는 걸 이 남자는 정말 모르는 걸까?



“가, 갈아서 어떻게 했는지…….”

“대체 설주원 그 새끼에 대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그래?”



설주원의 이름만 나오면 설이현의 목소리와 표정이 날이 선다.



‘설마…….’



영주는 둔감하다는 말은 거의 들어 본 적이 없다.

단 하나, 연애에 대해서는 둔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질투인가? 설주원을 질투하나?’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지만 설마 설이현이 설주원을 질투하는 것일까?

그래서 설주원의 이름만 나오면 저런 식으로 날이 서서 화를 내는 걸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죽었을까 봐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고 해도 죽는 건 좀…….”



일부러 [나쁜]에 힘을 줬다.



“나쁜 놈이지만 죽이지는 않았어.”



봐라. 바로 설이현의 목소리가 풀어진다.

역시 그랬던 것이다.



“정말 나쁜 사람인 것 같아요, 설 사장님은요.”

“개새끼야. 그놈은.”

“맞아요.”

“상종 못할 놈이지.”

“저도 딱 질색이었어요.”

“두 번 다시 볼 일 없게 만들었으니까 안심해.”

“다행이네요.”



이 정도까지 오자 이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떠오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때 영주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육식 동물은, 순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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