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환관 상열지사 2 - 혼인하다
뜻밖에도 혼례는 조촐하게 치러졌다.
혼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혼인을 하는 것이라면 응당 화려한 혼례를 올려서 모두에게 떠들썩하게 보여 주기 마련인데, 여희의 혼례는 정말 조용히 치러졌다.
대례복을 입고 족두리도 쓰고 연지곤지 찍은 것까지는 여느 혼례와 똑같지만, 마당에 멍석이 깔리지는 않았다.
부친에게 절을 올리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마에 오르는 것으로 여희의 혼례는 끝이 났다.
일생일대 단 한 번밖에 없는 혼례가 절 한 번 올리는 것으로 끝나 버렸지만, 여희는 차라리 그게 다행이었다.
남들에게 ‘저 내시에게 시집가요!’라고 떠들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부친도 그것을 기뻐했다.
양반 체면에 딸을 내시에게 시집을 보낸다는 것이 아마 부친은 조금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딸이 걱정이라서가 아니라 양반 체면 때문에 말이다.
도성 외곽에서 도성 중심으로 가마를 타고 가며 여희는 새삼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가마가 향하는 곳은 북촌이다.
북촌. 권문세도가들이 모여 산다는 곳이다.
권문세도가가 아니면 올 일이 없는 곳이고 살 일이 없는 곳이다.
이곳은 돈이 많다고 해서 집을 구할 수 있는 그런 동네가 아니다.
돈만 많은 장사꾼들이 이 북촌에 집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다는 소리는 여희도 알고 있다.
일부러 권문세도가와 연을 맺어 보려고 이 북촌에 집을 구하려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양반들이 집을 내놓을 리가 없고, 아주 가끔 희귀하게 집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팔리는 탓에 이 북촌에 사는 양반들은 거의 붙박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 북촌에 김수윤 대감이라는 환관의 집이 있다.
‘내가 북촌에 살게 된다니.’
환관의 처를 환처라고 부른다고 했다.
혼담이 들어오고 나서 여희는 이것저것을 알아봤다.
물론 환관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는 환관이라는 이들에 대해 새끼손가락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니 관심을 가져야 한다.
환관은 일단 두 종류로 나뉜다.
장번 내시와 출입번 내시가 있는데, 출입번 내시는 교대로 시간을 정해 궁궐에 출퇴근하는 내시로 주로 아침에 입궐해서 저녁에 퇴궐하는 일반 관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장번 내시는 출퇴근이 따로 없이 거의 궁궐에서 살다시피 하는 직위다.
임금을 보좌하는 일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궐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이번에 여희가 혼인하는 김수윤 대감이 바로 이 장번 내시다.
그중에서도 대전 상선이라고 했다.
상선은 정2품의 위치로 대감이라고 불린다.
육조의 판서들이나 대제학 정도가 되어야 정2품이다.
품계로만 치면 엄청나게 높은 품계에 임금의 가장 측근이니 그 권력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니까 과거에 낙방한 오라비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시골 현감 자리도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돈이야 당연히 넘칠 것이다.
그 정도 권세 있는 환관이니 줄을 대길 원하는 양반들이 온종일 들락거리며 뒷돈을 얼마나 대겠는가.
‘일단 집에는 거의 없겠지? 장번 환관이니까 궁궐에서 살 거 아냐. 그러면 나는 그냥 혼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면 되는 건가?’
장번 내시는 보통 궐에서 열흘에 두어 번 정도 나온다고 들었다.
그러면 한 달이라고 해 봤자 많아야 일곱, 여덟 번 정도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서로 크게 부딪치는 것도 없고 그냥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여희가 했다.
‘친구 비슷하게 되는 걸까?’
나이가 아홉 살 차이니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겼을까? 정말 수염이 없을까?’
수염은 양반의 자존심이다.
양반은 수염을 자르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 스물다섯 살 된 여희의 오라비도 코 밑과 턱 밑에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그게 보기에 꼭 좋지는 않다.
인물이 잘나야 수염도 보기 좋지, 좋지 않은 인물에 수염은 정말 최악이다.
‘내시라면 수염은 없겠네. 나중에 양자를 들이려나? 귀여운 아이로 양자를 들이면 좋겠다. 말벗 삼아서 살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마가 슬슬 멈추는가 싶더니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마가 덜컹거렸다.
‘도착했나?’
드디어 김수윤 대감의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님.”
가마에서 내린 여희가 제일 먼저 들은 말은 ‘마님’이었다. 마님.
‘마님? 기분이 이상한데?’
마님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괜히 묘해졌다.
정말 대단한 실세 권세가의 집에 시집온 것이 실감이 난다고나 할까.
“안채로 모시겠습니다, 마님.”
여희를 반겨 준 여자는 이 집의 하녀인 것처럼 보였다.
나이는 여희보다 열 살 정도가 많아 보였고, 인상이 무척이나 다정해 보이는 여자였다.
“대감마님께서는 오늘 일직이시라 밤이 깊어야 돌아오실 겁니다.”
“.”
아니, 혼례를 올리는 날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대체 이 혼인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혼인은 그 사내에게 있어서 그냥 형식적인 것일까.
‘나는 그냥 장식품 정도일까? 뭐, 그래봤자 밥걱정 안 하고 살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혼담이 들어오고 오늘까지 여희는 꽤 많은 생각을 했다. 환관의 아내가 되어서 뭘 하고 지낼까, 주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자.’였다.
그동안은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서 못 하고, 시간이 없어서 못 하고, 여건이 되지 않아 못 했다.
6년 동안 집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여희는 정말 조금도 쉬지 못했다.
게으르고 대책 없는 아버지와 오라비를 두면 그렇게 된다.
정말 작은 집이지만, 일은 뭐가 그리 많은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어 본 기억이 없다.
마음고생은 더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다.
원래 출가외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혼담이 들어올 때 받았던 쌀 수레 외에 비단과 무명 그리고 은전을 예물로 받았다.
지참금인지 몸값인지 예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잔뜩 받았으니 아마 당분간 부친과 오라비는 걱정 없을 것이다.
‘이젠 알아서들 하라고 하자.’
이제 친정에는 신경을 끊고 살되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어머니는 따로 모실 계획을 여희는 이미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혼자라서 외롭다는 이유로 김수윤 대감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고 싶다고 말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어차피 집에도 없는 사내 아닌가. 그러니까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지.
“마님, 들어가서 쉬시지요.”
하녀의 말을 들으며 여희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앞으로 자신이 살 방을 둘러보며 여희가 입을 벌렸다.
누우면 머리와 발이 벽과 벽에 딱 붙는 한 뼘짜리 작은 자신의 방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방이 넓을 수가 있을까.’
여기서는 굴러다녀도 된다. 물론 굴러다닐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안채까지 오는 동안 곁을 슬쩍슬쩍 보니 집이 어지간히 넓은 것이 아니다.
정말 아흔아홉 칸짜리 기와집이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까지 누가 산다고 이렇게 크게 지은 것일까.
‘지금까지는 혼자 살았겠지.’
이 넓은 집에 혼자 살면 어떤 기분일까.
족두리를 쓴 채로 앉아 여희가 괜히 손으로 책상을 한 번 쓰윽 만져 봤다.
책상의 나무가 결이 좋다.
책상 위에는 붓과 벼루, 먹 그리고 종이도 있었다.
모든 것이 단정하게 갖춰져 있고, 병풍에는 우아한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고상하게 꾸민 방이었다.
‘좋구나.’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는 조부가 시골 현감을 지냈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태어나 보니 지지리 가난한 집에, 양반이라는 자존심 하나만 남아 있었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무능하고 유일하게 어머니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계셨다.
어린 눈에도 어머니는 무척이나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 어머니처럼 의연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지만, 최근 6년 동안 그 책임감에 너무 과하게 짓눌려서 이제는 책임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리고 지금이 그 좋은 기회다.
“술이네.”
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소반 위에는 합환주로 보이는 술병과 술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술은 한 번도 안 마셔 봤는데.”
소반 위에 술잔은 두 개다.
그런데 정작 이걸 마시고 초야를 치러야 하는 신랑은 아직 궐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니, 참 희한한 혼인이 아닐 수 없다.
“살짝만 마셔 볼까? 목도 마른데.”
술병을 기울여 작은 술잔에 술을 채운 다음 살며시 입술에 머금어 보니 향이 아주 좋다.
“술이라는 것이 이렇게 다 향이 좋나?”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으니 원래 이렇게 향이 좋은 건지 어떤 건지 알 수가 없다.
살짝 혀끝을 대고 마셔 보자 과일의 단맛이 풍겼다.
“맛있잖아.”
달콤하고 향긋하다.
먹어 본 적이 없는 과일이 생각나는 단맛에 한 잔을 전부 마신 여희가 한 잔을 더 따라서 그마저도 쭈욱 들이켰다.
“계속 족두리를 쓰고 있어야 하나?”
술기운이 들어가자 슬슬 몸이 불편해졌다.
입고 있는 대례복은 너무 거추장스럽고, 족두리도 벗고 싶었다.
처음으로 해 본 화장은 계속 얼굴을 간지럽게 했다.
분을 바른 얼굴이 가렵고 연지를 바른 입술은 끈적거린다.
혼례가 한 번이니 망정이지 두 번이라면 정말 곤란할 뻔했다.
‘옷고름은 신랑이 풀어 줘야 하는 건데. 혼자 풀어도 되나?’
여희가 슬쩍 제 옷고름을 쳐다봤다.
이걸 혼자 풀어도 될까?
“그랬다가 밤에 그 대감이 돌아와서 혼자 옷고름을 풀었다고 노발대발해서 혼인을 무르면 어떻게 하지?”
예물로 받은 비단과 무명을 아버지와 오라비가 벌써 일부 써 버렸다는 것을 여희도 안다.
혼인을 무르면 그것도 돌려줘야 하는데, 이미 써 버린 것을 채워 놓을 길이 없다.
‘풀지 말아야겠다.’
그래,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 것이 낫다.
결정을 내린 여희는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 봤자 인정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돌아오겠지.
설마 그 후에 돌아오겠는가. 통금도 있는데 말이다.
슬슬 여희의 눈이 감겼다. 오늘 아침 너무 일찍 눈을 떴기 때문이다.
어제 늦게 잠든 다음에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며 이것저것 정돈하고 챙겨 놓기 위해서였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꾸벅꾸벅.
여희의 고개가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족두리를 머리에 쓴 채로 고개가 툭툭 떨어지며 여희는 꾸벅꾸벅 졸았다.
무거워 보이는 대례복을 입은 채로 잠든 여희가 머리에 쓰고 있는 족두리의 장식이 여희의 꾸벅거림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등을 든 하인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단령을 입은 사내가 따라 들어왔다.
남색의 단령을 철릭 위에 덧입고 갓을 쓴 사내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녀를 쳐다봤다.
“마님께서는 안채에 계십니다.”
“저녁은 드셨소?”
이 사내의 이름은 김수윤, 정2품의 대전 장번 내시였다.
키가 훌쩍 크고 넓은 어깨가 벌어져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내시가 아니라 무관으로 착각할 정도의 체격을 갖춘 사내였다.
목소리는 묵직하고 이목구비는 시원스럽게 생긴 미남자인 이 사내는 올해로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었다.
“편히 쉬시라고 말씀드렸소?”
“아무리 그래도 오늘이 혼례일인데 대감마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은 상태에서 편히 쉬신다는 것은 마님께도 흠이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하녀는 공손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런가?”
“네, 대감마님. 여인에게 있어서 초야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니까요.”
“누님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겠지.”
김수윤은 그와 비슷한 서른 살 정도가 되어 보이는 하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피식 웃었다.
어지간한 양반도 오르기 힘든 정2품의 벼슬에 있는 사내가 집안에서 일하는 하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어떤 것 같소? 누님 보기에는?”
“똑 부러지게 생긴 아가씨였습니다.”
“성격이 착한 것처럼 보였소?”
“착하겠지요. 원래 딸은 그 모친을 닮는다 하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며느리를 얻을 때면 그 친정어머니를 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아주머니께서 좋은 분이셨으니 그 딸도 그 성품을 닮았다면 착하겠지?”
“그렇고 말고요. 신부를 아주 잘 고르셨습니다, 대감마님.”
“그녀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해야지. 내시에게 시집왔다고 울고불고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의미심장하게 웃는 하녀에게 김수윤이 ‘쉿.’ 하고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고 표시했다.
충분히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수윤이 신방이 차려진 안채로 들어섰을 때 여희는 잠들어 있었다.
족두리를 쓴 채로 이불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잠이 든 여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수윤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쓰고 있던 갓을 풀었다.
쓰윽 쳐다본 소반 위에 술잔 두 개 중 하나에는 술이 조금 남아 있다.
아무래도 혼자 술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술병을 들어 흔들어 보자 찰랑거리는 소리가 아주 가볍다.
“많이도 마셨군. 술주정뱅이 같으니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수윤의 눈은 웃고 있었다.
“어디 보자, 어떻게 생겼나.”
수윤이 잠든 여희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봤다.
뽀얀 분을 바르고 입술에 연지를 찍은 채로 잠이 든 여희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수윤이 피식 웃었다.
“분은 바르지 않는 편이 더 낫겠군.”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여희의 머리에 얹어진 족두리를 벗겨 줬다.
그다음부터 수윤은 꽤 바빴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대례복을 벗기는 것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고 힘이 들었다.
대체 몇 겹이나 껴입은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옷고름은 왜 이렇게 많은지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었다.
결국 전부 벗기고 속옷만 남긴 채로 축 늘어진 여희를 금침 위에 단정하게 눕히고 그 위로 이불까지 덮어 줬다
.
“굳이 보답하고 싶으시다면, 제 딸과 혼인해 주시면 됩니다.”
수윤은 오늘 여희를 처음 봤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처녀에게 혼담을 넣은 이유는 간단하다. 은혜를 갚기 위해서다.
수윤은 석 달 전에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을 뻔했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뜻밖의 여인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그 여인이 바로 이 처녀 송여희의 어머니다.
덕분에 구사일생하여 은혜를 갚으려고 뭐든지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니 그 여인이 꺼낸 것이 바로 이 혼인이었다.
자기 딸이 혼기가 찼지만, 집이 가난하여 혼담이 들어오지 않으니 부디 딸을 아내로 맞이해 달라고 간청해 오는 것을 거절하지 못했다.
수윤은 원래 평생 장가들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일이 바빠서 궐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있고, 집안일은 누이처럼 여기는 이가 도맡아서 해 주고 있으니 딱히 아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환관이 처를 얻었다고 하면 괜한 구설에 오르기 쉬워서 혼인할 생각은 없었는데, 생명의 은인이 그리 부탁하니 거절하는 것이 어려워 그 딸에게 혼담을 넣긴 했다.
어차피 이 처녀는 자신을 환관으로 알고 있으니 따로 밤일이나 그런 것은 하지 않아도 되고, 장번 내시인 것을 알고 혼인을 받아들였으니 집을 많이 비워도 이해해 주리라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 혼인이다.
주위에 다른 내시들이 환처를 들이는 경우를 수윤은 많이 봤다.
그러나 자신이 환처를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과실주라서 입에 맞았나 보군.”
이 합환주는 임금이 친히 내린 어주다.
수윤이 환처를 들인다고 하니 임금이 무척이나 기뻐했다.
원하면 몇 달 정도 휴가도 주겠다고 했다.
그만큼 임금은 수윤을 아낀다.
임금이 보위에 오를 때 수윤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까닭이다.
수윤이 아니었다면 임금은 용상에 오르기는커녕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참 이상해서, 수윤 자신이 임금의 목숨을 구하고 용상에 오르는 것을 도와서 지금의 자리와 권세를 누리는 것처럼, 송여희의 모친은 수윤의 목숨을 구하고 수윤은 그녀의 딸을 처로 맞이했다.
돌고 도는 은혜 갚기라는 것일까?
“겨우 반 잔만 남겨 놓다니. 무정한 신부로구먼.”
수윤이 웃으면서 술잔에 겨우 절반밖에 차지 않는 술을 한입에 털어놓은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윤이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은 반 잔이면 족하다. 하지만 이 무정한 신부는 술병 하나를 거의 혼자서 비웠다.
“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하나.”
수윤이 입고 있던 단령을 벗고 철릭까지 벗었다. 그리고 바지를 벗으려다 말고 손을 멈췄다.
바지를 벗으면 고의밖에 남지 않는다.
고의만 입고 처녀 옆에서 잘 수는 없다.
결국 바지를 입은 채로 수윤이 쿨쿨 잘도 자고 있는 여희의 곁에 누웠다.
나란히 놓인 베개를 베고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자니 곁에서 여희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참.”
누군가와 함께 자는 기분이 묘하다. 너무 오래 혼자 잠들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오래전에는 식구들과 작은 방에 옹기종기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 무척이나 어렸을 때였다.
“통성명과 인사는 내일 아침에 해야 하겠군.”
내일은 입궐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명색이 혼례이고 초야인데, 내일 입궐을 하겠다고? 그렇게 하기만 하면 당장 의금부에 하옥을 해 버릴 것이니 사흘 동안은 궐에 얼씬도 하지 마라.”
내일도 원래대로 입궐을 하겠다고 고해 올렸더니 임금이 노해서 소리까지 지르며 내쫓아 버렸다.
결국 수윤은 강제로 사흘 동안은 집에서 쉬어야 한다.
뜻밖의 휴가다. 이런 일이 아니면 수윤은 쉬는 법을 모른다.
딱히 일이 너무 좋아서 쉬는 법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궐에서 일하는 쪽을 택하는 것뿐이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다.
누이처럼 여기는 이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고 아이도 있다.
그녀의 시간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집에 있으면 혼자이지만, 궐에 들어가면 임금이 있고 다른 이들이 있다.
그것이 수윤이 일벌레가 된 이유다.
일하는 것 외에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취미도 딱히 없고, 취미를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불 안이 뜨끈뜨끈하군.’
누군가와 이불을 함께 덮어서 좋은 것은 이불 안이 무척이나 따뜻하다는 것이다.
방에 아무리 군불을 많이 지펴도 한겨울에 이불을 덮고 있으면 도무지 이불 안이 따뜻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군불을 뜨겁게 지피지 않아도 누군가와 함께 이불을 덮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따뜻해지는 것이 신기하다.
결국에는 아무리 뜨거운 불도 사람의 온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이런 것도 좋긴 하구나.’
만족스럽게 웃으며 수윤이 눈을 감았다.
“으음.”
수윤이 몸을 뒤척였다.
원래 수윤은 깊게 잠이 들지 않는다. 열 살 이후에는 한 번도 깊게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이 들어도 늘 한쪽 귀를 열어 뒀다.
그런데 오늘은 푹 잠이 들어 버렸다. 이불 안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일까.
“으음.”
‘목이 마르군.’
이불 안이 더웠던 까닭에 역작용으로 목이 말라 잠이 깬 수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소반 위의 술병이었다.
저 술병은 비었다.
게다가 목이 마르다고 술을 마실 수는 없다.
‘물을 가지러.’
자리끼를 마련해 두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수윤이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누구와?
송여희와 눈이 마주쳤다.
송여희는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얼어붙은 것은 송여희도 수윤과 마찬가지였다.
“저어, 그러니까.”
아직 통성명도 전이다. 처음 만났다고, 앞으로 잘해 보자고 인사도 못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의관을 정제하고 인사를 나누려고 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이렇게 안면을 트게 되었다.
수윤은 상투가 살짝 흐트러진 채였는데 차라리 그건 좀 나았다.
왜냐하면 지금 송여희는, 요강 위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속치마를 살짝 걷고 요강 위에 앉은 채로 송여희가 눈을 깜빡거렸다.
쪼르르륵.
아주 작은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텅 비어 있던 요강 안으로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여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꺄아아아악!”
여희가 비명을 지르며 속치마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요강에서 일어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아아아악! 꺄아악!”
강도를 만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여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덕분에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수윤은 밤중에 들어온 강도처럼 놀라 문을 열고 자리를 피해 줘야만 했다.
그리하여 대전 장번 내시 김수윤이 혼인 첫날밤에 때아닌 소박을 맞은 것이다.
문밖으로 알아서 쫓겨나는 소박 말이다.
문밖으로 알아서 쫓겨나온 수윤은 그날 밤 안방의 댓돌 위에 앉아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본 요강 위에 얹어진 그 엉덩이가 꼭 저 보름달처럼 희고 둥글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