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환관 상열지사 5 - 환관은 무엇으로 하는가
“아, 아읏.”
미지근하게 젖은 혀가 살갗에 미끄러질 때마다 여희는 신음을 멈추지 못했다.
전신이 저릿저릿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목간장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운심은 보이지 않았다.
운심을 찾을 상황도 아니었다.
목간장에서 곧장 안채의 신방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방 안에는 이부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분명 방에서 나갈 때는 이부자리가 말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던 누군가가 준비해 둔 것처럼 이부자리가 다시 펴져 있었다.
이부자리는 준비되어 있고, 그러면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대충 입었던 옷을 다시 벗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희도, 수윤도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는 곧장 이불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수윤이 곧장 여희의 위로 올라갔다.
잘린 고환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일까.
수윤은 전부 벗으면서도 바지만은 벗지 않았다.
조금 전 수증기 속에서 수윤의 벗은 몸을 봤을 때 그의 다리 사이에 매달려 있는 음경은 봤지만, 고환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잘린 것이 틀림없다.
잠시나마 가짜 환관은 아니었을까 의심했던 것이 무안할 정도였다.
그러나 음경이 없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수윤의 말처럼 이렇게 충분히 다른 것으로 대체가 가능한 것을.
“아, 앗. 대감, 대감.”
수윤의 애무에 전신을 떨며 여희가 허리를 흔들었다.
그의 입술이 닿은 젖꼭지가 욱신거렸다.
집요하게 빨아 댄 탓에 여희의 젖꼭지는 선명한 색으로 달아올라 뾰족하게 변했다.
수윤이 빨아 댄 곳은 젖꼭지만이 아니었다.
그의 입술과 혀는 여희의 목덜미 그리고 귓불까지 샅샅이 빨아 댔다.
그가 빨아 댈 때마다 다리 사이에 습기가 차올랐다.
목간장에서 수윤의 손이 제 하지를 만지던 것이 떠올라 여희의 흥분이 더 거세어졌다.
다시 손으로 만져 올 것이라고 여희는 생각했다.
환관은 무엇으로 하는가? 손가락으로 하니 말이다.
그러니 그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다시 제 안으로 들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을 때였다.
“아!”
수윤의 손이 여희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다리가 넓게 벌어지자 여희는 숨이 막혔다.
목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제 하지를 보여 주지 않았다.
아직 벌건 대낮이다.
아무리 이곳이 신방이고, 자신들이 어제 혼인한 부부라 할지라도 이렇게나 적나라하게 하지를 보여 주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 여희가 얼굴을 붉혔다.
그때 허벅지와 함께 벌어진 하지에 젖은 것이 와 닿았다.
“대, 대감……!”
그것이 수윤의 혀라는 것을 알아차린 여희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제 은밀한 곳을 빨기 시작하는 사내의 혀 놀림에 여희가 숨을 헐떡였다.
“환관이 무엇으로 하는지 아시오?”
수윤이 짓궂게 물어 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여희도 대답할 여유가 없다.
지금은 숨을 쉬는 것만으로 버거웠기 때문이다.
수윤의 손이 여희의 음순을 좌우로 벌렸다. 그리고 드러난 젖은 속살에 혀를 대고는 질척하게 핥았다.
“아! 아으응!”
달뜬 교성을 지르며 여희가 등줄기를 휘었다.
“앗, 앗, 아, 아아……!”
여희의 몸이 이불 위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미끈거리는 혀끝이 드러난 돌기를 꾹꾹 누르고 문지를 때마다 잔뜩 젖은 그녀의 음순이 움찔움찔 음란하게 떨렸다.
“환관의 혀는 뱀처럼 움직인다는 말이 있는데, 사람을 말로 죽일 때만 뱀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때에도 뱀처럼 움직일 수 있다오.”
수윤의 혀가 뱀처럼 움직이는지 어떤지는 여희도 몰랐다.
뱀을 본 적이 있어야 뱀처럼 움직이는 것이 뭔지 알지, 여희는 아직 뱀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수윤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가 하는 것이다.
“하윽! 아! 아아아!”
음부를 통째로 삼키고 빨아올리는 탓에 여희의 교성이 높아졌다.
젖은 속살 안으로 파고들어 후비던 혀가 꿈틀거릴 때마다 제 하지에서 울리는 젖은 소리에 여희는 귀가 멀 것만 같았다.
“아, 하읏! 하읏, 아, 아, 아아!”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며 신음을 지르던 여희의 전신이 아찔한 열기에 휩싸였다.
그 순간 그녀의 허벅지가 경련하며 허리와 엉덩이가 덜덜 떨렸다. 마침내 절정에 이른 것이다.
절정에 이른 순간 그녀의 벌어진 하지에서 말간 것이 왈칵 쏟아졌다.
제 회음부를 타고 흐르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지금 경험한 절정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여희는 생각했다.
“하아, 하아.”
숨을 헐떡이며 여희가 눈을 감았다.
‘세상에. 이렇게 좋다니.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몸이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둥둥 구름 위를 떠다니고 있는 이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눈을 감아 버린 여희가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떴다.
“대감?”
끝난 줄 알았는데 젖어 있는 음부에 수윤의 손가락이 다가온 것이다.
“어젯밤에 초야를 치르지 못했으니 어제 것과 오늘 것, 두 번은 해야 하지 않겠소.”
하지만 아직 낮인걸요?
밤이 남았는걸요?
“주상께서 왜 사흘이나 말미를 주신 줄 아시오?”
그걸 어떻게 아나요. 제가 임금님이 아닌 것을요.
“밤에는 당연히 하는 것이지만, 낮에도 하라는 뜻으로 사흘 밤 사흘 낮의 말미를 주신 거요. 그러니 주상 전하의 어명을 어겨서는 안 되지 않겠소.”
말은 잘한다. 어명이 내려졌는데도 입궐했다가 대궐 문이 닫혀서 돌아왔으면서 말이다.
“한 번은 혀로, 한 번은 손으로,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소.”
뭐가 공평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손가락이 달아오른 곳을 문지르자 열기에 물든 허리가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아, 읏, 으응, 응.”
세운 무릎을 벌린 채로 여희가 열기 오른 가쁜 숨을 헐떡였다.
이미 흥건하게 젖은 질의 안쪽으로 손가락이 찔러 들어왔다.
츄퍽거리며 찔러 들어온 손가락이 안쪽의 애액을 긁으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츄퍽츄퍽 찔러 들어오자 그녀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한 번 절정에 이르렀던 몸은 쉽게 다시 절정으로 치달았다.
짜릿한 희열에 완전히 잠식당한 여희가 물 위로 올라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전신에서 열꽃이 펑펑 터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목간을 하셔야지요.”
웃음을 애써 감추며 운심이 여희를 목간장으로 안내했다.
수윤을 만났던 목간장과는 다른 목간장이었다.
애초에 이곳이었는데 운심이 도중에 장소를 바꿔 버렸다는 것을 여희도 안다.
하지만 그런 운심 덕분에 초야를 치렀다.
“자, 마님. 따뜻한 물을 잔뜩 채워 놓았으니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나오지 마세요. 뜨거운 물에 몸이 녹을 때까지 있어야 피로가 풀린답니다.”
운심은 손수 여희의 옷을 벗겨 주고 그녀가 목간통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줬다.
목간통에 가득 차 있던 물이 여희가 안으로 들어서자 촤악- 소리를 내며 밖으로 흘러넘쳤다.
“따뜻해.”
뜨거운 물에 들어간 여희가 나른한 숨을 쉬었다.
이렇게 큰 목간통 안에, 이렇게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뜨거운 물을 솥에 끓여도 그건 항상 아버지와 오라비의 몫이었다.
여희는 대충 찬물에, 겨울에는 뜨거운 물을 조금 섞은 미지근한 물에 머리를 감고 몸도 대충 씻어야만 했다.
물을 길어 오는 것도 일이었고, 그 물을 끓이는 장작도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목간통 같은 것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기분이 어떠세요, 마님?”
“나른해요.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아요.”
“그렇지요?”
운심이 여희의 어깨 위로 뜨거운 물을 끼얹어 줬다.
“등을 밀어 드릴까요, 마님?”
“아니, 괜찮아요, 언니.”
“마님처럼 좋은 분이 대감마님과 혼인하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언니.”
여희는 문득 궁금한 것이 생각나 운심을 돌아봤다.
“네, 마님. 뭐가 필요한 것이 있으세요?”
“왜 대감께서 언니를 누이라고 부르나요?”
“아, 그건.”
“대감께서 예전에 환관이 되시기 전에 검계에 계셨다고 하는데, 그와 관련된 것인가요?”
“그런 것까지 말씀하셨어요?”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요.”
“나중에 대감마님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실 거예요, 마님.”
“나는 지금 궁금한데…… 비밀스러운 이야기인가요?”
“설마요.”
운심이 작게 웃었다.
“마님께서도 들으셨다시피 대감마님께서는 예전에 검계에 몸을 담고 계시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셨는데 그때 배가 고프시면 꼭 저희 집에 오셔서 밥을 드시고 가셨답니다. 제가 해 드리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고 하시면서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당시 저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이라고 차려 봤자 콩과 감자가 절반이나 들어간 보리밥에 강된장 하나가 찬의 전부였는데 그게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찾아오셔서 저녁을 드시고 가셨는지.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저녁을 드시러 오지 않으신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님을 모시고 계시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곳에 이 집을 산 후에 저와 제 남편을 이 집으로 불러서 남편에게는 청지기 일을 맡기고 제게는 집안일을 돌봐 달라고 하셨어요.
저희 가족이 은혜를 입었지요. 예전에 저녁을 드시러 오실 때부터 누이, 누이, 하고 부르던 것이 습관이 되셨는지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계신 것이니 마님께서 부디 이해해 주세요.”
김수윤의 입을 통해서 듣든, 운심의 입을 통해서 듣든 김수윤 그 사내는 알면 알수록 이상하면서도 좋은 사람이 분명했다.
사람은 원래 출세하면 옛일을 잊어버리기 쉬운 존재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가난했거나 불운했던 옛일을 지우거나 그 당시 알고 지낸 사람들과의 관계를 꺼리는 경우가 많은데 김수윤은 적어도 은혜를 아는 사내가 틀림없다.
그러니 검계 시절 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줬던 운심 부부를 잊지 않고 이렇게 데려온 것이리라.
좋은 사내라는 것은 이제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여희도 안다.
그런 좋은 사내에게 누가 자신을 소개해 줬는지 궁금하지만, 나중에 말해 준다고 하니 기다릴 수 있다.
“양반 서자였다는데 왜 검계에 들어간 것일까요?”
물을 참방거리며 여희가 또 궁금한 것을 꺼냈다.
“언니?”
그런데 운심이 바로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내가 너무 곤란한 것을 물었나?’
자신이 너무 곤란한 것을 질문했나 싶어 고개를 돌리던 여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운심이 아니라 수윤이었다.
“대, 대감?”
언제 운심이 수윤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물소리가 워낙 참방거려서 문이 열리고 닫히고 걸어오는 발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다.
“어, 어,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까지 수윤과 신방에서 그렇게 뒹굴었는데 지금 이렇게 얼굴을 보니 귀가 달아올랐다.
물이 뜨거워서 귀가 달아오르는 것인지 아니면 수윤의 얼굴을 봐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양반 서자이긴 했지만, 서자도 서자 나름이라 생부의 집에서 살지 못했소.”
소매를 걷어붙인 수윤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여희의 어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그리고 여희의 어깨를 손수 밀어 주기 시작했다.
“내 어머니는 원래 백정의 딸이었는데 내 아버님의 눈에 띄어 거의 강제로 당하다시피 몸을 잃고 나를 가졌소. 하지만 중인의 딸도 아니고 양민의 딸도 아닌 백정의 딸이 어찌 양반의 첩이 될 수 있겠소. 보는 눈들이 많으니 양반인 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차마 집으로 들이지 못하시고 나 역시도 아들로 취급받지 못했소.
나는 아버님의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반촌 백정의 집에서 태어났고, 반쪽 양반 반쪽 백정의 자식으로 자라며 좁은 방에서 사촌 형제들과 뒤엉켜서 자고 먹고 생활했지.”
목소리가 너무 담담해서 여희는 이 사내가 그때의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은 꺼내기 어려운 과거인데, 부끄러워하기 마련인 과거인데 이 사내의 목소리에서는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이 묻어나고 있다.
이 사내는 사촌 형제들과 뒤엉켜 살았다는 그때 그 작은 백정의 집을 그리워하고 있다.
“해가 지나며 나는 점점 자라났고, 언제까지나 백정 숙부의 집에 얹혀살 수 없어서 집을 나가 살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돌아가셨소.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소.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나는 이제 숙부의 집을 나가 혼자 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기점으로 나는 양반의 반쪽짜리 서자라는 것도 버렸소.
숙부의 집을 나간 그 날에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서 절을 세 번 올리고, 이제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분의 집을 찾아간 적이 없소.
내게 아버지는 죽은 분이고, 그분께도 나는 죽은 자식이니 이제 부모 자식 간의 연은 더는 없소. 그렇게 해서 혼자 거리를 떠돌다가 검계에 들어갔는데, 내가 원래 어려서부터 숙부의 칼질을 보고 자란지라 칼 하나는 잘 다루어 밥은 먹고 살았소.”
여희의 어깨를 문질러 주는 손바닥이 거칠다.
환관이 되면서부터는 더는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손바닥은 여전히 거칠다.
그건 이 사내가 살아온 세월이 거칠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 오래 거칠게 살아서, 그 손에 남아 있는 모진 세월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 죽여 주는 값이 제법 두둑해서 궁상스럽게 살지는 않았지만, 못 믿을 놈들 속에 섞여서 밥을 먹으니 그 밥이 어디 넘어가겠소. 밥이란 자고로 좋은 사람과 먹어야 하는 법인데.
그래서 평소에 웃음소리가 울타리를 넘어서 나오는 집을 한곳 눈여겨봐 두고 있다가 쇠고기 한 근 끊어서 어느 날 무작정 그 집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고기를 내놓고 밥이나 한 술 달라고 했지. 보통은 그러면 웬 놈이냐고 소리 지를 법도 한데 우리 누님은 성품도 좋아서 밥 한 그릇 더 퍼 와서 마음껏 먹으라고 하지 않겠소. 그러니 내가 고맙겠소, 안 고맙겠소.
나는 은혜는 아는 놈이라 언젠가는 꼭 은혜를 갚자 생각했소. 누님에게 사람 죽일 일 있으면 꼭 말하라고, 내가 그냥 죽여 준다는 말도 했소. 그런데 저 누님께 무슨 사람 죽일 일이 있겠소. 안 그렇소?”
여희는 문득 오늘 목간장에 갇혔을 때 이 사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우연이라는 것도 걸어온 길의 결과라고 이 사내에게 제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정말 그렇다.
우연이 있겠는가.
없다.
걸어온 길이, 걸어온 발자취가 남아 그것이 결국은 인연을 이어 주는 것이다.
걸어온 발자취를 모르기 때문에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던 것이다.
이 사내와 운심 그리고 자신도.
“그날도 사람을 죽이러 나갔는데 운종가에서 칼부림 소리가 나지 않겠소. 운종가 주변은 한밤중에 칼부림이 제법 나는 곳이라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웬 말쑥하게 차려입은 어린 선비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니 퍽 불쌍하게 보이더이다.
그 어린 선비를 보호하던 이들이 죄다 칼에 쓰러지고, 그 어린 선비 목에 칼이 들어가기 직전에 내 칼을 뽑아 그 포악한 놈들을 전부 쫓아내고 보니 그 어린 선비가 세자 저하였소. 참, 인연이 되려니 그렇게 만났지.”
수윤이 허허 웃었다.
그의 목소리 그리고 따뜻한 물, 어깨와 등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놀림, 뜨거운 물에 나른하게 풀리는 몸.
그 나른함에 여희의 눈꺼풀이 살짝 내려앉았다.
내려앉는 눈꺼풀을 여희가 얼른 다시 들어 올렸다.
여기서 자면 곤란하다.
“당시에 세자 저하는 목숨을 위협받고 계셨는데, 그날 밤이 인연이 되어서 내가 궐 밖에서 세자 저하의 정보통 노릇도 해 드리고, 세자 저하의 적들이 한밤중에 모여 은밀한 궤계를 꾸미는 것을 몽땅 망쳐 놓기도 했소.
그 덕분에 세자께서 무사히 보위에 오르셨다고, 그 후에 주상이 되신 세자께서 굳이 날 궐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겠소. 나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다고, 그러니 곁에서 밤낮으로 지켜 달라고 부르셔서 나도 결심했소.
나를 그리 간절하게 필요로 해 주는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검계 생활 때려치우고 궐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소.”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수윤이 낮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굳이 환관으로 들어간 것은 내가 양반이 아니라 벼슬을 할 수 없고, 무관이 될 수 없어서 운검 노릇도 못 하니, 운검을 제외하고 주상 전하의 곁에서 온종일 밤낮으로 떠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환관밖에는 없더이다. 그래서 멀쩡하게 고환과 음경을 매달고 환관이 되었소.”
이쯤에서 수윤이 말을 멈췄다. 수윤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고백한 것이다.
언제쯤 여희에게 제게는 실은 고환도 있고 음경도 구실을 잘하고 있다고 고백 아닌 자백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금이 딱 그 순간이다 싶어 사실대로 말했는데 어째 여희가 반응이 없다.
“여보, 낭자. 어찌 대답이 없으시오?”
놀라서, 아니면 기가 막혀서 대답을 못 하는 것일까?
“그렇게 놀라.”
그때 여희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낭자? 여희 낭자? 여보?”
당황한 수윤이 허리를 숙여 여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아마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 있으니 몸이 나른하게 풀려 잠이 든 것이리라.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 가며 잠이 든 여희를 보며 수윤은 픽 웃고 말았다.
나름대로 진실을 고백하자는 생각에 여기까지 따라와서 열심히 과거사를 고백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잠들어 있다.
“어디까지 들은 걸까?”
어디까지 들었을까? 내일 다시 설명해야 하는데, 그러면 어디부터 다시 말해야 하는 걸까.
“과거사를 꺼내는 것이 얼마나 닭살이 돋는 건데, 또 하게 하다니. 정말 괘씸한 아내가 아닐 수 없군.”
하지만 잠든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나. 죄가 있다면 목간통 안에서 잠들 정도로 지치게 한 자신에게 있지.
죄가 있다면 목간통 안에서 제게 몸을 맡긴 채로 잠이 들 정도로 저를 믿어 버리게 한 자신에게 죄가 있지.
“내 인연의 길에 걸어와 줘서 고맙소.”
여희가 했던 말이 있다. 우연은 걸어온 길의 결과라고.
정말 그런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랑스러운 여자가 자신의 삶에 걸어 들어와 준 것이 고맙다.
다행이다. 자신을 구해 줬던 여인이 그녀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주는 것으로 빚 갚기를 대신하자고 말해 줘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갔을 것이다.
다행이다. 임금이 사흘의 말미를 줘서 다행이다.
그렇잖았으면 형식적으로 혼인만 하고 의무를 다했다는 시건방진 생각이나 하고 이렇게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알아갈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행이다.
“내 고운 처가 이리 잠이 많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첫날밤에는 혼자서 어주를 다 마시고 잠이 들더니, 목간장에서는 내 고백을 자장가 삼아 잠들어 버리니. 잠꾸러기 처를 얻은 나는 행복한 사내가 된 것 같으니,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수윤의 입술과 눈은 계속 웃었다.
행복에 겨워 어쩌지 못하는 사내의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