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 4부
나뭇잎 4부
승민은 주말동안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느라 꽤 애썼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희준은 잘 보이지 않았다. 희준은 하루종일 서재에 박혀 컴퓨터에 빠져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승민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자 희준이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 아가야...회사간다." "행운을 빌어줘"
"잘 하세요"
"그리구..승민아..오늘 집안 일 좀 해줄래? 빨래도 쌓여 있고, 부엌도 좀 청소 해야되겠던데.."
"알았어요...다녀오세요"
"고마워..내가 좀 바쁘구나...부탁한다.. 일찍 올께"
승민은 아침을 먹고 샤워를 했다. 정말 빨래가 많긴 많았다. 그 많은 빨래를 하느라고 오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오후에는 세제를 꺼내어 부엌을 바닥부터 찬장까지 박박 닦았다.
승민이 청소를 시작해서 바닥에서 기어다닌지 한시간이나 되었다. 그는 엄마의 존재가 그리워졌다. 아니면, 희준의 존재가 껄끄러웠다. 왜 희준은 밖에 나가서 멋진 사장이라는 직함으로 화려한 생활을 하고, 나는 이렇게 부엌바닥에서 기고 있어야 하지? 희준에겐 식모나 가정부를 둘 수도 있을텐데... 승민은 이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제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다섯시 반이 되자 승민은 저녁준비를 했다. 그러나 희준은 여덟시가 되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왔다.
"어...미안해..너무 늦었지?" "오늘 첫날이라 할 일이 얼마나 많던지 말야. 내일은 언제 들어 올 지 전화해 줄께. 저녁밥은 그냥 간단하게 뭐 좀 줄래?"
승민은 라면을 끓여서 서재로 가져 갔다. 희준은 컴퓨터 앞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고마워" 희준은 승민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승민은 잠시 거기 서 있었다.
"오늘 첫날인데 어땠어요?"
"괜찮았어..."희준은 간단히 말을 끊어 버렸다. 승민은 부엌으로 돌아와서 잡지를 뒤적였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희준은 서재에서 나왔다. 그는 승민의 맞은 편 식탁의자에 앉아서 그날 있었던 일을 풀어 놓았다.
"굉장해..." "내가 알았어야 되는 회사 일들은 그냥 머리 속에 떠올라. 뭐든지 말야. 마치 내가 지금까지 희준으로 평생 살았던 것 처럼 말야"
"그럼.....살아왔던 기억들도 말이에요?"
"맞아...니 엄마인 희주였던 기억들도 있는데...희준이라는 사람의 기억도 함께 존재해"
승민은 희준이 은행에서 사장으로서 하는 일들을 들었다. 희주는 은행에서 여자와 남자가 얼마만큼 다른 대우를 받는지 놀랍다고 했다. 그 세계에서는 남자는 여전히 실제로 상류사회였던 것이다. "내가 희주일 때는 그다지 좋은 대우를 못 받았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
희준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뭇잎에 관한 이야기도. 승민이 하루종일 그 나뭇잎을 찾아 보려고 여기저기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희준이 숨겨 놓은 게 틀림없었다.
다음날, 화요일은 전날과 비슷하게 지나갔다. 희준은 새벽같이 출근했고, 승민은 요리며 청소며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다. 그날 밤, 승민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승민은 가정부를 들이자고 희준에게 부탁했다. 그러나 희준은 현재상황에 비추어 볼 때 외부사람을 집안에 들여놓는 것은 좀 위험하다고 변명했다. 말은 맞는데......
은행에서는 승민이 희준의 조카로 되어 있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먼 친척 조카...젠장. 승민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수요일은 화요일마냥 지루했다. 그날밤 승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나도 집밖에서의 생활이 있어요. 매일 집에만 틀어 박혀서 식모처럼 일하고만 있고 싶진 않다구요..."
"뭐가 문제야? 오히려 편하게 생각해봐.. 사람들 만나서 짤릴 거 걱정 안해도 되지. 집안일 생각만 하면 되잖아? 공부할 시간도 많고....대학에 합격해서 내년부턴 대학 다녀야지..."
"있잖아요...지금하는 건 식모일이잖아요....가정부라도 들여놔요..저도 좀 살아야 되잖아요!!!!"
"집안일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이건 여자가 할 일이잖아요..."
희준은 오랜 생각 끝에 말했다. "좋아..어떻게든 해결해 줄께...됐지?"
승민은 방으로 들어갔고, 그날 저녁 희준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