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전락 - 1부
황홀한 전락 - 1부
“난 정말 가기 싫은데•••”
거울 앞에 선 채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살피며 유미는 말꼬리를 흘렸다.
“왜에, 네 신랑도 허락했는데 이럴 때 나가서 스트레스 한 번 쫘악 푸는 거지. 야, 이쁘다 이뻐. 그걸로 해라.”
미란이 너스레를 떨며 채근했다.
“넌 동창회를 스트레스 풀러 나가니?”
“그러엄, 그렇잖고. 우리 같은 팔자에 이런 날 아니면 언제 나이트 가서 맘 놓고 흔들어 보니이? 안 그래?”
“칫, 얘는. 그깟 나이트가 뭐 대수라고.”
유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었던 옷을 다시 벗었다.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 20년만에 만나보는 동창생들인데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세련되고 멋져 보이고 싶었다.
그녀는 맨 처음에 골랐던 체크무늬 투피스 정장을 다시 걸쳐 보았다. 날씨도 스산한데 차라리 그게 나을 것도 같았다.
“야야, 고만 좀 해라, 응? 갓 쓰다가 장 파하겠다.”
“아무래도 배가 나와 보이지?”
유미는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로 미란을 돌아보았다.
“우리 나이에 이만큼도 배 안 나온 년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너 정도는 양반이라구. 나좀 볼래? 난 이거 안 하면 쪽 팔려서 나가지도 못해. 다들 몇 개월째냐고 묻는다니깐. 미친년들, 눈구녁에 콩깍지가 씌였는지 원.”
미란이 스커트를 훌렁 걷어 올리고 니퍼로 조인 허리를 드러내 보였다.
“그래, 나도 니퍼를 하는 게 낫겠다.”
유미는 서랍을 열고 살색 웨이스트 니퍼를 꺼내 허리에 둘렀다.
하나하나 후크를 채워 나가자 탄탄하게 눌리는 압착감이 허리를 조여들었다.
“어때, 괜찮아 보이니?”
“그래 그래, 똑소리 난다. 제발 좀 작작해라.”
“후••• 이놈의 살•••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무책임하게 살만 쪘는지•••”
“집에서 살림하는 아낙네가 그 정도 살도 안 찌면 그게 비정상이지.”
“그래도••• 서른 다섯 한창 나이에•••”
“한창은 무슨 얼어죽을 한창이니? 낼 모레면 사십인데.”
“하긴, 좋은 시절 다 지났지만.”
“야야, 그래도 유미 넌 그러고 나가면 강남 미시족 뺨치겠다. 나야말로 원, 푹 삭아서 사내 새끼들이 눈깔 한 번도 안 돌린다구. 미친 것들이 내가 얼마나 섹시한 여잔지 당최 알아보덜 못한다니까, 호호호.”
유미는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니퍼로 조였음에도 눈에 띄게 허리선이 굵어 보이는 게 속이 상했다.
다리 역시 옛날의 미끈한 곡선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통통하게 알이 박인 종아리가 몹시 눈에 거슬렸다.
“암만 해도 난 그냥 집에 있을까 봐. 미란이 너만 갔다 와라. 응?”
“미친 년. 지가 무슨 가래떡 장수라고, 빼긴 왜 그렇게 빼니? 잔말 말고 빨랑 핸드백 들어. 늦어도 한참 늦었겠다.”
미란이 핸드백을 집어 던지다시피 건네주며 설레발을 떨었다.
“아이 참, 별로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유미는 못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미란의 뒤를 따라 나섰지만 가슴 속에서는 벌써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었다.
“야, 이거 유미 아냐! 어서 와라.”
“우와, 유미가 다 웬일이니. 동창회엔 생전 안 올 것처럼 굴더니.”
“어머 어머, 유미야. 넌 어쩜 그리 하나도 안 늙었니. 옛날 그대로다 얘.”
“신수가 훤한 게 서방님이 엄청 잘해 주시는 모양이지? 부럽다 얘.”
미란과 유미가 한정식당 ‘청도’의 룸에 들어서자마자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고 인사를 해대느라 실내가 어수선해졌다.
“이것들이 이 미란이 언니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갑다. 아무리 키가 작다고, 그래, 난 보이지도 않냐?”
미란이 큰소리로 떠들며 금방 분위기에 파고들었다.
“이 언니가 니들한테 유미 보여줄라고 기어코 끌고 왔다 이거 아니냐. 그러니까 빨랑 수고주부터 한잔 따르거라 잉.”
미란이 어디 가나 활달하고 거침없는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그래, 얼른 앉아서 한잔씩들 받그라 잉. 야들아 뭐하냐. 느그들이 고렇코롬 보고 싶어하던 유미가 왔응께 빨랑빨랑 한잔 따라 드리잖고,”
영숙이 미란의 말투를 흉내내며 옆 자리의 남자 동창들을 향해 소리쳤다.
“우리덜이 유미를 보고 싶어한 건 사실이다만은, 젤로 보고 싶어한 사람은 따로 있응께 그 사람이 따라 줘야제.”
누군가가 영숙의 말을 받아 그렇게 떠들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맞다, 맞아, 경철이 어딨냐, 유미한테 한잔 따라줘라 잉.”
“그라제. 유미를 젤로 보고 싶어한 사람이 경철인께 말이여.”
“경철이는 오직 일편단심 민들레제. 안 그러냐? 하하.”
“그란께 경철이가 동창회에 나오는 것은 순전히 유미 얼굴 한 번 볼라고 그란 것이다 잉, 그말이여. 느그덜 안 그러냐? 내 말이 틀려부렀냐?”
모두들 벌써 한잔씩 했는지 불콰한 얼굴로 사투리를 거침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유미는 느닷없이 경철이와 한 두름으로 엮여 농담의 타깃이 되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허어, 이것들이 참••• 보자보자 하니까. 알았다 알았어. 내가 우리 신유미 씨한테 한잔 따를 테니까 그만들좀 해라 응?”
경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술병과 잔을 들고 유미 옆으로 건너와서 끼어 앉았다.
“아따 이것들이 날 그냥 팍팍 밀어내네 그래 잉. 내가 아니꼬와서 비켜주고 말란다. 아나 느그들끼리 나란히 앉아서 옛정을 나눠라 잉?”
미란이 너스레를 떨며 냉큼 일어나더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오랜만이다. 한잔 할래?”
경철이 잔을 내밀며 말했다.
“난 술 잘 못하는데•••”
유미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머뭇거리며 잔을 받았다.
경철은 초등학교 시절 별명이 ‘코보’였다.
시도 때도 없이 누런 코를 질질 흘리고 다녀서였다.
게다가 성적은 꼴찌를 맴돌았고 맨날 싸움박질로 얼굴이 온전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 시절은 대개들 그랬지만 형의 옷을 물려입어선지 꾀죄죄하고 헐렁한 옷차림에 때가 시커멓게 낀 손발 때문에 여자애들한테는 마치 거지처럼 여겨져 무시당하는 존재였다.
덩치는 동네에서 제일 컸지만 하는 짓은 철부지 같기만 했었다.
게다가 당시 경철의 별명은 ‘말좆’이었다.
유미는 그 말이 무얼 뜻하는 건지는 몰랐지만 친구들끼리 만나면 경철의 별명을 놀리며 킬킬거리곤 했었다.
어쨌든 ‘말’이 들어간 말이라면 그닥 좋은 별명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유미 역시 경철을 벌레처럼 징그럽게 보며 경원시하곤 했는데 문제는 경철이 유미를 좋아해 졸랑졸랑 따라다닌다는 거였다.
그게 창피했던 유미는 맨날 선생님한테 일러바쳤고, 덕분에 경철은 그렇잖아도 미운 털이 박힌 선생님한테 덤으로 얻어맞곤 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해서도 경철은 공공연하게 유미를 좋아한다고 주위 친구들한테 떠들어 대며 뒤를 따라 다니곤 해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오죽하면 견디다 못한 유미가 집에 일러바칠 생각을 다 했을까.
그 일로 경철은 아버지한테 몽둥이찜질을 당해 한동안 학교에도 나가지 못했다.
유미 어머니가 경철의 집에 쫓아가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댔던 것이다.
유미가 읍내에서 여고를 다닐 동안 제법 집안 형편이 괜찮았던 경철은 도시로 진학했다.
그러나 주말에 내려오면 여전히 유미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을 일로 삼았다. 마치 유미의 안부가 궁금해 내려오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유미는 경철이 끔찍이 싫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경철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친구들과 어울려 싸움이나 하고 다녔는데, 유미도 들리는 소문으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경철은 동네에서도 소문난 난봉으로 찍혀 동네 어른들이 고개를 살살 저을 정도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경철은 전형적인 불량학생의 길을 걷고 있었고, 유미는 착실한 우등생의 길을 꼬박꼬박 걷고 있었다.
그러니 언감생심 유미를 넘보는 경철이 사람들의 코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었지만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미 뒤를 따라다녀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꿈 많은 여학생 시절 유미가 단 한 번도 남학생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한 것도 순전히 경철이 때문이었다.
워낙 싸움꾼에다 건달패인 경철의 해코지가 두려워 남학생들은 아무도 유미에게 친밀하게 굴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철은 유미가 자기 애인이나 되는 것처럼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면서 만일 유미한테 치근덕거리는 놈이 있으면 칼로 배를 갈라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쳐댔던 것이다.
유미가 경철의 귀찮은 꼬리표를 떼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취직 때문에 서울로 올라온 때문이었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이미 깡패 그룹의 리더로 소문난 경철에게 유미의 연락처를 가르쳐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기에, 경철은 찾아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유미는 직장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경철에 관한 소문은 가끔 만나는 여자 동창생들의 입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듣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누군가를 칼로 찔러 감옥에 갔다는 둥, 유명한 깡패가 되었다는 둥, 경철에 관한 소문은 하나도 좋은 게 없었던 터라 그녀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신이 경철의 끈질긴 구애를 따돌릴 수 있었던 게 마치 하늘의 도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동창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의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철이 순 깡패에서 그럴 듯한 사업가로 변신해 강남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축에 든다는 것이었다.
큰돈을 버는 만큼 씀씀이도 커서 동창회 때면 몇 십 몇 백 만원 씩 척척 내놓곤 하고, 고향의 초등학교에도 장학금으로 기천 만원을 기탁했다 했다.
또 결혼도 했는데 마누라가 나이도 한참 어린 데다 미스 코리아 뺨칠 정도로 예쁘더라는 둥, 차는 벤츠를 몰고 다닌다는 둥, 사는 집에 가봤더니 육십 평 고급 빌란데 방이 운동장만하더라는 따위의 선망어린 말들을 해대며 부러워들 하는 것이었다.
‘흥 제까짓 게’ 하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유미는 내심 기분이 상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처를 입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겨우 방 두 개짜리 소형 전세 아파트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올망졸망 사는데, 경철은 육십 평 아파트에서 미스 코리아 같은 여자와 벤츠를 굴리고 산다니 괜히 생돈이라도 떼먹힌 듯한 기분이었다.
그 코흘리개 떼꼽쟁이 쌈박질꾼에다 징그러운 스토커가 어여번듯한 사업가가 되어 성공했다니 믿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자신의 처지가 비교되며 괜히 억울한 심정이 들기도 했다.
유미가 모처럼 동창회에 나갈 생각을 한 것은 미란의 끈질긴 채근도 있었지만 사실 은근히 경철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다른 친구들의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어디 경철이란 놈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한 번 두 눈으로 똑똑히 보자 싶은 호기 비슷한 게 일었던 것이다.
게다가 미란이로부터 경철이가 동창회에 올 때마다 유미 너만 찾더라며, 어디서 살고 있으며 남편은 무엇하는 사람이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는 둥 꼬치꼬치 캐묻더라는 얘길 듣자, 어쩐지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동시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지 똑똑히 보여주기고 할 겸 적선하는 기분으로 얼굴 한 번 보여 주리라는 오기가 퍼뜩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동창회에 나와 보자 유미는 괜히 맥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떳떳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지만 막상 마주치고 보니 어쩐지 스스로 왜소해지는 느낌이었다.
경철은 정말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그 옛날 ‘코보’의 모습은 간 곳 없고 어엿한 신사가 되어 있었다.
근사한 풍채에 무게 있는 말투며, 제법 큰 사업을 한다는 남자다운 면모를 떡하니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유미는 저게 옛날의 그 경철인가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운동으로 다져진 듯한 늠름한 몸매에 말쑥한 옷차림이 그야말로 신사다운 풍모를 풍겼던 것이다.
경철은 동창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미 옆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어 주기에 바빴다.
은근히 다른 남자 동창들이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도록 보이지 않는 경계를 해가면서 마치 공주마마 모시듯 세심한 신경을 써 주었다.
유미는 그런 경철의 태도가 자못 어색하고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경철이 해 왔던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그가 자신을 공주처럼 떠받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약간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던 경철의 진심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 버렸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연민과 함께 측은지심이 들기도 했다.
유미는 경철의 친절을 한 몸에 받으면서 경철이 영원한 자기의 팬으로 남아있지 않고 미스 코리아 뺨치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게 왠지 배신당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운 한편, 그 여자에게 괜히 질투심까지도 문득 치밀곤 했다.
그러면서도 경철이 하는 행동 속에서 여전히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문득 발견하곤 ‘그러면 그렇지 네까짓게 날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하는 묘한 우월감이 들기도 했다.
이차로 몰려간 곳은 나이트클럽으로 어쩌면 미란의 말마따나 당연한 코스였다.
미란이 바람을 잡자 경철이 술값을 혼자 도맡겠다고 큰소리쳐 분위기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루루 몰려나가 경쾌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양주며 맥주가 몇 순배 돌 무렵에는 유미도 어지간히 술기운이 올라 있었다.
모처럼 동심으로 되돌아간 듯한 들뜬 기분과 이 친구 저 친구가 강권해대는 잔을 마냥 피할 수만은 없어 한잔 두잔 마시기 시작한 게 벌써 보통 때의 주량을 초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미는 의외로 술이 취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웃고 떠들며 얘기하는 동안 취기가 많이 희석되기도 했지만, 경철이 줄곧 붙어다니려 드는 통에 은근히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한 때문이었다.
유미는 경철 앞에서 영원한 우상처럼 남고 싶었다.
도도한 공주의 면목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었다.
넘볼 수 없는 이상의 여자로 군림하고 싶었다.
그래서 술에 취해 가볍게 보이는 건 참을 수 없었고, 덕분에 생각보다 말짱한 정신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널 보고 싶었는지 아니?”
하도 짖궂게 강권해대는 친구들의 성화로 마지못해 경철과 블루스를 추게 되었을 때였다.
플로어로 나가자마자 경철이 참을 수 없다는 듯 거칠게 와락 끌어안더니 절박한 어조로 속삭였다.
“왜?”
유미는 뻔히 알면서도 자못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러나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경철은 끌어안은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격정에 복받친 듯 허리를 힘껏 조이며 손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움켜잡았다.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서 그래?”
경철은 그러면서도 멋진 스텝으로 유미를 리드했다.
“그랬어?”
유미는 몰랐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내뱉고 말았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경철의 표정은 여전히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래.”
경철은 확인이라도 시켜 주듯 짤막하게 말했다.
“부인이 미스 코리아 뺨치게 예쁘다면서? 나이도 우리보다 훨씬 젊고.”
유미는 핀잔처럼 말해놓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꼈다.
질투하는 것처럼 받아들일까봐 무안했던 것이다.
“누가 그래?”
“애들이.”
“병신 같은 것들이 뭘 안다고••• 너보단 안 이뻐.”
“훗••• 아부하지 마.”
“정말이야.”
다시 침묵이 흘렀다.
경철의 손은 유미의 허리를 부서뜨릴 것처럼 감아쥐고 있었다.
허구리의 옴팍한 부분에 닿아있는 경철의 손이 자꾸만 은근한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미는 차마 만류하기 힘들었다. 경철의 미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경철이 뚫어져라 눈을 쳐다보며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부탁?”
유미는 그 강렬한 시선을 받자 가슴이 덜컹, 했다.
사람을 집어 삼킬 듯이 이글거리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용서해 줘.”
“무, 무얼?”
유미는 놀라 더듬거렸는데 바로 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경철의 한손이 젖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던 것이다.
“너, 너•••”
“미안해. 딱 한 번만 만지게 해줘. 소원이야.”
“이, 이 손 안 놔?”
유미는 싸늘하게 소리쳤다.
눈앞이 핑 도는 당혹감 속에서 재빨리 주위부터 살폈다.
그러나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경철이 은연중에 일행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플로어 구석으로 유미를 리드해 왔던 것이다.
이 자식이 감히 건방지게•••.
유미는 그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치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몸을 빼려 했다.
그러나 경철이 완강한 힘으로 허리를 틀어쥐고 있었다.
“좋구나••• 정말로 너하고 결혼하고 싶었는데•••”
경철이 한숨까지 내쉬며 한탄조로 속삭였다.
“헛소리 그만하고 이거 못 놔?”
유미는 낮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헛소리가 아니야. 지금 당장이라도 난 유미 네가 원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릴 자신 있어.”
“난 절대 못 그래. 그러니 어서 이 손부터 내려.”
“알아. 네가 날 발톱의 때만치도 생각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딱 한 번만 봐줘. 그러면 널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빨리 내려.”
“부탁이다, 유미야.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네 가슴이라도 만져 봤다는 기억으로 스스로 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게 해 줘. 두 번 다시 널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
경철이 사뭇 애원조로 매달렸다.
유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아닌 소리 작작해.”
그녀는 손을 들어 경철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경철의 한 손이 워낙 강하게 허리를 틀어쥐고 있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너••• 정말 그러면, 아예 손을 집어넣는다.”
경철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윽박질렀다.
“잠깐이라 그랬잖아. 그것마저 용서 못하겠니?”
경철의 표정에는 정말이지 애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차마 더 이상 매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 한 번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날 사랑했던 정리로 딱 한 번만 눈 감아 주자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였다.
“정말 좋아•••”
경철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젖가슴을 움켜쥔 손을 천천히 움직거렸다.
유미는 저으기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이 홧홧했다.
경철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움켜잡았던 경철의 손은 어느 틈엔가 유미의 젖꼭지를 잡아 비틀고 있었다. 옷 위였지만 그녀는 경철의 두 손가락이 자신의 젖꼭지를 제대로 찾아쥐고 만지고 있다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이러지마, 경철아.”
유미는 당황해서 애원했다.
그러나 경철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 젖꼭지를 번갈아 만져대고 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경철은 어느 틈엔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제 한쪽 다리를 깊이 들이민 채 자꾸만 은밀한 부분을 압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허리를 감았던 손으로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 제발, 부탁이야.”
유미는 자꾸만 이상해지는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경철을 말렸다.
그러나 경철은 놓아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음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러고 있었다.
남편은 성실하고 인정 많은 남자였지만 그런 만큼 매사에 적극성은 없었다. 유미가 한번 싫다고 말하면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만큼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주는 남자였다.
사실 유미는 그런 남편이 때로는 무기력해 보일 때도 있었다.
부부관계를 할 때 더욱 그러했다.
남편은 보통 키였지만 몸이 약해 체중이 별로 나가지 않았다.
가끔씩 유미는 남편이 온 몸의 체중을 실어 압박해 주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아무리 남편이 기를 써도 그녀의 마음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가끔은 거칠게 다루어주기를 은근히 바란 적도 많았는데, 남편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제 풀에 점잖게 꼬리를 빼버리곤 했었다.
찡그린 그녀의 표정을 잘못 해석한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경철의 태도는 남편과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덩치도 덩치였지만 힘부터가 달랐다.
남편은 손바닥을 아무리 넓게 펼쳐도 그녀의 젖가슴을 제대로 감싸 쥐지 못했지만, 경철의 턱없이 크고 우람한 손은 한손만으로도 가볍게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았다.
게다가 허리를 감아쥔 완력이 너무나 강해 그녀는 마음대로 숨을 쉬지도 못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유미는 자존심도 저버린 채 남편의 힘이 이 정도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경철의 거센 압박을 무심결에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딱 한 잔만 더 할래? 이대로 헤어지긴 너무 서운하잖아.”
경철이 말했다.
방향이 같은 미란니를 태워다 주고 유미네 집 근처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경철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차에 탄 것이었다.
“그, 글쎄•••”
유미는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경철이 은연중에 그녀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유미는 그런 경철의 손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러나 경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 어때. 아직 열시밖에 안 됐는데••• 우리, 딱 한잔만 더 하자.”
경철이 허벅지에 놓인 손에 짐짓 힘을 주며 말했다.
“그, 그럼 딱 한잔만이야.”
유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경철의 말마따나 아직 열시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한잔쯤 더하고 들어간다 해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처럼 동창회에 나가니 좀 늦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던 것이다.
“오케이. 안내는 내가 할게. 멋진 곳으로 모시지.”
경철은 유미가 손을 뿌리치려는 의사를 포기한 듯싶자 슬그머니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경철아, 이, 이러지마.”
유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당황스러워졌다.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유미가 손을 끌어내리자 경철이 순순히 손을 거두더니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왜 이러지••• 한잔 더 해서 뭘 한다고•••.
유미는 딱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이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여겨졌으나 차는 어느새 집과는 제법 먼 거리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경철이 차를 세운 곳은 평창동의 어느 기와집 앞이었다.
마치 조선시대의 대갓집을 연상시키는 대문이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스르르 열리더니,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종업원이 다가와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내리자.”
“여, 여기가 어디야?”
“응, 내 단골집.”
“여기가 술집이야?”
“들어가 보면 알아.”
그러고 보니 대문 위에 ‘玉香’이라는 휘호가 멋들어지게 쓰인 나무 현판이 조그맣게 걸려 있었다.
“요정•••?”
“응, 조용히 한잔하기엔 그만이지.”
경철이 자동차 키를 종업원에게 건네주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유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대문 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모의 중년 여자가 역시 양복을 점잖게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 하나와 나란히 서서 허리를 굽혀 반겼다.
“어서 오세요. 박 사장님.”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그럼 별채로 모실까요?”
“그래 주었으면 고맙겠소.”
유미는 괜히 주눅이 드는 것 같았다.
탤런트 찜쪄먹게 생긴 중년 여인이 경식을 대하는 깍듯한 태도도 그랬거니와 얼핏 훑어본 정원의 화려하고 그윽한 분위기가 어디 영화 속에서나 보암직한 그런 특별한 곳의 냄새를 풍겼기 때문이다.
또 경철의 당당한 태도 역시 은근히 사람을 기죽이는 뭔가가 있었다.
“지배인님, 상 올릴 준비 하세요. 자, 이쪽으로 오시죠.”
여인이 양복 입은 남자를 향해 빠르게 말해 놓고는 유미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유미는 엉겁결에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여인의 뒤를 따랐다.
밖에서 대충 본 것과는 달리 안은 굉장히 넓었다.
별채는 정원 사이에 난 소롯길을 한참이나 걸어가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시지요. 곧 상을 준비하겠습니다.”
여인이 장지문을 열어주고는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유미는 경철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순간 당황스러워졌다.
방은 꽤나 넓었다.
잘 정돈된 화려함이 방안에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유미가 놀란 것은 그런 화려함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방 한쪽에 영화에서나 보암직한 멋진 침대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때, 분위기 괜찮지?”
경철이 양복 상의와 넥타이를 동시에 벗어 옷걸이에 걸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유미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쩐지 수상쩍은 냄새가 풍기는 곳이었던 것이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녀는 새삼 긴장이 되어 엉겁결에 여기까지 따라와 버린 자신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나, 그냥 집에 갈까봐. 아무래도 안 되겠어. 술도 이미 많이 마셨고•••”
유미는 진심으로 미안하단 표정을 해보이며 서성거렸다.
“왜? 맘에 안 들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그래? 아뭇소리 말고 앉아. 우리 여기서 딱 한잔만 더 마시고 가자. 내가 책임지고 태워다 줄게.”
“술 마시고 어떻게 운전하려고?”
“아까도 했잖아.”
“그건•••”
“괜찮아. 정 뭣하면 여기 대리운전사를 부르면 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어? 나 그냥 갈게. 우리 다음에 만나서 한잔 하자. 미란이랑.”
“풋, 미란이랑?”
경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단둘이서는 못 만나겠다는 거지? 날 믿을 수가 없어서.”
유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 뜻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뜻이 은근히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지막에 미란이를 들먹인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경철은 지금 날카롭게 그 점을 추궁하고 있었다.
“아, 아냐, 그런 뜻은. 내가 왜 널 못 믿겠니? 둘 다 가정이 있는데.”
그렇게 둘러대 놓고 유미는 또 아차 싶었다.
가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족은 붙이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던 것이다.
괜히 뜻과는 다르게 경철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만 내뱉는 것 같아 그녀는 은근히 당황이 더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경철이 입을 비쭉거렸다.
“가정이 없으면? 가정이 없으면 날 믿지 못한다는 거야? 그래?”
“아, 아니라니까. 그게 아니고 난•••”
“넌 언제나 그랬어. 무조건 날 못 믿고 뿌리치려고만 들었지.”
“그건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여기까지 따라왔지. 경철아, 안 그래?”
“후훗••• 여기 온 것도 넌 벌써 후회하고 있어. 그렇지? 네 얼굴에 그렇다고 써졌는 걸. 난 박경철이를 절대 못 믿는다.”
“경철아•••”
유미는 뒷걸음질을 쳤다. 천천히 다가오는 경철의 얼굴에 서려있는 희미한 미소가 문득 두려움을 주었다.
“알았어. 여기서 한잔만 더 하고 갈게. 응?”
그러나 경철은 아무 대꾸도 없이 손을 뻗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왈칵 껴안는 것이었다.
“이, 이러지마. 이러려고 날 이리 데려왔니? 응?”
유미는 경철의 가슴을 힘껏 떠밀며 소리쳤다.
“가만있어.”
경철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허리를 낚아챘다.
“너 정말,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녀는 다시 한 번 힘껏 경철의 가슴을 떠밀었으나 넘어진 건 오히려 유미 자신이었다.
그녀는 경철의 감당할 수 없는 체중을 가슴으로 받으며 무너지듯 침대 위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제, 제발••• 이러지마.”
유미는 황급히 몸을 빼며 소리쳤다.
그러나 경철의 완강한 팔이 허리를 감고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미야•••”
경철의 눈에서는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숨소리가 벌써 거칠게 달음질을 치고 있었다.
유미는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경철의 눈빛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무서워졌다.
“자, 잠깐만. 술상이 들어올 거야. 우선 술부터 한잔•••”
유미는 어떻게 하든지 이 순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일단 경철의 손을 벗어나면 술상이 들어오는 틈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가리라는 계획이 머리에 스쳤다.
“술상?”
“그래, 술상이 들어올 때가 됐잖아.”
“후훗••• 염려마. 인터폰으로 불러야 들여오게 돼있어. 그전엔 암도 안와.”
“뭐, 뭐라구?”
그녀는 갑자기 맥이 빠졌다.
순식간에 눈앞에 캄캄한 장막이 쳐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 유미야. 이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경철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홱 스커트 자락을 젖혔다.
“아, 안돼. 경철아, 안돼.”
유미가 부르짖었지만 경철은 이미 그녀의 스커트 자락을 허리께에 올려놓고 있었다.
솥뚜껑만한 손이 스커트 자락을 끌어올리는 순간 그녀는 아무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당황감이 필사적인 저항을 불러왔으나 의지와는 다르게 완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경철의 손은 이어 팬티스타킹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