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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프의 요정 5


램프의 요정 5   

 

또 전화벨이 계속 울린다. 나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벨 소리를 끌 생각도 안 하고 짜증스럽게 침대 시트 밑에 넣고 내 머리도 다시 베개 속에 욱여넣고 잠을 청했다. 잠이 들었는지 시간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을 무렵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왜 전화를 안 받아? 뭐해?”

 

종서다. 아름다운 종서. 하지만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어설프게 고백을 했다 차인 경험은 아무리 별것 아니라고 해도 별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혼자 벽보고 빈속에 소주 두 병을 내리부었고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가 찌질함의 모든 것을 갖춘 채 아름다운 그를 맞이했다. 최악이었다. 동시에 누구라도 와서 다행이었다. 그가 말한다.

 

 

“술 마셨어?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리 마셨어?”

 

“몰라.”

 

모를 리가. 서로가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들추지 않는다. 그가 다가온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손을 들어 얇고 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만진다. 따뜻하다. 나도 모르게 내 손을 올려 그의 손에 겹쳐 잡는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얘기한다.

 

“욕봤네.”

 

“아냐....... 내가 그렇지 뭐......”

 

“에이,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경우가 안 좋았던 거지.”

 

“응......”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 주변에서 흘러내려 온 긴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는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짧게 생각해본다. 그저 이 친구 하나면 굳이 여자에 목을 매고 방황해야 할까...... 날 바라보던 그는 이내 몸을 틀어 내 옆에 눕는다. 그가 다시 나를 보고 옆으로 누우며 짧게 말한다.

 

“더 자.”

 

“응......”

 

순종하듯 눈을 감았다. 사실 잠은 더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고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몸에 힘을 풀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그의 동공에서 나오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를 바라보며 옆으로 누운 채 눈을 감았기에 그의 눈빛은 바로 내 눈꺼풀 위에 맺혀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올려놓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여자 손보다 투박하고 컸다. 하지만 내 손보다 너무나 섬세하고 부드러웠으며 따스했다. 손가락 끝의 도톰한 볼 끝이 내 손가락에 닿을 듯 말 듯 미묘한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의 손가락이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긴장되기 시작했고 따스하면서도 찌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호흡이 뜨거워지기 시작해서 들키지 않기 위해 더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인지 그의 눈길과 손길이 더 잘 느껴졌다.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혈류의 흐름이 한곳으로 강하게 몰린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목을 지나 팔의 선을 타고 올라오다 천천히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한다. 마치 내가 잠을 안 자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계속 잠든 척을 하려 했지만 이미 심장이고 핏줄이고 자지이고 제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를 들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거부하기가 싫었다. 그리고 이미 그에게 들킨 것인지 그는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팔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점점 그의 손가락들이 올라오더니 잠깐 사라졌다. 그리고 애가 타려는 찰나 그의 손가락이 내 귓불에 닿았다. 닿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떠버렸다. 바로 앞에 그의 눈동자가 있었고 그 안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으며 입술 끝에 그의 코에서 나온 날숨이 닿았다. 서로의 호흡을 교환한 것도 잠시, 곧 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고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으며 눈을 감고 난 뒤에 곧바로 어둠이 아닌 새하얀 빛에 둘러싸이며 온몸의 신경이 녹아내렸다.

 

잠을 설쳐서 그런지 알람 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마치 녹아서 프라이팬에 눌어붙은 고기 기름 덩어리같이.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 화장실로 향한다.

 

어제저녁에 남은 버섯 찜과 찬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먹고 전에 입었던 옷에서 안의 셔츠만 바꿔 입고 집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조금 늦게 나왔다. 아직도 버스를 타는 것이 몸에 익숙해지지 않는지 시간을 잘 못 맞춘다. 이 시간대의 아침 공기는 내겐 아직 낯설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내 눈에 익숙한 교복과 그렇지 않은 교복들이 있다. 몇몇 여학생들이 내게 인사했으며 목례로써 간단히 답을 했다. 햇빛을 받는 쪽이 따스해지기 시작할 때쯤 버스가 도착했으며 밀려 들어가는 학생들의 병목 현상이 사라지길 기다려 마지막에 버스에 올라탔다. 요금을 지불하고 허리를 폈을 때 밖에서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아저씨, 잠깐만요!”

 

운전기사는 그 목소리의 달리기를 촉진하려는 듯 슬슬 움직였으며 그에 자극받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죽어라고 뛰어 버스에 올랐다.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탔네요.”

 

그녀는 요금을 지불하며 숨 차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얘기했다. 올려다보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어제와는 또 다른 향이 뇌에 닿았다. 숨을 들이쉰 순간 아찔한 기운이 올라오고 전율이 내려갔다. 나는 애써 말을 이었다.

 

“항상 이렇게 버스 타나 보네요?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그래요.”

 

그녀는 숨을 내쉬며 말을 토했다. 아직 덜 마른 그녀의 머리는 물기가 촉촉하게 어렸으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유난히 발달한 그녀의 가슴도 같이 올라가고 내려갔다. 그녀의 움직임과 함께 올라오는 내음은 나를 자꾸 긴장시키고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제처럼 도망칠 곳은 없었다. 숨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버스 타시는 것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아요.”

 

“네.”

 

숨을 고른다는 것이 의도치 않게 말을 너무 짧게 끊어 얘기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그녀대로 더 대화를 이을 것이 없는지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음 정거장에도 학생들이 많았으며 나 때문에 생긴 어색한 상황이 풀리지 않은 채 서로 어벙하게 서 있다가 인파에 밀려버렸고 그녀는 나에게 밀착되어 버렸다. 나는 최대한 사이를 벌리려 했으나 끊임없이 꾸겨져 들어오는 인파에 도리어 그녀의 가슴이 내 횡격막 언저리에 닫게 되어버렸다. 나나 그녀에게 더욱 어색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얼굴색의 변화를 들키기 전에 급히 말을 꺼냈다.

 

“이거, 오늘따라 꽤 몰리네요. 아침마다 고생 많겠네요.”

 

다행히 그녀는 내 예제를 벗어남으로써 대화를 이끌어갈 소지를 남겼다.

 

“이 정도는 보통이에요. 이 차 다음에 오는 차에 타면 차곡차곡 압축 다니깐요.”

 

“이것보다 더?”

 

“네.”

 

내 질문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내 질문을 어찌 해석했든 무의식중에 내려간 시선을 그녀도 한 박자 늦게 내 시선을 느꼈기에 얼굴의 변화를 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 유쾌한 상황들은 아니겠네요.”

 

“아, 저, 항상 유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자기와 동행하는 선생님을 덜 민망하게 하려 한 이 배려심 깊은 학생은 결과적으로 뜻이 상당히 여러 방향으로 해석되는 문장을 던졌으며 그에 따라 난 다시 대화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군요.”

 

“네에...”

 

버스 기사는 승차거부를 하면서 멈춰야 하는 정거장들을 지나갔고 그 덕분에 버스 안의 공간이 더 압축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 나 사이의 어색한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아무런 대화도 없었으며 학교 안에서 서로 길이 갈라져 인사를 건넬 때까지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여느 또래 아이들이라면 이런 상황을 빨리 벗어나려는 듯 도망치듯 나를 앞질러 가야 하는데 이 아이는 얼굴을 붉힌 채 줄 곳 내 옆에서 걸었다. 나 역시 그녀가 민망해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기에 그리고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기에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덕분에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 셔츠 목 뒤가 젖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수업이 원어민 특별 영어 수업인 관계로 테드와 함께 교실로 걸었다. 테드가 서툰 한국말로 말했다.

 

“선생님.”

 

“네?”

 

“저는 아직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어요.”

 

“어떤 것이......?”

 

“왜 한국 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것인가요?”

 

난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되물었다.

 

“글쎄요, 테드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모르겠어요. 저는 지식에 대한 갈구나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기에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의 학생들은 공부에 대한 목표가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 잘 살려고 공부하는 것이죠.”

 

“그래요? 그럼 잘 살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어느 것이든 도움이 되는 것은 열심히 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 같아요. 학생들이 영어에 대한 듣기가 잘 안될지 몰라도 너무 수업 태도가 안 좋더군요. 다른 수업은 그런대로 수업 진행이 된다고 하던데……. 제가 외국인이라서 반감이 있는 건가요?”

 

이제야 테드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갔다. 그리고 내가 괜히 돌려 말했다는 것도. 난 답변을 했다.

 

“이곳의 학생들 대부분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공부합니다. 고등학교의 목표도 결국 대학 보내기고요. 성적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수업은 성실히 수업 듣기가 힘들죠.”

 

“대학은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조건이라고 들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아무 대학이나 가려고 하지 않기에 대학 가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죠.”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따로 있나 보지요?”

 

“사회가 선호하는 대학이 있는 것이죠. 미국도 요새 그렇다면 서요? 교실 다 왔네요.”

 

그녀가 있는 2학년 3반에 들어간 우리는 수업을 시작하였고 나는 교실 뒤로 가서 서 있었다. 뒤에 서 있는 내 눈치를 살피며 테드의 말에 경청하는 연기를 하는 45명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다. 테드의 말을 듣고 보니 학생들은 연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진심으로 집중하거나 반응을 하는 학생이 없었다. 그렇게 치면 나 역시 태도가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테드의 수업을 보조하는 척 학생들을 둘러보는 척하며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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