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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옆집 남자, 옆집 여자


옆집 남자, 옆집 여자 

 

그 남자

새벽, 한잠 자고 인력시장에 나가려는데 옆 방 여자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뭐 하는 여잘까? 문득 궁금해진다. 매일 같은 궁금증이다. 그 여자가 이 집에 온 후로 아직까지 얼굴 한번 못 봤다.

 

 

그 여자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갔던 길보다 멀다. 피곤한 다리를 애써 재촉하며 집으로 돌아와 무거운 몸을 침대에 뉘었다. 잠시, 늘 하는 걱정과 하루의 상념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잠이 든다.

 

그 남자

오늘도 별로 못 벌었다. 며칠째 계속이다. 그놈에 I.M.F 이후로는 새벽 인력시장에 인간들만 북적대고 일거리를 주는 사람들은 거의 반이 넘게 줄었다. 오늘은 겨우 3만 오천 원을 받고 도배사 보조로 하루 온종일 풀칠만 했다. 제기랄. 옛날 일했던 공장에서는 한 달에 85만 원을 받았다. 월급이 많지는 않아도 400% 보너스에 수당에 그런대로 혼자 먹고살고 조금 저금하고 가끔 소주에 삼겹살로 모가지 때도 벗겨 낼 수 있었다. 사장이 부도를 내고 날라버리고 공장 그만두며 건진 거라고는 사무실에 있던 전화기 한 대가 달랑이다. 5년을 죽도록 일하고 8번하고 0번하고는 눌러지지도 않는 전화기 한대 들고 퇴직했다

 

그 여자

오늘 술 처먹으러 온 놈은 변탠가 보다. 떡이 돼서 들어온 놈이 한다는 소리가 "마담하고 너하고 둘 다 내 방으로 와"였다. 1:1은 어떠냐니까 지가 변카사노바란다. 미친 새끼. 얼른 돈 좀 벌어 손 털려고 했는데 돈은 안 벌리고 별 개 같은 놈들만 꼬인다. 지금의 내가 날 봐도 내가 아닌 것 같다. 건설회사 경리 겸 소장비서로 일할 때는 대머리까진 소장 놈의 눈빛이 느끼해서 그렇지 친구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잘 나갔는데... 그때도 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했다. 2차 안 가고 12시 되면 강남의 오피스텔로 퇴근하는 마담 언니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몸이었다. 회사 부도나고 오피스텔은 주인 놈이 경매 처분해서 날라버리고 남은 거라고는 백 벌도 넘는 옷가지뿐이었다.

 

그 남자

오늘은 일도 없고 집에서 빨래나 하고 만화책이나 빌려봐야겠다. 구석에서 썩어가는 양말 짝부터 밀린 빨래가 산이다. 대충 모아서 발로 밟았다. 어차피 봐주는 사람도 없는 거 냄새나지 않을 정도로 얼른 빨아야겠다.

 

그 여자

어제 먹은 폭탄주에 아직 머리가 흔들린다. 어제 그놈이 또 왔다. 변태새끼. 두 장으로 마담하고 얘기 다 됐다며 이차 나가자고 두 시간을 졸라댔다. 다른 룸에 가 있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불러 제낀다. 내가 제 마누라랑 비슷한가 보다. 새벽 3시까지 시달리다 왔더니 속도 머리도 다 죽는다고 아우성이다. 목욕이나 가야지.

 

그 남자

그 여자가 방에서 나왔다. 이사 온 뒤로 처음이다. 어제 늦게 들어오더니 머리도 부스스하고 눈알도 벌건 게 꽤 무리했나 보다. 측은해 보인다.

 

그 여자

수돗가에서 빨래하는 옆방 남자랑 눈이 마주쳤다. 근데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백수 새끼. 네가 더 불쌍하다.

 

그 남자

방에 빨래를 다 늘어놓고 만화방엘 갔다. 18세 미만 구독 불가의 성인만화 10권을 빌렸다. 오천 원이란다. 저런 만화방 하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둑놈 새끼

 

그 여자

목욕탕에 웬 할머니들이 이렇게 많은지 때가 옮겨붙은 기분이다. 가다가 만화방에 들려 순정만화나 몇 권 빌려 가야겠다. 만화 한권에 오백 원 이란다. 도둑놈 새끼. 7권을 빌렸다. 주인이 대머리가 까져서 옛날 건설회사 소장같이 생겼다. 눈빛까지 느끼하다. 뭘 보냐? 십새끼야.

 

그 남자

만화가 꽤 야했다. 옆방 여자가 갑자기 떠오른다. 미친년. 어디 공장에서 곰 인형 눈깔이나 부치지 젊은 년이 술집이냐? 배가 고프다. 라면이나 하나 끓여야겠다. 냄비에 물 받으러 수돗가에 갔더니 옆방 여자가 얼굴이 뽀얘져서 목욕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다. 머리에 물기가 남아 햇살에 반짝인다.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빙긋이 웃어줬다.

 

그 여자

수돗가에서 옆방 남자가 냄비에 물을 받고 있다. 날 쳐다보고는 헤 웃는다. 뭘 봐. 쯧쯧 넋 빠진 놈. 라면을 끊이려나 보다. 열린 문틈 사이로 온 방에 빨래가 걸려 있는 게 보인다. 꼴에 깔끔은...

 

그 남자

내방을 힐끔 쳐다보고 들어간다. 괜히 쪽팔린다. 방에 들어와서 옆방에 들릴까 봐 조심조심 라면을 끓인다. 하도 먹어 별맛은 없지만 그래도 안 먹는 것보다는 백번 났다. 한번 놓친 끼니는 평생 찾아 먹을 수 없다는 게 내 생활철학이다.

 

그 여자

옆방에서 꼼지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괜히 배가 고프다.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은데 배는 고프다. 라면을 하나 끓일까 하다가 따라 하는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나대로 살자가 내 생활 철학이다.

 

그 남자

실업자 쉼터엘 갈까. 일도 없고 돈도 달랑거리고 한 달에 12만 원 하는 이 산꼭대기 월세도 못 줄판이다. 새벽시장에서 벌써 보름째 허탕이다. 집주인이 오늘까지 방세를 내라는데 큰일이다.

 

그 여자

통장에 이제 백만 원이 모였다. 차라리 2차를 뛸까. 이러다가는 평생 가도 이 산꼭대기를 못 벗어나겠다. 골이 아프다.

 

그 남자

돈을 빌리러 옛날 회사 동료를 찾았다. 반갑게 만나주기는 하는데 다들 어렵단다. 밥을 사주며 미안해한다. 내가 더 미안하다고 하며 돌아왔다. 하늘은 졸라게 맑은데 눈물이 나온다.

 

그 여자

출근을 하려는데 옆방 남자가 들어온다. 맥이 쭉~ 빠진 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아직도 일자리를 못 찾았나 보다. 불쌍한 놈. 여자로 태어났으면 나처럼 술이라도 팔지. 핏기없는 얼굴이 안돼 보였다.

 

그 남자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 당장 돈을 주는 일자리를. 집주인은 삼 일 안에 방세를 안 내면 내 보낸단다. 사실 이만한 월세방 구하기도 만만찮은데. 걱정돼서 잠도 안 온다. 담배도 없어 재떨이에서 장초만 골라 피며 새벽까지 뒤척거렸다.

 

그 여자

새벽 2시에 들어왔는데 옆방에 불이 켜져 있다. 웬일인가 싶다. 초저녁부터 코 고는 소리가 내방에까지 진동하는 놈이. 오늘은 술도 별로 안 마시고 팁을 10만 원이나 받았다. 무슨 건설회사에 다니는 놈이라는데 주머니가 두둑한지 돈을 막 뿌려댔다. 느끼하지만 매일 와도 좋은 놈이다.

 

그 남자

오늘은 집주인이 오는 날이다. 돈도 없는데 다시 한 번 사정해볼까. 사정해도 봐줄 놈은 아닌 것 같은데. 걱정돼서 새벽에 텐트도 안 선다.

 

그 여자

아침부터 난리다. 집주인이 올라와서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아마 옆방 남자가 집세를 못 냈나 보다. 그래도 그렇지 xx, 소 새끼가 뭐냐. 이 십새끼야. 그리고 저놈은 배알도 없나.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저렇게 비냐. 속없는 놈.

 

그 남자

주인 놈은 과연 무서웠다. 한마디도 못하고 죄송하다고 내일까지 꼭 드리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만 했다. 옆방 여자가 문을 열고 내다봤다. 그 순간에도 쪽팔려서 등을 돌렸다.

 

그 여자

출근하려는데 옆방 남자가 죄송하다고 인사를 한다. 나한테 뭐가 죄송한 건지 내가 괜히 화가 나서 "돈 십만 원에 그렇게 죄송하면서 세상은 어떻게 살아요"하고 쏘아붙였다. 그 남자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됐네요. 하여튼 피곤하실 텐데 떠들어서 죄송해요"라 한다. 내가 뭘 하는지 아는 눈치다. 괜히 얼굴이 벌게져서 뛰어나왔다. 내가 술집 나가는데 네가 뭘 보태줬냐? 백수 새끼. 욕이 막 나왔다.

 

그 남자

내일은 어떡하든 돈을 만들어야 한다. 아랫동네 십자가가 참 많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하늘이 가까운 동넨데 십자가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낮은 데로만 임하시나 보다.

 

그 여자

일하는 내내 그놈 얼굴만 생각난다. 괜히 부아가 치민다. 내가 그놈보다 더 못한 인간인 것처럼. 안 되겠다. 내가 그놈 방세를 내줘야겠다. 내가 누군데 그딴 놈이 날 가련하게 보냔 말야? 나도 돈 십만 원에 껄떡거리고 아양 떠니까 너도 내 돈 십만원 빌려 쓰고 쪽팔려 봐라! 어제 팁 받은 것도 있으니까 주고 이 찜찜한 기분을 털어야겠다. 술 처먹고 악쓰며 노래하는 놈들이 다 강아지 새끼처럼 보인다. 퇴근해서 언덕으로 오르는데 어디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언 듯 그런 생각이 든다. 남자는 술 처먹으면 개가 되는데 저 개도 술 처먹으면 남자가 될까

 

그 남자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밤새워 뒤척이고 있는데 옆방 여자가 문을 두드렸다. "아저씨 자요?" 문을 열었더니 술에 취한 얼굴로 "한 집에 살면서 그런 일 있으면 말하지 그랬어요" 한다. "뭘?", "자 여기... 급한 방세 먼저 내시고 나중에 갚으세요"하며 수표 한 장을 준다.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휙 돌아서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린다. 꽝. 딸칵.

 

그 여자

내가 너보다야 낫지. 넌 백수에 실업자고 난 직장인 아니냐? 골백번을 되뇌는 데도 스스로 위로가 안 된다.

 

그 남자

돈을 돌려 주려고 문을 두드려도 기척이 없다. 몇 번을 두드리자 “나중에 갚으라잖아요”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댄다. 매서운 여자다. 한참을 실랑이하다 받기로 하고 고맙다고 세 번쯤 인사하고 왔다. 아! 이제는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그 여자

오늘은 옆방 남자가 헐떡대며 들어와 "이거 드시고 나가세요" 하며 봉지를 하나 준다. "뭐예요?", "크림빵하고 우유요. 고마워서요." 빙긋 웃으며 지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와 빵을 먹는데 내가 남한테 고맙단 소릴 언제 들어봤더라 하는 생각이 든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빙긋이 웃는 모습이 착한 놈인 것 같다.

 

그 남자

한 달 방세가 해결되니까 날아갈 것 같다. 게다가 오늘 새벽에는 건물 철거하는 조에 끼어 일당 사만 원을 받았다. 10일간 철거한다고 매일 나오라고 한다. 다 여자 덕분인 것 같다. 들어오는 길에 빵을 샀다. 우유도 한 병 사고. 술집에 나가기는 하지만 마음씨는 고운 여자 같다.

 

그 여자

옆방 남자가 요즘은 얼굴이 밝다. 뭐 좋은 일이 있나 보다. 좋겠다. 어제 먹은 술이 아직도 속을 뒤집는다. 며칠 새 별스럽게 심해졌다. "눈치 없는 년 술 좀 적게 먹고 2차나 뛰어." 오늘도 퇴근하는데 마담이 하는 소리가 뒤통수를 때린다.

 

그 남자

어제 새벽에는 옆방 여자가 아픈지 끙끙 소리를 내며 앓았다. 가볼까 하다가 또 매서운 소리 들을까 싶어 벽에 귀를 대고 걱정만 했다. 새벽에 나갈 때 들려봐야겠다.

 

그 여자

속이 쓰리고 아프다. 며칠째 속을 뒤집더니 위경련이라도 났나. 아침에 병원에 들러야겠다.

 

그 남자

새벽에 나가면서 들리려다 그냥 왔다. 괜히 쏘이면 나만 서럽지 뭐 하며 근데 괜스레 걱정된다. 끝나고 갈 때 과일이라도 좀 사다 줘야겠다.

 

그 여자

병원은 별로 올 일도 없지만 오면 정말 찜찜하다. 의료보험도 없고 있는 거라고는 보건증밖에 없고 의사 놈들은 딱 보면 내가 뭐 하는 여잔지 꿰뚫어 보는 것 같고 접수를 하고 한 이십 분을 앉아 있으니까 들어가란다. 내과 전문의 * * * 박사. 대머리 벗겨진 폼이 우리 가게에 오는 그 변태 놈 같기도 하고 옛날 소장 같기도 하다. 느끼한 놈. 어디가 아프냐고, 어떻게 아프냐, 언제부터냐, 다른 데는 안 아프냐, "야! 이 십탱아 그거 다 알면 내가 의사하지 술집 나가겠냐." 언제 시간 나면 병원 와서 검진 한번 받으라는 말투가 언제 야외로 놀러 갈까?하던 소장 놈하고 똑같다. 개쉐이들. 어디 가서 사우나나 하고 가야겠다.

 

그 남자

과일을 사서 언덕을 올라오는데 그 여자가 앞에 가고 있다. "괜찮아요? 어제 많이 아픈 것 같던데." 빙긋이 웃기만 한다. 얼굴에 화장을 안 했는데 참 뽀얗다. 언제처럼 검은 머리가 반짝반짝한다. 착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나니까 예뻐 보인다. 진짜로 예쁜 것 같다.

 

그 여자

집으로 오는 길목에서 옆방 남자를 만났다. 방세 사건 이후로 이 남자가 참 친절하고 곰살지게 군다. 귀여운 놈이다. 근데 내가 기대했던 아양이나 비굴은 아닌 것 같다. "돈 언제 줄 거예요" 괜히 한번 쏘아본다. "요즘 10일짜리 일 나가요 끝나면 드릴게요 이자까지요..." 생글거리며 말하는 폼이 막일하는 놈 같지는 않다.

 

그 남자

"속 아프시면 제가 죽 끓여 드릴까요? 저 음식 잘해요." 엄청나게 무서운 눈이다. 말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내가 뭐랬다고... 먹지 말면 되잖어. 제기랄... 과일 괜히 샀네.

 

그 여자

눈치가 없는 것인지 머리가 나쁜 것인지 “너 어제 또 술 처먹었지. 내가 죽 줄까" 한다. 개새끼. 너나 처먹어.

 

그 남자

저녁 대신 과일을 먹었다. 속이 시리다. 화장실 세 번째다. 돈을 달라고...  야야야! 준다 줘! 누가 떼어먹냐! 썅! 또옹 누는데도 그 여자 까만 머리에서 반짝거리던 햇살과 뽀얀 얼굴이 생각났다.

 

그 여자

오늘 간만에 변태가 왔다. 오자마자 날 찾는 모양이다. 저 새끼 마누라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양주 두 병 까고 혀 말리는 소리로 노래도 한 시간 불렀다. 혼자 와서 저렇게 잘 노는 놈은 한강 이남에서 저놈밖에 없을 거다. 게다가 오늘은 정말 2:1 2차 가자며 지랄을 떤다. 계산하자니까 현금카드밖에 없다고 시계, 반지, 휴대폰 다 꺼내 놓는다. 애라 이 빙신아. 팁 한 푼 못 건지고 나왔다. 마담까지 성질을 낸다. 이년아 제가 내 서방이냐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그 남자

철거가 다 끝났다. 어디 다른데 일자리 났냐고 묻는다. 다음 주부터 자기 조수로 다니자고 한다. 일당이 아니고 월급으로 줄 테니까 새벽에 인력 시장에 가서 일꾼들 끌고 어디 공사 현장에 가서 소장 지시대로 일 시키란다. 월급이 백이십이란다. 월급이... 날아갈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 내내 옆방 여자의 뽀얀 얼굴과 까만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오늘 돈 갚으면서 고맙다고 밥 사준다고 해봐야겠다.

 

그 여자

아침까지 속 쓰려 뒹굴고 있는데 옆방 남자가 와서 돈을 준다. 고맙다며 밥을 사고 싶단다. 때려죽여 버리려다 참았다. 이 새끼야 나도 저녁 먹을 수 있어 저녁 시간 낼 수 있다고. 씨발새끼

 

그 남자

죽을 뻔했다. 저녁에는 바쁘시니까 점심 먹으러 갈래요 난 그 소리밖에 안 했는데 그 여자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혼자 가서 배불리 먹어요"란다. 뭘 먹는 걸 되게 싫어하나 보다. 첨 봤다. 먹는 거에 저렇게 신경질 내는 여자. 다음부터는 먹자는 소린 말아야겠다.

 

그 여자

"속이 성하겄냐. 어이그 춘향이 났다. 춘향이 났어! 미친년아.", "언니 나 먼저 좀 들어가면 안 될까?.", "가긴 어딜 가 오늘 안 그래도 5번, 8번 둘 다 안 나왔는데 술 처먹지 말고 딴 애들처럼 아양 떨다 2차나 가!". 저 년 아버지는 이차 가서 저년을 낳았나 보다. 내일은 정말로 병원에 가야겠다.

 

이 산꼭대기 동네에 온 지도 벌써 8개월이 됐다. 술집을 그만두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지만, 일자리가 없다. 마담한테서는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다시 나오라고 전화가 온다. 어떡할까. 걱정이다. 돈도 없는데 하지만 다시 나갈 수는 없다.

 

그 남자

옆방 여자는 요즘 매일 집에 있는다. 얼굴이 파리해졌다. 이제는 예전처럼 쏘아대지도 않고 말도 곧잘 건넨다. 요즘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

 

그 여자

방세가 없다. 통장에서 백만원 찾아 마담한테 빚진 거 갚고 병원비 몇 번 내고 나니까 이제는 달랑달랑한다. 주인 놈이 방세 재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옆방 남자는 요즘 매일 출퇴근을 한다. 일자리가 생겼나 보다. 부럽다. 가끔씩 먹거리를 사다 주고는 빙긋이 웃는 모습이 참 환해 보이고 귀엽다.

 

그 남자

주인 놈이 올라와 한바탕 난리를 쳤다. 방세 내라고... 예전 같지 않게 그녀는 듣고만 있었다. 주인 놈이 내려가고 조금씩 그녀의 어깨가 들썩거리더니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우나 보다. 속이 아팠다. 주인놈 면상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쌍놈의 새끼

 

그 여자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다. 근데 돈이 없다. 이제 아픈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 방에 누워 천장 벽지의 꽃무늬를 헤아려 본다. 눈물이 난다. 병원엘 꼭 가야 하는지...

 

그 남자

현장 소장 놈이 월급에서 20%를 떼고 월급봉투를 준다. 20%는 지하고 십장하고 5:5로 먹는 소개비란다. 개 쉐이들. 그래도 월급이라고 받아본 게 몇 달만인지 돌아오는 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 여자

옆방 남자가 방세 내라며 돈을 준다. “그러면서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너무 안 좋아요” 한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내일은 쉰다면서 놀러 가잰다. "우리도 아래 동네 사람처럼 하루 살아볼래요?" 그 남자의 눈은 어린 송아지의 눈처럼 슬프다. 고맙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않고 그냥 받았다. 근데도 그의 눈은 내 속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가끔은 입으로 하는 말보다 눈으로 하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을 수도 있구나....

 

그 남자

영화를 봤다. 무슨 병인가에 걸린 남편이 아내를 위해 편지를 계속 부치는 영화였다. 난 사실 영화를 보면 거의 잔다. 한참을 자다가 옆을 보니까 그녀는 눈물이 그렁한 눈동자로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흘리는 눈물보다 더 슬픈 모습이었다. 손을 꼭 잡아줬다. 가만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를 보는 순간 뭔가가 가슴에 들어와 콱 박혔다.

 

그 여자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공원에도 극장에도 거리에도 사람들로 붐빈다. 모두 기분 좋은 얼굴들이다. 그 남자는 극장에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언젠지도 모를 어릴 때 어린이 날이라고 내 손을 잡고 대공원으로 데리고 가셨던 아버지의 손같이 편안했다. 하루를 같이 다녔는데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편안했다.

 

그 남자

그녀는 큰 소리로 웃지 않는다. 빙긋이 미소만 짓는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그녀가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내가 편하다고, 진작에 친했으면 좋았을 텐데 한다. 지금부터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안 했다.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 여자

좋은 사람이다. 오랜만에 술집 아가씨가 아닌 그냥 아가씨로 거리에 나섰다는 게 좋았다. 내가 전에 하던 일을 알 텐데 날 좋아해 줄까? 아파서 병원에 다니면서 맘이 약해진 것인지 착해진 것인지 옆에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 남자

그녀를 업고 병원에 왔다. 밤새 끙끙대더니 새벽에 내 방문을 열고서는 땀에 전 얼굴로 쓰러졌다. 한참이나 걸어 올라오던 언덕을 나는 듯이 내달렸다.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주문처럼 외면서 안경 쓴 대머리 의사는 아홉 시가 넘어서 왔다. 간호사들이 링거를 꽂고 응급실 복도로 침대를 끌고 왔다. 자리가 없으니 여기서 기다리란다. 보호자를 찾는다. 내가 그녀의 보호자가 됐다. 만성 위염인데 심각한 상태라서 입원을 하란다. 한 달 이상 약물치료를 해야 한단다. 그녀는 계속 퇴원한다고 고집이다.

 

그 여자

눈물이 났다. 고마워서... 그 남자는 "가만히 좀 있어요" 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고는 "입원시켜 주세요" 하며 수속창구로 간호사와 함께 갔다 왔다. "다음에 나 아프면 업고와 줄 거죠? 밥 좀 많이 먹어요. 몸이 솜뭉치 같았어요", "나 지금 출근해야 하니까 이따 저녁에 올게요."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의 등이 넓어 보였다.

 

그 남자

받은 월급으로 그녀의 병원비를 냈다.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정말로 그녀의 보호자가 된 기분이다. 병원비가 만만찮을 것 같아서 걱정은 되지만 잘 될 것 같다. 소장에게 돈이 좀 필요하다고 했더니 좀 더 받을 수 있는 일을 맡기겠다고 며칠만 기다리라 한다.

 

그 여자

저녁때 온다고 한 그의 말을 곱씹는다.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남자

병원에 누워있는 그녀와 많은 얘길 했다. 그녀는 거의 내 얘기를 듣기만 하고 난 계속 떠들어 댄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 여자

그 남자는 내 옆에 앉아 내가 잠들 때까지 쉴 새 없이 자기 얘길 한다. 옛날 다니던 회사, 사람들 지금 하는 일, 나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도 묻지 않고...

 

그 남자

오늘 소장이 새로운 일을 맡겼다. 구청, 동사무소에 가서 적어주는 사람들 등본을 다 떼어오란다. 한 사오백 명 쯤 되니까 2주일 동안 그것만 하고 바로 퇴근하란다. 식은 죽 먹기다. 게다가 그녀에게 더 빨리 갈 수 있어서 아주 잘 됐다. 그녀도 좋아한다

 

그 여자

이제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그 사람을 기다린다. 며칠째 동사무소로 출근한다고 양복을 입고 나갔다. 양복 입은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넥타이를 골라주고 매어주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혼자서 웃는 날 보고 간호사가 다가와서는 "아저씨가 참 다정하세요. 좋으시겠어요."한다. 부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만 발개졌다.

 

그 남자

이제 며칠 후면 그녀가 퇴원한다. 의사가 생각보다 경과가 좋다며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해도 된단다. 보호자란에 이름을 쓰고 관계를 적어달라길래 남편이라고 적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등본을 다 떼다 줬다. 소장이 수고했다며 돈을 준다. 월급날도 아닌데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준다. "수고했.어" 며칠 뒤에 철거 한 건 끝나면 더 준다고 한다. 병원비가 마련됐다. 모든 게 다 잘되어 간다.

 

그 여자

내일이면 퇴원이다. 닭장 같은 집이지만 집에 간다니까 날아갈 것 같다. 그 사람이 내일은 바빠서 못 온다고 병원비는 다 계산했으니까 혼자 가 있어라 한다. 일 끝내고 일찍 가겠다고 데이트 한번 변변하게 못 했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애인이 되어 있었다.

 

그 남자

소장이 일꾼들을 데려왔다. 노가다꾼이 아닌 것 같다. 몸에 문신한 놈이 거의 다. 뭘 하려고 이런 놈들을 불렀을까? "오늘 미적거리지 말고 한 번에 밀어 잘 안돼서 신문 나고 뭐하고 하면 골치 아파." 건물 철거가 아닌가 보다. 아무려면 어떠냐 끝나고 보너스까지 준다니... 그녀가 퇴원해 있을 테니까 일찍 끝내고 나와서 외식하자 그래야겠다.

 

그 여자

오전에 마지막 검진을 받고 병원을 나왔다. 햇살이 눈부시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그가 있었으면 했지만, 집에 가서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밥을 해둘까? 반찬은 뭘 하지? 내가 밥이며 반찬이며 만들어 본 적이 있나? 그래도 정성이니까 먹어는 주겠지? 시장에 들러서 장을 봐서 가야겠다.

 

그 남자

대절한 관광버스에 다 타라고 한다. 소장이 안 가니까 내가 현장 책임자란다. 버스에 오르려는데 소장이 두둑한 하얀 봉투를 준다. 현장 책임자란에 내 이름을 적고 일이 끝나면 회사로 오지 말고 바로 퇴근하란다. 좋긴 한데 소장의 표정이 어쩐지 야비해 보인다. 찜찜하다. 깡패 새끼들의 인솔자가 된 것도 그렇고

 

그 여자

시장은 다 봐다 났고 이따가 저녁때쯤 반찬 만들고 밥도 지으면 된다. 그가 주고 간 키로 그의 방에 들어갔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앉은뱅이책상 위에 그가 써 놓은 편지가 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당신이 아플 때, 힘겨울 때, 울 때, 웃을 때, 밥을 먹을 때, 잠을 잘 때, 잠을 안 잘 때 나는 항상 옆에 있겠습니다.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당신에게 방세를 빌렸을 때부터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당신이 좋은 사람인 걸 그때 처음 알았죠. 당신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아파서 끙끙 앓다가 눈을 뜨면 곁에 있는 당신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눈물이 그 편지 위에 점점이 퍼진다.

 

그 남자

버스에서 내린 곳은 우리 동네 언덕 밑이었다. 몇 달 전부터 재개발이네 뭐네 하며 동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깡패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동네에 올라섰다. 말할 틈도 없이 뭉둥이, 야구방망이, 각목으로 무장한 깡패들은 입구의 집들부터 작살을 낸다. 아줌마들을 밀치고 창문을 부수고 부엌살림을 엎었다.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순식간에 싸움이 났다.

 

그 여자

갑자기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나더니 창문 깨지는 소리, 악쓰는 소리, 아이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 뭔가? 슬리퍼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얼굴 반을 손수건으로 동여맨 덩치들이 이집저집 유리창이며 가재도구들을 깨부수고 있었다. 그 중앙에 수건도 안 쓴 그가 서 있었다.

 

그 남자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오늘 그녀가 퇴원했는데 우리 방 창문이 깨어졌다. 햇살을 받고 선 그녀가 보였다. 깡패 한 놈이 그녀의 머리를 휘어잡고 던진다. 까만 그녀의 머리가 공작새 꼬리처럼 펴지며 그녀가 넘어졌다. 그 위로 소장 놈의 느끼한 웃음이 덮쳐온다. "빙신 새끼" 하며 뛰어갔다. 그녀에게 발길질하던 깡패 새끼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모두 죽여버린다.", "뭐야 저거, 회사에서 나온 놈 아냐?", "저 새끼 돌았나" "저거부터 밀어버려!"

 

그 여자

그가 보였다. 내게로 뛰어오며 각목을 휘둘렀다. 내게 발길질을 하던 깡패가 쓰러진다. 하지만 곧 그의 머리에 몸뚱어리에 무수한 각목이 주먹이 날아들었다. 머리에서 피가 터졌다. 눈부신 햇살 아래 붉은 장미 수천 송이가 뿌려지고 그가 쓰러졌다. 내 바로 옆에...

 

우리 동네 재개발 아파트 현장 앞에는 포장마차가 있다. 예쁘게 생긴 젊은 아줌마와 눈이 풀린 체 언제나 의자에 앉아 "그녀가 퇴원했다."만 되풀이하는 바보 아저씨가 같이하는 포장마차다. 아저씨는 온종일 포장마차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녀가 퇴원했다"만 되뇐다. 아줌마는 그런 아저씨를 손수레에 올려 앉히고 매일 언덕을 오르내린다. 언젠가 술집 여자 같은 아줌마가 와서 그녀에게 마구 욕을 퍼붓고 울면서 갔다. "이 미친년아, 그래 기껏 이 짓 하며 살려고 저 멍충이 먹여 살리려고 그만뒀냐, 도망가 혼자 살아! 지금 뭘 해도 이것보다야 못 하것냐?이 얼빠진 년아" 그 여자가 가고 난 후 그 포장마차 아줌마는 하늘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나는 아직 그가 날 사랑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지 않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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