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거리 9
우리의 거리 9
현수는 차갑고 뾰족한 무언가로 심장이 찔린 듯 아팠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그녀 또한 현수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고 있었다. 2호선 열차 안에 있는 모두가 현수를 숨죽인 채 바라보았다.
“다음 역은 OOO, OOO 역입니다.”
안내 방송이 들려오고서야 둘은 눈물을 훔치고 멋쩍은 미소와 함께 작별했다. 먼저 내린 현수는 어두운 승차장에서 밝은 하늘 밖으로 사라지는 열차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현수의 깜짝 방문에 놀란 어머니를 모시고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회를 비롯해 여러 가지 반찬이 많았지만 아들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고 당신은 샐러드로 배를 채웠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아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 어머니의 희생은 여전했다. 식사를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예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나 집에 없으니까 편해?”
“그럼 이 새끼야, 네 방 창고로 쓰니까 집이 다 넓어졌어. 아주 편하다!”
“그렇구나.......”
진심이 아닌 줄 알지만 왠지 서운했다.
“미친놈. 삐쳤어?”
“아니-. 누가!”
“어휴 그리 속이 좁아서 누가 시집오겠냐.”
“결혼 안 해. 엄마 같은 여자 만날까 무서워서.”
현수는 어머니에게 이름 대신 자주 욕설로 불리곤 했다. 귀여움이라고는 없는 ‘병X, 머X리, 미친놈, 개새끼.’ 가 주를 이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런 호칭이 무척 싫었다. 욕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억척스럽고 험난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아서였다.
“삐돌이, 왜 안가? 여태.”
현수의 어머니는 집 근처 정류장에 멈춰 서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엄마 돌아가는 길 쓸쓸하잖아.”
“칫....... 지랄.”
난폭한 단어와는 달리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현수야.......”
“응?”
“진짜 아직 맘에 드는 여자 없어?”
“응.”
“세상 못된 년들 많아. 위험한 년들도 많고. 그에 비해 우리 아들은 너무 약하고, 착해.”
“그래?”
현수는 지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이 엄마 닮아서는 겁도 많고, 마음도 여리고.......”
“........”
“진짜 좋은 여자가 나타났을 때는 가시 세우지 말고.”
“내가 왜 그러겠어.......”
“가시는 상처받은 약한 곳에서 돋아나는 거야.”
“응.”
“우리 아들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 왜 뜬금없이 욕하다가 그런 얘기해~!”
현수는 집 앞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누르고 어머니의 주머니에 목걸이가 든 상자를 찔러 넣고 뒤돌아 정류장으로가 버스를 탔다.
현수는 둘만의 거리에서 성현과 만났다.
“어머니 건강하셔?”
“응. 너희 아버지는?”
“너무 건강하시지.”
“근데 너 누나는 왜 때렸냐?”
“아버지한테 대들었어. 그뿐이야.”
“........그래.”
“납득 안 가도 별 수 없어. 우리 집 구조가 그래.”
“근데 왜 미움받고 쫓겨 다녀.”
“내심 날 자랑스러워하실 거라니까?”
“죽어 제발.”
한 주 뒤,
“바람이 이제 따스한 게 아니라 뜨거워.”
얇은 양복을 벗어 대충 벤치에 던지고 현수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넌 더위에 쥐약이지. 하긴 이제 꽃도 다 떨어졌네. 여름인가 봐.”
둘은 손부채질을 하며 정면에 기운 없이 호객행위를 하는 아가씨를 보았다.
“쟤도 덥나 봐.”
“잠깐, 쟤 걔잖아.”
그녀는 2주전 우진의 직원들에게 끌려가던 소녀였다.
“네가 만든 계획에 들어와서 착실하게 일하고 있네. 몸 파는 일인데 착실하다고 하면 웃기려나?”
성현은 짓궂은 농담을 하며 현수에게 말했다.
“3신데 안가?”
“신경 쓰여서, 먼저 가. 금방 갈게.”
“그래.”
현수는 소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겁먹은 듯이 팔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성현은 지원의 가게로 향했다.
“왔니.”
텅 빈 가게에서 술잔을 닦는 지원은 성현을 보자마자 지겨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얼굴만 봐도 그러네.”
“딱히 웃으면서 볼 사이는 아니잖아.”
“내가 뭘 어쨌는데.”
“그날 이후로 계속 치근덕대잖아.”
“아- 그날~. 우리 섹스 한 날?”
텅 빈 가게가 성현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미쳤어?”
“왜 사실인데. 나는 아직도 네가 내던 신음, 네 움직임 다 기억하는데.”
“내 의지랑 상관 없었어.”
“과연 그럴까? 다시 확인해 볼까?”
“작고 처량한 거시기를 내가 또 겪고 싶을까 봐?”
“이게!”
성현은 어금니를 악물고 팔을 걷었다.
“왔어?”
가게의 흡연실 문이 열리고 우진이 차분하고 다가와 성현 앞에 놓인 술잔에 어두운 색의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마셔.”
우진도 잔을 들고 성현의 잔에 건배를 했다.
“인생에서 뭐가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 같니?”
우진은 성현에게 물었다.
“몰라. 나는 그냥 재미있으면 돼.”
“재미?”
“응. 근데 그건 왜?”
“줄 수 있으면 주려고. 우리 사랑스러운 조카한테.”
“.........”
살의 가득한 표정에 성현은 영문도 모른 채 겁을 먹었다.
“넌 어떠니?”
우진은 지원에게 물었다.
“나.”
“너?”
“응. 난 내가 가장 소중해. 반드시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될 거야.”
“사랑.......”
“응. 안 어울려?”
“둘이 떡 칠 때는 사랑은 있었고?”
“어?”
“묻잖아!”
우진은 거칠게 일어나 든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현수는 일을 마친 소녀와 공터에 단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눈에 띄게 야윈 그녀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현수가 제안한 방법으로 모집한 그녀는 원래 우진 아래 있던 아가씨들의 텃세에 영업은 힘들어지고, 과도한 수수료로 돈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현수는 받았던 돈 봉투를 떠올리며 후회와 죄책감이 들고 수치스러웠다. 그 시스템을 제안한 게 현수라는 것을 알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현수의 숨은 땅으로 꺼지듯 무거워졌다.
“현수!”
성현의 다급한 외침이 멀리서 들려왔다.
“왜 그래.”
“나 뒤질 뻔했어.”
“왜?”
“삼촌이 미쳤어.”
“우진 삼촌이? 왜?”
“아 몰라.”
성현은 얼버무리며 현수의 손에 고철 파이프를 쥐여주었다.
우진의 직원들이 뒤따라 공터로 들어왔다.
“거기 도령 한 명만 데려가면 되니까. 다치기 전에 넘겨.”
트레이닝 차림의 남자들이 공터에서 점점 포위망을 좁히며 들어섰다.
“안돼요. 얘랑 나랑 세트라고 보시면 돼요.”
현수는 파이프를 세게 쥐어 자세를 가다듬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