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거리 6
우리의 거리 6
“라즈베린가 그거 라던디?”
“라즈베리?”
“왜 있잖여. 여자 좋아하는 여자.”
우진의 사무실로 통하는 좁은 계단 아래에서 남자 둘이 대화하는 목소리가 올라왔다.
“레즈비언이요?”
“응, 겨겨~그거.”
꽤 낮은 계단 아래로 머리를 밀고 묻는 현수에게 험상궂은 남자가 무릎을 치며 대답했다.
“누가요?”
“술 만드는 처자.”
“아아. 근데 그게 왜요?”
“그런 일이 있어. 근데 오늘은 도령 혼자네?”
“그러네요.”
“아무튼 우린 순찰 나가 볼라니께.”
현수의 대답에 흥미가 없다는 듯 남자는 계단을 올라갔다.
현수는 호기를 뒤로하고 우진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려 손을 들었다. 작은 문틈을 통해서 크게 다투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잠깐 바람 쐬다가 다시 올까 생각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여자 바텐더가 서 있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을 하고 매서운 눈으로 현수를 노려보았다.
보라색 니트를 벗어 팔에 걸치고 얇은 민소 티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은 갈색으로 된 수많은 자해 자국으로 빼곡했다.
“뭘 봐.”
바텐더는 당장에라도 할퀼 것 같은 표정으로 서서 말했다.
“아아.”
도대체 어떤 사연으로 팔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을까. 현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길을 내주자 바텐더는 사무실을 짧게 뒤돌아본 후 나갔다.
“들어와.”
우진의 머리는 쥐어 잡힌듯했고 오른쪽 볼에는 빨갛게 손자국이 있었다.
“성현이는?”
“아픈가 봐요.”
“진짜? 어릴 때 감기 한 번 안 걸리던 녀석인데.”
“아니요.”
“그럼?”
현수는 친구를 팔 수 없다는 것보다. 우진을 속이기 어렵다는 답을 내렸다. 그래서 성현의 상황을 짐작하는 곳까지 설명했다.
“일도 내팽개쳐놓고, 떡을 치러 가셨다.......?”
“사랑일 수도 있잖아요.”
“사랑이라.......사랑 좋지.”
우진은 뺨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너는 연애 안 하냐?”
“해야 합니까?”
“왜, 한참 지나가는 여자만 봐도 쿠퍼액이 막, 가랑이 속에서 낭자할 나이인데.”
“그보다 어제 제가 말씀 드린 건 생각해보셨어요?”
“아, 그 좋은 생각이라는 거?”
“네.”
“시간이랑 돈은 좀 들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현수의 제안은 관리인 없이 홀로 성매매를 하다 피해를 보고 악순환을 반복하는 여자들을 우진의 사무실에서 거둬 관리하자는 것이다. 범죄가 일어나는 위험을 줄이고 번거로운 수색을 없애고, 구인할 필요 없이 시장을 점거하는 것이다.
“근데 애들이 순순히 하겠냐. 내가 요구한 수수료 떼는 게 싫다고 도망가면?”
“일단 소문을 퍼뜨려야죠.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 여자들이 많다면서요.”
“그래도 안 되면? 업소에서 일하겠다는 애들 인터넷에서만 고용해도 충분한데 괜히 길바닥 출신 주워다가, 도망가면 우린 교육이니 뭐니 시간만 쏟다가 손해 보는 거야.”
“이 구에 웬만한 야간 경찰은 우리 편이라면서요. 도망가면 수배를 하든지 하면 되죠. 감옥 가거나 몇 백만 원 물어줘야 한다는데, 몇만 원 떼어주고 일하기 싫어서 삼촌이라면 도망가겠어요?”
“오호.......이놈, 착한 척은 다 하더니, 나보다 못된 놈 아니야?”
우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진이 제안을 받아들인 후, 현수는 업무를 나갔다. 첫날인 어제와 달리 가게의 잡업이 늘어서인지, 성현의 부재 때문인지 일이 더 고되게 느껴지는 듯했다. 술 상자를 나르거나, 업소 관리하며 돌아다닌 탓에 한 벌밖에 없는 양복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눌어붙은 먼지를 대충 털고 기지개를 켜니 밤의 일과도 끝나는 듯했다. 오래된 건물의 비상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봄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바라보았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오로라처럼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며 현수는 담뱃갑을 꺼냈다.
“아.”
빈 담뱃갑을 현수는 허탈하게 바라봤다.
“X발.”
어두운 담벼락 아래로 빈 담뱃갑을 던졌다. 담 너머 고양이들이 놀랐는지 빠른 실루엣으로 흩어졌다.
“으이그.”
누군가 한심하다는 목소릴 내며 현수의 등을 때렸다. 현수는 성급히 뒤돌아보았고, 바텐더가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보는 듯한 표정으로 현수를 보고 있었다.
“찰지구나. 파하핫!”
바텐더는 뭐가 재밌는지 혼자 웃었다.
“뭐예요?”
“찰지구나 몰라요? 유행언데.”
“몰라요.”
“모르시는구나.~”
그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아깐 미안했어요. 너무 열이 받아서, 아! 물론 그쪽 말고 사장님한테.”
바텐더는 커다란 잔에 든 맥주를 내밀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현수가 올라온 계단은 그녀가 일하는 2층의 흡연실 겸 비상계단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으면 통성명할까요? 지원이에요. 전지원.”
“아, 전 최현수입니다.”
“그래요. 현수씨, 마시고 잔은 가져다줘요.”
현수는 뒤돌아 가는 지원을 다급하게 불렀다.
“아, 잠시만요.”
현수가 그녀를 부른 이유는 우진과 다툰 일이 궁금했는지, 아니면 길고 따분했던 성현이 없던 밤을 채우고 싶어서인지 몰랐다. 그 모든 게 핑곗거리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까지 가냘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저 술 못 마셔요.”
현수는 손에든 잔을 다시 지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불안한 새벽바람이 그녀의 노란 머리카락을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