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을 가진 한 방화범의 사연 1
관음증을 가진 한 방화범의 사연 1
"왠 비가 이리 많이 온다니.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마침 예약자가 없었기에 인턴 선생 세 사람과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비에 옷깃과 완장이 조금 젖은 듯 한 경찰이 한 남자를 데려왔다. 데려온 남자는 50대 초반으로 보였고, 여름 장마철인데도 불구하고 두툼한 갈색 가을 점퍼를 입고 있었다. 역시 빗물로 인해 그의 갈색 점퍼도 군데군데 물 얼룩이 져 있었다. 경찰이 묻는다.
“여기가 성심리상담소 맞죠?”
“아, 네. 그렇습니다.”
초짜 인턴이 벌떡 일어나 반색을 한다.
“다름이 아니라... 이 사람이 모텔에 불을 질렀지 뭡니까.”
경찰이 데려온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흐리멍덩한 눈빛, 남루한 옷차림 등 외모를 봤을 때 약간의 지적 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모텔에 아무 이유 없이 불을 질러서 잡혀 왔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서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데려왔습니다. 모텔 손님이 빠구리를 치지 않았다나 뭐라나. 그래서 화가 나서 불을 질렀다는데... 나 원 참, 그게 이유가 됩니까? 그래서 검찰에 송치되기 전에 선생님께서 정확한 범죄 사유를 파악해주셨으면 해요. 그래서 데려왔습니다. 가능하시겠죠? 성심리를 전문으로 하는 상담소가 여기가 제일 유명하더라구요. 아무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경찰은 그 남자를 내게 상담 맡기고 상담실 바깥에서 대기하기로 하였다. 용의자가 모텔에 불을 지른 혐의는 스스로 인정했으나 왜 불을 질렀는지 그 이유가 도무지 납득되지 않아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모든 범죄 행위에는 범죄 이유가 있는데 지금 데려온 이 사람은 모텔 한 채를 태워 타인에게 극심한 경제적 인명적 피해를 입게 해놓고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엉뚱한 이유만 대는 이유를 알고 싶다고 했다.
정말 회까닥 미친 것인지, 아니면 고도의 위장술을 발휘하는 것인지,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심각한 변태적 성심리가 결부된 것인지 범죄 심리 검사와 범죄 이유를 알아봐달라고 하는 경찰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나이는 52세, 혼자 사는 남자라고 하였다.
남자를 상담실로 안내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상담소 소장 문지영입니다.선생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유영진입니다.”
“아, 유영진 씨. 어쩌다 모텔에 불을 지르게 되셨는지요.”
남자는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하다가, 이내 턱을 빳빳이 세우고 내게 당당하게 말했다.
“빠구리를 안 쳐서요..”
“누가요?”
“모텔 손님이요.”
“모텔 손님이 빠구리를 안 쳐서 화가 났다는 건가요?”
상담사는 내담자와 비슷한 눈높이에서 비슷한 어휘를 써야 내담자를 개방시키는 것이 더 쉬워질 수 있다. 내가 잘 쓰지 않는 용어였지만, 유영진 씨의 마음을 빨리 열기 위해서 약간 불편한 용어를 썼다.
“네...”
“그게 왜 화가 났을까요? 혹시 그 모텔 손님은 유영진 씨가 평소에 알고 계시던 분인가요?”
“아니요.”
“유영진 씨가 생각하는 모텔은 어떤 곳인가요? 무엇을 하는 곳이에요?”
“빠구리 치는 곳이요.”
“음, 그렇다면 꼭 모텔은 남녀 사이에만 투숙을 할까요? 업무상 출장 때문에 남자끼리 와서 잠을 청할 수 도 있고, 아예 그곳에서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 않을까요?”
“뭐니뭐니해도 모텔은 빠구리를 치는 곳입니다. 모텔에 가서 그 짓을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말하는 동안에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는 듯해 보였다.
보통 범죄심리학에서는 내재된 화가 범죄행위를 통해서 발산이 되는 편인데, 유영진 씨의 화는 방화행위로도 아직 해소되지 않은 듯 보였다. 그것이 뭘까. 왜 그리 화가 났을까.
지인도 아닌 누군가가 모텔에서 섹스를 안 했다고 해서 불을 지르다니...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범행이유인데다가 계속 똑같은 진술을 반복하는 그에게 경찰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된 것이다. 아직 성인용 웩슬러 지능검사 전이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약간의 지적 장애도 의심되었다. 아니면 고도로 연출된 바보 연기일 수도 있다.
나는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닌지부터 지능검사로 알아보려고 생각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지능검사는 이럴 때 별로 효과가 없다. 그가 만약 지적 장애를 연출하는 것이라면 지능검사지에도 역시 연출할 것이므로 그렇다.
수십 장의 설문용 심리검사보다, 지금 필요한 건 그와의 끊임없는 면담과 색채심리검사이다. 색채심리검사는 트리 모양으로 된 용지에 12가지 컬러스티커를 붙여서 내담자의 현재 심리를 파악해내는 방법이다. 비교적 빠르고 쉽게 내담자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라 지적장애가 있는 이나 시간이 다소 부족할 때 혹은 따분한 검사지를 싫어하는 성인, 청소년, 아동에게 주로 쓰는 방법이다.
유영진 씨 앞에 검사지를 내밀었다.
“자, 유영진 씨. 이제부터 여기에다가 이 12가지 스티커를 붙이는데요. 1번부터 12번까지, 순서대로 붙이시면 됩니다. 만약 지금 빨간색이 제일 눈에 들어온다 싶으면 1번에 빨간색을 붙이시면 되구요. 두 번째로 붙이고 싶은 색은 2번 칸에, 세 번째로 붙이고 싶은 색은 3번 칸에 붙이세요. 붙이고 싶은 순서대로 총 열두 개를 이 용지에 붙여주세요.“
유영진 씨는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열심히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분석 결과 그의 본 모습은 워낙 불같고 충동적인 에너지가 있었으나 현재 어떠한 사유로 인하여 더욱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고 약간의 분노조절장애 증상도 보여졌다. 분노 통제가 안 돼 계획 없이 그저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실행해 버린 상태였다. 그러나 실행 후에도 불안감과 화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고 상담가로서 현재 그에게 결핍되어 있는 심리적 안정감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그의 제대로 된 진술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고 제대로 법의 심판을 받고 죄의 댓가를 치를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제는 지속적 상담을 통해 그의 ‘화’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볼 차례이다. 그는 경찰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는 도중 엉뚱한 진술만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바람에 여기에 오게 된 것이었는데, 서울지검에 송치되기 전 범죄 이유를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끔 조사해서 넘겨야 하기에 경찰 측에서 더욱 급하게 이 사건을 의뢰한 것이었다. 나에겐 3일 안으로, 하루 두 시간씩. 그의 범죄 동기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