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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더블 데이트 - 17부(마지막부)


나의 더블 데이트 - 17부(마지막부) 

 

5분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들은 거실의 참극을 보고도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개중에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정석에게 다가와 말했다.

"요금이 추가되겠군요. 박 상."

어딘가 다소 어눌한 한국말. 정석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정석의 뺨을 두어번 쳤다. 아주 세게는 아니지만, 넋이 나가있던 정석의 주의를 돌이키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걸 이리 주시죠."

정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린 권총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걸고 품 안에 넣었다. 그가 일본말로 무어라 지시하자 남자들은 준비해 온 자루에 인애의 시체를 넣고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정석이 밖으로 나오자 키 작은 남자는 따라 나왔다. 복도의 창문 하나를 연 정석은 거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참을 왝왝거렸다. 실제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간신히 머리가 차분해진 정석은 남자에게 물었다.

"총 소리가 났는데... 괜찮겠습니까? 쿠보 상."

쿠보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나 더 꺼내어 정석에게도 권한다. 정석은 받아들였다. 정석이 담배를 빨아들이는 것을 보며 쿠보는 말했다.

"애초에 총을 빌려 드린 것은 접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두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아까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하시군요."

"그야 뭐, 일상이니까."

씨익 웃어보이기까지 하는 쿠보의 얼굴을 보며, 정석은 피와 주먹의 세계에 사는 남자의 얼굴은 이렇구나라는 걸 기억하기로 했다. 정석은 아직도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손이 계속 떨렸고, 몸에서는 끝없이 오한이 일었다. 복도 너머 야경을 보며 담배를 다 피울 때쯤 집 안에서 누군가 나와 쿠보에게 뭔가를 건넸다. 몇 개의 편지봉투였다. 쿠보는 겉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정석에게 넘겨주었다.

"방 안에서 찾았다고 하는군요. 집주인에게 온 편지인 듯 합니다."

정석은 봉투를 받아보았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씨체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정석은 이전까지 뭔가 아련하게 머리 속을 흘러가던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읽지도 않고 그대로 품에 쑤셔 넣었다. 쿠보는 그런 정석을 한번 쳐다보곤 말했다.

"오늘 하루는 어디 가지 말고, 누구를 만나지도 말고 저희가 모시는 대로 차를 타고 가서 숙소에만 계십시요."

"숙소에만요?"

 

 

"술을 좀 넣어드리겠습니다. 독한 걸로.... 그게 도움이 될 겁니다."

쿠보의 말대로, 정석은 자신이 묵던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쿠보의 부하들이 문을 지켰다. 정석은 나갈 생각도 없었고 쿠보가 가져다 준 독주를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정석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내리 이틀을 술만 마셨다. 내쉬는 숨까지 알코올로 물들인 후에야, 그는 술을 끊고 식사를 시작했다. 정석은 쿠보에게 뒷처리를 일임하고 일본을 떠났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았다. 아이들의 방문을 열어 확인해보니 모두 침대 위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정석은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태근의 이불을 바로해주고 방에서 나왔다. 안방에 들어서자, 코트를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미자가 보였다.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정석을 마주보았다.

"오는 거 보고, 가려고 했어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어디든지요. 아마도 아저씨는 이제 내가 곁에 있는 걸 받아들이지 못할테니까."

정석은 일본에서의 일을 미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정석이 일본으로 가기도 전에,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석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정석은 자신의 추측을 미자에게 털어놓는다.

"인애를 일본으로 보낸 건, 자네의 판단이었나?"

"네."

이번에도 대답은 빨랐다. 정석의 질문이 뭔지 알고 있다는 듯 너무도 선선히 인정해버렸다. 쿠보가 발견한 편지는 미자가 인애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미자는 자신이 뺑소니 사건을 모두 목격했으며 그 범인이 인애라는 것을 이미 알고있다는 뉘앙스로 편지를 보냈다. 정석이 행하는 그녀의 추적에 대한 정보를 흘리면서 인애의 지속적인 도망을 도운 것도 미자였다.

"왜 그랬지?"

"아저씨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요."

"인애가 날 죽인다고 했던 이야기는?"

"네. 거짓말이었어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미자의 얼굴을, 정석은 후려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에겐 가장 궁금하면서, 또한 가장 힘겨운 질문이 남아있었다. 

"자네가 가진 그 아이는........."

정석은 목이 바싹바싹 타오르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꺼내기가 이토록 힘겨운 줄 몰랐다.

"정말, 내 아이인가?"

"네."

 

 

"거짓말 하지마!!!"

분을 참지 못한 정석은 벽에 걸린 거울을 후려쳤다. 와장창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져나갔고 정석의 손에서는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인애는... 인애는 내가 무정자증이라고 했어. 씨없는 수박이라고 했다고!"

흥분한 정석과 달리 미자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정자증이라고 해도, 정자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에요. 수가 지극히 적은 거지. 운이 좋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어찌되었건!"

"이상하네요."

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정석에게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어 정석을 손을 감아주기 시작했다. 왜 붕대를 주머니 따위에 넣고 있는지, 정석은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미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묻기 시작하면, 그녀를 상대하는 자신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궁금할 지경이니 말이다.

"아저씨는 태근이와 효진이를 결국 아저씨 아이로 여기기로 결심했어요. 그렇지만 제 뱃속의 이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작정이군요. 아마도 여태껏 저 아이들과 함께 해온 시간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겠지요."

"모든 게... 모든 게 그렇게 명확하고... 본 대로 행동하고... 넌 그런 거냐...."

"글쎄요. 저도 절 모르겠어요. 어쩌고 싶은 건지. 어쩌면 아무 것도 안 하고 싶은 건지..."

꼼꼼하게 붕대를 감은 그녀는 그대로 정석의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정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줘. 그럼, 나도 널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거짓말 하시는 군요."

"거짓말이 아냐! 정말... 내 아이로 생각하고 같이 키우겠다."

그러자 미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고 정석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아저씨랑 결혼해주는 조건, 기억해요?"

정석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 하나도 그에게 버거웠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 약속을 지켜주세요."

이쯤 되니, 정석은 화도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화내지 않아. 결코... 결코 화내지 않아."

정석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그렇게 여러번 되뇌였다. 미자는 상당히 뜸을 들였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의 아빠는...."

미자의 대답은 늦었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열려 있는 안방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누나....왔어요?"

등 뒤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석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방금 방으로 들어온 이를 확인했을 때, 미자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도무지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태근아."

그런 정석의 마음에 결정타를 날린 건, 미자의 차분한 목소리. 영문을 모르는 태근이가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두 손을 뻗어 태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정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석의 질문에 대답했고, 그리고 정석의 기분도 잘 알고 있었다. 정석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럼, 난 가볼게요."

"그....그래......가...가라...."

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본에서부터 붕괴되어온 그의 내면이 흩어진 잔해가, 마치 믹서기에 넣고 갈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커다란 바위가 자갈이 되었다가 다시 으깨져 모래가 되듯, 그리 머리 속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는다.

"누나...어디 가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나온 태근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미자는 빙긋 웃으며 태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 좀 쐬러."

"밖에 추운데?"

"그러니까 나가는 거야."

 

 

그녀는 여행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갔다. 태근이가 신발을 꿰어신으며 자기도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정석은 팔을 뻗었다. 태근은 자신의 팔을 붙들은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왜요?"

"가지마라."

"네?"

"미자 혼자 가게 내버려두어."

무겁고 낮은 정석의 목소리에서, 태근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태근은 팔을 크게 휘둘러 정석의 손을 뗴어내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아들이 자신을 팔을 뿌리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정석이었다. 그리고 미자에게 아이를 준 게 태근이라면... 정석은 왜 굳이 미자가 자신과 결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누나! 누나!!"

한 때 장미로 가득찼던 정원에서는 태근의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서둘러 달려나간 태근이었지만 그는 미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밤의 어둠은 깊었다. 태근은 목놓아 울었고 정석 역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딩동- 딩동-

현관벨이 울리자 미자는 외쳤다.

"안 잠겼어요."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밖에 선 이는 들어오길 주저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들어올거, 빨리 들어와요."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장미로 가득한 꽃다발을 손에 든 정석이 서 있었다.

"지나가다... 들렀어."

"그렇군요. 지나가다, 2년만에 들르시는 군요."

정석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미자의 이런 말투는 당연히 각오하고 찾아왔다. 그는 준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변명이고, 이미 미자가 충분히 알고 있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원에 장미가 많이 피어서, 네가 좋아하던게 생각났다. 그리고 조만간 이사갈 생각이라... 이게 정원의 장미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이라 생각했어."

"어머. 로맨틱도 하셔라."

"비꼬는건가?"

 

 

"그럴 리가요.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 뭐하잖아요. 들어와요."

정석은 안으로 들어섰다.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자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좋아하던 된장찌개로 했는데, 괜찮죠?"

".......밥은 먹지 않을 거야."

"라고, 아저씨는 대답하지만 결국은 먹게 되죠. 왜냐하면 조금 있다가."

그 순간, 정석의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미자가 말을 딱 멈추고 이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주 선명히 들렸다. 미자는 손가락을 튕기며 빙긋 웃었고 정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가 졌다. 휴우. 너와의 대화는... 당최 적응이 안 돼."

"적응이 되기도 전에, 날 내쳤잖아요."

식탁에는 이인분의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정석은 별 수 없이 미자의 맞은 편에 앉아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식사를 마칠 때쯤 방에서 애 울음소리가 났다.

"저런, 깼나보네."

미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가서 아이를 안고 나왔다. 잠이 덜깬 아이는 미자의 목덜미에 대고 얼굴을 부비며 칭얼거렸지만 미자는 능숙하게 어르고 달랬다.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쯤 미자는 정석을 보며 말했다.

"한번 안아보겠어요?"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 딸도 아닌데."

 

 

"그래도 이름은 지어주셨잖아요. 유진이라고 하기로 했어요. 괜찮죠? 물론 박유진은 아니고 진유진이지만."

유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미자의 집으로 아기용품 한 꾸러미와 유진이라고 적힌 종이카드가 함께 배달되었다. 누가 보냈는지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미자는 알고 있었다. 카드에 적힌 이름대로 출생신고를 했다.

"그리고 나도 이름을 좀 바꿔보려구요. 미자는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서 유미로 하기로 했어요. 유진이 이름에 유자가 들어가는 게 예뻐보여서."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낯선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답지 않게 또랑또랑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마치 관찰하듯 정석의 면면을 주의깊게 보았다. 정석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어."

"잠깐만요."

미자 - 아니, 이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유미라고 하기로 한 그녀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혀주었다. 정석이 그 모습을 쳐다보자 유미는 웃으며 말했다.

"애가 두 돌 되어가는데도 아직 못 걷더라구요. 발육이 좀 더딘 모양이에요."

"그런가."

"그렇지만 영리한 아이로 자랄테니 크게 걱정은 안 해요."

유미는 정석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정석은 유미를 쳐다보고 뭐라 인사해야되나 고민했다.

"아직도 궁금해요?"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자네가 왜 굳이 나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태근이를.... 그렇게 한 건지."

"혹시 개코원숭이라고 알아요?"

정석은 오랜만에 만난 유미와의 대화가 퍽 불편했다. 같이 살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몇 년 만에 만나니 그녀의 뜬금없는 화제제시에는 따라가기 여전히 벅찼다.

"몰라. 설명해봐."

"어떤 책에서 봤었는데요. 개코원숭이 암컷은 설령 임신을 하더라도 다른 수컷들과 관계를 가진다고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 새끼가 태어났을 때, 암컷과 관계를 가진 수컷들이 그 새끼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정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원숭이로 보여?"

"호호호. 어차피 모든 남자들은 다 짐승 아니었던가요?"

"그래... 설령 짐승이라고 해도, 저 유진이라는 아이를 내가 박해하거나 하지는 않아."

"난 죽어요."

"뭐?"

 

 

자신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유미의 표정은 침착했다.

"저 아이가 성년이 되는 모습을 나는 지켜볼 수 없어요. 그래서 조바심이 났어요. 그리고 내가 없는 곳에서.... 저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최대한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나? 설령 태근이의 아이라고 해도, 나와의 결혼에서 생긴 아이니까 내가 돌봐주리라 생각했나?"

미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정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또 잊고 있었군. 자네한테 이유나 원인 같은 걸 물어보면 안된다는 걸. 그러면... 저 아이가 성년이 되면 나한테 다시 보낼텐가?"

"모르겠어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말했죠?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혹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름도 바꿔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난 모든 걸 믿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그중에서 가장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을 찾아 유진이를 그와 함께 하도록 하겠어요. 그때까지 못 찾으면, 역시 아저씨에게 부탁하는게 제일 낫겠죠. 친절한 분이니까."

정석은 웃었다. 웃겨서 웃다기보단 하도 어이가 없다보니 이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미자는 그런 정석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아저씨도 지금 불확실성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나요? 듣기로 요새 사방에 씨뿌리고 다닌다고 들었어요. 아예 그럴 목적의 애들까지 모아서 길러내기도 하신다고....그 애들중에서도 임신한 애들이 나오곤 하잖아요."

"그년들은 죄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와서 내게 뒤집어 씌울 뿐이야."

"아저씨도 참 딱하네요. 여자를 믿지 못하면서도, 또 그 믿음을 여자에게서 얻으려고 하시니 말이에요."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흐음. 저도 책임이 좀 있으려나요."

"말이나 못하면... 

정석이 아무리 툴툴거려도, 미자의 웃는 얼굴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마음이 편하고 싶으면 애초에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저씨의 첫번째 부인이든, 두번째 부인이든... 그리고 세번째 부인인 저까지. 아무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아저씨가 무정자증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운좋게 회임에 성공했어요. 어때요?"

"그게 아니라... 셋 다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건 뭐, 제 알 바가 아니죠."

미자는 정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을 한참동안 지켜보던 정석은, 깊이 후회했다. 미자를 만나러 온 자신의 판단을 저주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되면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모조리 자기가 중심인 그녀이기에 말만 하면 휘둘리기 마련이다. 과거의 일이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도 무너진다. 미래에 맞추어 미리 행동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는 그녀다. 정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이제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그녀를 자신 쪽에서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정석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하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불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래를 보는 미자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수많은 선택과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것이 진짜 인간의 삶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정석의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장미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정석은 집으로 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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