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ㄱ이 맺어준 인연 3
ㄱㄱ이 맺어준 인연 3
“글쎄 그 색시가 얼마 전에 요 앞 파란 대문 집으로 이사를 와서 다 죽어 가는 신랑을 몇 년째 간호를 하는데 그 무슨 암이라고 하던가,
하여간 제법 살던 집인데 신랑 회사가 망하고 암 까지 걸려서 전 재산 다 축내고도 모자라 빛 까지 졌다지 뭔가.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새벽에 폐품 줍고 하루 종일 병원에서 청소하고 환자 빨래하고 또 밤엔 신랑 병간호 하는 게 여간 불쌍해야지 그래서 내가 여길 비워 줬네. 그러니 젊은이도 어지간하시거든 양보 좀 하시라고“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난 너무 부끄러워졌다.
암 투병중인 남편을 살리겠다고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린 몸을 이끌고 힘겹게 살아가는 여자를 겁간 했던 게 너무 부끄러워 내 자신이 미워졌다.
한 순간의 욕구를 참지 못해 힘겨운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한 여인을 너무도 처참하게 유린해 버린 내 자신이 너무도 미워 졌다.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젊은이 그렇게 좀 해줌세...”
“네...할머니 그렇게 하죠.”
“고맙네....그리고 참 어제 일은 내 입밖에 안낼 테니 너무 걱정일랑 말고...양보도 때론 득이 되어 돌아 올수도 있다네... 고마우이 젊은이. ”
할머니는 그렇게 공원을 빠져 나가고 있고 난 벤치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따르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어김없이 또 하루가 시작 되었다.
자명종 시계가 울리고 새벽공기를 가르며 폐품 사냥을 나간다.
동네 어귀를 몇 바퀴 돌았지만 결과는 신통찮다.
나도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좀 더 멀리 나가 보려고 하다가 무슨 생가에서 인지 공원 쪽으로 향했다. 막 공원 어귀에 들어서니 공원을 빠져 나가는 그녀가 보였는데 뒷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인다. 그녀의 삶의 무게 때문인 듯 여전히 어깨가 처져 있어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녀의 눈동자. 그 까만 눈동자가 다시 눈앞에서 깜빡인다. 마치 심연의 호수처럼 무심한 눈길로 그렇게 나를 경멸하듯이 쳐다보는 듯하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도 모르게 발길이 쓰레기통 쪽으로 향해진다. 역시 쓰레기통은 건드리질 않았다. 공원 내에서도 가장 많은 공병이나 빈 캔을 수거 할 수 있는 장소인데도 그녀는 하나도 건드리질 않고 그냥 두고 자리를 비워 준 것이다. 그녀가 어제의 할머니에 이어서 또 다시 나를 부끄러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공병이나 빈 캔을 그대로 둘까도 잠시 생각했지만 이게 나의 호구지책이라 어쩔 수 없이 마 포대에 주워 담아 자리를 뜨지만 마음이 무겁다.
그녀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 뒤 미련 없이 공원을 넘겨주어야겠다.
그게 그녀를 돕는 길이라면 말이다.
그 할머니의 말씀처럼 어쩌면 내겐 더 큰 득이 되어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그런 생각일랑 말자.
며칠을 그녀와 마주치기 위해 새벽 일찍 공원엘 가서 기다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덕분에 호구지책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녀가 걱정이 된다.
행여나 사고라도 나진 않았는지 어디 아프진 않은지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괜시리 그녀가 눈에 아른거리고 자꾸만 생각이 나는 게 벌써 며칠 째다.
“후우~~어디 아픈가. 혹시 사고라도 나진 않았는지”
공원 벤치에 앉아 혼자 말을 하며 담배를 한 모금 피워 물었지만 맛은 별로 느끼질 못하겠다. 자꾸만 머릿속은 그녀의 생각으로 가득차고 불안함과 부끄러움에 견디질 못하겠다.
자전거를 끌고 저번에 보아둔 그녀의 집으로 가야겠다.
그래서 있는지 없는지, 멀쩡한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확인을 해야겠다.
다리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고 자전거의 속도도 그에 따라 점점 빨라진다.
초조한 내 마음이 자전거의 속도와 비례하는 듯하다. 눈앞에 파란 대문이 보인다.
안을 살펴보니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는지 아무도 없다. 그녀의 방문을 살펴보았지만 세간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이고하여 이사를 가거나 하진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일단 안심은 된다.
그녀가 아직은 내 주위에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렇다면 며칠 내로는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려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질 않았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향해 자전거를 돌려갔다. 그래도 마음은 못내 찝찝하고 답답하다.
그녀를 못 본지 오 육일이 지났다. 그 오일동안 공원에서 거둔 수입이 약 팔만 원 정도 된다. 냉장고에서 어제 사다 넣어둔 캔 음료수 두 개를 꺼내 자전거에 실었다.
만약 오늘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 단념 하려고 한다. 친구 녀석의 건물로 방을 옮길까 생각 중인데 좀 허름한 원룸건물 지하 방이다. 방값은 아침저녁으로 건물 청소를 해주는 조건으로 무료로 하고 다만 전기세와 수도세를 내는 정도로 하면 된다는 친구 녀석의 이야기에 고민 할 것도 없이 옮기는 게 맞는 것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결정을 유보 해둔 상태이다. 바로 그녀 때문이다.
왜? 그녀 때문에 이런 호기를 유보 하는 진 모르지만 딱 한번만이라도 더 그녀를 보고 싶었고, 또 그녀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것보다도 그녀의 눈동자, 나를 사로잡아 버린 그녀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자전거는 어느새 공원 어귀에 들어섰고 나의 눈에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투영되어 들어왔다. 기쁘다 왜 기쁜 진 이유를 모르겠지만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게 자전거의 페달 속도로 전해진다.
공원 입구에 도착해서 그냥 뛰어 내려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불렀다.
조종사를 잃은 자전거가 공원 울타리에 쳐 박히며 우당탕 소리와 함께 옆으로 넘어졌다.
“저, 저기요.”
그녀가 내 쪽을 돌아보더니 흠칫하고 놀라더니 공원을 가로질러 도망을 가기시작 한다.
뒤 따라 뛰어가 그녀의 팔을 낙아 채곤 얼른 말을 꺼냈다.
“자...잠깐만요...저기요....사과하려고요.”
“사과요?”
그녀가 내말에 달리던 속도를 늦추더니 나를 쏘아보며 던진 첫마디다.
“네...그날 일 사과드리게요.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정신이 나가면 사람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고 줘 패고 그래도 되나 보죠?”
“죄송합니다. 용서해 달라곤 하지 않을게요. 그렇지만 그쪽에게 사과라도 하지 않으면 죽어 버릴 것만 같았거든요.”
“후~~됐어요. 그냥 없었던 일로해요.”
그녀는 이 말을 남기고 다시 자리를 피하려고 했고 난 그런 그녀를 다시 붙잡았다.
그리곤 주머니에서 지난 오일간의 수입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어 주며.
“이거 안 계신 오일동안 여기에서 모은 돈이에요.”
“이걸 왜 저한테?”
“지난번 그 이튼 날 어떤 할머니한테서 그쪽 사정 들었어요.
그리고 이건 엄연히 그쪽 돈 이구요. 원래 팔만 이 천원인데 제가 허락도 없이 이거 써버렸거든요. 그래서 팔만 원 밖에.”
난 까만색 비닐봉투에 들어있던 캔 음료수를 그녀에게 내 밀었다.
‘피식...’
그녀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웃음을 보였다. 비록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곱디고운 얼굴의 웃음기는 한층 더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만들고, 내 가슴은 더욱 설렌다.
그녀도 돈이 궁하긴 궁했던 모양이다. 내가 내민 돈에 눈길은 가는데 섣불리 받지는 못했다. 세간 사람들에겐 좋은 술집에서 술 한 잔 값도 안 될지 몰라도 우리같이 가난뱅이에겐 팔만원은 열흘은 족히 살아갈 수 있는 거금이다.
“받으세요.”
그녀의 팔을 잡고 손에 팔만 원을 쥐어 주었다. 그녀도 손에 쥐어진 팔만 원을 꼭 감싸 쥐었다.
“저기 앉아서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그녀와 난 공원 벤치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아 캔 음료수를 땄다.
“저기 그날일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사죄를 했고 그녀는 무심한 눈길로 땅바닥을 바라보면서.
“됐어요. 없었던 일로 해요. 그리고 염치없지만 이 돈은 잘 쓸게요 고마워요.”
“아...아니에요. 제가 잘못 한 거고 그 돈은 그쪽이 임자인데요.”
그녀가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