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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을 해치우다 - 15부



그녀들을 해치우다강릉시장이라니. 난 조금 생경함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낙원의 구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꿈꿨던 낙원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이었다. 이진섭이 필요한 땅과 인구가 확보되었다고 했을 때 마음이 동했던 것은, 강원도라는 사회와 격리될 수 있는 지역적인 조건과 이진섭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것이 분명한 영생교회의 열혈신자들이라면 지금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지역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릉시장이라니. 내가 꿈꿨던 낙원은 적어도 현실정치와 이어져 있어서는 안되는데... 뜨악한 내 눈치를 살짝 보던, 이진섭이 품에서 무엇을 뒤적거리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서 불을 붙이면서 말했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죠? 하지만, 말이죠. 이게 내가 도달한 결론이에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꿈은 없으니까요." "예?" "꿈이나 목표는 말이에요. 조금 힘들면 금방 포기하고 싶어지는 거거든요. 알잖아요. 현실에서 꿈을 이루는 몇 안되는 사람들도, 막상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걸요. 김연아도 그럴걸요. 그만큼 했으면 됐잖아요. 돈도 꽤 벌었고. 먹을 것도 좀 더 먹고 싶고, 좀 느슨하게 인생을 살고 싶을 거잖아요." "왜 그런 말을 하죠?" "서른 다섯 살을 살다가 다시 아기로 태어난 남자가 세상에 대해서 느낀 감정이 어떤 건 줄 아시나요?" 대부분의 회귀물에서 아기로 다시 돌아간 과거의 인물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현대를 살아온 지식을 기반으로, 주식을 투자하거나, 새로운 물건들을 만들어 내거나 하면서. 난 이런 설정이 과연 옳은 건가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왜 대부분의 회귀물에서 사업적 성공만을 다룰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한결 같이 노력하는 인간들로만 가득한 회귀물이 내 마음에 닿지 않았던 것은, 인간사회라는 건 노력하는 삶보다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하지만 말이에요. 세살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기억들이 퇴행을 해요. 나 같은 경우가 얼마나 될 지 나도 모르지만, 아마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도 아기 시절을 겪다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고 말거에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시시때때로 오는 졸음도 그렇게 되다보면 진짜 아기가 되고 말거든요. 전, 버텼어요.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삶을 아주 오래 살아왔다는 것이 이유같기도 하지만, 제가 다시 태어나기 전에 이루지 못했던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목표가 있고, 목표를 이뤄나갈 수 있는 조건의 삶을 새로 얻었다고 생각했었어요." 이진섭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멀쩡한 사람이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온전히 말을 하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는 다섯 살 무렵까지의 시간을 평범한 인간이 버텨내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난 여태까지 회귀물에서 주인공이 가져야 할 가장 큰 감정은 역시 권태로움이라고 생각했었다. 똑같은 일상을 다시 살아가는 데에 대한 보람보다는 지겨움이 먼저일거라고 아무리 개인적인 성공을 거두더라도, 적어도 서른살이나 스물 살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초등학교 과정에서 100점을 맞는 걸 기뻐할 리 없을거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이진섭의 말처럼 말도 하지 못하고,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아기의 삶을 견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이진섭은 날 한번 힐끗 보더니 그대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나만의 낙원 같은 건 생각하지 않았어요. 세인이 생각을 더 많이 했죠. 따라 죽을 만큼 사랑한 여자였잖아요. 혼자 움직일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세인이를 만나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을 때, 배신당할 여유도 없을만큼 일찍 세인이를 만나야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혹시 좀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전생에서의 난 진짜로 대히트 작가가 되고 싶었으니까, 읽었던 소설들을 미리 도용해서 대히트 작가를 꿈꾸기도 했어요."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떠올렸을 일을 이진섭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난 이진섭의 말에 좀 더 신뢰가 갔다. 그랬을 것이다. 난 그런 인간이다. 사라를 마음 속으로부터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사라가 술집을 다녔었다는 것이 있었고, 나 자신은 섹스를 즐기고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적어도 내 아내가 될 사람은 순결한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난 했을 것이다. 거기다, 히트에 대한 부러움과 열망은 언제나 내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었다. 난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좋은 장면들을 따로 모아둔 적도 있었다. 난 교묘하게 표절을 피해갈 방법을 연구했었다. 심지어는 외국의 소설 중에서 설정만 무협으로 바꿔서 반권분량 정도를 쓴 적도 있었다. 이진섭은 몹시 진지했고, 또 말에 흥미가 있어서 계속 듣고 있었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테리우스였다. "형, 뭐해? 밖에 나가더니 소식이 없어?" "잠깐 너네 형 만나고 있어. 할 이야기가 있어서." "형, 우리 형 말 믿지마, 보나마나 뻥이야." "응?" "무슨 말을 하던 뻥이라고. 진짜로 믿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뻥이야. 우리 형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거든. 형 그것만 생각해. 우리 형이 말하는 미래의 형의 모습이랑 지금 형이 살고 있는 형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더 행복할까를 생각해. 어떤 게 더 혼란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나를 생각해. 기대하는 것말고, 현실을 말이야." 주위가 조용해서 테리우스의 전화 목소리가 모두 외부에 들렸고, 이진섭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진섭이 말했다.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하긴, 뭐 크게 동생으로 생각한 적도 없으니까요. 전 어디까지나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제 생각이 녀석을 저렇게 바꾼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솔직히 믿지 않을 도리도 없지만, 이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될 지는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서요." "진명이 녀석이 말한 걸 좀 더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지금 경민씨가 살고 있는 삶이 오랫동안 꿈꿔오던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지역공동체의 실질적인 왕이 되는 것보다 더 행복할 지를 고민해보세요. 어차피 전 당신이니까요. 경민씨가 어떤 선택을 할 지 알고 있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적어도 3개월 안에는 이사를 하셔야 할 겁니다."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테리우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난 피곤하다는 핑계로 손님방으로 돌아와 그냥 침대에 누웠다. 몹시도 혼란스러웠지만, 테리우스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진섭이 누구인가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진섭이 나의 환생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난 그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내 삶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진섭 스스로도 자신의 삶과 나를 따로 떼어 살아왔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이진섭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난 겨우 4년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다. 그 동안,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만약 내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아니 오래전에 헤어졌던 세인이를 다시 만나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사라와 결혼을 하기만 해도, 이진섭의 전생과 나는 달라지게 되고, 그의 전생은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니 그가 내 인생을 미리 살아왔다는 대전제 역시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내가 여러가지 믿어야만 하는 사실에 근거한 이진섭의 매력적인 제안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상황을 내 의지대로 주도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컸다. 나는 현실적이지만, 언제나 내키는대로 살아왔다. 나는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그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이룰 수 없는 꿈은 무시하며 살아왔다. 가능성이 아무리커도, 내 노력으로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니면 거절해왔었다. 공동체의 행정적인 왕이 되어서 여러 사람을 다스리거나 거느려도 전혀 즐거울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이진섭이 말하는 미래를 위해 진심을 쏟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설풋 잠이 들었는데, 깨고 났더니 침대 시트가 젖어있을 정도의 땀이 흘렸던 것 같다. 악몽을 꾼 것 같긴 한데,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창문을 열어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는데, 슬슬 4년밖에 남지 않을지도 모르는 내 인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난 사는 것이 좋았다. 봄부터 시작되어 가을에 끝이 나는 프로야구가 좋았고, 매일매일 읽는 소설들이 좋았고, 입맛이 없을 때마다 찾는 종로의 모듬전이 좋았다. 한동안은 조용히 지냈지만, 여자들도 좋아했다. 무시하기엔 이진섭이 말했던 과거의 내 기억들이 너무 정확했다. 진짜로 죽게되는 건가? 조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거실로 나갔다. 한참 작업을 했는지, 테리우스는 컴퓨터를 그냥 켜두고,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컴퓨터 옆에는 작업을 하다 먹었는지 과자부스러기와 반 정도 비워진 양주병이 있었다. 작업한 것을 보려고 테리우스의 컴퓨터에서 써놓은 글을 읽었다. 역시 녀석은 글을 참 맛깔나게 쓴다. 세가의 대공자는 비참하지만, 불쌍하지는 않게 몰락하고 있었다. 고치고 싶은 점도 거의 없었다. 습관처럼 인터넷을 접속해서 다음의 헤드라인 뉴스들을 읽고 나선, 회사의 메일계정으로 들어갔다. 내 담당작가들을 모두 체크했는데, 한 명만을 제외하면 모두 마감날짜를 지켰다. 김장권 작가만이 마감을 지키지 않아서, 카카오톡으로 마감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나 넣어두고, 내 개인메일을 들어갔다. 스팸 몇가지를 지우고, 핸드폰 요금을 확인하려는데, 메일이 하나 추가되어 봤더니, 철기산 작가의 메일이었다. 명함에는 내 개인메일이 적혀 있긴 했지만, 회사대표계정으로 늘 작품을 보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메일을 확인했다. "철기산입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작품인데요. 한 번쯤 봐주셨으면 해서요." 첨부파일에 카메라라는 단편이 보였다. 1. 알 수 없는 곳이다.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순박하기 그지없다. 마치 공격성을 잃은 원시부족, 아니 아담과 하와가 나오는 에덴동산처럼 그저 모든 것을 나누며 살아간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이 이 곳에서 깨어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 지 내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핸드폰을 한 번 켜볼까 했지만, 어차피 전파는 커녕 전신주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 소용이 없다. 다행이라면 언어의 체계가 거의 없는 이 곳에선 말을 배우지 않아도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몸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정도랄까. 내가 정신을 잃었던 곳이 경북 김천의 지류인 금천변이었으니까 여긴 대한민국의 어딘가가 분명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틀을 걸어도 내내 우림지역인 이 곳이 대한민국의 어디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는 원주민-물론, 이것은 내 위주의 사고다. 여기 사람들은 날 리노라고 부른다. 리노! 리노! 라고 외치는 그들은 bbc의 자연다큐에서 봤던 초기 인류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서양배와 비슷한 이 과일은 많이 먹으면 설사를 하게 된다. 이 곳에서 생활한 지도 벌써 몇 달 정도가 지나서 지금은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먹으면 안되는 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벌과 벌레가 앉은 과일은 먹을 수 있다. 주변에 풀이 나지 않는 곳에 홀로 난 과일이나 풀은 먹으면 안 된다. 머리가 좀 아프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책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을 지속하는 일 정도였다. 2. 동굴 앞의 큰 나무에다 나무위 가옥을 만들고 있다. 불씨를 얻는 법을 알아내기 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다행히 핸드폰 카메라 렌즈를 분리해서 지금은 조금은 수월하게 불을 피우고 있다. 문명생활에 대한 유일한 증거를 버리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불을 피울 나무를 매번 구할 수 있다면 동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생명력이 넘치고 비가 잦은 이 곳에선 생나무를 잘라 말리는 것을 제외하면 죽은 나무가 별로 없다. 생나무를 태우면 눈이 따가운 연기가 나기 때문에 나무 위 가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동굴은 습하고 찬 기운이 늘 있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지내기에 부족한 면이 많았다. 일단 집만 완성이 된다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다. 분명. 3.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원주민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어렵다. 저들은 내가 살고 있는 곳까지 가끔 다가와서 죽은 영양의 다리 뼈 같은 것을 던져주고는 있지만, 문명생활에 익숙한 내가 그것을 먹을 수 있을 리 없다. 나 역시 차곡차곡 따서 말린 과일 같은 것을 저들에게 주고 있긴 하지만, 물물의 교환이라는 것 정도지 의사의 소통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지 답답하다. 기록을 하기 시작한 것은 외로웠기 때문이다. 혼잣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것도 매번 같은 일상을 살다 보니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난 나 스스로를 분열시켜 새로운 자아의 나를 하나 만들었다. 기록은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자위를 하고 싶었다. 난 혼자가 아니다. 4. "교수님. 그럼 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정신분열증을 일으킨 것인가요?" "원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 수 없지. 특히 이 사람처럼 사회적 활동을 경험한 사람이 혼자서 오랜 시간을 버티는 일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그래서 기록이 시작된 것이다. 이 사람은 그 기록을 쓰면서 흔들리는 자신을 다 잡은 것이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정상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미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있는 것 아닌가요? 이 사람이 발견된 지리산 중턱엔 열대우림 기후도 없고, 이 노트에 쓰여 있는 기록들도 모두 믿지 못할 것들 뿐이잖아요." "연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실제로 여기에 있는 김창식씨는 지리산에서 실종되었고, 3년 동안 산세가 너무 험해 근접하지 못했던 곳에서 수렵생활과 동굴생활을 했으니까 말이다. 기록에 과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살고 있었던 섭생이 분명 기록과 일치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나무 위에서 생활하다 추위 때문에 동굴로 다시 들어갔고, 동굴안에 아궁이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로 밝혀졌으니까 말이다." "아, 조금 답답하네요. 그럼 여기 원주민들이라던가 하는 것들도 모두 사실일까요?" "경상대 산악팀에서 그 주변을 수색중이라고 하더라." 5. 김창식 씨가 발견된 곳은 용현골이라는 지리산 최심지 중의 하나였다. 대부분의 등산로가 마련되고 나서는 더더욱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곳이었는데, 지리산 종주를 하던 경상대 산악팀 K2에 의해 발견된 김창식씨가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영양실조로 극도로 쇠약해 진데다 말도 잃은 그가 지난 3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싸구려 유성볼펜을 다 쓰고 나서는 나무의 껍질을 벗겨 다 쓴 볼펜 촉으로 눌러서 글을 쓰기도 했는데, 그 기록엔 지리산의 생활에 도움을 준 원주민이라던가, 따고 나서 하루가 지나면 다시 열리는 야생자두나무 이야기 등 신기한 것들이 많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서양에서 발간되어 허무맹랑한 기록으로 취급받았던 동방견문록처럼, 그의 노트는 사람들에게 신비함에 대한 동경과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대한 불신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았는데, 그가 환상으로 겪었으리라고 생각되던 많은 일들 중 몇 가지가 사실로 밝혀지면서 그의 노트는 다시 한 번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6. "여기야. 바로 여기가 김창식씨가 발견된 곳이야." "선배, 산세가 꽤나 험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역시 그 부분이 문제가 되겠네요. 울울창창한 열대 우림의 기후가 강수량도 전국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리산에 있을 리 없잖아요. 기록을 보면 열대우림의 식생이 꽤 자세하게 적혀 있잖아요." "그래서 탐사를 나온 거잖아. 의견이 분분하더라. 김창식씨는 사실 그저 대학에서 경비를 서던 무능력한 남자였어. 교육의 수준도 떨어져서 열대 우림지역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을거야. 하지만, 그가 쓴 기록을 보면 마치 그 곳에서 살다 나오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황들이 아주 많이 적혀 있나보더라." "경민이 형, 저기에요. 김창식 씨가 발견된 동굴이요. 같이 들어가 보죠." 동굴은 길었다. 안 쪽으로 갈수록 말린 과일들과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침상대용으로 쓰인 바위같은 것이 있었다. 제일 앞서가던 정현수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경민이 형. 이것 좀 보세요. 얼음이에요." "이것도 좀 봐바라. 망고다. 말렸지만 분명히 망고야." "어떻게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여기에 있을 수 있죠?" 7. k2 산악대가 가져온 소식은 전국을 들썩거리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무지 알 수 없는 현상이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김창식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충남대 지질학과 김충곤 교수는 직접 지리산으로 내려가서 동굴의 지질층을 분석했다. 그리고 밀양이나 안동에서 발견되는 얼음골과는 다른 식으로 얼려진 얼음이라 말하면서 비공개를 전제로 결정의 구조가 빙하와 비슷하다는 말을 했다가 비보도 원칙을 깬 동아일보 기자에 의해 그 말이 밝혀지면서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망고로 생각되던 말린 과일도 망고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밝혀진 적이 없는 종으로 판명되어 김창식의 동굴은 새삼 화제가 되었고, 정부차원의 조사단이 파견되어 관광객들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잘 나가지 못하고 있는 프리랜서 르포라이터 송치현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김창식과는 아주 친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한 고향에서 나고 같이 자랐기 때문이다. 송치현은 우선 병원으로 찾아가 면회를 요청했는데, 간호사는 면회가 거절되었다는 말만을 전해 주고서 부스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송치현은 지리산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고서는 버스에 올라타고서 예의 그 기록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8.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다. 벌써 먹을 것을 먹은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버찌같이 생긴 과일이 있어서 그것을 따러갔다가 원숭이 떼의 습격을 받았다. 원주민들의 말로는 원숭이를 키하후라 부르는 듯 했다. 원숭이들과 원주민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원주민이 원숭이떼에게 끌려갔고, 그는 곧 해체되었다. 피에 굶주린 눈을 한 원숭이들의 잇새에 끼어있는 원주민의 살점을 보고나니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벌써 이틀 째다. 어쩌면 난 정신적 외상을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이 울렁거린다. 배가 고프다. 목도 마르다. 송치현이 이 글에서 위화감을 느낀 것은 다른 것보다 정신적 외상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트라우마라는 이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흔히 쓰는 말이지만, 그의 친구 김창식은 이런 말을 알 정도의 사람이 못 되었다. 무엇보다 기록은 내내 침착하고, 잔잔한 느낌의 글이다. 김창식은 이런 식의 일기를 쓸 사람이 못된다. 알 수 없는 일은 많지만, 김창식이 저 일기를 쓰지 않았을거라는 그저 알 수 없는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왜? 김창식이 저런 식으로 살아온 것은 만으로 3년이 좀 못되었다. 누군가 올드보이에 나온 것처럼 원한에 의해서 김창식을 저런 오지에 가두었을까? 우선 알 수 있는 것부터 확인해 두는 것이 좋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치현입니다. 잘 계셨죠. 그동안 연락도 못드리고. 죄송합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치현이 아니야? 왜? 너도 창식이 때문이냐?" "네. tv고 신문이고 다 김창식, 김창식 하는데, 설마 제 친구 창식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글안혀도, 너한테라도 연락을 할까 싶었다. 내가 뭘 아는 것이 있다고, 태레비 기자고, 신문 잡지고 하도 귀찮게 해서." "어머니. 진작 연락을 주시죠. 지금 내려가는 중인데요. 창식이 예전에 쓰던 노트 있으면 좀 구해주세요. 필적을 좀 조사해보려고요." "왜? 그놈이 무슨 일이라도 낸 거니?"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오해를 받는 부분이 있는 것같아서 제가 그걸 풀어주려고요." "그래. 내 찾아다 놀게. 언제쯤 도착하는 거니?" "한 여섯시 반쯤이요." "저녁은 여그 와서 먹으면 되겠다. 내 기다리고 있으마."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대로를 쓰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것만큼이나 어떤 일이 왜 그렇게 되었나를 알아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필적이 확인만 되면 실종 당시의 창식이에 대한 탐문을 할 생각이었다. 믿을 수 없지만,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했다. 9. 핸드폰을 다시 조립했다. 애초에 분리했을 때부터 재조립을 생각하지도 않았었는데, 갑자기 내가 쓰는 이런 기록들의 증거를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믿기지 않은 현실이 과연 진짜인가 하는 확인도 하고 싶었다. 지금의 난 도저히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다. 버섯을 따서 말리고, 과일을 따서 말리고,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먹는 내 생활은 원시인들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카메라에 찍힌 모습도 그럴까. 어쩌면 난 너무 힘든 상황에서 환각을 계속 경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날인가 둘쨋날인가 먹었던 야생 포도 비슷한 과일을 먹고나서 내내 열이 끓었었다. 어쩌면 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햇볕을 모으기 위해서 렌즈를 검게 그을렸더니, 억지로 끼워 맞추고 나서도 영 카메라가 작동될 것 같지가 않다. 거듭드는 절망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10. k2산악회의 최경민과 일행들은 동굴을 주변으로 500미터 가량의 사방을 모두 둘러봤지만,특이할 만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날이 어둑어둑해 져 왔기 때문에 성과 없는 힘겨움에 발길이 무거워졌고, 베이스캠프인 산장으로 향하는 길 역시 힘들기만 했다. 정현수가 최경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경민이형, 이렇게 포기할거야? 동굴에 한 번 더 가보는 게 어때요? 솔직히 탐사단들이 오고나서 우리 보다 나은 걸 발견한 적도 없잖아. 말린 과일도 얼음도 다 우리가 발견한건데." "시간도 늦었고, 어차피 동굴은 폐쇄가 됐어." "아. 아니야. 아까 나랑 석락이가 발견한 건데, 이쪽 높새오름 쪽으로 동굴로 향하는 통로를 발견했거든." "왜 이야기를 안 했어?" "들어가 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도 한 번 더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혹시나 모르잖아. 여러 사람이 가면 또 뭔가 찾을 수 있을지. 솔직히 지금 이 기분으로는 산장에 들어가도 잠도 안 올 것 같고. 어차피 동굴 안에 가면 땔 나무도 있고 하니까. 괜찮을 거 아니에요. 라면도 있고." "소주는?" "있지. 당연히." "가 보자. 아 영미 넌 들어가라. 산장에 알릴 사람도 필요하고. 넌 여자라 좀 위험하기도 하고." "선배! 그러는 법이 어딨어요. 산악회는 짬빱 순 아니었어요. 야. 김석락 네가 가! 가서 우리 내일 온다고 전하고. 알겠어? 알아 몰라?" "알겠습니다. 선배님. 그럼 전 산장에 가서 연락을 취하고, 다시 복귀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마라. 괜찮아. 여기 산길 위험한 거 너도 잘 알잖아. 핸드폰도 통화권이탈 지역이니까 괜히 위험하고."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괜찮아. 있어라. 산장에서 기다려." "네." 11. 송치현이 달강마을에 도착한 것은 6시가 좀 지나서였다. 마을의 앞엔 서낭당과 큰 당산나무가 있었는데, 금줄이 걸려 있는 것이 출어굿을 한 모양이었다. 울긋불긋해서 좀은 난잡스럽게 느껴지는 무격의 흔적을 지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아직 어촌계의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부모님은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몇 달만이라 기다렸다 얼굴이라도 볼까 했지만, 김창식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서 곧 몸을 움직여 김창식의 집으로 향했다. 다 쓰러질 것 같은 김창식의 집은 동네에서 좀 떨어진 산비탈에 있었는데, 그래도 걸어서 7-8분이면 족할 정도였다. 부지런히 걷던 송치현은 마을의 어귀에서 이장님을 만났다. "어, 네가 누구더라." "감나무 집 둘쨉니다." "아. 그렇지. 서울가서 무슨 기자일을 한다면서? 네 아버지가 네 이야기만 하면 늘 싱글벙글이다." "아니요. 밥술도 겨우 먹는데요." "어디 가는 게야? 혹시 북선댁 집에 가는 거냐? 창식이 녀석 때문에?" "예." "모진게 사람인게야. 한 동리 사람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 됐다마는 말이지. 북선댁이 사람이 변했더라." "무슨 말이세요?" "한 삼 사년쯤 됐나보다. 너야 타지에 나가 있어서 소문 못 들었겠지만, 북선댁이한테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많았었다. 그것도 새파란 녀석이랑 붙어먹었다는 소리가 있었어. 글안혀도 창식이가 효심이 가득한데 몇 년동안 고향을 찾지 않아서 이상하다는 소리를 했었어." "예? 혹시 그 남자가 뭘 하는 남잔지는 모르세요. 이름이라던가요?" "몰라, 정히 급하면 지서 최순경한테 가보던가. 이번 사건 터지고 내내 그 사람 조사를 했었거든." "네." 최민규는 치현보다 서너살 연상이지만, 한 동리 사람이라 몹시 친숙한 편이었다. 짙은 냄새가 났다. 머리가 혼미할 정도였다. 기분좋게 배에서 쪼르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았다. 배가 부르면 머리가 잘 돌지 않는다. 오랜만에 칼날 위에 선 느낌이 들었다. 발끝이 저릿저릿했다. 12. 김창식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려 시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었던 그의 복부는 부푼 풍선처럼 빵빵했다. 마치 더는 마실 수 없을만큼 물을 마신 사람 같았다. 그는 간헐적으로 많은 땀을 흘렸고, 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불안해 했다. 그의 케어를 책임진 양철환 박사가 한 tv연예정보 프로그램에 나와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혈당치가 너무 낮아서 인슐린을 투여하고 있고, 뱃 속에 찬 복수를 제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열 시간 정도가 고비입니다. 간간히 말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제대로 된 언어체계가 아닙니다." 13. 동굴의 다른 입구는 좁았다. 그저 풀숲 가운데 불쑥 가라앉아 있는 구멍 같은 느낌이어서 덩치가 큰 최경민은 등에 맨 배낭을 벗어 미리 내려간 정현수에게 던져 줘야 했다. 그래도 입구를 통과하고 나니 제법 공간에 여유가 있었다. 미리 충전해 둔 충전식 랜턴을 켜고서 앞으로 조금씩 전진했다. 다들 피곤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은 것은 한방울 씩 떨어지는 석회동굴 특유의 습기 때문이었다. 일렬로 동굴의 다른 쪽 입구로 향하던 산악대원들은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숨을 죽였다. 100미터쯤을 가다가 산악대원 중 유일한 여자대원인 전영미가 손을 들었다. "왜 그래? 전영미." "잠깐만요. 이것을 좀 보세요. 여기요." "어디? 이게 뭐야?" 검은 돌 아래 있어서 잘 보지 못했지만, 그곳엔 분명 전선이 연결된 스피커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게 뭐죠?" "뭐긴 뭐야. 스피커지." "이게 여기에 왜 있죠?"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알아. 잠깐만 모두들 이 주변을 수색해보자." 정현수가 경민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형, 나는 좀 무리인 것 같은데, 긴장하면서 여기까지 꾸역꾸역 따라 왔더니 죽을 것 같아. 일단, 수색은 내일하고, 어차피 어둡고 랜턴도 각자 수색할 만큼은 많지 않으니까. 일단 안쪽의 넓은 공간에 가서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영미가 성과는 냈으니까. 어디 동굴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그럴까. 사실은 나도 죽을 것 같긴 하다. 허기에 목도 마르고. 누구 수통에 물 있는 사람." "형, 여기 천연 정수기를 두고 뭐. 저거 마셔요. 분명 일급수일걸. 물고기도 한 마리 없잖아. 물이 맑아서." "그럴까." 14. 최순경을 만나, 대강의 자초지종을 들은 치현이 곧바로 창식의 집으로 향했다. 창식의 어머니 북선댁은 원래 출신이 평안도 인근이라 북한 요리를 곧잘하곤 한다. 인사를 하자 손사래를 친 북선댁이 억지로 치현을 방으로 끌었다. 치현의 눈에 보인 것은 늘 조금쯤은 냉갈스러웠던 평소의 그녀가 아니었다. 얼굴에 화색이 가득했는데, 자식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지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병원엔 안 가보세요?" "살 놈이면 살겠고, 죽을 놈이면 죽겠지." "어머니, 노트는 찾아 놓으셨어요?" "그려. 그런데 왜 그 놈 노트를 찾아?" "아닙니다. 누군가 오해를 하고 있어서 그것을 풀어주려고요." "아구구야. 망할 허리가 좋지 못해서. 여깄다. 밥은 먹고 가야지." "예. 얼른 한 상 차려주세요/" "한 상은. 그런데, 조금만 기다릴래. 이선생님이 올 때가 다 됐거든. "이선생님이 누굽니까?" "아. 우리 집 하숙생. 어디 대학에서 심리학을 연구한다고 하대. 여기가 공기가 좋아서 좋대." "그런데, 지금 어디 갔습니까?" "학교에 있겠지 그래도 저녁 때는 거르지 않으니까 아주 조금만 기다려. 알겠지." "예." 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생이라? 이 궁벽한 곳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심리학을 연구한단 말인가? 의심은 노트를 펼쳐보며 확신으로 바뀌었다. 노트의 글씨는 창식이 본인의 글씨가 아니었다. 한눈에도 거만한 필체가 보이더니.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15. 죽음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며칠 전부터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침침했다. 쓸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손이 닿는 곳에 놓기 시작했다. 3년을 내내 혼자 견뎌왔지만, 이젠 견디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다. 기록을 하던 것들도 모두 부질없다.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 망할 놈의 우림을 벗어나고 싶지만, 길이 없는데다, 수많은 독충과 독사들로 채 10미터도 갈 수 없다.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너무나도 그립다. 원주민들은 지능이 떨어진다. 16. 데메롤, 역시나 이 것이 있었다. 데메롤은 말기 암 환자들에게나 쓰는 강한 환각작용을 가진 치료제다. 학생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전문 마취의나 사용하는 것인데. 역시 김창식을 해친 인물은 그 한선생이라는 학생 나부랭이가 분명하다. 하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것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김창식이를 데리고 말이다. 사립문이 열리면서 이선생이라는 작자가 들어왔다. 잔인한 얼굴이다. 쥐상의 그는 뺨이 홀쭉했다. 위초 치켜 올라간 작은 눈과 좁은 이마. 모든 면에서 외골수로 보였다. 그는 내게 신경질적으로 인사를 하고는 곧 자신이 묵고 있는 듯한 방으로 들어갔다. 벗어놓은 구두의 뒷축이 좀 닳아 있었다. 17. "선배, 이런 게 또 있네요." 유일하게 침대를 차지한 전영미가 침대의 구석에서 또 하나의 초소형 스피커를 찾아내 들고 왔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산과 책에 미쳤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니는 2학년 안지용이 무엇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뭔데?" 덩치만큼이나 호기심이 많은 정현수가 안지용을 다그쳤다. "누군가가 김창식씨를 의도적으로 그런 환각 속으로 빠뜨렸다고요. 일부러 이런 극한의 상황에 빠뜨려 버렸다고요. 이 산에는 보시다시피 먹을 것이 거의 없어요. 봄이나 겨울에는 특히 더하겠죠. 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하지만, 김창식씨는 이곳에서 기거하며 3년 동안이나 별다른 채집활동이나 수렵활동을 하지도 않은 채로 살아가고 있어요. 생각해보세요. 이 가죽도, 고라니의 가죽이잖아요. 하지만 김창식씨의 건강상태로 고라니를 잡아낼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수렵도구인 올무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야생이 괜히 야생이 아니에요. 열로 해결되지 않는 기생충 같은 것이 가득할 거예요. 보통은 살아갈 수가 없죠. 보급이 이뤄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왜?" "그거야 알 수 없죠. 김창식씨에게 복수하고 싶었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닐까요?" 18. 치현은 이선생이 나올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다. 이윽고 이선생이 식사가 차려진 대청으로 나왔을 때, 물었다. "왜 그랬어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 친구가 누군가를 해꼬지 할 친구가 아닌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데메롤은 어디다 썼는데, 이렇게 대량의 빈 앰플이 있는 거죠? 발견된 기록의 필체를 감정하면 그 필체가 사실은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이래도 시치미를 떼실 건가요?" "하하. 대단하네요. 난 전 국민을 상대로도 자신이 있었는데 말이죠. 뭐 갑자기 산악대가 그곳까지 내려올 줄은 몰랐지만요." "왜 그랬죠?" "그저 하나의 명제를 시험해 보고 싶었죠. 인간에게 카메라를 빼앗으면 어떻게 될까?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명제라기 보다는 인간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의미하는 겁니다. 알아 들을 지 모르지만, 사진이란 사실 인간에게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죠. 하나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확인, 두 번째는 그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임으로 해서 얻는 자기 존재의 확인. 환각상태를 만들고 기억을 조작해 완전한 홀로의 객체를 만들었을 때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을 알고 싶었죠." "겨우 그 따위 것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난 말이죠. 세상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자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죽여도 세상에 크게 해가 되지 않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먼저 해보라고 한 거예요. 돈도 쥐어줬죠. 계약서도 어딘가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단 기회를 줬을 뿐, 기회에서 실패하는 책임은 그 기회를 선택한 자신에게 있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난 꾸준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는 홀로가 아닐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그것을 깨닫기란 쉬운 일은 아니죠." "당신을 고발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뭐, 이젠 홀로 오롯한 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했으니까요. 감옥에서도 부대끼며 살아가야겠죠. 좀 덥긴 하겠네요. 아직 에어컨이 설치된 감옥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19, 밝혀진 것은 없었다. 김창식은 병원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선생은 자신의 방에서 김창식을 3년간이나 관찰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수 천장의 사진을 경찰에 압수품으로 압수당한 채로 살인죄의 재판을 치르고 있다. 치현은 떠났던 조직에 다시 들어갔으며 영미와 경민은 사귀기 시작했다. 김창식이 눈을 감기전 환영을 보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한 말만이 남았다. "언제나 시간은 흐르지만, 시계가 없인 살 수 없어. 붉은 꽃잎은 누구에게나 붉지만, 혼자 마음에 담아둬선 나누지 못해. 사람은 사람은 서로에게 기댈 수 있어 사람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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