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마지막
언젠가는 마지막
잊지 못할 밤.
섹스보다도 섹스후의 깃털처럼 가벼운 산책.
머리위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한 별빛에
뜨거운 몸을 식히며
천천히 오랫동안
우리는 걸었어.
그 순간,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다신 없을 낭만의 감정들.
서로가 그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적확한 표현을 찾아
언어의 세계를 훨훨 유영하던
그날 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서로 멋쩍게 웃으며
Я Вас Люблю라고
어색한 발음으로 속삭이고,
입을 맞추고
약속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그 애를 다시 만났을 땐,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어.
냉랭하고, 시크한 여자. 묻는 말에만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여자.
등록금 투쟁부터, 성적 소수자 인권보호 캠페인까지,
학교도 휴학했으면서, 너무나 많은 일을 하더라.
나랑 만날 시간이 어디 있겠어,
가끔 같이 술을 먹고 러시아에서의 한때를 추억하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지.
나 역시 점점 자존심이 상했고,
자존심상한 남자들이 그러듯,
허세와 큰소리만 늘어갔지.
그럴수록 연아는 더욱 차가워졌어.
그렇게,
우린 헤어졌어
어리고 철없던 남자애였던 내게, 연아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 글을 쓰는 내내 들었던 의문이야.
내가 글 서두에 사설을 좀 풀었잖아. 자기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이유.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사건의 나열에 불과했던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와 ‘완성도’를 부여하게 된다고.
연아 얘기를 하려고 그랬나봐.
그 애와의 경험도 그냥 스쳐지나간 섹스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번 썰을 풀면서
내가 그 애를 통해 많은 걸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아닌, 가족 친구도 아닌,
그저 남.
그것도 결코 가까워질 것 같지 않았던
‘타인’에게
호감을 느끼고,
호감이 발전해 애정이 되고,
하나가 되고,
살다보니,
이런 저런 일들로,
그 애정이 식고
다시 타인이 되가는 과정.
그 과정을 잔잔히 겪으며 지금의 내가 됐나봐.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깜냥을,
갖게 된 거지.
난 여전히 누군가와 친해지고 사랑하고 멀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살지만
더 이상, 그 애와 그랬던 것 만큼 아프고 그러지 않아.
언젠간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겠어?
그래선지,
연아를 떠올릴 때마다, 그 노래가 생각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질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