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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노예 - 18

 



“짝사랑 같은 거 하기 싫다고요.”


그녀의 고집스러운 말투는 서러움이 묻어났다. 

상처받았던 걸까? 하긴, 아프지 않았다면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도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우리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건 미래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늘 의심했지만 애써 외면하면서 견뎠는데, 서유진과의 만남이 직면하게 했던 것이다. 

그가 의미 없이 만들었던 과거가 막상 영아한테 곪아 터졌던 것이다. 

그건 그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치를 대가가 아니었다.


“미안해.”


“무슨 의미의 사과죠?”


“내가 널 상대로 성욕을 해결하면 안 되는 거였어.”


그녀의 순수한 열정을 그는 가차 없이 이용했다. 

계획적으로 유혹해서 순결을 차지했다. 오랜 갈망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건 어떤 변명을 해도 짐승 같은 짓이었다.


“그럼 다른 여자한테 성욕을 해결하는 게 옳은 행동이었을까요?”


그녀의 쓰디쓴 표정에 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작 그가 사과하고 싶은 건 그거였는데 왜 이 이다지도 서툰지 자신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를 향한 감정이 앞선 탓에 뒤죽박죽인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 것이었다.


“아니,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그래요. 오빠가 날 여자로 만들어 줬던 그 특별한 날에 대해서라면 사과를 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건 우리가 서로 주고받았던 선물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오빠가 나한테 미안해할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는 숨을 죽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니, 폐 속에 공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사랑할 마음이 있으면서 단지 의무감이라고 선을 긋는 비겁함이에요. 그래요. 오빠가 어렵게 마음을 열었는데 생부가 난데없이 돌아가셨죠. 

생전 처음으로 채워졌던 마음이 텅 빈 것 같았겠죠.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잃어버렸는데 애도할 시간도 갖지 못했잖아요. 어머니를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슬픔을 죽여 버렸으니까.”


꼼짝 못 하는 진실이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그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폐 속에 공기를 주입했다. 하지만 답답한 가슴은 뚫리지 않았다.


“맞아, 슬픔을 죽였지. 그런데 내 슬픔은 생부를 향한 애도가 아니었어. 실은 내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슬픔이었거든. 

의무감? 아니, 난 쫓겨날까 봐 두려워서 착한 아들이 되려고 기를 썼던 거야. 어머니께서 나한테 의지하도록 내가 필요해야 날 버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 이해관계에 의한 무언의 계약 성립이라면 모를까.”


영아가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렸다. 


그 자신마저도 속였던 진실이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속내를 보면 그는 속속들이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러니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사랑할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손을 이렇게 붙들고 있는 걸까? 놓치기라도 하면 죽을 것처럼 말이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서 허했던 심장이 불이 붙는 것 같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저 그의 품속에 작은 몸을 움츠린 채 넣을 뿐이었다. 

그녀가 굳이 안아 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는 꼭 안았다. 

그녀의 심장인지 그의 심장인지 알 수 없지만 힘찬 고동 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오빠.”


한참 후 그녀가 그를 귀엽게 불렀다.


“응?”


“목말라. 포도 가져다줘요.”


회피일까? 아니면 아무렇지 않은 걸까? 왜 일상적인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걸까? 

하지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갖은 에너지를 다 소진해 버렸으니까. 

그는 포도를 과일 바구니에 담아서 가져왔다. 하나를 따서 영아의 입에 넣어 주니 그녀가 포도와 함께 혀끝으로 그의 손끝을 핥았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고양이 같아.”


“음, 고양이는 흔히 독립심이 강하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건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확신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이에요.”


“그건 무슨 소리야?”


그는 애완동물을 키운 적이 없었다. 사람은커녕, 아무리 작은 동물을 봐도 귀엽다고 키우고 싶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영아만 달랐다. 앙증맞을 정도로 귀여웠고, 여자로 키우고 싶었다. 그의 여자로 말이다.


“고양이도 분리 불안을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건 갑자기 집사의 애정이 안 보이거나 줄어든 것 같으면 행동이 달라져요.”


“어떻게?”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는 거죠. 사랑을 보여주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고양이도 있는 거예요. 

사람과 떨어지면 애정이 너무 간절해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받거든요. 행여 버림받을까 봐 두려운 건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거죠. 


전에 아주 어릴 때 7년을 키운 고양이가 있었는데 5년째인가 아버지랑 여행 간다고 외할머니댁에 맡긴 적이 있거든요. 

이동식 고양이 집에 넣으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들어가려고 애를 먹이더니. 글쎄, 우리가 여행 갔다 와서 데리고 가려고 했더니 집 문을 열기 무섭게 총알처럼 들어와 있는 거 있죠. 


그러고 우리 집에 데리고 왔는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과도하게 애교를 부리고 내가 걸을 때마다 쫓아다니고 소파에서 쉬고 있으면 옆으로 뛰어오르고. 정말 성가실 정도였어요. 


동물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분리 불안이라고 해서 놀랐어요. 그래서 외할머니께 여쭤보니 일주일인가 외할머니댁에 맡겼는데 그때 잘 먹지도 않고 잠만 많이 잤대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는 포도를 하나 더 따서 입에 넣어 줬다.


“고양이가 불쌍해서?”


“아뇨, 우리 좋자고 고양이한테 상처 준 거잖아요. 그래 놓고 여행 끝났다고 집에 올 때 아쉬웠던 내가 너무 싫더라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영아는 태욱의 입에 포도를 넣어 주고는 주름진 그의 미간에 살짝 입을 맞췄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다 이해관계가 없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근데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표현을 해야 하는 거예요. 슬프면 슬퍼해야 하는 거고, 상처받았으면 상대방이 알게 해야 하는 거고요. 


만약 그때 예삐가 나한테 표현을 안 했다면 난 몰랐을 거예요. 내가 상처 줬다는 것도 예삐가 내 사랑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것도 몰랐겠죠. 

놀라운 건 그 후로 난 예삐의 마음이 보여서 더 사랑하게 되었고, 내 사랑을 받고 예삐는 다시 안정을 찾았죠.”


놀라운 건 태욱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터뜨렸는데 그녀는 그를 이해하고 순식간에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잖아. 그만큼 유년기를 지나면 잘 변하지 않거든. 근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좀 변한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다시 만난 후 말이야. 어때?”


태욱이 그녀를 못 만났던 1년 동안 많이 깨달았고, 노력할 거라는 걸 그녀가 알아주기를 바랐다. 

마치 그가 영아의 애정을 바라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도 분리 불안을 심하게 앓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말로 먹고사는 그가 어떻게 그녀 앞에서는 할 말을 잘 못 해서 애를 먹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난 사람을 쓰지 않아요. 단, 서로 이해관계가 맞으면 절로 길드는 거예요. 그렇게 익숙해지면 불안감이 사라지거든요. 

물론 그게 다가 아니죠. 우리 관계는. 


하지만 우리가 단단해지면 제아무리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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