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야설) 아내에게 남겨진 흔적 1
오전 외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 앞에서 지역 정보지 몇 장을 버릇처럼 갖고 왔다.
사무실로 들어와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자잘한 광고들이 몇 줄씩 나열된 정보지를 뒤적이는데, 특이해 보이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광고 문구였다.
만남 이벤트. 절대 비밀보장!!
‘만남 이벤트? 절대 비밀보장이라니, 무슨 말이지?’
간단하게 쓰인 몇 줄이 고작이었지만, 제 딴엔 자기네 의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그런 부류의 문구 중 대부분은 유치하고 저속한 표현들 일색이긴 했지만, 그런 노력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너무도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었다.
여성 무료!
상류층 회원 다수 확보!
강남 최고의 역사와 전통!
허전한 생활의 무료함을 멋지게 탈출!
겨울 찬 바람을 막아줄 따뜻한 사랑!
문구는 한정된 지면을 가득 메워서라도 어떻게든 회원을 확보하려는 듯 갖가지 선정적인 표현으로 가득했는데, 마지막 줄에서 남자는 무료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 여성회원 원장 직접 면접 상담, 절대 미모 보장!
매일같이 눈에 띄는 광고라 무시해오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에 뭐가 씌었는지 큼지막하게 눈앞을 가로막았다.
게다가 광고의 내용을 어렴풋이 상상하면서 가슴까지 쿵쾅거리는 나 자신을 느끼며 웃음까지 흘러나왔다.
‘그냥 한번 전화나 해볼까?’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조용히 자기 할 일에 매달려 있는 눈치였다.
나는 표나지 않게 정보지에 나열된 몇 개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한 다음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회사 옥상에 있는 야외휴게소로 가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광고 문구를 실은 사무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거기 이벤트 사무실이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 어디세요?”
“예, 저. 광고 보고 전화했는데요..”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왔지만, 저쪽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와 억양은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차분하고 친절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 분이시죠? . 아, 그냥 참고하려고 그래요.”
“그냥 직장에 다니는데.”
“아, 그러세요? 그럼 잠깐 나오실 수 있으세요? 어디세요, 지금?”
“예, 여긴 역삼동인데요.”
“어머, 그래요? 가깝네요, 여긴 강남역 근처예요. 오실 수 있죠?”
“예. 근데 꼭 가야 하나요? 그냥 전화로 이야기하면 안 되나요?”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바라, 내 호기심을 들키는 것 같아 창피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방문을 요구해 신분이 노출될까 봐 염려되었다. 순간적으로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고, 자칫 직장 동료들과 주변 사람들 입에 이 사실이 오르내리게 된다면!
하지만 오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그런 이성의 감각을 짓누르고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상대방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더욱 적극적으로 나왔다.
“오셔서 저랑 잠깐 얘기를 나누시면 돼요. 어떤 분인지 제가 알아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떤 스타일의 남성분을 원하시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전화로는 다 알 수가 없는 거잖아요? 잠깐이면 돼요. 처음이시니까 좀 망설여지시겠지만 다른 분들도 잘 오시는 걸요, 뭐.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한번 들르세요.”
“예, 그렇군요. 정확히 어딘데요, 위치가?”
“예, 여기는요..”
나는 곧 방문할 것처럼 전화를 끊고는, 걱정하지 말라는 그 여자의 말이 마음에 걸려 결국 찾아가지 못했다.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의 한 편으로 마음이 너무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이튿날 출근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다시 그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제 그분이시죠?”
“예, 그런데. 누구신지?”
“저. 어제 전화하고.”
“아, 어제 통화했던 그. 직장에 다닌다고 하신?”
“예..”
“호호, 뭘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다들 잘 오시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오세요. 비밀은 절대 보장되니까요, 호호호!”
“예, 그럼..”
통화를 끝내고 오전 일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녀가 일러준 대로 택시를 타고 직장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그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가 강조한 피부 마사지실 간판이 걸려 있는 입구에 도착해 한참 동안 망설였다.
건물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선이 마주치면 마치 내가 큰 죄를 짓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고개가 움츠러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신히 용기를 냈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스무 개 남짓한 계단을 간신히 올라갔다.
벽이 회색으로 칠해진 사무실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놓인 책상 두 개와 응접세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실내는 제법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 분위기 탓인지 잔뜩 몸을 움츠러들게 했던 불안감은 어느덧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아까 전화하셨던 경은 씨죠?”
“예, 안녕하세요?”
“예, 어서 오세요. 세상에! 이렇게 직접 뵈니 너무 매력적이시네요, 호호! . 전 김 실장이라고 해요.”
“예..”
“않으세요. 커피 한 잔 드릴게요.”
“예..”
이윽고 커피를 내온 그녀와 마주 앉아 있으려니 왠지 다시 낯설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건네받은 커피잔을 입에 대지도 못한 채 그냥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자신을 김 실장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물었다.
“어떤 광고지를 보셨어요?”
“예. ○○○인데요.”
“아, 그렇군요. 제가 참고하려고요. 근데. 이벤트사 이용은 처음이신가 보죠?”
“예..”
“그래요.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불안해들 하세요. 그렇지만 몇 번 만나보시고 나면 달라져요. 지금까지 다 그래요, 호호호!”
“예..”
“결혼은 하셨어요?”
“3년 되었어요.”
“그렇군요. 남편께서 잘 못 해주시나 보다, 그쵸? 호호호!”
“아뇨. 그이는 떨어져 계시거든요.”
“어머나! 이렇게 예쁘신 분을 혼자 놓아두시다니, 호호호! 사실 우리 사무실 여자 회원 분 중 대부분이 그런 분들이세요. 잘 오셨어요.”
그녀는 수많은 여자를 만나보았다는 듯 나를 안심시키고 편하게 해주기 위해 애쓰는 눈치였고, 나도 그리 싫지는 않았다.
사무실을 찾는 여자 중 대부분이 나와 같은 처지의 유부녀들이라는 말에 적잖이 안심되었고 불안감도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그렇지만 ‘나 같은 처지’란 어떤 처지를 말하는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경은 씨.. 경은 씨는 어떤 만남을 원해요?”
“예?”
“괜찮으니까 우리끼리 솔직하게 말해요. 만남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뭔데요?”
“예. 첫 번째는 순수한 만남이에요. 그건 말 그대로 순수한 만남을 의미해요. 만나서 대화하고 차 마시고. 애인처럼, 아니면 친구처럼 만나는 거죠. 물론 두 사람이 마음에 들 경우지만요.”
“두 번째는요?”
김 실장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두 번째는 만나서 엔조이하는 만남이에요. 어차피 모르는 사람들이니 뒤탈도 걱정 없어요. 남자는 우리가 신분도 확인한,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물론 우리 회원이죠. 그리고 그런 만남은 약간의 대가도 받을 수 있어요.”
“대가라면?”
“사실대로 말하면, 만나서 즐기고 헤어지는 일회성 만남이에요. 남자는 그 대가로 여자분에게 10만 원에서 15만 원 정도를 사례비로 주고요. 어때요, 해보실래요?”
“..”
“만약 그런 만남이 싫으시면 순수한 만남으로 하셔도 되고요. 본인이 좋은 걸로 하세요. 절대 강요가 아니니까.”
“..”
“거듭 말하지만,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우리 사무실은 그런 데 아니니까. 그렇게들 많이 즐기세요. 그런데 경은 씨는 키가?”
“예, 168이에요..”
“어머! 어쩐지. 아까 들어오시는데 훤칠하시고 늘씬하시더라니! 남자들이 좋아하겠어요, 호호호!”
“뭘요.”
“몸무게는 어떻게 돼요?”
“예, 요즘은 한 52쯤 될 거예요.”
“좋아요, 아주 적당하죠. 에구! 난 살이 쪄서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호호호!”
“아직 예쁘신데요. 뭐.”
“후훗! 경은 씨에 비하면 할머니죠, 호호! 나이는 올해?”
“서른두 살이에요.”
“어머, 좋아라, 너무 좋은 나이다!”
“고마워요.”
“저, 경은 씨.”
“예..”
“어차피 남편분과 그렇게 떨어져 계신다면 그렇잖아요?”
“..”
“괜찮으니까 한번 만나보세요. 남들도 다 하는데요, 뭐. 그런다고 남편이 알 것도 아닌데. 안 그래요?”
“그래도 좀.”
“순수한 만남도 좋지만, 기왕이면 즐기고, 약간의 용돈도 받고, 그게 좋잖아요.”
“.글쎄요.”
“남자는 어떤 스타일이 좋을까요? 말해봐요. 우리끼리니까.”
“..”
“괜찮아요, 말해봐요. 거의 원하는 남자분으로 맞춰드릴 수 있어요.”
“예.”
“아무래도 깨끗하고 매너 있는 남자가 좋겠죠?”
“..”
“유부남이 좋을까요, 아니면 총각?”
“..”
“그래요. 내가 알아서 좋은 남자로 소개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만나시면 돼요. 남자가 알아서 리드하니까. 그리고 만나서 헤어질 때 절대로 연락처 같은 건 주지 말고요. 혹시 모르니까 귀찮게 전화하면, 알았죠? 오늘은 어떠세요? 괜찮죠?”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의 그런 침묵을 동의로 간주한 듯 그렇게 결정하고는 곧장 연락처와 만남이 가능한 시간과 장소 등을 물었다.
딱히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오늘 당장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묻다니!
한참 동안 망설인 끝에 내 휴대폰 번호를 일러주고 그곳을 나서는데, 김 실장이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경은 씨, 즐거운 만남 가지세요. 오늘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곳을 빠져나온 나는 어떻게 사무실까지 돌아왔는지 몰랐다. 그리고 사무실로 들어와서도 조금 전 내가 무슨 짓을 벌이고 온 건지를 떠올리며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낯선 남자를 만난다. 그러다가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설마!’
이런저런 혼란스러운 기분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날 오후, 퇴근 시간을 두 시간쯤 남기고 있을 무렵 갑자기 휴대폰에 호출 번호가 찍혔다.
‘3325’
점심때 찾아갔던 사무실의 뒷자리 번호였다. 나는 즉시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김 실장이에요. 경은 씨죠?”
“예.”
“잘 들어갔어요? 호호호! 그나저나 경은 씨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호호호!”
“왜요?”
“저기. 우리 회원 중에 점잖고 매너 좋은 분이 계시는데, 오늘 만나고 싶으시대요. 경은 씨, 시간 괜찮다고 했죠? 한번 만나보세요.”
“저. 어떤 사람인데요?”
“예, 나이는 서른아홉이고, 사업하시는 사장님이에요. 매너 좋으시고 너무 착한 분이세요. 키는 중간이고 잘생기셨어. 호호호! 경은 씨도 만나면 마음에 들 거야.”
“그래요. 저. 정말 괜찮을까요?”
“그럼, 걱정하지 마dy. 내가 알아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소개하는 거니까, 알았죠?”
“그래도 좀..”
“에이, 뭘 그렇게 걱정해? 오늘 만나보고 나중에 또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지나 말아요. 호호호!”
“예..”
“퇴근이 6시라고 했죠? 6시 30분에 강남역에 있는 가나 커피숍으로 나와서 기다려요. 시간이 되면 카운터에서 경은 씨를 찾는 전화가 올 거야. 알았죠? 그럼, 데이트 잘해요. 호호호.….”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김 실장은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방적인 전달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말미에 진지한 말투로 ‘약속시간 잘 지키고’라는 말과 함께.
퇴근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통화를 마치고 나자 내내 나는 불안한 심정으로 후회를 거듭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어야 하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그건 그렇고, 만나서 어쩐다? 커피 마시고, 무슨 얘기를 하지?’
불안과 초조함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옆자리의 미스 김이 문득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 일도..”
마치 내 행동거지를 들키기라도 한 듯 화들짝 놀란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화장실로 갔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불안에 떠는 마음과 달리 화장을 고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고는 조금 마음이 놓였다.
거울 속 얼굴에는 마음속처럼 그렇게 천박하거나 불안한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뻔뻔해 보이기까지 해 이게 진정 내 얼굴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었다.
누가 봐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나 아닌 다른 여자, 그녀가 천박하지 않은 세련된 컬러의 루즈로 입술을 그리고 있었다.
퇴근 후 그녀가 일러준 곳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려니 후회와 긴장, 알 수 없는 기대감으로 전신이 경직되어 얼어붙는 듯했다.
약속시간까지 아직 5분 정도 남아 있었지만, 그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둘째 문제였다. 차라리 아무런 연락이 없어도 좋으니 상대방이 나타나주지 않기를 바랐다. 머릿속으로 온갖 갈등이 스쳐갔다.
‘목소리만 들어보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달아날까? 아님 지금이라도?’ 그런 내적 갈등의 순간도 잠시였다.
“김경은 손님, 전화 받으세요.”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여 멈칫거리다가 내 이름이 두 번 이상 불리는 창피는 피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예. 저는 신준식이라고 합니다. 김경은 씨 되시죠?”
“예, 제가..”
“예, 나오셨군요.. 처음이시라는 말을 듣고 안 나오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
“저는 지금 아래층에 있습니다.. 올라가겠습니다.”
“예..”
“무슨 옷을 입고 계시죠?”
“남색 스커트에. 밤색 니트요. 창가 쪽이에요..”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