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의 과거회상록 두번째(개정증보판)
아 예.. 다녀왔습니다. 아랫집에서 마실오라고 했었는데 며칠 까먹고 있다가 이거 쓰는데 전화가 왔었어요.댓글보니 반응들이 좋은데 한분이 그러시더군요. 전두환정권때 예편한사람 딱 둘이라고.실제론 약 40여분 계시고 그 중 가장 유명한게 둘입니다. 신상털기하지 말아주세요. 여튼 그렇게 콘도에서 저는 신세계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방에 들어가서 진동기와 딜도를 딱 내밀 땐 기가 막혔습니다. 기쁨일지도 몰랐겠습니다만... 요새 남편의 물건은 제대로 본 지 꽤 됐다만 그 당시에도 부실해 여자로서의 기쁨은 없다시피 했고 논문 연구에서 성과가 없는데 기한이 다가와 많이 민감한 상태였기에, 의무방어전을 요구해도 외려 연구실에 더 틀어박히던 남편이라 바이브는 생명수였습니다.남자분들은 잘 모르실겁니다. 흔히들 물건이 발기할때 아랫도리가 뻐근하다고 하지만 여성을 남성이 꽉 메울때 그 뻐근한 감각은 여성으로선 가히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리고 가장 민감한 부위를 살짝 덮고 있는 것을 약간 넘겨 그곳 주위로 바이브를 돌리면 점점 고조되는 느낌이 이루 말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언니가 딜도를 대체 몇 종이나 갖고 있는지는 지금까지도 저에겐 미스테리입니다. 대체 안들키고 어디에 보관하는지도... 여튼 안을 휘젓고 다니는 그 느낌이나 가득 메운채 떨리는 감각은 당시 저로썬 신세계였고 그렇게 첫 기구를 이용한 자위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당시 일박을 하면서도 신기한 것은 언니와 같이 여러번 자위에 몰두했지만 남자를 유혹하거나 동성애 행각을 벌리지 않은 것입니다. 뭐, 학습효과였겠죠. 그만큼 제 인생 초기의 성생활은 메말라있었습니다.정말 제대로된 성관계 후엔 딜도로는 별로 성이 차지 않더군요. 내 안의 육봉이 뜨겁게 맥동하는 감각이 벽에서 허리를 타고 올라올때 그 느낌이란... 그리고 질내사정은 딜도가 따라올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요즘엔 그것도 따라하는지 몰라도 몸 속에서 뿜어져나올때, 세찬 느낌과 꿀럭거리며 다시 미어나올때가 제가 가장 즐기는 순간들입니다.너무 적나라한가요...? 여튼 남자분들은 어떠한 즐거움을 느끼시는지 잘 몰라도 여자로 산다는 건 그런 즐거움만 충분하다면 정말 괜찮다고 봅니다.예전 미국에 있을 때 퍼킹 머신이란 걸 아게 되었는데 그런걸 가지고 있다면 여자로는 충분할것 같습니다. 다음은 딜도와 진동기로 연명하는 생활을 지나 해방을 겪게 됩니다. 남편이 미국 모 주립대로 연구때문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아이들 유학도 시키고 집안의 분위기에서 떠나기 위해 사전공작이 있었습니다.남편은 밤일이 부족한것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에서 살 집을 찾겠다고 할 때 그러라 했고 전 언니의 조언대로 부도심에서 가깝고, 대학에서 먼 집을 골랐습니다. 순진한 그이는 대학이 멀어도 정원이 좋아서 선택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다. 그러면서 자기도 정원일 취미를 붙이더군요.가장 첫 혼외정사는 의외의 대상과 일어났습니다. 적당히 술집 같은곳이나 클럽을 찾고 있던 저에게 남자가 접근한 것이죠.사실 그 친구(?)는 꽤나 바람둥이였다고 합니다. 이탈리아계 청년이었는데 의외의 접근방식을 쓰더군요.먼저 정원일에 취미를 붙인 그이에게 접근해 식물류에 대해 해박한 지식-전공이 생태학이었다는데.. 진짜였는지는 모르죠-을 자랑하며 저희 집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그 방문들을 이용해 이탈리아 음식이며, 집안 장식이며 등등 취미에 대해 논하며 은근슬쩍 윙크도 하고 사인을 제게 보내더군요. 아마 저희 부부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읽었나봅니다. 각방을 쓰고 살았거든요.첫 관계는 아이들이 슬립오버-친구집에서 자고오는것-을 하고, 남편이 학회일로 멀리 동부쪽으로 가며 시작되었습니다. 정원용품을 같이 사러 나간 남편이 자기 학회 일을 말했었나봅니다. 그는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농담처럼 제게 같이 자보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늘 하던것처럼 빙글거리며 말이죠. 제가 진지하게 망설이자 저를 벽으로 밀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더군요. 배덕감보다는 황홀함이 앞섰습니다.학회는 2주 정도고, 마침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는 터라 저는 그에게 점심을 먹으러 오라고 전화했습니다. 그는 근처에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했는데 점심은 항상 집에서 먹어 그 버릇을 알고 불렀습니다.점심은 그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느라 그냥 먹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아이들이 안온다는 말을 하자 제 뺨에 입맞추더니 자기 직장에 전화하더군요. 일이 있어서 내일 오전까지 휴가를 쓰겠다고요. 그러고는 첫 혼외정사가 시작되었습니다.그를 부를 때 일말의 기대감으로 속옷은 최대한 야한 것으로 입었습니다. 당시는 어떻게든 배에 군살을 없애버렸던 시기라 그는 상당히 놀란듯 했습니다. 애 둘 낳은 유부녀가 이정도라니 했겠죠.옷을 다 벗기도 전에 한번 약하게 느꼈습니다. 남편은 형식적인 전희와 삽입운동 후 사정이라는 패턴, 정상위만을 했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귓불을 깨물고, 가슴을 애무하고, 입술로 허벅지부터 훓고, 클리토리스를 혀로 건드리며 연신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최고다 하더군요. 아직도 그때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삽입에서도 침대에 다소곳하게 누우려는 저를 그는 일으켜 세우더니 자기가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앉혀 좌위로 시작했습니다. 처음 밀고들어올때는.. 크기만 따지면 딜도보다 그리 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체온과 혈관이 벽에서 느껴지는 것이 정말 좋았죠. 그때, 전 그가 콘돔을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굳이 제지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충족감과 황홀감이 몸을 메우고, 이 온도가 이물질로 가려지는게 싫었습니다.제 허리를 들었다 놨다 하며 장난치던 그는 본격적으로 피스톤 운동을 시작했고 자세를 바꿔가며 하다가 가위치기 자세를 저한테 해봐도 되냐고 하더니 제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자 씩 웃더니 제 허리에 베개를 받치고 다리를 적나라하게 벌리고 허리를 흔들었습니다. 저는 이미 한번 절정에 올랐고 그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가 절정에 이르려는게 느껴지자 그의 허리를 다리로 감고 꼭 죄었습니다. 남편의 찍 발사하는 사정이 아니고 격류가 자궁구-인지는 모르지만-을 때리는 듯한 감각에 저는 몸을 떨기만 했고 그는 얼떨떨해 하다가 저를 꼭 안아주고는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습니다.십년쯤 지난 이야기지만 그는 정말 저에게 잊지 못할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로도 계속 지치지도 않는지 뒤로, 입으로, 온갖 체위를 저에게 시켜주며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분명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철저한 쾌락과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가장 즐거웠던 체위는 저라면 후배위 자세를 들겠습니다. 여성들이 싫어하는 체위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남자들이 애무에 신경쓰지 않으면 여자에게 남는건 수치심뿐이지만 그는 정말로 애무만으로 제가 그의 말을 듣도록 했습니다. 하나 더하자면 보통 여자들이 후배위로 할 경우 피스톤운동의 힘이 손목이나 머리에 실리는데 그렇지 않도록 그는 등돌린 좌위로 일으켜 세워 제 가슴과 목을 애무해주었습니다. 그게 이후 제가 제 파트너들에게 후배위시 요구하는 메뉴가 된 것은 나중의 이야기. 어쨌거나 저는 그렇게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가 원할법한 오럴이나 애널을 기꺼이 할 용의가 있다고 했지만 그는 일단은이라고 웃으며 후희에 골몰했습니다. 이후 만난 이들 중 그런 반응을 보인 이들이 없어 그는 제 마음속에 아직도 이상적인 파트너상의 큰 파트로 남아있습니다.
여기서 글을 더 올리고 싶은데 아무도 안올리셔서 도배규정에 걸릴까봐 그냥 이걸 개정증보 합니다.
댓글 중 흑인과 한 이야기를 올려달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런 관계로 세계 남성들의 물건 이야기와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미국에서 1년간 있다가 남편은 한국으로 귀국하고 저는 아이들과 같이 미 동부지역으로 떠났습니다. 아이들 교육으로 남은 것이라 말이죠.
이탈리아 청년과는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와 첫 혼외정사, 첫 애널 관계, 다종의 체위를 시험한 기억들은 나중에 시간이 나면 풀어놓겠습니다.
동부지역에서는(구체적인 지명은 안밝힙니다) 한번 더 이사를 가서 많은 남자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국적은 미국이라도 인종별로, 출신별로 여러 남자들과 할 수 있었죠. 여기 올리신 글들을 읽어 보니 텐인치님 와이프랑 비슷한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아시아인 물건은 대체적으로 작지만 단단하고 질 안을 종횡하는 느낌이 좋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만 저는 그렇더군요. 뭐, 일본, 중국, 대만, 태국, 캄보디아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겪어본 아시아계중 가장 좋은 남자는 대만 출신 화가 청년이었습니다. 낭만적인 기질도 넘치고 삽입보다 전후희를 즐기는 것이 여자들 여럿 녹였겠더군요. 저처럼 좌위를 좋아해서인지 오랫동안 제 주 파트너였습니다. 누드화를 그려주기도 하고 지내다가 이사오면서 헤어졌지요.
동부에 와서 한 2년쯤 지나 한국계 의사 한 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가까워졌고 그에게 소개받아 루프 삽입을 했습니다. 그 이후론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모조리 질내사정을 시켰습니다. 저는 그 감촉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더군요.
여튼 그건 그렇고, 루프삽입도 했겠다, 남편도 없겠다, 테크닉도 늘었겠다. 아이들만 잘 떼어놓으면 섹스라이프가 정말 즐거워집니다.
보통은 애들 눈을 피해 오전중에 남자를 만났고 개중 흑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흑인들의 물건이 크다, 굵다 하는데... 진짜입니다. 제가 겪어본 것 중 하나는 26센치라고 본인이 그러더군요. 자궁구를 찌르는 그 맛이 정말.. 이태리인 청년 다음으로 좋았습니다.
다만 한가지 별로인게 있다면 애무보다는 삽입 위주, 특히 거칠어서 저랑은 좀 안 맞는듯 합니다.
개중 가장 좋았던 경험은 시에라리온 출신의 바텐더였습니다. 바텐더라고 얄쌍한 이미지가 아니고 정말 한 2미터 조금 못 돼는 거구에 온통 근육질, 레슬러 같은 몸매였습니다. 한 다리 건너 소개를 받았는데 그와 한 체위가 정말 인상깊었습니다.
저야 뭐 키가 동양인 치고는 크고 몸매도 글래머에 가깝지만 그의 반 수준이라 그가 가볍게 들고 그의 육봉에 꿰어 공중에서 흔들 수 있었습니다. 소위 벽치기 자세를 하는데 절 소파 뒤에서 번쩍 들더니 등받이를 잡으랍니다. 그래서 잡았더니 하반신을 번쩍 들고 다리를 허리에 감더니 흔드는겁니다. 그런데 그가 워낙 잘 받쳐줘서 손목에 무리가 없고 정말 뿅갔죠. 괴력으로 별별 기이한 체위가 가능했으나 물건도 커서 삽입도가 너무 높아 나중엔 제가 정상위로 하자고 할 정도였습니다.
시작하면 일단 안아드는데 근육질 가슴에 폭 안기면 그만한 안정감이 또 없습니다. 공주님자세로 안고 올라가 침대나 소파에 내리는데 다른 인종들은 체격 면에서 흑인들만 못해 그게 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써보고 다음엔 백인들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추천 많이 주시면 그 간격이 빨라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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