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사-1
나의 가족사 - 1편
허얼신 320136
전에 다른글을 쓰면서 잠깐 언급 한적이 있는데 제가 다음주면 환갑이 됩니다. 나이 많이 먹은것이 자랑도 아니고 또 요새는
환갑 가지고는 오래 살았다고 하기 힘들지요. 그냥 환갑을 맞이하여 잘난것은 없지만 회고록 비슷하게 저의 가족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제가 52년 7월생이니까 한참 한국전쟁이 진행중일때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그때 20세이셨고 제가 첫 아들 이었죠...
아버지는 국군 장교였고 계산해보니 37세였겠네요... 사실 아버지에 대한 어렸을적 기억이나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는 일찍 결혼해서 본부인 사이에 2남 3녀가 있었다는데 6.25 사변때 본부인과 아이들 4명은 행방불명 되고
막내딸(제 큰누이 48년생) 하나만 나중에 찾았습니다. 하긴 황해도 개성에서 국군 장교 가족이 무사히 6.25를 보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제 어머니는 강원도 강릉 근처에서 사는 제법 큰 부자집(천석군)에서 3남 5녀중에 셋째딸로 태어 나셨지요. 위로 오빠 하나
언니 둘,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 6.25 사변이 나기전에 언니 둘과 오빠는 결혼을 했고 어머니도 가을에 시집가려고
약혼자가 정해져 있었다고 하네요... 근데 6.25 사변이 나고 인민군이 내려오자 오빠와 형부들은 인민군에 징용 안 당하려고
몰래 남쪽으로 내려가고 오빠 아들과 언니 둘은 친정집으로 왔답니다.
하지만 그 작은 시골에서 비밀이 있을수 없고 인민군은 도망간 아들과 사위, 그리고 천석군이라는 이유로 외할아버지를
잡아 가두었고 결국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언니 둘이 인민군 장교에게 몸을 더렵혔고 간신히 외할아버지의 목숨은 구했지만
전 재산을 빼앗기고 남동생(그때 당시 16세)은 인민군에 자원 입대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얼마 안되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언니 둘과 남동생은 북으로 데려가고 국군이 들어왔답니다.
그때 들어온 국군의 총 사령관이 저의 아버지이셨고, 남동생이 인민군에 자원입대하고 전 재산을 인민군에게 헌납했다는...
그리고 두 딸이 인민군 장교의 첩이었다는 이유로 외할아버지는 다시 국군에 의하여 잡혀가고, 결국 어머니(당시19세)와
넷째 딸(당시 18세)은 언니들이 한데로 이번에는 국군 장교를 찾아가서 외할아버지를 구해 나왔답니다.
그뒤에 다시 1.4 후퇴가 되고 어머니와 가족들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포항 근처에 자리잡고 피난 생활을 했답니다. 물론 그곳의
사정도 별로 틀리지 않아서 지나가는 부대마다 장교들에게는 처자들이 제공 되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면서 써준 친필
편지를 국군 장교들에게 보여주었고 , 그 덕분에 다른 피해가 없이 지냈다고... 여담이지만 저의 아버지가 사실 박 대통령보다
두살 연장이고 거의 직속 상관이었다는데 전쟁중에 충청도에서 육영수 여사를 만난적이 있는데 육 여사도 그때 박 대통령의
친필 서찰을 가지고 있었다고... 박 대통령 본 부인이 따로있고 그 사이에서 난 친딸이 있다는 것은 이제는 비밀도 아니죠...
그러다가 포항 근처에 빨치산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어머니 가족은 서울로 이사 하셨다고 하네요... 그리고 서울에서
다시 아버지와 만나게 되고 결국 제가 태어난거지요... 하지만 전쟁통에 호적도 없고 (아버지는 그때 본부인의 이름이 호적에
올라 있었고 본부인 동의없이 저를 호적에 넣을수 없었죠...) 결국 휴전이 되고 본부인이 행방불명 또는 사망 처리가 된 뒤에
저는 아버지 호적에 어머니 이름과 함께 올라갔죠. 물론 어머니는 부인으로 올라간게 아니고 저의 친모로 즉 아버지의 첩의
자격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래서 호적상 제 생년월일은 거의 두살이 틀린 54년 4월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호적에는 저의 어머니 이름말고도 10 여명의 여인과 20 여명의 제 또래 아이들의 이름이 거의 같은 시기에 올라가서
나중에 제가 학교에 주민등록 등본을 제출 하려면 4장에 거기엔 형제들 이름만도 20 여개 적혀 있었고 나중에 제가 미국에
이민 올때도 이것 때문에 좀 골치 아팠습니다. 물론 그 숫자는 그뒤에도 계속 늘어났고 아마 마지막으로 저의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린 자식은 88년생 일겁니다. (아버지 73세때 태어난 자식...)
하엿튼 서울에서 살때 가끔 아버지가 갓난아이를 안은 여인을 데리고 오시면서 "너의 작은 어머니시다... 인사드려라..."
하시면 저는 동생이 하나 더 늘어났지요. 저의 작은 어머니 중에는 제가 국민학교 1~2 학년때 담임을 맡으셨던 여자선생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이부분은 보충 설명 드릴께요...)
저의 외할아버지는 휴전이 되기 직전에 길을 가다가 미군기에서 난사하는 기관총에 맞아서 넷째 이모와 같이 돌아가셨고
결국 어머니와 저 그리고 막내이모와 제가 형이라고 부르는 성이 다른 사촌형(엄마의 오빠의 아들)만이 남았고 다른 사람은
생사조차 확인이 안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5.16 이후에 전역하셔서 군납하는 회사를 하시다가 전쟁중에 알게된 미군 장교의 주선으로 대미 무역과 주한미군의
물품 납부를 맡게 되었고 돈은 항상 여유롭게 쓰셨지요. 제가 국민학교 5학년이 될때까지는 한두달에 한번씩 저의 집에
오셔서 자고 가셨는데 그 뒤에는 미국에 올때까지 못 뵈었습니다. 다른 작은 어머니 집에서 지내셨지요... 제가 미국에 와서
자리잡고 1999년 겨울에 초청했을때가 국민학교 5학년 이후에 처음 뵙는 것이었고 결국은 마지막으로 뵈온 것이었지요.
2003년에 한국에서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엿튼 1999년 12월부터 2000년 1월까지 2달 정도 같이 지냈는데, 그때 당신의 연세가 85세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일주일에
두번씩 백마를 타고 노셨습니다. (가끔 흑마와 황마 또는 라틴 혈통도 타시고요...)
저의 막내 이모는 아버지의 소개로 용산 미군부대에서 일하다가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넘어왔고, 시민권을 받은뒤에
형제 초청으로 저의 어머니를 불러서 결국은 저는 여동생(58년생)과 같이 미국에 이민왔고 형(사촌형)은 호적이 큰외삼촌
이름 밑으로 되어 있어서 아직도 한국에 살고 계십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계실때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조그만 잡화상을
운영 하시면서 막내 이모가 PX에서 사오는 물건들을 한쪽에서 몰래 파셨지요... 저의 유년 시절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넉넉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상으로 간추린 저의 가족사는 마치고 제 이야기를 하지요...
호적때문에 거의 2년 늦게 학교에 늦게 들어간 저는 워낙 선천적으로 키도 커서 항상 반에서 대장이었고 또 중 고등학교때도
대부분의 체육 선생님이나 교련 선생님들이 알고보면 아버지의 한참 밑 쫄개들이라 어느 선생님도 저를 터치하거나 벌주지
못 했습니다.(머리카락을 장발로하고 교복 바지를 줄여서 입어도...) 그냥 공부도 곧 잘해서 5대 공립중에 한 학교에 들어갔고
어머니가 취급하는 미국 물건들 (특히 프레이보이등의 도색 잡지) 덕분에 동네 깡패들도 제말은 잘 들었습니다.
제가 첫 경험을 한것은 15세이고 처음 실제로 성행위를 하는것을 본것은 8~9세때 정도 입니다. 저의 막내이모가 용산의
미군부대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막내 이모는 용산쪽에 하꼬방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모집에는 그 당시는 거의
보기 힘든 침대라는 것이 있었고 저는 그 침대 위에서 뛰며 노는것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이모집에 놀러가곤 했는데 하루는 이모방에서 이상한 신음소리와 삐꺽거리는 소리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남자가
영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일인가 하고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벌거벗은 흑인 남자가 침대에 앉아서 역시 벌거벗은
이모의 두 다리를 잡고 엉덩이를 움직이는데 그떼마다 이모는 신음소리를 토해냈지요...
그때는 순진했었기 때문에 뭔일인지도 모르고 조금 보고있다가 끝날때까지(어짜피 침대위에 올라가 뛰어 놀기는 글렀으니까)
그냥 쪽마루 구석에 앉아 있었지요. 조금 있다가 그 흑인이 나오면서 앉아있는 나를 보더니 주머니에서 1불짜리 하나를 꺼내
주었고(그때 저는 그게 미국돈인줄도 몰랐음.) 이모가 나오면서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언제 왔냐고 묻는데 웬지 아까 왔다고
말하면 안될꺼 같아서 방금 왔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국민학교 5학년쯤 되었을때 그때 무슨일이 생긴건지 이해했지요...
막내이모 이야기 (막내이모 시각에서 씀)
내가 13세가 되었을때 6.25 전쟁이 일어났고 부유하게 살던 우리집은 초토화가 되고 피난 생활과 천신 만고 끝에 셋째 언니와
같이 서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18세가 되자 나도 무엇인가 일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었으나 실제로
서울에서 내가 할수있는 일은 없었다. 언니가 하는 잡화가게에 나가서 가게를 봐주거나 집안 청소와 설거지등의 잡일외에는
내가 할수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곁에서 평생 신세만 지고 있을수도 없는일이고...
항상 밤 늦게 잠깐 와서 자고가던 형부가 웬일인지 점심결에 집에 들어왔다. 언니는 잡화상에 나가 있는데... 점심을 차려서
안방으로 가져가서 형부 앞에 놓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 저..."
" 응, 왜... 연희야(가명)" 하며 나를 처다본다.
" 저, 혹시 제가 할만한 일이 ..."
" 없어... 나가서 너 할일 해..." 형부가 말했다.
" 아니 그게 아니고... 저도 신세만 지는게 미안해서... 뭔가 하고 싶은데..."
한참 내눈을 주시하더니 "그래, 그럼 어깨 안마 좀 해줄래 ?"
뭔가 엄청 잘못 이해 하신것 같다... 그 이야기가 아닌데...
할수없이 형부 등뒤로 가서 어깨를 주므르기 시작했다.
앉아서 점심을 다먹은 형부가 아직도 어깨를 주므르는 나에게
" 진심이야 ?" 하고 묻는다.
" 네, 진심이에요."
" 어떤일 ?" 형부가 다시 묻는다.
" 아무거나... 뭐든지..."
" 언니도 알아 ?" 형부가 물었다.
" 아뇨, 언니한테는 비밀..."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형부가 상을 밀어놓더니 돌아서서 내몸을 끌어 당겨서 안는다. 그러더니 키스를 하면서 손을 저고리
속에다 집어 넣고는 내 젖가슴을 만진다. 놀라고 당황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어.." 하고 있는데 치마를 들추고는 보지를 감싸고
있던 헝겊쪼가리를 잡아 당겨 버린다.(그때는 아직 제대로 된 펜티가 없이 치마밑에 마치 기저기 같은 헝겊을 대고 치마끈으로
묶고 있었음...) 어느새 군복 혁띠를 푸르고 바지를 내린 형부가 단단해진 자지를 나의 보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엄청난 고통
때문에 "아..ㅤㅇㅏㅋ크..." 하며 소리를 지르니... "처음이지... 처음엔 다 그래..." 하면서 형부가 나의 젖가슴을 쥐어짜며 그의 자지를
힘껏 더 밀어 넣었다.
그러더니 엉덩이를 움직이며 단단한 자지로 질벽을 마구 찌르면서 왕복 운동을 한다. 고통속에 눈물이 흐르면서 아무런
정신없이 신음하며 누워있는데 형부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더니 내 질안에 들어온 그의 자지가 떨리면서 무슨 액체
같은걸 내질안에 쏟아낸다. 그리곤 잠시 형부의 몸도 내 몸위에서 떨더니 푹 쓰러진다... 잠시 그 상태로 있다가 형부가
"좋은데..." 하며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바지속에서 백원짜리 지폐를 꺼내더니 "용돈으로 써..."
하면서 내몸위에 던져두고 방을 나갔다... 한참 누워 있으면서 무슨일이 생긴건가 돌이켜 보는데 계속 눈물만 흘렀다...
사흘뒤 다시 형부가 점심결에 찾아왔다. 그대로 나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더니 요를 깔고 옷 다 벗고 누우란다... 자기도
옷을 다 벗더니 내 몸위에 올라타서는 또다시 단단해진 자지로 내 보지를 찔러댄다. 헌데 전번보다는 고통이 훨씬 덜했다.
"어때, 이젠 괜찮지 ?" 나를 보며 묻는다... 그리고는 다시 열심히 나의 보지를 찔러댔다. 한참을 그렇게 박아대다가
몸을 일으키며 나의 두 발목을 잡아서 들어 올리더니 내 가슴 쪽으로 민다. 엉덩이가 요에서 떨어지며 보지가 하늘을 향해
벌어진다. 다시 내 보지안에 자지를 집어넣고는 힘차게 박아댄다. 몸과 마음이 좀 이상해 지는것 같더니 나의 호흡이 가파지며
열이 오르며 땀이난다. 그러더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뭔지 모르게 미칠것 같다.
그런데 형부의 몸이 떨리면서 다시 내 질안에 액체를 싸고는 쓰러진다... 잠시 있다가 일어나며 "아직 언니는 모르지 ?" 하고
묻는다. "네.." 하고 대답하니 이번에도 주머니에서 백원을 꺼내서 던져주고 나간다... 가슴속에 답답한 기운이 아직 남아있다.
뭔지 몰라도 조금만 형부가 더 찔러주면 확 터져 버릴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그 뒤에 일주일에 한두번씩 형부가 낮에
찾아왔고 한 두달이 지난뒤에 나는 처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러면서 형부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고 내가 원했던 것이 취직이었다는 것과 형부와의 오해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형부가 용산에 짓고있는 미군 부대에 할일이 있을것도 같다면서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일뒤에
나는 용산기지에 취직되었다...
어릴적 기억에 약간의 각색을 해서 글을 썼지만
대부분 사실을 기초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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