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학기 마지막 시험을 보고 왔습니다.
실패했습니다, 저는.
학기 마지막 3차 시험을 보고 왔습니다.
이번 학기엔 100점 만점에 100점 맞았던 시험도 있었으나, 학사경고가 확정적입니다.
100점, 1학년 때 이후로 이런 점수는 처음이네요.
아직 학점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번 학사경고로 제적도 될 예정입니다.
1년 지나면 재입학 신청도 할 수 있지만, 두렵네요.
1년동안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열심히 벌어볼까.
그동안 촛불집회에서 연행됐던 일, 그 일로 벌금 200만원의 일반교통방해로 약식 기소된 일, 재판으로 가서 50만원을 선고받고 항소한 일, 집을 따로 구해 나와서 어머니의 이혼 재판 준비를 했던 일, 2년 살았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일 등의 여러 일들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공부를 열심히 했다면 학점이 잘 나오는 것이니, 변명은 필요없고.
내가 선택한 것이니 결과도 내가 책임을 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도 얘기를 해보자면,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성적은 좋았지만 헛똑똑이였습니다. 별 생각없이 살았죠.
문화고 교양이고 뭐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눈 앞 밖에 몰랐어요. 그저 점수 높은 대학만 가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대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점수가 안 됐고, 연세대 공학부에 가고 싶었지만 떨어져서, 붙었던 고려대 화학공학과에도 안 가고 재수를 했습니다.
재수를 하고 성적이 더 안 좋아져서 이번에는 고려대 화학공학과도 떨어지고, 건국대 화학공학과에 들어갔죠.
그리고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자퇴를 했습니다.
삼수를 하고 성적이 조금 더 나아졌지만 역시 약대에 가기에는 모자란 점수.
연세대 공학부에 또 떨어지고 결국 고려대 화학공학과에 들어왔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안 했으니 약대에 못 간 것이겠죠.
그리고 대학에 들어오고나서 이것저것 많이 보고, 많은 사람도 만나면서 사회의 안 좋은 면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 내가 그렇게 점수 높은 대학, 학벌을 따졌는데 그게 참 사회의 병폐로 인한 것이구나.
뭐 그런 것들 있잖아요.
학연, 지연 등은 타파해야하는데 저는 이미 그 안에 있었으니, 지방대학으로 옮길 수는 없겠고, 이 안에서라도 바꿔보자는 생각을 하게됐습니다.
난 열심히 과목을 이해하고 시험을 봐도, 오히려 수업도 많이 빠지고 과목은 이해 못 하지만 미리 기출문제의 답을 구한 아이들이 더 시험을 잘 보는 것도 보고 좀 실망도 하고.
주입식 교육의 폐해, 대학이라는 곳이 학문의 전당이 아니라 교육의 탈을 쓰고 돈장사하는 곳이라는 것도 보게 되고.
어쨌든 어떻게든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학년 때에는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들이 큰 도움이 되니 학점이 꽤 잘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중간,기말이 아닌 3차시험을 보는 공대는 저에게 꽤 빡빡했습니다.
한창 문화나 교양, 정치, 사회 등에 관심이 있던 저에게는 공부만 하기는 시간이 모자랐어요.
과중한 숙제와 보고서 등을 쓰고 시험공부를 하려면 저에게 있어서는 잠자고 밥먹는 시간 외엔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저는 사소한 것까지 모두 제대로 하려는 성격입니다. 그러다보니 큰 것을 놓치는 것이죠.
많은 전공과목들을 하나하나 모든 증명까지 다 이해하고 넘기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한글이 아니라, 영어로 된 전공과목들을 보려면 더 시간이 많이 들게됐죠. 전문적인 낱말들도 많이 나오고.
숙제를 해도 남들이 한 시간이면 할 것을 저는 몇 시간이 걸리고, 제 시간에 맞춰 내는 것도 부담이 되고.
어떤 애들은 남이 해놓은 숙제 베껴서 쉽게쉽게 내버리던데, 저는 그게 정말 싫습니다.
학교에 밤 10시 11시까지 남아서 숙제를 하고 집에 터벅터벅 돌아오는 것이 몇 년 반복되니 버티기 힘들어지더군요.
보통 시험 성적이 좋으려면 이해하지 말고 외워라. 외우면 시험 성적은 잘 나오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 했습니다.
다른 분들을 보면 참 의지가 강한 분들이 많으신데, 저는 참 의지가 약한 것 같습니다.
집까지도 왔다갔다하면 하루 세 시간, 오가는 동안 책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전공 과목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시험과 몰아치는 숙제에 부담도 커지고, 시험기간이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깨어있어도 정신이 제 정신이 아닌 그런 생활을 보냈죠.
저는 수업 시간에 떠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른 학생들이 떠들거나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데엔 진저리가 나는 성격입니다.
수업도 열심히 들어왔고요.
하지만 제게 큰 단점은 아침 시간에는 지각이 좀 많다는 것.
사소한 것까지 붙들려는 성격이 결국 큰 것을 놓치게 되고, 수업은 열심히 듣지만 지각으로 빠진 부분이 생기고
이런 것들이 모이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따라가기가 어려워지더군요. 포기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점점 공부해야할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해지는데, 스트레쓰는 커져만 가고.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밖에는 못 하는 사람이 되었네요.
한꺼번에 몰아치는 시험과 숙제라서 시험 성적은 나쁘지만, 나는 내 걸음걸이대로 걷자고 생각해서 방학 때에라도 과목을 이해하자고 계획했지만,
학기 중에 시간이 없고 마음에 부담이 돼서 안 보고 미뤄뒀던 영화나 책들 등을 보다보면 전공과목을 공부하기엔 방학도 참 짧았습니다.
그렇게 쳇바퀴 돌듯 지나게 되고.
학기 중에는 좋지 않은 요리솜씨지만 그렇게라도 요리해 먹을 시간도 없고, 기름기 미끄러운 게 싫어서 설거지도 꽤 꼼꼼히 오래하는데 설거지도 쌓이고, 손빨래로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세탁기로 다 돌리고.
하고 싶은대로 못 하면서도 성적도 좋지 않으니 사는 게 참 피폐해졌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배부른 소리지만.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없어지고, 악순환이 점점 심해지고.
휴학을 하고 마음을 좀 가다듬자고 생각해도, 부모님이 안 된다 빨리 졸업하라고 하셔서 지쳐도 계속 다니게 되었고.
결국 결론은 다른 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저 공부만 하자. 이렇게 되더군요.
그렇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부모님께도 볼 낯이 없고, 그동안 뭘 했는지. 이젠 나이도 꽤 먹었고. 돈도 많이 낭비하게 됐네요.
저는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빠듯한 교육과정에 맞추기엔 제 공부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나쁜 학생도 아니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지각을 했을지언정 대리출석도 해본 적이 없고, 시험시간에 한번도 남의 답 베껴본 적도 없는 착한(?)학생이었는데, 문제아가 되어버렸습니다.
1등만 바라보고 꼴찌는 버리고 가는 교육.
아무리 교육이 잘못 됐다고 핀란드 교육 얘기해봐야 제가 잘못한 것을 변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어떻든 제가 못 따라간 것이니.
청년 자살률이 높다는데, 저의 정신도 병이 좀 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몸의 병도 돈 없으면 치료를 안 해주려는데, 맘의 병이야 뭐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래도 살아야죠.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네이버3 회원님들 모두 칼바람 조심하시고 추운 날씨에 몸 건강하세요.
바람이 아니라 칼이 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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