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A 시험 전 주 두 번째 날
섹스가 끝난 후 팔 베개를 해 준 다음 노곤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하다 갑자기 압박이 들어왔다.
자기는 지금까지 남자친구 아닌 남자랑 섹스를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이게 별 거 아닌 것으로 들리겠지만 이건 여자들이 사용하는 언어인 여성어로 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남성어로 해석하면 이렇게 된다. ‘나랑 섹스를 했으니 책임져. 나도 네가 싫지 않으니 지금 당장 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시를 한 편 쓴 다음에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할 영광을 주겠어!’
물론 내가 사람 마음을 읽지는 못하므로 이 해석은 아니면 말고다.
남의 장단에 춤 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내가 못 알아들은 척을 하자 아까 한 말을 아주 조금 바꿔서 조금 더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자 내 해석이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 듣는 것과 그 지시에 따르는 것은 전혀 별개다.
내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 못 믿겠다는 투로 “진짜?” 라고 물었다.
그러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팔로 얼굴을 가리면서 아주 조그맣게 웅얼거린다. “프랑스에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 가 있을 때만 빼고……”
내가 키득거리며 웃자 부끄러워하는 게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동요했다.
“오늘은 어떻게 된 거냐”고 추가타를 넣자 섹스를 못 한지 아주 오래 돼서 민감해진 거라고 변명을 한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됐냐고 추궁하자 잠깐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부끄러운 듯이 담요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둘 다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쌕쌕 거리는 숨소리에 잠이 깨서 옆을 보자 정말로 달게 자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를 가볍게 쓸었더니 얘가 비몽사몽상태로 시간이 몇 시인지를 묻는다.
11시 약속에 맞추려면 시간 많이 남았다고 안심하고 더 자라고, 시간 되면 깨우겠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하고 다시 잠들어서 귀엽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확실히 잠든 걸 보고 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마시고 오자 얘가 잠에서 깨서 부루퉁한 얼굴로 앉아 있다.
내가 깨운 거냐고 미안하다고 묻자 내 질문은 무시하고 더 자자고 한다.
내가 옆에 눕자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 팔을 베고는 얼마 안 돼서 다시 코를 골기 시작했다.
11시 약속에 맞추려면 지금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깨웠더니 다 죽어가는 소리로 “지금 몇 시야~?” 라고 묻는다.
10시 15분이라고 했더니 샤워 안 할 거니까 시간 충분하다면서 10분 후에 깨우라고 한다.
10분쯤 후에 깨웠더니 잠에 취한 목소리로 “5분만 더~~” 란다.
5분 후에는 “2분만 더~~” 라고 하고.
몇 번이고 깨워도 안 일어나는 게 짜증이 나서 지금이 몇 시인 줄 아냐? 11시 20분이라고 했더니 기겁을 하면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화가 난 듯이 묻는다 “정말? 왜 안 깨웠어?”
내가 잠에 취한 목소리를 흉내 내서 “2분만 더~~. 타령 때문에” (Because of two more minutes~~) 라고 하자 기가 확 죽는다.
사실 11시도 안 됐고, 조금만 서두르면 시간 맞출 수 있다고 시계를 보여 줬더니 샐쭉한 얼굴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지하철 역 어디인 지 모르겠으니 데려다 달라고 졸라서 데려다 줄 겸, 먹을 것도 살 겸 밖으로 나갔는데, 날씨가 꽤나 고약했다.
추운데다 눈인지 얼음조각인지 모를 것이 내리고 있는데다 바람이 굉장히 강해서 눈을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가 잘하면 ‘유나’ 라는 자기 친구가 인턴으로 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내가 참 국제적인 이름이라고, 그거 일본어, 한국어, 영어 어느 언어에도 있는 이름이라고 했더니 한국 애란다.
한국 애라는 말을 듣자 어제 압박을 넣은 것의 보복 겸, 아침에 안 일어나게 해서 귀찮게 한 것의 보복을 겸한 장난을 하나 치고 싶어졌다.
내가 “언제 나랑 유나랑 엮어 줄 거야?” 라고 묻자 당장에 OK 라는 대답이 나온다.
언제 만날 수 있냐고 묻자 유나한테 물어보고 연락해 주겠다고 한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라 약간 실망하고 있는 사이에 지하철 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에서 자기 혼자서 내 집을 찾아올 자신이 없으니까 2시간 후에 데리러 와 달라고 한다.
지하철에서 돌아가면서 먹을 것을 조금 샀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자 너저분해진 방이 보였다.
콘돔 포장이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고 덤으로 체액이 말라붙은 (내 것이 아닌) 속옷이 그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고, 이부자리 반드시 세탁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부자리와 다른 빨래 감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사족을 달자면 이부자리를 빨아야 될 상황이라면 속옷 상태는 어떨지 짐작이 가리라 믿는다.
나라도 저런 걸 입느니 차라리 벗고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세탁기를 돌리고 그 사이에 진공청소기로 방 청소를 하고, 빨래를 건조기에 돌린 후 정리하고 나자 데리러 갈 시간이 됐다.
그 사이에 날씨는 더 나빠져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눈이 발목 높이까지 쌓여 있는데다 1시인데도 태양이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날씨였다.
게다가 눈발은 더 거세져 손으로 눈을 가리고도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 정도였다.
Tutoring 을 받고 있는 도넛 가게에 도착해 보니 이 가게 단열을 어떻게 했는지 밖이나 안이나 온도가 그게 그거다.
거기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됐는지 눈이 새 들어 와서 실내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정말이다! 과장이 아니다! Tutor가 실내에서 눈이 내리는 거 처음 본다고 농담을 했다!)
방에 돌아오자마자 춥다고 이불을 뒤집어 썼는데, 손이나 발을 만져 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
불쌍하다고 끌어 안아주면서 손을 내 손으로 감싸서 녹여 줬더니 얘가 심심하다고 Sex & The City 를 재생했다.
그런데 일부러 노린 건지 우연인지 하필이면 그 에피소드 제목이 ‘가위 들고 뛰기’ (Running with Scissors, 직역하면 그런 거고 실제 의미는 위험한 짓 하기 정도.) 였다.
에피소드 제목을 보고 내가 “으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자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이런다 “나 네가 무슨 생각하는 지 알 것 같아.”
여자가 가위 들고 쫓아오는 것,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상황이지 않은가.
그렇게 몸 녹이고, 각자의 책이랑 씨름을 하다가 밤이 됐다.
전날처럼 둘이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지만 분위기가 전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옆으로 누워서 몸을 웅크리고 두 다리를 꼭 붙이고 가슴에는 팔짱을 꼈다.
내가 뺨과 입술을 손으로 쓰다듬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지만 팔 다리의 긴장은 전혀 풀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내가 오래 굶어서 약해진 틈을 이 나쁜 놈이 비집고 들어온 거야. 이 놈한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내가 헤픈 여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돼.’
뭐… 어쩌면 가위 들고 내 뒤를 쫓아서 뛰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고.
내가 뒤에서 안아 주면서 손등을 쓰다듬었더니 깍지를 끼어 왔다.
다음날 아침에 학교 도서관으로 출발하기 전에 다음주 토요일이 시험이니 금요일에 다시 와서 머물러도 되겠냐고 물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