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林奇談(신림기담1)
신림기담
이런 식으로 수필을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고시생의 수필이랄까요? 여러분처럼 이야기 하듯이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되네요.
고시촌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해가 창문에 비치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재수없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독서실에 틀어박혀 전년도 강의 테이프를, 그보다 더 재수없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전전년도 강의 테이프와 헌책방에서 1000원에 파는 책으로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재수좋은 집안에 태어난 사람들은 하루에 12000원씩 하는 강의를 주 6일 듣고, 최신판 책과 인터넷 강의로 보충수업을 할 수 있다. 어쨌든 돈이 있건 없건 고시촌에 볕들 날 없음은 모두에게 공통된 사실이다.
고시촌에는 적막이 서울대 입구부터 신림역까지를 뒤덮고 있다. 대한민국 어디에서건 소녀시대, 카라, 투애니원, 원더걸스, 빅뱅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버스 안에서건 대학가 앞 상가에서건 인터넷에서건. 그러나 고시촌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도, 잠깐의 웃음소리만 들려도, 핸드폰 진동 소리가 1초만 들려도, 시험지를 풀다 홧김에 낮은 목소리로 “젠장” 이라는 소리만 내도 그에게는 잠시 뒤 “조용히 해” “시험지 넘기는 소리 내지 마” 라는 쪽지가 날아오고, 게시판에는 “오늘 누군가 독서실에서 젠장 이라는 소리를 냈습니다, 조용히 합시다” 라는 협박성 문구가 들러붙는다.
고시촌에는 협동이란 것이 없다. 9급공무원, 7급공무원, 노무사, 감평사 ,회계사, 외무/사법/행정 고시 쪽으로 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한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나와 같은 시험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나는 최악의 강사를 소개하고, 가장 지저분한 독서실을 추천하며, 절대 봐서는 안되는 수험서를 쥐어준다. 그리고 뒤 돌아서서 한명의 유력한 경쟁자를 물리쳤다는 안도감에 미소를 짓는다.
고시촌에는 나눔의 미덕도 매말라 있다 담배 한갑을 사 나눠 피는 정겨운 풍경은 없다. 담배 한 갑을 사면 누군가가 한 대 달라고 하는 것이 두려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담배 한 개피씩 팔죠?” 신림동에는 담배도 초코파이도 낱개 낱개를 포장해 판다.
고시촌에는 잔인한 수재들만 넘쳐 흐른다. 이름 들어보지 못한 대학 출신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고시를 준비하겠다는 생각을 펼치지도 못하고 서울권 대학 혹은 지방의 국립대 출신들의 인맥이 짜 둔 고시촌의 스크럼에 좌절한 뒤 흘러흘러 노량진으로 흘러들어가 공시족으로 내려앉게 되고 만다. 올해도 상위 10개 대학의 고시 합격률은 증가하였고 그 외 대학에서는 점점 합격자수가 줄어들고만 있다. 그 안에서도 서 고 연 성 한 이 경 중 부 경 등의 찌질한 싸움을 하며 아귀다툼을 벌인다. 그러다 몇 년쯤 지나 장수생의 타이틀을 달 때 쯤 자신이 무슨 멍청한 학벌놀음을 했던 건지 자책하며 담배 한 대를 태우게 된다. 그리고 결심한다. 일단 붙고 보자.
고시촌에는 탐욕이 흐른다. 정식집, 백반집 등은 고시생들의 배를 채우지 못한다. 싸구려 음식을 무한정으로 공급해주는 매식 3500원, 월식 20만원 식권 100장 22만원의 고시부페만이 성업할 뿐이다. 정성스레 만든 밥은 없고 표백한 중국산 쌀에 몇 년 묵은 밀가루를 어디서 짜낸지 모른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고서 고시생들은 트림을 한다. 날이 갈수록 얼굴은 수척해져 가고 뱃살은 뒤룩뒤룩 쪄 간다. 그리고 나서는 공짜로 퍼주는 설탕국물 식혜를 한사발 들이키거나 천원 한 장을 손에 쥐고 천원짜리 싸구려 생과일쥬스를 빨아들이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다.
고시촌에는 거짓된 인연만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사슬보다 단단했던 친구의 우정도, 금보다 소중했던 선후배의 미덕도, 줄 것이 없어 자신의 마음만을 선물하던 연인의 사랑도 신림동에 들어와서는 골목 골목마다, 책장 하나 하나 마마 흘러 넘치는 저 비열한 공기에 녹아 없어지고 만다. 친구는 거꾸러 뜨려야 할 라이벌이 되고, 후배는 귀찮게 달라붙는 멍청이로 불리며, 연인은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만다.
고시촌의 지하에는 담배연기보다 짙은 착각이 흐른다. 내가 진짜 연애를 하고 있다는 착각. 두집 건너 한집 있는 바에는 여자들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남자 고시생들의 음란한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응대한다. 그러나 잠시 뒤 저쪽 테이블에서 새로 들어온 손님이 양주를 시키고 여자는 고시생에 “저쪽 잠깐 가볼게요” 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여자를 빼앗긴 고시생은 고개를 숙여 만원짜리 두장과 고시부페 식권 열장만 들어 있다는걸 알면서도 지갑을 열어 자신의 재력을 다시금 확인한다. 쪽이 헤어진 지갑을 살짝 매만지며 ‘여자와 술과 차는 고시에 도움이 안된다’ 라고 다시금 되뇌이지만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세로로는 서울대 정문 관악문화도서관부터 미림여고까지. 가로로는 신성초등학교부터 관악산 입구까지. 가로세로 2km 도 안되는 이 작은 공간 안에, 대한민국의 모든 기쁨을 포기한 우리 2만명이 쨍 하고 해뜰날을 기다리며 조용히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부른다. ‘잠룡’
오랜만에 쓴 글을 올리고 이제 나는 다시 독서실 책상으로 돌아가 민법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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